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6장 19-7:2절
19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그들을 치사 (오만) 칠십 명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슬피 울었더라 20 벧세메스 사람들이 이르되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누구에게로 올라가시게 할까 하고 21 전령들을 기럇여아림 주민에게 보내어 이르되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도로 가져왔으니 너희는 내려와서 그것을 너희에게로 옮겨 가라 1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궤를 옮겨 1)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고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하였더니 2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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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건 모른다고 해야 옳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보았다고 그들을 죽이신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주석을 보면 “여호와의 궤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상징이고 그의 거룩하심을 무시하고 잘못했을 경우 하나님의 재앙이 임하는바 여호와의 위력이 나타났음을 증명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합니다. 보아서는 안 되는 걸 보았기 때문이란 말입니다.
하지만 왜 보아서는 안 되는지 심증은 가지만 말로 풀어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당시 죽은 벧세메스 사람들은 19절에서 “(오만) 칠십 명”이라고 말합니다. 괄호 안에 오만이란 숫자와 칠십 명을 함께 기록합니다. 마소라 본문에 칠십 명 오만 명(쉬빔 이쉬 하미쉼 엘리프 이쉬)이란 숫자가 나란히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오만은 괄호에 넣고 합리적인 숫자인 칠십 명을 기록한 겁니다.
이런 이유로 벧세메스 사람들은 여호와의 궤를 기럇여아림으로 보냅니다. 기럇여아림에서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고 그의 아들 엘리아살이 지켰습니다. 7장 2절에서는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 오래 있은지라”고 합니다. 특이한 것은 사무엘하 6장에서는 아비나답의 집에 있던 법궤를 옮기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법궤를 옮깁니다. 그때 웃사는 궤를 붙들다가 죽게 됩니다.
하나님은 헌신은 기뻐하시고 불신은 슬퍼하십니다. 아비나답은 20년을 헌신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들은 죽습니다. 웃사의 죽음이 꼭 불신이라 말하긴 어렵습니다. 하지만 웃사의 죽음은 구조적인 불신의 결과입니다. 원래 법궤는 제사장이 어깨에 메어야 합니다. 그런데 새 수래에 싣고 옮겼습니다. 말씀을 간과한 결과입니다.
순종은 끝까지 해야 온전해집니다. 20년의 순종은 한순간 죽음이 되었습니다. 사역자들이 은퇴 시기에 잡음이 생기는 이유가 이겁니다. 끝까지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처음과 끝이 같았습니다. 말 구유에 태어나셨다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맨몸으로 오셨고 벌거벗은 모습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하나도 가져가지 않으신 순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