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권력 사유화의 결말
조선 왕조 500년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국왕이 어리거나 정국이 혼란할 때마다 왕실의 최고 어른인 왕비와 대비들의 '수렴청정' 그리고 그 뒤를 에워싼 외척 세력들이 조정을 뒤흔들었습니다. 왕권을 쥔 여인들의 치마폭에서 싹튼 국가권력 사유화는 개혁의 동력을 잃은 채 결국 조선을 세도정치와 멸망의 길로 내몰았습니다.
그 뿌리는 조선 건국 초기부터 시작됩니다. 태종은 왕실의 외척으로서 권력이 비대해질 조짐을 보이던 자기 처가 민씨일문을 도륙한 것도 모자라 세종의 장인 심온까지 역모로 몰아 처형했습니다. 1419년의 일인데 왕실 외척 가문의 세도의 싹을 미리 잘라버리고 왕권을 강화한 것입니다. 세종 사후에 문종이 일찍 죽자 단종이 즉위하고 연이어 계유정난이 터져 세조가 즉위합니다. 왕권을 강화한 조치었지만 세조 때부터 성종 대에까지 한명회는 두 딸을 각각 예종과 성종에게 시집보내 두 왕의 장인이 되어서 권세를 누립니다. 성종 다음에 연산군이 집권하자 조정은 거듭되는 사화의 피바람에 휩싸입니다. 월탄 박종화가 쓴 소설 <금삼의 피>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훈구권신들에 대한 연산군의 트라우마 폭발입니다만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거치며 많은 선비들이 희생되었고, 폭정을 견디다 못한 신하들이 중종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몰아냈습니다. 이처럼 왕비의 가문이 정권을 사유화하고 권력 다툼을 벌이는 악습은 조선 태동기부터 이미 예고되어 있었습니다. 인간의 본성으로 봐야 합니다.
외척의 암투와 권력 집착은 연산조에 대한 반정으로 중종이 집권하면서 더욱 복잡하게 얽혀갔습니다. '위훈삭제(반정공신 공적 취소)로 인한 훈구파의 반발'과 '지나치게 과도했던 사림파의 신권 정치(왕권 압박)' 가 불러온 기묘사화로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사림들이 대거 처형됩니다. 다시 중종 사후에 중종의 세 번째 왕비(계비)이자 명종의 친어머니인 문정왕후가 권력을 쥡니다. 1545년, 명종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어머니 문정왕후가 궁궐의 휘장 뒤로 걸어 나와 수렴청정을 선포했습니다. 남명 조식은 이를 두고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라며 권력의 사유화를 매섭게 직격하는 상소를 올린 것으로 유명합니다. 하지만 문정왕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동생인 윤원형을 필두로 한 '소윤' 세력을 과감하게 앞세웠습니다. 그녀는 이에 맞서는 중종의 두 번째 왕비(첫 번째 계비인 장경왕후) 가문이자 오빠인 윤임의 '대윤' 세력을 잔혹하게 짓밟았고, 이 과정에서 조선 전기 최대의 참극인 을사사화(1545년)가 또 터져 나옵니다.
나라의 명운을 쥐어야 할 조정은 여인의 치마폭 아래 권력욕에 눈먼 외척들의 피비린내 나는 각축장으로 변모해 갔습니다. 권력의 사유화와 당파 싸움으로 나라의 인재를 소모한 대가는 가혹했습니다. 곧이어 임진왜란(1592년)이 터져 나오면서, 조선은 국토가 유린당하고 백성들이 생선처럼 맨 몸으로 도마 위에 오르는 참혹한 지경으로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망해버린 나라를 지켜내고 다시 일으킨 주역들이 바로 이순신과 유성룡이었습니다.
나라가 잿더미가 된 후에도 비극은 반복되었습니다. 전쟁에 참전한 노비들에게 내걸었던 면천(천민 신분 해제)의 약속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서자 출신으로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적자인 영창대군의 탄생으로 정통성 시비의 부담 속에서 늘 전전긍긍해야 했습니다. 결국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축출되고 인조가 등극합니다. 이후 인조는 병자호란을 당하여 삼전도에서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라는 치욕의 화친을 맺게 됩니다. 《정약용의 비어고》 등에 따르면 약 50만 명에서 60만 명에 달하는 엄청난 수의 백성이 포로로 잡혀갔으며, 이 가운데 여인의 수가 20만~50만 명 사이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했다고 합니다. 사대부가의 부인과 딸부터 평민 처녀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여인들이 청나라 군사들과 몽골군에게 붙잡혀 만주 심양 등으로 끌려갔고, 육신과 영혼이 처참하게 유린 되었습니다. 이후 돈을 지불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이들이 바로 그 유명한 '환향녀(還鄕女)'들이었습니다.
그렇게 목숨을 연명하며 세월이 흘러 조선 후기인 1800년에 이르러서도 권력의 사유화와 신분제 파탄의 악순환은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숙빈 최씨의 아들로 등극한 영조는 무수리 출신의 생모를 둔 서자라는 열등감 속에서 평생을 지내야 했습니다. 60이 넘어 쉰 살이나 차이나는 어린 중전을 맞이하는데 그분이 바로 정순왕후입니다.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는 사도세자의 비극적 소용돌이 속에서 숨죽여 지내다가 정조가 서거하자 1800년 11세의 어린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의 칼을 뽑아 듭니다. 그녀가 주도한 신유박해는 표면적으로는 천주교 탄압이었지만, 정조 시대의 개혁을 뒷받침하던 남인 계열의 신진 실학자들을 완전히 궤멸시키기 위한 피비린내 나는 숙청이었습니다.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은 순조가 성년이 되면서 4년 만에 막을 내렸으나, 그녀가 뿌린 숙청의 칼바람은 조선이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실학적 개혁을 향한 인재풀을 완전히 파괴시켰습니다.
정순왕후가 사망하자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정조가 미리 후원 세력으로 점찍어 두었던 노론 시파의 거두, 안동 김씨 가문이었습니다. 순조 비 순원왕후(純元王后), 헌종비 효원왕후, 철종비 철인왕후로 안동김씨 가문에서 대를 이어 왕비로 책봉되면서 약 60년 동안 이어지는 최악의 세도정치 시대로 진입하게 된 것입니다. 고려 말의 60년 최씨 무신정권처럼 조선말의 안동 김씨 60년 세도정치가 뿌리 박은 것입니다.
왕권은 땅에 떨어졌고, 매관매직과 삼정의 문란 속에 백성들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국가의 기둥이 뿌리째 뽑힌 셈이었습니다. 이토록 길고 긴 암흑의 세도정치를 타파하고자 잠시 등장한 것이 바로 흥선대원군의 개혁입니다. 고종이 즉위하고 실권을 잡은 대원군은 서원을 철폐하고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으며 왕권을 강력하게 되찾아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고 치열하게 며느리 집안인 민씨 일문과 대립하며 불꽃을 튀겼습니다. 그러나 무너진 나라를 다시 추스르기엔 역부족이었고, 급변하는 제국주의 열강의 거센 파도 속에서 조선은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습니다. 조선왕조 500년 지배세력들의 갈등은 민중의 삶을 구제하거나 억압받는 신분제를 타파하기 위한 혁명이 아니었습니다. 양반 지배층이라는 틀 안에서, 중앙의 거대 기득권(훈구)과 지방의 신흥 지주(사림)가 한정된 권력과 토지를 두고 벌인 처절한 자기들끼리의 '파이 싸움'이었고 간혹 홍길동전, 서학, 동학 같은 사상들이 태동하기도 했지만 힘을 쓰지 못하고 사라졌습니다.
결국 외척의 득세와 세도정치로 누적된 국력의 소모는 조선 왕조 500년이 저물 때까지 신분제를 혁파하지 못하고 김옥균의 3일천하로 촛불이 꺼질 때 처럼 화르르 타고는 경술국치(1910년)라는 비극을 맞이하며 완전히 침몰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권력의 사유화로 얻고자하는 최종 목표는 사리사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