돌무덤이 된 양왕릉
김성문
망국의 왕이 흙으로 묻힐 수 없다고 한 양왕은 거대한 돌무덤을 남겼다. 돌무덤은 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왕산 기슭에 있다. 가락국 제10대 마지막 왕의 무덤이다. 사적(史蹟)으로 지정됐다. 양왕은 6세기경 한반도 고대사의 중심에서 격동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신라에 나라를 양위해야 했던 아쉬움이 지리산 북동쪽 줄기인 왕산 자락에 머물고 있다.
양왕의 이름은 구해, 구형, 구충, 구차휴라고도 한다. 흥무대왕인 김유신 장군의 증조부이다. 서기 521년에 가락국의 마지막 왕이 되어 신라 법흥왕에게 나라를 넘겨줄 때까지 11년간 왕으로 있었다.
『편년가락국기』에 보면, 서기 532년 신라 법흥왕 19년에 양왕이 신라에 나라를 넘겼다. 세상에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양왕은 신라와의 싸움에서 패하여 전사했다고도 하나, 터무니없는 이야기다. 양왕은 나라를 넘긴 후 지리산의 태왕궁(太王宮)에서 생활하다가 서기 557년에 69세로 붕어했다. 태왕궁은 현재 금서면 왕산에 있었으며 수로왕의 별궁이었다. 양왕은 나라를 넘기고 태왕궁으로 가서 궁 이름을 수정궁으로 바꾸었다. 신라 때 양왕의 손자인 각간 김서현이 수정궁을 버리고 왕산사(王山寺)를 세웠다. 김유신 장군은 왕산사 경내에 사당을 세워 수로왕과 양왕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도 지냈다.
돌무덤인 양왕릉은 그 형식에 있어 일반 분묘들과 달리 각 층이 단을 이루고 있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내리는 경사면에 잡석으로 축조했다. 전면은 7단을 이루고 있으며, 경사가 완만한 편이다. 그러나 후면은 위로 갈수록 경사가 커져서 층급이 높아질수록 층의 폭이 좁아지고 있다. 돌의 배열은 전면에서부터 직선이 아닌 곡선을 이루고 있다. 모퉁이도 뚜렷하지 않고 정상은 봉분과 같이 타원의 반구형을 이루고 있다.
양왕릉은 중앙의 높이가 약 7m이고, 넷째 단의 동쪽면에 조그마한 감실이 설치되어 있다. 감실은 신주를 두는 방이다. 이 왕릉을 중심으로 같은 잡석으로 높이 1m 내외의 담을 쌓았다. 능 바로 앞에는 ‘가락국양왕릉(駕洛國讓王陵)’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비석이 서 있다. 비석 앞에는 상석과 장명등(長明燈)이 있고 좌우에는 문인석, 무인석, 돌짐승석이 각각 1쌍씩 있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이 왕릉 위로는 새들도 날지 않고, 짐승들도 드나들지 않는다고 한다. 칡넝쿨과 잎이 떨어지지 않는다니 신성함이 느껴진다.
양왕릉이라고 하는 근거는 서기 1481년, 조선 성종 때에 간행한 『동국여지승람』 「산음현」 산천 조에 있다.
“왕산(王山)이 있고, 현(縣)의 서쪽 10리 산중에 돌로 쌓은 구릉이 있다. 4 면에 모두 층급이 있고 세속에는 왕릉 이라 전한다.”
서기 1592년, 임진왜란으로 왕산사와 사당이 불탔다. 이 때 양왕의 위패를 땅에 묻고 승려들이 다시 절만 중건했다. 승려 탄영(坦瑛)은 서기 1650년에 왕산사기(王山寺記)를 남긴다.
왕산사기는 왕산사의 내력을 적은 기문(記文)이다. 왕산사기 원본은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서기 1908년경에 발행된 『가락 삼왕기』에 전해지고 있다. 가락 삼왕은 수로왕, 양왕, 흥무대왕을 말한다.
조선 정조 때인 서기 1798년 여름, 영남 지방에 큰 가뭄이 들어 마을 사람들이 산에 올라 기우제를 지내고 내려오다가 갑자기 큰비를 만나 왕산사에 들어갔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은 왕산사 법당 들보 위에서 내력을 알 수 없는 큰 나무상자를 발견했다. 기우제에 간 산청 선비 민경원(閔景元)은 스님에게 열어 보게 했다. 절의 스님들이 나서서 목함에 손을 대면 목숨을 잃는다고 만류했다. 민경원이가 직접 열어보니 그 속에는 영정, 옷, 활, 칼, 왕산사기가 들어 있었다. 남자의 영정에는 구형왕상이라 적혀 있었고, 여자의 영정에는 이름이 없으나 왕비인 계화 왕후임을 알 수 있었다. 왕과 왕비의 그 당시 영정과 표준 영정은 현재 산청 덕양전 앞 영정각에 게시되어 있다.
왕릉 수호를 위한 기록으로는 승려 탄영이 쓴 왕산사기에 보면, 서기 676년에 신라 30대 문무왕은 스스로 구형왕의 외손이라 말하고, 사신을 보내어 제사 지내는 의식과 능묘를 새롭게 하도록 했다. 그리고 전답 30경을 내려주어 양왕의 제사를 받들도록 했다. 김유신 장군은 7년 동안 양왕릉을 보살폈다. 고려 신종 때는 진각국사가 왕릉을 중수했다.
구형왕릉이라고 능에 왕명을 붙인 기록은 조선 후기 문신인 홍의영(洪儀永)의 ‘왕산심릉기’에 보인다.
“절벽에서 옛 판각을 찾았고, 그 판각에 가락국 구형왕은 궁검을 이 절에 남기고, 그가 돌아가니 그대로 보관했으며 돌을 쌓아 능을 만들었다.”
한편 『산청현읍지』에 의하면, 조선 정조 때인 서기 1798년에 왕릉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양왕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도 조선 정조 24년인 서기 1800년에 능 주변에 다시 세우고 수정궁이라 했다. 이 수정궁은 서기 1928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 세웠고, 덕양전의 모태가 된다. 덕양전(德讓殿)은 양왕과 계화 왕후의 위패를 봉안한 전각이고, 서기 1983년도에 경상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한반도 남단에 찬란한 철기 문화로 꽃을 피운 가락국이 양왕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다. 그러나 양왕은 국토 때문에 백성을 다치게 할 수 없어서 신라에 나라를 넘겼다. 신라는 가락국을 금관군으로 고치고, 양왕을 도독(都督)으로 강등하여 금관군을 식읍으로 삼도록 했다. 양왕은 다시 동생 탈지에게 금관군을 물려주고 태왕궁에 와서 생활하다가 서거했다. 이곳에 돌무덤으로 장사지내니 양왕릉이다. 돌무덤 속 양왕은 백성을 사랑하고 인간의 생명을 소중히 했다. 감사한 마음을 보내면서 돌무덤을 나선다.
첫댓글 아 산청에 돌무덤이 있었군요.
저런 무덤 처음 봐요.
정보 감사드려요.~~~^^*
수선화 선생님!
꼭 한 번은 가 보실 곳입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가락국의 마지막 왕인 이 무덤에 가보았지요.
제가 알고있는 여느 왕의 무덤과 달라 좀 놀랍기도 했습니다.
선생님의 글을 통해 다시 돌아보게 되네요.
조 선생님! 가 보셨군요.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