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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孔子), 맹자(孟子), 순자(荀子), 노자(老子), 장자(莊子)의 생애
01. 공자의 생애공자는 노(魯)나라의 창평향(昌平鄕) 추읍;현재의 山東省)에서 하급무사 숙량흘(叔梁紇)과 그의 내연(內緣)의 아내 안징재(顔徵在)와의 사이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매우 힘이 세었으며 제(齊)나라와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그러나 공자가 3세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공자는 창고지기며 목부(牧夫) 노릇을 하면서 학문에 힘썼기 때문에 정해진 스승은 없었다. 당시의 천하(天下)는 하극상(下剋上)풍조가 만연해 있었다. 제후(諸侯)들은 주(周)나라의 권위를 업신여겼고, 제후국(諸侯國)에서는 중신(重臣)이 주군(主君)을 능멸했다. 노나라에서는 대부(大夫)인 3환(三桓;季孫·叔孫·孟孫)이 나라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노나라의 임금 소공(昭公)은 3환의 전횡(專橫)에 분노하여 무력으로 이를 토벌하려 하였으나 실패, 제나라로 망명하였다. 36세에 공자는 제나라로 가서 여러 해 동안 머물렀다. 43세 때 정공(定公)이 즉위하자 공자는 노나라로 돌아왔다. 이 무렵부터 자로(子路)·민자건(閔子騫) 등의 제자들이 모여들어 그의 명성이 높아졌으며, 52세에 중도(中都)의 재(宰;守令)가 되었다. 53세 되던 해에 협곡(夾谷;山東省)에서 노나라와 제나라 사이에 화평회의가 있었는데, 제나라의 임금은 폭력으로 노나라 임금을 협박하려 하였다. 그러나 노나라 임금을 수행하고 있었던 공자가 제나라 임금을 질타하여 교섭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54세에 노나라의 대사구(大司寇;法務大臣)가 되었으며, 다음해 3환의 세력을 없애려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그 후 14년간 조(曹)·위(衛)·송(宋)·정(鄭)·진(陳)·채(蔡)·초(楚) 등의 여러 나라를 떠돌아다녔다. 공자의 의도는 자신의 이상(理想)정치를 실시해 줄 군주(君主)를 찾는 것이었지만 어느 곳에 가도 채용되지 않았고 때로는 다른 사람으로 오인되어 상해(傷害)를 당하고, 굶주리기도 하였다. 69세에 노나라로 돌아온 뒤 정계(政界)에의 기대를 버리고 제자 교육에만 전념하였다. 제자는 3000명에 이르며, 그 중 <6예(六藝;禮·樂·射·御·書·數)>에 통달한 사람이 72명이었다. 공자에 의하면 덕행(德行)에는 안연(顔淵)·민자건·염백우·염중궁, 언어(言語)에는 재아(宰我)·자공(子貢), 정사(政事)에는 염유·계로(季路), 문학에는 자유(子游)·자하(子夏)가 뛰어났다. 이들을 공문십철(孔門十哲)이라 한다.
02. 맹자의 생애맹자는 BC 4세기 전반에 태어났다. 어릴 때 이야기로 맹모삼천(孟母三遷)이나 단기지계(斷機之戒)의 가르침이 있다. 젊었을 때 노 (魯)나라로 유학하여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孔伋)의 문하생에게 배웠다. 뒤에 제자들을 이끌고, <후거수십승(後車數十乘), 종자수백인(從者數百人)>이라는 대부대를 이루어 양(梁;魏)나라 혜왕(惠王), 제(齊)나라 선왕(宣王), 추(鄒)나라 목공(穆公), 등(謄)나라 문공(文公) 등에게 유세하고 돌아다녔으나, 만년에는 향리에서 후진들을 지도했다. 사상맹자가 살았던 전국시대에는 유력한 제후가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무력으로 타국을 귀속시켜 천하의 패권을 장악하려고 했다. 그들의 목표는 춘추시대의 제(齊)나라 환공(桓公)이나 진(晉)나라 문공(文公)과 같은 패자(覇者)가 되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맹자는 그의 이상주의적인 사상을 제후에게 유세하고 다니면서 인의(仁義)를 무시하고 무력이나 권모술수로 다스리는 일을 부정하고 임금이 어진 덕으로 백성을 다스려야 한다는 왕도(王道)를 제창했다. 힘으로 부국강병을 도모하는 패도로는 인심을 장악할 수 없으며, 인애(仁愛)에 의한 왕도로써만 민심을 얻고 천하를 다스릴 수 있다 하였다. 군대나 영토의 크고 작음이 아니라 민심의 장악이야말로 통치의 요체(要諦)라는 것이 맹자의 주장이었다. 이 왕도론은 이상주의적인 사상이어서 결국 사용되지 못했다. 맹자의 민심파악 중시사상은 이른바 역성혁명(易姓革命)의 긍정이라는 과격한 형태로도 나타났다. 또 왕도정치의 일환으로서 그가 제창한 정전법(井田法)도 유명하다. 정전법이란 전답을 우물정(井)자 모양으로 9등분하여 중앙을 조세용 공전으로 하고, 그 주위를 균등하게 배분한다는 것인데, 토지제도 이념으로서 그 뒤에 오래도록 사용되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인(仁)·의(義)·예(禮)·지(智)라는 사덕 (四德)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는 사단(四端) 즉 측은(惻隱)·수오(羞惡)·사양(辭讓)·시비(是非) 등의 마음씨로 나타난다. 사람은 이 사단을 확대하여 마음의 선성(善性)을 발휘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유명한 성선설(性善說)이다. 그의 이 주장은 약 50년 후배인 순자(荀子)의 성악설(性惡說)과 아울러 오랫동안 인성설의 두 전형이 되었다. 맹자 시대는 유세가(遊說家)가 활약했던 시대였다.
특히 제(齊)나라의 도읍 임치(臨淄)에는 유세가가 많이 모여, 그 성황을 <직하(稷下)의 학(學)>이라 했다. 맹자도 이 직하(임치)에서 논진(論陣)을 편 일이 있었으나, 다른 지방에서도 활발하게 논쟁을 했다. 맹자가 가졌던 일련의 논쟁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성(性)에 대한 선악을 말할 수 없다는 고자(告子)와의 응수이다. 또 차별없는 사랑을 주장한 묵적의 겸애설(兼愛設), 철저한 이기주의를 주장한 양주(楊朱)의 위아설(爲我設)을 모두 극단적인 이론이라 하여 물리치고, 가족윤리를 기둥으로 차츰 남에게 파급시키는 인의(仁義)를 주장했다.
03. 순자의 생애BC 3세기경의 중국 사상가. 이름은 황(況). 조(趙)나라 사람으로, 50세 무렵에 제(齊)나라에서 유세(遊說)하여, 직하(稷下)에 모였던 학자들 사이에서 장로(長老)로 존경받있다. 그러나 모략으로 인해 초(楚)나라로 옮긴 후 춘신군(春申君)에 의해 등용되어 난릉(蘭陵;현재의 山東省 남부)의 지사(知事)가 되었다. 그러나 BC 238년 춘신군이 암살당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난릉에서 여생을 마쳤다. 순자는 공자(孔子)·맹자(孟子)를 잇는 유가(儒家)로, 《순자》 20권 32편의 저작이 남아 있다. 그의 중심사상은 끊임없는 노력을 중시하며, 노력주의라고도 할 수 있는 이러한 기본적인 사고에서 맹자의 성선설에 대치되는 성악설이 나왔다. 그는 사람의 본성은 악(惡)하지만, 후천적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고대 중국에서는, 재해는 하늘의 뜻으로 생각하였는데, 인간의 후천적 노력을 중시하는 순자는 이를 부정하였다. 또한 고대의 신화적 천자, 즉 선왕(先王)을 군주의 이상형으로 삼는 전통적인 사고방식에 반대하여, 현재의 정치는 현재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고 현실에 노력한 왕, 즉 후왕(後王)이 정한 정책이나 제도에 당연히 복종해야 한다는 후왕사상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현실 및 현실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중시하는 순자의 주장은, 이상론을 원칙으로 삼는 유교에서는 이단시되어 오다, 18세기에 접어들어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04. 노자의 생애<인물>노담(老聃)이라고도 한다. 성(姓)은 이(李), 이름은 이(耳), 자(字)는 담(聃), 춘추시대에 초나라의 고현(苦縣)에서 태어났다. 주(周)나라 왕실의 수장실리(守藏室吏;도서 관리인)를 지냈다. 공자가 방문하여 예(禮)에 대한 가르침을 받은 일이 있었다고 한다. 얼마 후에 주나라가 쇠퇴하는 것을 보고 은거를 결심하고 서쪽으로 여행하는 도중, 관문에서 관문지기 관윤희(關尹喜)의 청에 의해 상하 2편의 책을 저술한 후 떠났는데 행방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전설에는 의문시되는 점이 많고, 그것을 전하는 가장 오랜 자료 《사기(史記)》의 <노자전>에서도 의문을 표명하고 있어, 공자의 선배로서 BC 6세기에 활약한 인물이라는 실재성은 희박하다. 오늘날의 학설로서는 BC 479년에 죽은 공자보다 100년 정도 후배라는 설과, 가공의 인물로서 실재하지 않았다는 설 등이 있다. 현존하는 책과 결부시켜 생각하면 춘추전국시대의 중기(BC 4세기)보다 올라갈 수는 없다.
<서적>《노자》 2편은 《도덕경》이라고도 불린다. 상편이 <도(道)>자로 시작되므로 도경, 하편이<덕(德)>자로 시작되므로 덕경, 즉 이들을 합친 명칭이나, 유교의 도덕과는 달리 우주인생의 근원과 그 활동을 나타내는 말이다. 내용은 약 5000자. 현재는 81장으로 나뉘어 있지만 이것이 최초의 형태는 아니다. 문장은 간결한 격언적 표현의 집적으로 대구(封句)와 각운(脚韻)을 많이 썼고 의표를 찌르는 역설적인 말이 특색이다. 민간에 널리 구전되어 온 속담과 격언을 모은 듯한 느낌이다. 따라서 세속적인 이야기와 함께 비유적인 난해한 어구도 많고 고래의 해석에도 이설(異說)이 많다. 완성된 것은 전국시대 말기일 것으로 추정된다. 주석(註釋)의 수는 대단히 많지만 위(魏)나라 왕필(王弼)의 주가 현존하는 것 중에서 가장 오랜 것으로 무(無)의 철학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다. 하상공(河上公)의 주는 치신치국(治身治國)의 현실적 해석 외에 양생(養生)에 관계하는 신선도교(神仙道敎)의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이 두 가지가 고주(古註)의 대표적인 것이다. <사상>《노자》사상의 중심은 개인적 또는 정치적인 성공을 쟁취하기 위한 <무위(無爲)>의 술(術)에 대해 논하고, 이를 위한 근거로서 형이상학적 근원인 <도(道)>를 논하는 것이었다. 우선 <도>란 <이것을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고, 이것을 들으려고 해도 들리지 않으며… 혼합하여 하나가 된다>와 같이 감각을 초월한 하나의 것으로 천지만물의 존재에 앞서 독립자존하며 그 위에 큰 현실적인 활동을 수행한다. 즉,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와 같이 만물생성의 근원으로서 <천하의 어머니>이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을 포함한 세계의 존재는 모두 <도>에 의해서 각각 본연의 자세를 수행한다. 그래서 만물은 <도>에 따라 있는 그대로(자연 그대로) 있지만, 인간은 사욕(私慾)으로 인해 종종 <도>를 벗어난다. 이것이 인간의 불행이다. 그래서 <단지 도만을 따라서> 인간으로서의 약은 꾀를 버리고 고의적 소행을 피하는 <무위(無爲)>의 입장에 몸을 놓고 <무욕(無慾)>이 되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게 자기를 나타내려고 하지 말고, 약하게, 겸손하게 행하는 것이 좋다. <무위이면서 무위함이 없다> 즉, <무위>이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 <도>의 큰 활동은 그 활동의 자취를 남기지 않는 자연 본연의 모습이므로 사람은 그것을 모범으로 하여 <도>의 절대세계에 <복귀>하라는 사상이다. 《노자》의 사상은 열자(列子)와 장자(莊子)에게 계승된다. 단 노자의 현실적 세속적인 성공주의와 장자의 관념적·사변적인 철학과는 차이가 있다.
05. 장자의 생애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사상가. 제자백가(諸子百家) 가운데 도가(道家)의 대표자이다. 또는 장자가 저술한 저서 《장자》를 가리킨다. <인물>성은 장(莊), 이름은 주(周). 송(宋)나라의 몽(蒙;河南省 商邱縣) 출신. 전국시대인 BC 300년 무렵 활동한 것으로 여겨지며, 칠원(漆園)의 말단관리가 된 적이 있을 뿐 대개는 자유로운 생활을 했다. 논리학파(論理學派)의 혜시(惠施)와 친하게 교유했지만 그 밖의 행적에 대해서 밝혀진 것이 없다. 보통 그를 가리켜 노자(老子)의 사상을 이어받고 도가사상(道家思想)을 대성시킨 사람이라고 하여 노장사상가(老莊思想家)라고 일컫기도 하나, 노자의 사적(事績)과 연대(年代)가 애매하다는 사실과 두 사상의 차이 등에서 그 전후관계에는 의문점이 많다. 노자의 현실적인 성공주의와는 달리 장자에서는 양주(楊朱)의 위아설(爲我說;自己中心說)과 전병(田騈)의 귀제설(貴齊說;萬物平等說)의 영향을 받은 사변적 경향이 강하다. <서적>《장자》는 33편으로 내편(內編) 7, 외편(外編) 15, 잡편(雜編) 11로 나뉜다. 그 가운데에서 내편이 장주(莊周)의 근본사상을 기술한 것이고 외편과 잡편은 내편의 뜻을 부연한 것으로서 그의 후학들이 연구발전시킨 것이라 하며, 노자와의 절충이나 다른 사상과의 교류 등을 엿볼 수 있다. 대략 전국시대 말기(BC 3세기 말)에 완성한 것으로 추정되며, 원문(原文)의 분합(分合)은 그 뒤에도 이루어졌고 오늘날의 33편으로 정착된 것은 진(晉)나라 곽상(郭象)의 주석본이 나온 이후의 일이다. 곽상의 주석본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완본(完本)의 기본자료이며, 그 뒤에도 당(唐)나라 성현영(成玄英)의《주소(註疏)》와 송나라 임희일(林希逸)의 《구의(口義)》등 많은 주석본이 나왔다.
첫댓글 잘 배우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