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1126. 묵상글 ( 연중 제34주간 토요일. - 깨어 기도한다는 것. 등 )
----------------------------------------------------
221126. 연중 제34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깨어 기도한다는 것
종말의 때에 주님께서는 두 가지를 권고하십니다.
하나는 “마음이 물러지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 앞에 설 수 있도록 깨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먼저 주님께서는 조심하라고 하시는데
이 조심이라는 말이 제게는 마음 단단히 먹으라는 말로 바뀌어 들립니다.
왜냐면 마음이 물러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조심이라는 말 자체도 마음을 잡다, 쥐다, 조종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지요.
그러니까 마음을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둬서는 안 되고 잡아줘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마음 잡고 공부하기 시작했다느니,
무엇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느니 그런 말을 하는데, 그렇습니다.
마음을 잡거나 마음을 먹지 않으면 아예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조심을 한다는 것은, 마음이 물러지게 하는 것들,
곧 방탕과 만취와 근심부터 끊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다음으로 주님께서는 깨어 기도하라고 하시는데
멸망의 때에 세상과 같이 멸망하지 않고 주님 앞에 서기 위해서는
한편으로는 방탕이나 과음이나 세상 근심 따위를 끊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깨어 기도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방탕이나 과음이나 세상 근심을 끊는 것도 실은 깨어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것들을 끊지 않으면 마음이 물러져서 시작도 하지 못하게 되니
깨어 기도하기로 마음을 단단히 먹은 사람은 이런 것부터 끊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방탕한 생활이나 과음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데
일상의 근심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선뜻 이해되지 않은 분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방탕이나 과음 못지않게
깨어 기도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세상 근심이라는 얘기입니다.
일상의 근심이라는 것이, 실은 세상 근심이고,
세상 근심이란 것은 이미 주님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 근심이나 걱정을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근심 걱정하느냐고 하는데
진정 기도와 하느님께 깨어있지 않으면 기도하지 않고 근심 걱정하고,
기도하다가도 어느새 근심 걱정이나 하고 있는 것이 우리 현실이지요.
그래서 깨어 기도해야 한다는 말씀을 새삼스럽게 마음에 새기는 오늘입니다.
----------------------------------------------------
221126. 연중 제34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는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
오늘은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우리는 이번 주 내내 종말에 관한 말씀을 들었고, 오늘은 그 마지막 결론 부분을 들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사흘 남짓 남겨둔 시점에서, 당신의 공생활을 마무리 짓는 말씀으로,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이 주님의 재림에 대한 기다림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기다림의 자세를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첫째> 말씀은 “스스로 조심”하되, 무엇보다도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물러지다’는 것은 ‘무디어지다,’ ‘각성하지 않다’라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우리의 마음을 물러지게 하는가?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루카 21,34)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물러지게 하는 것들은 바로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근심걱정이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의탁의 부족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스스로 조심”하라는 말씀은 사도 바오로의 말을 떠올려줍니다.
“그대 자신을 조심하십시오. ~그대 자신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그대의 말을 듣는 사람들을 모두 구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1티모 4,16)
<둘째> 말씀은 “늘 깨어 기도하라”(루카 21,36)는 말씀입니다. “기도하라”함은 자신의 약함과 무능력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주님의 능력과 선물을 믿으며 소망하고 의탁함이요, “깨어 기도하라”함은 그분을 맞아들이기 위해 준비하여 마음을 경계하고 그분을 향하여 있음이요, “늘 깨어 기도하라”함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 그분께 향하여 있고, 그분 앞에 서 있고, 그분 안에 머물러 있음입니다.
결국, ‘주님 앞’에 서 있다면 깨어 기도할 것이요, 그렇지 않고 ‘자신 앞’에 서 있다면,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에 빠져 마음이 물러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하는 것이 깨어있음의 표시가 됩니다. 만일 우리가 지금 기도하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깨어있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혹 주님 앞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여전히 근심걱정에 빠져 있다면, 그것은 주님을 향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빠져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처지가 ‘이방인의 땅 전쟁터’ 같아도 자신의 고집을 꺾고 주님께 의탁하면 바로 그곳이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 된다는 이 단순한 진리를 잊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주님 앞에 서 있음’, 곧 ‘하느님에 대한 현전의식’이요, 주님 면전에 나서 있는 대면의식입니다. 그분을 향하여 있는 것이요, 그분의 눈길, 그분의 돌보심 아래 있는 것입니다.
결국, ‘깨어있음’은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루카 21,34)
주님!
제 마음이 물러지지 않게 하소서.
흔들리더라도 당신을 벗어나지 않고,
넘어지더라도 당신을 붙들고 있게 하소서.
안일과 편리로 무뎌지지 않고 근심에서 벗어나 당신 사랑에 열렬하며,
늘 깨어 기도하게 하소서. 아멘.
----------------------------------------------------
221126. 연중 제34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방심하는 날 심판을 받는다
때로는 풀어지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마음껏 즐겼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루카21,34).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간곡히 당부하셨는데 그 말씀을 외면하면 결과는 뻔합니다. 저의 마음을 꿰뚫고 계시니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마음은 참으로 흔들비쭉입니다. 사실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로마7,15).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 하여라”(루카21,36).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은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고 육체를 따라 삽니다.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하며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가야 하지만, 마음뿐입니다. 몸은 예수님 앞이지만 마음과 생각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영적인 것에 마음을 씁니다”(로마8,5). 그러나 우리 삶의 현실은 영적인 것보다는 육적인 것이 더 매력적이고 가까이 있습니다. 아파트 베란다 밑으로 휘황찬란한 네온사인들이 번쩍이며 유난히 빛나는 빨간 십자가를 등지고 유혹합니다. 유혹은 언제나 달콤합니다. 한 잔술에 몸을 맡길 수 있는 그곳에 가고 싶습니다. 그리고는 후회할 것입니다. 안 되는 줄 알면서 왜 그랬을까? 자신의 꼴을 봅니다.
“늘 깨어 기도하여라” 는 말씀을 되새겨야 하겠습니다. 유혹은 일회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심판 가운데에서도 재앙의 길을 피하게끔 해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그분께 의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고 말씀으로 물리치셨지만, 악마는 다음 기회를 노리면서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루카4,13). 하물며 연약한 우리에게는 얼마나 자주 접근하겠습니까? 그러니 회개의 삶도 한 번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생을 통해 죽음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말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1베드 5,8-9). “우리의 삶은 예수님의 전 생애를 따르고 그분과 일치되기 위해 깨어 있는 시간의 연속입니다.”
주님께서 오시는 그날과 시간을 모르니만큼 언제나 깨어 기도하고 잠시라도 방심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분명 방심하는 순간이 심판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늘 성령 안에서 온갖 기도와 간구를 올려 간청하십시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인내를 다하고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며 깨어있으십시오”(에페6,18). 세상에 너무 푹 빠져 있어도 문제요, 세상을 무시해서도 안 됩니다. 세상에 발을 딛고 있기 때문이고 하늘은 세상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미래의 영생을 희망하는 만큼 조화로운 삶을 추구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은 끝날 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순간이 결정합니다. 천국을 희망하면 여기서 천국을 살아야 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221126. 연중 제34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교회의 전례력으로 한해를 마감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내일부터는 새로운 한해를 시작합니다. 교회의 전례력은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는 대림시기를 지내고 있으며, 대림시기는 예수님의 탄생 4주전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오늘은 예수님의 탄생 4주전입니다. 2022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올 한해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감사드리며, 주님 앞에, 이웃들에게 부족한 점이 있다면, 잘못한 것이 있다면 겸손하게 뉘우치면서 주님의 자비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지난 10월에 대한민국에서는 이태원 참사가 있었습니다. 사고의 원인은 많은 인원이 모이는 것을 예상했지만 안전대책을 세우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예전에는 할로윈 축제를 즐기러 오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예상했고, 경찰들이 질서유지를 했다고 합니다. 지난 2년 동안 코로나 팬데믹으로 사람들이 많이 모이지 못했기에 이번에는 더 많은 인파가 몰릴 것을 예상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시와 구청 그리고 경찰은 그에 대한 안전대책을 세우지 못 했다고 합니다. 예전에도 별 일없이 끝났으니 이번에도 별 일 없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백조가 호수 위를 우아하게 떠 있는 것은 물 밑에서 힘차게 노를 젓는 오리 발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중이 모이는 축제가 안전하게 마무리 될 수 있는 것 또한 질서 유지를 위해서 활동하는 안전요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후의 약방문일 수 있지만 다시는 이런 참사가 생기지 않도록 책임있는 사람들은 안전대책을 숙지하고 실행하도록 해야 합니다.
비슷한 시기에 봉화의 아연 광산의 갱도가 무너지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광부 2사람이 매몰되었지만 9일 만에 극적으로 구조되었습니다. 캄캄한 갱도에서 9일 동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20년 경력의 노련한 광부의 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습기가 많은 갱도에서 위험한 것은 저체온증이라고 합니다. 광부는 입사한지 5일 된 신임광부와 비닐을 모아서 작은 천막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천막 안에서 지내면서 저체온증을 막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주변에 있는 나무를 모아서 불을 피웠다고 합니다. 습기를 먹은 나무른 산소 용접기를 사용해서 불을 피웠다고 합니다. 늘 가지고 다니던 커피포트의 플라스틱 부분을 떼어내고 물을 끓였다고 합니다. 일하면서 먹는 커피믹스는 허기를 견디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다행히 아연광산은 통풍이 잘 되었고 호흡에는 큰 지장이 없었다고 합니다. 주변의 물건들을 적극 활용하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기에 캄캄한 갱도에서 9일을 버틸 수 있었고 마침내 밝은 세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적성 본당에 있을 때입니다. 본당에 25인승 버스가 있었습니다. 차량을 운전하기 위해서는 대형버스 면허가 있어야 했습니다. 본당 교우 두 분과 함께 운전학원에 등록을 했습니다. 열심히 연습을 했지만 교우분들은 합격을 했고, 저는 시간 초과로 불합격 했습니다. 다시 한 번 도전하려고 준비를 했는데, 아버님께서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은 노력할 만큼 했으니 이제 운전면허 시험은 그만두고, 합격하신 분들이 버스 운행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아버님은 제가 불합격 한 것도 다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저는 차량 봉사자들을 위해서 주일 아침이면 커피를 준비해드렸고, 잘 다녀올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대신에 저는 9인승 승합차를 운전하였고, 동네의 약수터에서 물을 떠오곤 했습니다. 신발은 발의 크기에 맞추어야 하듯이, 제게는 9인승이 적합했던 것 같습니다.
스키를 배울 때도 그랬습니다. 강사는 스키를 잘 타는 법을 가르치기 전에 넘어지는 법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넘어졌을 때 일어나는 법을 알려 주었습니다. 몸의 균형을 잃어버리면 억지로 스키를 타려고 하지 말고 넘어지는 것이 안전을 위해서 더 좋다고 하였습니다. 넘어진 다음 다시 일어나는 법을 배우면 스키를 재미있고 안전하게 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강사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잘 넘어지고 곧 일어날 수 있으면 스키를 즐길 수 있습니다.” 재물, 권력, 명예, 성공이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율법학자, 바리사이파 사람, 부자청년, 대사제, 빌라도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였고, 오히려 예수님을 박해하였습니다. 그러나 몸을 팔았던 여인도, 눈이 멀었던 소경도, 나병환자도, 하혈하던 여인도, 중풍병자도, 듣지 못하던 사람도 예수님을 만나서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세상에서는 실패한 것처럼 보였지만, 죄인으로 불렸지만 예수님을 만났고, 그들은 살아서 참된 행복을 느꼈고, 영원한 삶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지키고 따른다면 그곳이 바로 ‘꽃자리’입니다. 우리가 일상의 근심으로 마음이 물러진다면 그곳이 바로 ‘가시방석’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한다면 그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
221126. 연중 제34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얼마 전에 초등학교 동창 몇 명을 만났습니다. 초등학생 때면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입니다. 너무나 긴 시간이 지난 것만 같은데, 중년의 나이에 다시 만났는데도 엊그제 만난 것처럼 친숙하고 반가웠습니다. 사회적으로 안정된 자리에 있는 친구들, 그 자리에서 나름의 위엄을 보이면서 지냈을 텐데 이곳에서는 모두 초등학생 애가 되어 목소리를 높여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저녁 식사를 하며 많은 이야기를 한 뒤, 오랜만에 노래를 부르면서 신나게 놀자고 노래방에 갔습니다. 바쁘게 일만 하면서 지냈던 친구들, 그래서인지 무슨 노래를 불러야 하는지 몰라 노래방 책자를 한참이나 뒤적이다가 겨우 번호를 찍습니다. 그런데 하나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글쎄 모두 느린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 때도 분명히 빠른 노래도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느린 노래만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를 어느 책에서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 글쎄 나이가 들면 박자 맞추기가 힘들어서 느린 노래만 부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이나 행동은 다시 초등학생 때로 되돌아간 것 같은데, 역시 나이는 모두 먹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 변화를 받아들이기를 힘들어합니다. 받아들여야 “그러려니” 할 텐데, 받아들이지 않으니 세상의 모든 불공평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려니’라는 마음이 필요한 지금이 아닐까요?
마지막 주님의 날에 대해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이날은 갑자기 찾아오며,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치게 된다고 하시지요. 그렇다면 이날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혹시 ‘그날은 절대로 와서는 안 됩니다’라면서 거부하면 될까요? 아니면 그냥 포기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어야 할까요?
주님께서는 그 마지막 주님의 날에 주님 앞에 설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마지막 주님의 날이라는 새로운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날은 무조건 거부하고 불평불만에 가득 차서 포기하고 좌절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받아들여야 할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변화 자체를 거부해서는 안 되고, 또 불평불만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모습도 안 됩니다. 그보다 마지막 주님의 날을 잘 맞이할 수 있도록 늘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내일 우리는 교회력으로 새해라고 말하는 대림 제1주일을 보냅니다. 이 땅에 강생하여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기간입니다. 그런데 잘 준비하는 방법은 깨어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제1독서의 묵시록 말씀처럼 주 하느님께서 우리의 빛이 되어 주시기 때문에(묵시 22,5 참조), 다른 어떤 것도 필요가 없습니다.
------------------------
처음에는 우리가 습관을 만들지만, 그 다음에는 습관이 우리를 만든다(존 드라이든).
------------------------
----------------------------------------------------
221126. 연중 제34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늘 깨어 있어라!”
-깨어 있음, 천상의 꿈, 깨어 있기 훈련-
오늘의 연중시기 끝은 내일의 대림시기 시작입니다. 끝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어제 설치해 놓은 대림초 화관이 벌써 마음을 대림의 기쁨으로 설레게 합니다. 연중시기를 끝맺으며 대림시기를 열어 주는 결정적 말씀 주제는 “늘 깨어 있어라!”입니다. 끊임없는 기도도 영성생활도 깨어 있음을 궁극의 목표로 합니다. 참으로 깨어 있을 때 살아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대림을 앞둔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 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 닥칠 것이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어느 말마디 하나 생략할 수 없어 복음을 통째로 전부 인용했습니다. 언젠가의 그날은 죽음일 수도, 사고일수도, 병일수도, 재난의 불행일수도, 종말일 수도 있습니다. 유비무환입니다. 그러니 그날의 불행에 대비하여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깨어 사는 것입니다.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루하루 날마다 참으로 깨어 환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살아 있다 하나,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며 뿌리 없이 표류하며 생각 없는 삶, 의식 없는 삶, 영혼 없는 삶, 피상적인 삶, 죽어 있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깨어 있는 삶입니다. 깨어 살 때 참으로 살아 있는 존엄한 품위의 삶이 됩니다.
깨어 있음은 기도입니다.
깨어 있음은 침묵입니다.
깨어 있음은 기다림입니다.
깨어 있음은 희망입니다.
깨어 있음은 기쁨입니다.
깨어 있음은 사랑입니다.
깨어 있음은 순종입니다.
깨어 있음은 봉헌입니다.
깨어 있음은 겸손입니다.
깨어 있음은 순수입니다.
깨어 있음은 주님의 현존입니다.
깨어 있음은 지혜입니다.
깨어 있음은 생명입니다.
깨어 있음은 빛입니다.
깨어 있음은 힘입니다.
깨어 있음은 평화입니다.
깨어 있음은 은총입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깨어 있음의 은혜입니다. 흡사 깨어 있음 예찬같습니다. 깨어 있음은 모두라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깨어 있을 수 있습니까? 답은 하나 꿈입니다. 희망입니다. 비전입니다. 셋같지만 실은 하나입니다. 꿈중의 꿈, 희망중의 희망, 비전중의 비전이 하느님 나라, 새 예루살렘의 꿈이자 희망이자 비전입니다. 이렇게 새 예루살렘 천상의 꿈이, 희망이, 비전이 깨어 있음의 원천입니다.
오늘 묵시록의 새 예루살렘의 천상 비전은, 꿈은 얼마나 아름답고 황홀한지요! 창세기 잃었던 낙원을 되찾은 것입니다. 바로 이런 꿈을 앞당겨 살 때 참으로 살아 있는 삶, 깨어 있는 삶입니다. 사도 요한이 체험한 제1독서 묵시록 많은 부분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그 천사는 수정처럼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나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 강은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에서 나와, 도성의 거리 한 가운데를 흐르고 있었습니다. 강 이쪽 저쪽에는 열두 번 열매를 내는 생명나무가 다달이 열매를 내놓습니다.
그 도성 안에는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가 있어, 그분의 종들이 그분을 섬기며 그분의 얼굴을 뵈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마에는 그분의 이름이 새겨져 있을 것입니다. 다시는 밤이 없고 등불도 햇빛도 필요 없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그들의 빛이 되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원무궁토록 다스릴 것입니다.”
바로 성인들의 미래요, 우리 믿는 이들의 궁극의 미래입니다. 이런 아름답고 영원한 천상의 꿈, 희망, 비전이 생생할수록 깨어 있는 삶입니다. 깨어 있는 삶이 이런 천상의 꿈을 앞당겨 실현하며 살게 합니다. 바로 이에 결정적 도움이 되는 우리 공동체가 매일 평생 끊임없이 함께 바치는 시편 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 기도입니다.
“늘 깨어 있어라!”
구체적으로 끊임없이 기도하는 영적훈련을 필요로 합니다. 깨어 있음의 훈련에 끊임없이, 한결같이, 간절히, 항구히 바치는 기도보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이런 기도는 감정도 기분도 마음도 아니라 끊임없는 훈련입니다. 끊임없는 기도, 끊임없는 회개의 훈련을 통해 비로소 성취되는 열정과 순수의 깨어있는 삶이요, 새 예루살렘을 앞당겨 사는 삶입니다.
깨어 있음의 구체적 영적 기도 훈련을 소개합니다. 이 관상기도는 제가 40년 수도생활 하는 동안 늘 해온 기도입니다. 다시 오늘부터 심기일전 하여 새롭게 충실히 수행하려 합니다. 바로 오늘 미사중 화답송 후렴 성구를 기도말로 하여, 즉 만트라로 삼아 수시로 마음과 몸을 고요히 한후 호흡에 맞춰 다음 만트라를 속으로 반복하는 것입니다.
“마라나타! 오소서, 주 예수님!”(1코린16,22ㄴ과 묵시22,20ㄷ).
'마라나타', 아람어로 우리 말로 번역하면 '오소서, 주 예수님'입니다. 마-라-나-타, 들숨 “마”, 날숨 “라”, 들숨 “나”, 날숨 “타”, 끊임없이 반복하여 바치는 아주 단순한 기도입니다. 이와 더불어 들숨 “오소서”, 날숨 “주 예수님!” 끊임없이 호흡에 맞춰 일정한 장소, 일정한 시간에 규칙적으로 훈련하는 것입니다. 수시로 언제 어디서나 늘 할 수 있는 참 좋은 깨어 있음의 기도 훈련입니다. 이 기도는 기도의 영성대가 지금은 타계했지만 영국 출신의 베네딕도회 수도사제 존 메인 신부가 강력히 추천하는 기도입니다. 순전히 하느님 현존 안에 깨어 있기 위한 기도입니다.
영성생활은 한곁같은 훈련을 필요로 합니다. 특히 기도 훈련입니다. 생생한 새 예루살렘의 천상 꿈이, 희망이, 비전이 깨어 있는 삶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源泉입니다. 주님의 매일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천상 꿈을 새로이 하며 늘 깨어 기도하는 삶을 살게 합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21,36). 아멘.
----------------------------------------------------
221126. 연중 제34주간 토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스스로>
루카 21,34-36 (깨어 있어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스스로>
주님을 믿기에
불신의 세상 깊숙이
들어갑니다 스스로
주님을 바라기에
절망의 세상 깊숙이
들어갑니다 스스로
주님을 사랑하기에
미움의 세상 깊숙이
들어갑니다 스스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