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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 브라질에서 홍수로 피해가 크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잘 아는 선교사님이 사역하는 아프리카 케냐에서 온 소식도 홍수가 크게 났다는 것입니다. 오가는 것이 힘들어 교회도 가지 못하였답니다. 홍수가 있을 만한 곳이 아닌데 때 아닌 홍수로 재산은 물론이고 인명피해까지 크게 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팔레스타인 전쟁도 우크라이나 전쟁도 끝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기저기 이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이 좋은 시대를 살고 있는데 좋기만 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이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야 고공행진을 하고 있는 물가 밑에서 사느라 힘겨운 날들을 살고 있습니다. 이전 시대 꿈꾸었던 21세기가 아닙니다. 이게 다 뭔 일이래요?
다 늦게 강원도 산지에 폭설이 내렸데요. 5월의 대설특보,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하던데. 뭐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산불 걱정 덜게 되어 다행이다 싶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루 이틀 지나면 다시 건조특보 내립니다. 참 빨리도 마르나 봅니다. 아무튼 비 지나고 파란 하늘을 보면 마음까지 상쾌해집니다. 이번 주말에는 비 소식이 없는가봅니다. 이제 좀 쉬어가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주말을 기다리던 사람들 몇 번 낭패했을 겁니다. 중간 쉬는 날까지 어쩜 그렇게 잘 맞추는지, 없는 사람들 생각해준 건가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맑은 하늘을 보는 마음이 더 위로를 받을 듯합니다. 아무튼 햇빛도 비도 다 필요하지요. 다만 때를 잘 맞춰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ㅋㅋ
비 온 후 더욱 싱그러워진 나무들을 바라보며 아름다운 세상을 꿈꿉니다. 인생들은 아귀다툼을 해도 변하지 않는 자연의 흐름에 희망을 가집니다. 행복한 주말을 빕니다. ^)^
2024년 5월 18일 김종우 목사 드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누가복음 14 : 11)
<스턴트맨>
우리는 무엇을 추구하며 살까요? 매우 기본적인 질문이고 어쩌면 답도 뻔합니다. 아무리 고상한 척해도 돈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자식 하나 낳으면 1억을 준다, 그러면 낳겠는가? 대답은 긍정이 반을 넘었습니다. 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네 출산율이 걱정에 걱정을 낳고 있지만 역시 돈의 힘이 작용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기야 웬만한 직장인이 1억을 모으려면 10년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이 하나 낳으면 1억이라니, 해볼 만하지 않겠습니까? 하기야 그래봤자 집 하나 얻으려면 근처에 가기도 힘듭니다. 아무튼 그래도 1억은 큰돈입니다. 쉽게 얻을 수 있는 돈이 아닙니다. 돈의 힘은 역시나 강합니다. 우리 대부분 돈을 추구합니다.
다음에는요? 따지고 보면 같은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자리입니다. 보다 좋은 자리, 보다 높은 자리, 자리를 차지하려 합니다. 왜 그렇게 국회의원이 되려고 발버둥 칩니까? 물론 붕급도 꽤나 괜찮습니다. 그보다 대한민국 국회의원만 누릴 수 있는 특권들이 워낙 많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만큼 일하고 받는지는 차치하고 일단 그 자리를 차지하고 나면 속된 말로 본전 뽑고도 남습니다. 그러니 그 자리가 탐나는 것입니다. 누구나 기회가 된다면 비단 국회의원만이 아니라 무슨 자리라도 하나 꿰차고 싶어 합니다. 하다못해 직장에서도 지금보다 높은 자리로 올라가려 야근을 밥 먹듯 하면서 노력합니다. 자리가 수입을 보장하기 때문입니다. 역시 돈이지요.
어느 사회 어느 집단에서도 사람이라면 얻고자 하는 것이 대동소이합니다. 돈 그리고 자리, 조금 낫다면 명예입니다. 그러나 명예도 돈이 따라주지 않으면 사실 공허합니다. 아무튼 돈은 인격도 없으면서 사람을 휘어잡습니다. 이제는 세상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 됩니다. 좀 과하게 말해서 돈이 없으면 집 밖에 한 발자국도 나가기 어렵습니다. 움직이면 돈이 필요합니다. 없으면 어디 가기도 어렵고 누구 만나기도 어려워집니다. 도무지 볼일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집에 가만있어도 돈이 듭니다. 누가 거저 먹여줍니까?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하려면 당연히 돈이 있어야 하지요. 세상 돈이 없으면 그냥 죽어야 합니다. 태어나지 말았어야지요.
영화 한 편을 보면 우리는 그냥 등장하는 배우들을 보는 것이 다입니다. 그 외에는 그저 앞이든 뒤든 영화를 만드느라 수고하던 사람들의 이름이나 지나칩니다. 예, 일일이 확인하지도 않습니다. 기껏해야 감독이 누구인지나 눈여겨봅니다. 그 외에는 그다지 관심도 없습니다. 아니 관심을 가질 만한 여유를 주지도 않습니다. 자막으로 나오는데 다 읽기도 전에 지나가기 십상이니까요. 그런데 정말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수고하는구나 싶습니다. 그러리라 짐작은 하였지만 촬영 장면을 보자니 새삼 깨닫습니다. 더구나 위험 장면이라면 실제 배우보다는 대역이 맡는 경우가 많습니다. 소위 ‘스턴트맨’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실제 사고로 이름 없이 떠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랬습니다. 유명 스턴트맨입니다. 사실 그 업계에서나 유명하지 일반 관객이 알기나 하겠습니까? 스턴트맨 ‘콜트’가 대역 촬영 중 사고를 당합니다. 일단 생명은 구했지만 그 뒤 현업에서 사라집니다. 자연히 애인인 영화감독 ‘조디’로부터도 떠납니다. 말도 없이. 그러니 그러잖아도 걱정과 안타까움으로 지내던 조디 또한 상처를 입습니다. 정말 사랑한 거 맞나 싶겠지요. 아무튼 콜트는 주변 아는 사람들로부터 사라집니다. 남모르게 자동차 정비업소에서 아르바이트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정체가 드러나고 위치가 노출됩니다. 그리고 조디 앞에 다시 나타나게 됩니다. 사실 밉지요. 그러나 콜트만한 대역이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조디는 일생일대의 작품을 꿈꾸면서 촬영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위험 장면들이 나오니 콜트가 대역을 맡습니다. 그러나 어찌 생각하면 보다 실감나는 장면을 위해 가능하면 주연배우가 대역 없이 맡아주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그렇게 진행되는 가운데 주연배우가 사라집니다. 아니 제작 기간이 있는 것이고 반드시 있어야 할 주연배우가 사라지면 어찌 합니까? 서로 아는 사이이기도 하니 콜트에게 찾아줄 것을 부탁합니다. 콜트가 여기저기 들쑤시며 찾아다닙니다. 그리고 찾아 들어간 곳에 또 다른 지인의 시신을 발견하고 놀라 뛰쳐나옵니다. 그것이 자신을 살인자로 만들게 됩니다. 경찰의 수배를 받으며 계속 주연배우를 찾습니다.
살인 누명을 벗어야 하고 주연배우를 찾아야 하고 도대체 왜 거기에 동료가 시신이 되어 있는지 알아내야 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조디와의 사랑을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주 복잡하게 엮여 있습니다. 그리고 수수께끼가 하나하나 벗겨집니다. 이제 누명을 벗어야 합니다. 증거물을 찾기는 했는데 손상당했습니다. 다시 만들어야 합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첩보전을 행합니다. 그리고 스턴트맨의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해결합니다. 조디는 그것을 이용하여 사실보다 더 사실 같은 영화를 제작합니다. 그렇게 해피엔딩. 신나고 재밌습니다. 영화 ‘스턴트맨’(The Fall Guy)을 보았습니다.
천국어를 아시나요?
사람마다 고유한 성품이 있습니다. 얼굴이 다르듯 성품이 다 다릅니다. 얼굴이 비슷한 사람이 있듯이 성품이 비슷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모르게 다릅니다.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사람들 곧 형제자매도 각각 다릅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자라나는 환경이 다릅니다. 선천성과 후천성이 어우러져서 자기 고유한 인성을 형성합니다. 그것이 곧 자기 자신이 되고 평생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물론 스스로 그것을 고치고 싶어서 고치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효과를 누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느 때 갑자기 돌발사태가 일어나면 자기도 모르게 고유한 자기 성품대로 반응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한번 형성된 성품은 웬만해서는 바뀌지 않습니다. 그 성품대로 우리는 한 평생을 사는 것입니다. 함께 살 때 이것을 서로 이해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것으로 서로 티격태격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부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결과 평생 화기애애하며 살 수도 있고 반대로 원수처럼 사는 부부도 있습니다.
같은 하나님의 백성이라 해도 하나님을 이해하고 인식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그것은 자기 인성으로 말미암은 영향이 큽니다. 그리고 자기가 자라온 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누구나 자기가 경험한 것과 배운 것에 의하여 인지하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다정다감한 아버지 슬하에서 사랑을 많이 받으며 자란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의 하나님’으로 인식하고 섬기는데 어려움이 없습니다. 하지만 엄한 아버지 밑에서 기 한번 펴지도 못하고 늘 두려워 떨며 자라난 사람은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칭찬은 고사하고 잘못하면 그 때마다 벌을 받으며 자란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도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의의 심판을 하시는 분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 쪽이 훨씬 더 이해하기 쉽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모가 없이 자란 사람이라면 그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이 실감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경우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시키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는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삶 속에서의 경험이 먼저 필요할 것입니다.
특히 전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초점을 두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물론 당연하지요. 경우에 따라서는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전하는 때도 있지만 그러나 대부분은 ‘사랑의 하나님’에 무게를 둡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처음부터 몽둥이를 든 하나님을 이야기하면 거부감이 더 심하리라 생각합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첫 번째 목적이 구원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사랑의 결과입니다. 요 3 :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신 말씀을 보아도 우리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그 동기는 바로 사랑입니다. 요1서 4 : 8, 16절에서 반복하여 말씀하신 것도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고 섬기는 가운데 알게 된 사실은 결코 사랑의 하나님만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불의를 그냥 두지 아니하십니다. 결국은 심판하신다는 말이지요. 당신의 자녀가 불의를 행하면 역시 징계하십니다. 사실 그것도 역시 사랑의 결과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자식을 징계하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히 12 :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알고 보면 심판도 사실은 사랑의 결과입니다. 그 사실을 알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이 또한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심을 성경은 꾸준히 가르쳐줍니다. 때문에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사 세상을 구원하셨고 또한 그 아들이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요 3 : 17 - 18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무슨 뜻입니까? 구원과 심판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따르면 구원입니다. 그러나 믿지 아니하면 그 자체가 심판이라는 말씀이지요. 하나님이 그 백성 가운데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은 곧 구원이며 동시에 심판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가요?
1. 죄를 미워하십니다.
어쩌면 당연한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당연한 것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달콤한 말에 너무 집착하여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거룩한 하나님’이라는 말에는 별 거부감이 없습니다. 본래 ‘거룩’이라는 말은 ‘분리, 구별’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 말이 해당되는 대상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 분은 피조물과 구별되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죄와 전혀 상관할 수 없이 죄와 분리된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도 먼저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아니하고는 그 앞에 나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그 사랑하심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려 하셔도 이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아니하면 오실 수가 없습니다. 사 59 : 1 - 2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죄의 문제가 해결될 때 비로소 하나님과의 교통이 열리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십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속성이 무엇일까 생각하게 됩니다. 처음 죄가 세상에 들어올 때를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사단이 뱀으로 가장하여 하와에게 접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결국은 따먹게 합니다. 바로 그 때 죄의 유혹을 살펴봅시다. 창 3 : 4 - 6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뱀은 분명히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와는 그 거짓말을 듣고 나서 하나님 언약의 징표를 보는데 다르게 보였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과 다른 그 거짓말은 들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당초 들을 필요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들었습니다. 더구나 일단 그 거짓말을 신뢰하고 나니까 그 실과가 다르게 보인 것입니다.
우선 궁금한 것은 왜 뱀의 접근을 허용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에게 거부감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주 무섭게 생겼다든지 아니면 소름끼치게 징그럽다든지 했다면 아마 상대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그의 말이 하나님 말씀과 전혀 다르다면 당연히 배척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거짓말에 혹하고 넘어간 것이 문제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확고하게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와는 아담과 좀 다른 입장에 있었습니다. 어쩌면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것이 아닙니다. 아담에게서 전해 들었겠지요. 그러면 하와가 건내준 그 실과를 아담은 왜 거부하지 않고 받아먹었을까요? 분명 의심했기 때문이리라 여겨집니다. 하나님은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 : 17)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실과를 먹은 하와가 멀쩡하게 살아 있잖아요. 어떻게 된 거지? 이상하네. 먹어도 안 죽는 거야? 먹으면 정말 하나님처럼 되는 거야? 그래서 먹었습니다.
이 상황을 종합하면 어느 분이 말한 대로 세 가지로 요약이 됩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의 삼총사라고 표현을 했는데 수긍이 갑니다. 그것은 곧 불신과 교만과 욕심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서있지를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불신에 빠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같이 되어보겠다는 교만이 싹텄습니다. 그것은 욕심이기도 하지요. 이 죄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이고 아담 이후 인간에게 끊임없이 나타나는 죄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내내 이 죄의 삼총사에게 휘둘리고 사는 것입니다. 마귀는 그것으로 우리를 부단히 괴롭힙니다. 시시때때로 우리를 넘어지게 만드는 것이지요. 의심은 불신을 낳고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어보고자 하는 교만을 부채질합니다. 인정받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은 항상 가장 높은 자리로 올라가려는 마음을 품게 합니다. 욕심은 비단 그것만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합니다. 권력도 명예도 돈도 사랑도 다 내 것이 되어야 한다는 욕심입니다. 서로의 욕심이 충돌하니까 싸움이 나고 전쟁이 나는 것입니다. 관심이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라 ‘나’에게 집중이 되니 하나님이 진노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사 53 :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다시 말해서 나의 길로 가는 것 그것이 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죄로 말미암아 내 영혼이 죽어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영원히 멸망의 길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닙니다. 불신 교만 욕심 이 모든 것이 결국 하나님을 져버리고 자기 길로 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죄를 미워하십니다.
2. 의로우신 하나님은 의인을 사랑하십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이 의인을 사랑하는 것 또한 당연한 일입니다. 시 34 : 15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17절 “의인이 외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저희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이어 19절에서도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아멘! 하나님은 당연히 의인의 편입니다. 그러므로 그 부르짖음에 귀 기울이시고 환난과 고난에서 건져내십니다. 문제는 이 세상에 의인이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롬 3 : 10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선포하셨는데 도대체 여기 나오는 의인들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죄인의 후손으로 죄인이 되었고 여전히 죄를 지으며 살고 있으나 그럼에도 하나님이 인정해주시는 의인이 있다는 말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정죄한다 해도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의롭다 하시는데 누가 반대하겠습니까?
물론 죄를 가지고 있는데 무작정 의인이라 칭하지는 않습니다. 죄인을 의인이라 칭한다면 그것 또한 불법 아닙니까? 그 죄 값을 치러야 의인이라 칭할 수 있습니다. 공의의 하나님이 그 공의를 지키지 아니하면 누가 법을 지키겠습니까? 우리들 세상에서는 자기네가 법을 만들어도 지키지 않는 일이 허다하겠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아니하십니다. 우리들 인간들은 자기가 제정한 법에서 자기는 예외이기를 원합니다. 남다른 특권을 행사하고 싶어 합니다. 그것 또한 교만이고 욕심이지요. 그러나 그것이 만천하에 드러나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러실 수 없습니다. 당신이 먼저 공의로우시고 우리에게 또한 의로워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의롭다 하시려면 당연히 우리 죄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죄 값을 갚으라고 보내진 것입니다. 과연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오르셨습니다. 그리고 “죄의 삯은 사망”(롬 6 : 23) 그 사망의 값을 치르셨습니다. 히 10 : 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아멘! 거룩함을 얻었으니 우리가 의인이 된 것입니다.
오랜 옛날 하나님은 노아를 의인이라 칭해주셨고 아브라함을 또한 의롭다 해주셨습니다. 다 나름대로 모자란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한 평생 하나님을 따르면서 살려고 애썼던 사람들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찾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당신이 우리를 구원하려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고 그 말씀을 지키려는 자들을 의롭다 해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직접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보시는 것입니다. 골 1 : 21 - 22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아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를 끝낸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으로 인정되었고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히 4 : 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아멘!
3. 의로우신 하나님은 의로운 심판을 행하십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하여 불만이 많습니다. 그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무엇입니까? 불공평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앞의 믿음의 선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 가지 예를 보겠습니다. 시 73 : 4 - 9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교만하고 강포하고 그러면서도 잘 먹고 잘 사는 저희는 도대체 누구입니까? 12절에서 설명합니다.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 하도다” 소위 악인이 형통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화가 안 납니까? 성실하게 세금 내고 정직하게 살려니 왜 이렇게 규제가 많고 장애물이 많습니까? 그런가 하면 요리 피하고 저리 빠지며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자는 날로 형통해지는 것입니다. 그 힘을 빌어다가 우리 것까지 빼앗는다면 어쩌겠습니까? 살맛납니까? 시 11 : 2 “악인이 활을 당기고 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하는도다”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아직도 우리 주변에서는 여전히 ‘무전유죄 유전무죄’ 같은 현실을 봅니다. 이제는 내노라하는 대학도 돈 많은 집 자녀들이 훨씬 많이 들어간다고 합니다. 세상은 점점 더 가진 자의 세상이 되어가고 있는 듯합니다. 때로는 억울하고 마음이 아프지만 도저히 따라가지를 못합니다. 있는 자는 더 많아지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마저 날아가기 십상입니다. 성실과 정의가 힘을 쓰지 못하는 세상이 되어가는 듯하여 답답하고 아픕니다. 그러면 어쩌겠는가? 절망하고 포기할 것인가? 그래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믿습니다. 시 11 : 4 - 5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강포함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 아멘! 의로우신 우리 하나님은 이러한 현실을 다 보고 계십니다. 앞에서도 말씀을 보았듯이 의인을 그 고난 중에서 구원하십니다. 할!
불의가 판치는 세상 어쩌면 불의가 승리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시편 기자도 그래서 실족할 뻔했다고 고백합니다. 시 73 : 1 - 3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는 의심을 하였던 것이지요. 과연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고 세상을 돌아보고 계시는가? 그렇다면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해결을 보았습니다. 어디서요? 17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앞에 설 때 답이 있습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믿습니다. 공의의 하나님이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자기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십니다. 갈 6 : 7 - 8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아멘!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십니다. 그래서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심는 방법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육체를 위해서 심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다 똑같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백성인 우리 그리스도인이 두 가지입니다. 고전 3 : 1 - 3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보입니까? 하나는 젖을 먹는 어린아이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육신에 속한 자라고 합니다. 수준이 땅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툭하면 저 잘났다고 시기와 분쟁에 휘말립니다. 세상에서 살던 버릇 곧 예수 믿기 전의 성품과 습관들을 그대로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도 그런 수준에서 이해합니다. 생각하는 것, 행하는 것이 육적이고 말씀을 땅의 이야기로 듣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잘 믿었던 사람, 나아가 예수님을 인정하고 찾아왔던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 3 : 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이렇게 다 큰 어른이 어떻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옵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육의 생각 곧 땅의 수준으로 이해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시 말씀하십니다. 5 - 7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영입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육으로 들은 것입니다. 그 수준을 벗어나 거듭나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그렇다면 우리 의로우신 하나님이 무엇을 의롭게 또는 무엇을 악하게 보시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누구를 의롭다 하시고 누구를 죄인이라 하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의인인지 죄인인지도 모릅니다. 구원의 길로 가고 있는지 아니면 엉뚱하게 구덩이에 빠지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신앙생활 해서 되겠습니까?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신앙한다면 목적한 하나님 나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 당시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습니까? 자기네 아버지는 누구다? 하나님이다, 당당하게 주장했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렇다고 인정해주셨습니까? 아닙니다. 너희 아버지는 마귀다, 그러셨습니다.(요 8 :44) 청천벽력이었지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믿고 교회 잘 다니고 봉사도 하고 헌금도 하고 나름대로 신앙생활 잘한다고 믿지요? 당연히 천국 가리라 믿고 있지요? 마 25장에 열 처녀가 나옵니다. 모두 예수 믿었습니까, 안 믿었습니까? 모두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살았지요. 그런데 그 중 다섯에게 말씀하십니다. 마 25 : 12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안대요, 모른대요? 모르시겠답니다. 그러니 왜 주님께 외면을 당해야 했는지 알아야 하겠다, 알 필요가 없다? 우리도 그럴 수 있으니 마땅히 알아야 하겠지요. 행여 우리에게 ‘나 너 모른다,’ 하시면 우리 그 동안의 신앙생활이 모두 헛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분명 주님 다시 오십니다. 누구에게 오실까요? 요 14 :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예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 오십니다. 그와 함께 하신답니다. 그렇다면 그 말씀을 알아야 하겠다, 몰라도 된다? 알아야 지키지요. 그래서 배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땅 이야기하십니까, 하늘 이야기 하십니까? 예수님이 육을 말씀하신다, 영을 말씀하신다? 하늘 이야기 곧 영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도 여태 니고데모처럼 육으로 들었습니다. 그러니 성경이 어렵고 이해하기 힘든 것입니다. 성경을 기록한 문자는 땅의 언어이지만 말하고자 하는 뜻은 하늘 언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천국어를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고 행할 수 있습니다. 세상 대학 들어가기 위해서도 수년을 공부하는데 천국을 공짜로 들어가려 합니까? 함께 배워서 하나님 나라에서 함께 살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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