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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에 대한 역사적인 이해
(세례에 대한 초대교회 교부들, 중세 카톨릭, 종교개혁가들
그리고 종교개혁 이후 세대들의 이해)
이지끼을
막 16:15-16절
15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막 16:15절에는 복음을 전파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막 16:16절은
(복음을) 믿음으로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세례는, 곧 성경의 세례는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 (눅 3:3절,막 1:4절)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을 그들의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마 1:21절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죄로부터의 구원은 죄사함과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죄사함으로 죄의 책임을 면제해 주시고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하셔서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인해 우리가 중생(거듭남)합니다.
곧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인해 우리가 중생하여(거듭나서) 새생명을 얻게 되는데
이 새생명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죄로 부터 구원을 얻는 사람이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막 16:16절 예수님 말씀은
(복음을) 믿음으로 (회개의)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 [죄사함과 성령의 내주하심(중생)]을 얻을 것이다
라는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이 말씀으로 부터,
세례로 구원을 얻는다,
세례로 죄사함을 받는다,
그리고 세례로 중생(성령의 내주하심)한다는 이해를 할 수 있는데
세례로 (또는 세례를 통해) 중생한다는 이해를,
우리는 세례 중생론(세례에 의한 중생, Baptismal Regeneration)이라고 합니다.
이 뿐만 아니라
세례로 구원을 얻는다. 세례로 죄사함을 얻는다는 이해도 모두 세례 중생론이라고 합니다.
1. 세례에 대한 초대교회 교부들의 이해를 살펴보면,
한 사람도 예외없이 모두 세례로 죄사함을 받는다, 또는 세례로 중생한다고 이해하였습니다.
곧 한 사람도 예외없이 모두 세례로 구원을 얻는다고 이해했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Origen (AD 185-253)은 (Exhortation to the Martyrs 30 [A.D. 235])을 통해
It is not possible to receive forgiveness of sins without baptism
세례없이는 죄사함을 받을 수 없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초대교회 교부들의 이해를 보여주는
콘스탄티노플 신조 (Nicene-Constantinople Creed, AD 381) 에는
We believe ........... in one baptism in repentance,
for the remission, and forgiveness of sins
우리는 회개로, 죄사함과 용서를 받는 하나의 세례를 믿습니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Irenaeus (AD 130-202) 는 자신의 글 "Against Heresies" Chapter 21에서
And when we come to refute them [i.e. those heretics], we shall show in its fitting-place,
that this class of men have been instigated by Satan to a denial of that baptism which is
regeneration to God, and thus to a renunciation of the whole faith.
(A.H., I.21) 라고 말하였습니다.
Irenaeus는 이 글에서
사탄의 부추김을 받아 하나님을 향한 중생(거듭남)인 세례를 거부하고
따라서 온전한 믿음(whole faith)을 포기한 사람을 이단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에 대한, 초대교회교부들의 이해는
세례로 죄사함을 받는다는 것과 세례로 중생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곧 모두 세례중생론이었습니다.
그런데 초대 교회 교부들은
세례만으로 죄사함을 받고, 세례만으로 중생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닙니다.
노병기 목사는
자신의 박사논문 “조나단 에드워즈의 중생론- 칼빈, 웨슬레의 신학 사상과 관련하여” 에서
세례에 대한 교부들의 이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습니다.
2세기부터 5세기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교회 교부들은 '세례에 의한 중생'을 천국에 들어가는
필수적인 토대로 가르쳤다. 그 기간 동안에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외적인 세례의
행위와 내적인 중생의 행위 모두를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초대 교부들은 세례와 중생을 너무나 긴밀히 연결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중생'을 '세례'와
동의어로 사용하였다. 초대 교부들은 세례가 중생의 일상적이고 공식적인 통로라고 생각하였다.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347∼406)은《고린도전서에 대한 세 번째 설교》(Third Homily
On First Corinthians)에서는 "세례가 없이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하였다.《갈라디아서
주석》(Commentary on Galatians)에서 그는 세례가 우리를 중생케 하고, 씻고 하나님의 아들들로
만든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초대 교부들은 일반적으로 단순히 물세례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진실한 신앙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노병기 목사)
노병기 목사는,
초대교회 교부들이 세례를 통해 중생한다고 가르쳤지만
물세례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진실한 신앙, 곧 진실한 믿음이 필요하다 하였다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 교부들은 막 16:16절 예수님 말씀을
[믿음]으로 [세례]를 받아 [구원]을 얻는다 라고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회개의 세례를 받아 죄사함과 성령의 내주하심(중생)을 얻는다고 이해했던 것입니다.
2. 세례에 대한 중세 카톨릭의 이해는
[믿음]에 상관없이,
..................[세례]를 받아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성례에 관한 중세카톨릭의 신학은 사효론 (ex opere operato, from the work performed)이었습니다.
성례 집례자의 개인적인 성덕에 상관없이, 또한 수혜자의 믿음에 관계없이
교회의 정확한, 의식적인 수행을 통해서 성례의 은혜가 수혜자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사효론에 대해
허호익 교수는 자신의 논문 "재세례와 세례의 효과에 관한 신학적 쟁점"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성례의 효과는 집례자의 자격 즉 행위자의 행위에서(ex opere operantis) 나오는 것이 아니라,
행하여진 행위 자체에서(ex opere operatums) 나오는 것이므로
집행된 성사(opus operantum)는 언제나 정당하다는 것이다. (허호익 교수)
쉽게 말해서
교회가 정한 정당한 절차에 따라 시행되는 성례는 그 자체로 효과적이다 라는 것입니다.
집례자의 신앙에 관계없이,
그리고 성례를 받는 자의 신앙(믿음)에 관계없이 그 자체로 효과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세 카톨릭의 세례에 관한 이해는
믿음에 상관없이, 교회의 세례를 받으면 죄사함(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세례중생론입니다.
그런데 중세카톨릭의 이와 같은 세례중생론은,
초대교회교부들의 세례중생론과는 다른 세례중생론입니다.
초대교회교부들은 세례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진실한 신앙(믿음)이 필요하다고 이해했고
중세 카톨릭은
믿음에 상관없이, 교회의 세례를 받으면 죄사함(구원)을 얻는다고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곧, 중세카톨릭은
"[믿음]으로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라는 막 16:16절 예수님 말씀을
...................[세례]를 받아 [구원]을 얻는다고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세카톨릭은 예수님의 막 16:16절 말씀에서
처음으로 [믿음]을 제외하여
초대교회교부들의 이해와 다르게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에 대한 중세 카톨릭의 오해는 이것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중세카톨릭은 세례를 통해 죄사함을 받는다고 이해했지만
세례받기전에 지은 죄에 대해서만 죄사함을 받는다고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세례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중세 카톨릭에서 시작된 것은 아닙니다.
Augustine의 글에서도 이러한 이해(세례받은 후에 지은 죄에 대해서는 용서받기가 더욱 힘들다)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중세 카톨릭은 세례받은 후에 지은 죄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교리들과 제도를 만들었고
이런 교리들과 제도로 인해 종교개혁의 필요성이 생겼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허호익 교수는 자신의 논문 "재세례와 세례의 효과에 관한 신학적 쟁점"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루터는 중세교회의 여러 모순 즉 면죄부 판매와 연옥설과 교황권의 남용 등은 고해제도에
근거해 있음을 밝혀 95개 조항을 제시함으로 종교개혁의 촉매가 되었다.
그러나 루터가 중세교회의 근본모순으로 분석한 고해제도는
사실상 세례에 대한 협소한 이해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중세교회가 세례를 과거의 죄의 소멸로서 죄 사함의 표시로 이해하였기 때문에
세례 이후의 죄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아주 중요한 문제에 부딪히게 된 것이다.
카톨릭 교회는 세례이후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고해를 통한 속죄를 교리화 하였고,
그래서 고해는 “파선 후의 제 2의 널빤지”로 통용 되었다.
세례이후의 죄를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사제의 사죄권과 고해제도가 세례 이전 죄의 소멸에 관한 세례론을 보완하기 위한 교리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허호익 교수)
그러므로 종교개혁을 유발한 원인은 바로 세례에 대한 오해였던 것입니다.
3. 세례에 대한 종교개혁가들(루터, 쯔빙글리 그리고 칼빈)의 이해
3-1. 루터는 1517년 95개조 반박문을 통해
위와 같이 세례에 대한 오해로 인해 생겨난 중세 카톨릭의 교리와 제도,
곧 고해제도, 면죄부판매, 연옥설, 그리고 교황권의 남용을 지적하였습니다.
루터는 세례에 대하여 중세 카톨릭의 이해와 다르게 이해하였는데,
루터가, 자신의 글 "대교리문답"(Large Catechism) 97 page에서
We must so regard baptism and avail ourselves of its blessings, that when our sins and
conscience oppress us we strengthen ourselves and take comfort and say:
I am baptized, and if baptized it is promised me that I shall be saved and have eternal
life, both in soul and body. For for this reason two things are done in baptism, viz. the
body which can apprehend nothing but the water is sprinkled, and the word is spoken
for the soul to apprehend.
우리는 세례를 소중히 여기고 그 축복을 누리며, 죄와 양심이 우리를 억압할 때 우리 자신을
강화하고 위안을 삼아 "나는 세례를 받았으며, 세례를 받으면 영혼과 육체 모두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는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말해야 합니다:
이런 이유로 세례에는 두 가지가 행해지는데, 즉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는 몸에는 물이 뿌려지고
영혼이 깨닫도록 말씀이 선포됩니다. 라고 말한 것을 보면
루터는, 세례를 통해 전 생애의 죄에 대한 죄사함을 받는다고 이해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루터가, "대교리문답"(Large Catechism) 96 page에서
That also is again most clearly and beautifully expressed in the words: “He that
believeth and is baptized shall be saved.” That is, faith alone makes the person worthy
to receive profitably the saving, divine water. Because these blessings are here
promised and presented in the words in and with the water, they cannot be received,
except we believe it with the heart.
그것은 또한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라는 말씀에 가장 명확하고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즉, 믿음만이 그 사람을 구원의 신성한 물을 유익하게 받을 자격이 있게 만듭니다.
이러한 축복은 여기에서 물과 함께, 말씀으로 약속되고 제시되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으로 믿지 않으면 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 것을 보면
루터는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막 16:16절)
(He that believeth and is baptized shall be saved.)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세례]를 받아 [구원]을 얻는다 라고 이해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루터는,
"[믿음]으로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막 16:16절 말씀에서
[믿음]을 제외하여
....................[세례]를 받아 [구원]을 얻는다고 이해했었던 중세 카톨릭과는 다르게
[믿음]으로 [세례]를 받아 [구원]을 얻는다 라고 이해했었고
또한 세례를 통해, 세례받기전의 죄와 세례받은 후의 죄 모두 사함받는다고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에 관한 루터의 신학은 중세카톨릭의 신학에 대항해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재세례파의 신학에 대항해서 세워진 것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루터는,
중세 카톨릭의 교리와 제도, 곧 고해제도, 면죄부판매, 연옥설, 그리고 교황권의 남용을 지적하였지만,
이런 교리와 제도가 세례에 대한 오해로 생겼다고, 그 원인까지 지적했던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됩니다.
3-2. 세례에 관한 쯔빙글리의 신학 또한, 루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중세카톨릭에 대항해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유아세례를 부정하는 재세례파의 신학에 대항해서 세워진 것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재세례파(Anabaptist)는 유아세례를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세례로 여겼기 때문에
유아세례는 무효라고 생각했습니다.
부모의 신앙고백으로 받는 유아세례를 거부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아세례 받은 것을 세례받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은 세례를 다시 받아야 된다는 주장을 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앙고백과 의지로, 처음으로 한번, 세례를 받으라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재세례파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유아세례가 성경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은
이들이,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은 세례를 다시 받아야 된다는 주장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이들을 재세례파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재세례파가 유아세례를 반대한 이유는
"믿음으로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막 16:16절)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유아에게 적용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유아에게 세례를 받을 만한 믿음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떤 주장을 하더라도 설득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막 16:16절 예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세례]를 받아 [구원]을 얻는다고 이해했던 어거스틴은
유아에게, 부모나 교회의 믿음이 적용된다(fides aliena)는 주장을 했고
막 16:16절 예수님의 말씀을 사효론에 따라
....................[세례]를 받아 [구원]을 얻는다 고 이해했던 중세 카톨릭은
세례를 통해 유아에게 믿음이 주입된다 (fides infusa baptisme) 는 주장을 했습니다.
그리고, 막 16:16절 예수님의 말씀을 초대교회 교부들과 같이
[믿음]으로 [세례]를 받아 [구원]을 얻는다라고 이해했던 루터는
유아에게 세례를 받을 수 있는 믿음이 있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이상과 같은 주장들은
그래도 믿음과 세례를 분리시키지 않으려는 노력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설득력이 부족한 주장들이었습니다.
중세 카톨릭의 신부였던 쯔빙글리는 처음에는 카톨릭의 교리를 따라 유아세례를 주었습니다.
하지만, 쯔빙글리와 함께 했던 재세례파가 유아세례를 반대하고
이러한 반대가 더욱 거세져 봉기로 이어질 것 같으니
쯔빙글리는 개혁주의 언약신학을 개발하여 유아세례를 옹호했습니다.
쯔빙글리는 두 언약, 곧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각각 시작된 두 언약이 아니라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단 하나의 은혜언약만이 있다고 생각해 낸 것입니다.
하나의 언약이므로 구약의 할례와 신약의 세례가 기능적으로 같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태어난 아이들에게 할례를 주었던 것처럼
신약에서 믿는 가정에 태어난 아이들에게 세례를 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개혁주의 언약신학은, 세례에 관하여,
초대교회 교부들의 신학, 자신이 한때 따르던 중세 카톨릭의 신학, 루터의 신학,
그리고 재세례파의 신학 모두를 부정하는 새로운 신학이었습니다.
쯔빙글리가 자신의 글 de Baptismo (of Baptism) 를 통해,
In this matter of baptism—if I may be pardoned for saying it—I can only conclude that all the
doctors have been in error from [after] the time of the apostles.
This is a serious and weighty assertion, and I make it with such reluctance that had I not been
compelled to do so by contentious spirits, I would have preferred to keep silence. … At many
points we shall have to read a different path from that taken either by ancient or more
modern writers or by our own contemporaries.
세례에 관한 이 문제에서 - 제가 이 말을 해도 용서받을 수 있다면 -
저는 사도시대부터 [이후] 모든 교부(doctor)들이 오류를 범했다고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심각하고 중대한 주장이며, 논쟁적인 영들에 의해 그렇게 하도록 강요받지 않았다면
침묵을 지키고 싶었을 정도로 마지못해 이 주장을 합니다.
많은 점에서 우리는 고대 또는 현대 작가들이나 동시대 작가들이 취한 것과는 다른 길을
읽어야 할 것입니다. 라고 말한 것을 보면
쯔빙글리는 초대교회 교부로 부터 이어진 세례에 관한 모든 신학을 부정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쯔빙글리는
all the doctors have ascribed to the water a power which it does not have
and the holy apostles did not teach.
모든 교부들(doctors)은, 물이 갖고 있지 않는, 그리고 거룩한 사도들도 가르치지 않았던 능력을
물에 부여했다고 말했습니다.
쯔빙글리는, 초대교회 교부들이 세례에 어떤 능력을 부여했지만
세례에는 그런 능력이 없으며, 이는 사도들이 가르친 것이 아니다 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곧 쯔빙글리는, 세례에 관한 초대교회 교부들의 해석은 틀렸고
세례에 관한 자신의 해석은 사도들의 해석과 일치한다고 주장하며
모든 형태의 성례의 효과(sacramental effects)를 부정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쯔빙글리는
세례를 통해 죄사함을 받는다는 것과, 세례를 통해 중생한다는 것을 부정했던 것입니다.
1525년 11월 6일, 쯔빙글리와 그의 친구들은 공의회 홀에서 유아 세례에 관한 공개 토론을 열었고,
다음과 같은 논제를 제안했습니다:
- Children born of believing parents are children of God, like those who were born under
the Old Testament, and consequently may receive baptism.
믿는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은 구약에서 태어난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이며,
따라서 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
- Baptism under the New Testament is what circumcision was under the Old;
consequently, baptism ought now to be administered to children, as circumcision was
formerly.
신약에 따른 세례는 구약에 따른 할례와 같으며, 따라서 이전에는 할례가 그랬던 것처럼
이제는 세례가 아이들에게 시행되어야 합니다.
- We cannot prove the custom of re-baptizing either by examples, texts, or arguments
drawn from Scripture; and those who are re-baptized crucify Jesus Christ afresh.”
우리는 성경에서 가져온 예화, 본문, 논증으로 재세례의 관습을 증명할 수 없으며,
재세례를 받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다시 못 박는 것입니다."
쯔빙글리는
구약의 유아가 할례를 받을 때 자신의 믿음으로 할례를 받은 것이 아니므로
신약의 믿는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이 세례를 받을 때 믿음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또한
구약의 유아가 할례를 통해 죄사함을 받은 것도 아니고 중생한 것도 아니므로
신약의 유아가 세례를 통해 죄사함을 받는 것도 아니고 중생하는 것도 아니다 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쯔빙글리는 이와 같이
신약의 세례가 구약의 할례와 기능적으로 같다고 주장하면서
세례에서 믿음을 제외하였고, 또한 세례의 효과도 부정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곧, 쯔빙글리는 세례에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부정하여
[믿음]으로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막 16:16절) 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믿음]과 [세례]의 관계를 끊었고
또한, 세례의 효과를 부정하여
[믿음]으로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막 16:16절) 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세례]와 [구원]의 관계를 끊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쯔빙글리는
[믿음]으로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막 16:16절)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 [세례]를 받는다 ..............
[믿음]으로 .............. [구원]을 얻는다 라고 둘로 나눈 것입니다.
그러므로
".............. [세례]를 받는다 .............." 는 말을
"[믿음]으로 .............. [구원]을 얻는다" 라는 말 앞에다 놓을 수 있고,또한 뒤에다 놓을 수 있습니다.
곧, 유아의 경우,
".............. [세례]를 받는다 .............." 그리고 그 이후 "[믿음]으로 .............. [구원]을 얻는다"
그리고 성인의 경우
"[믿음]으로 .............. [구원]을 얻는다" 그리고 ".............. [세례]를 받는다 .............."라고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 [세례]를 받는다 .............. 는 말을 생각해 보면
쯔빙글리는 개혁주의 언약신학을 개발하여
기존의 세례에서 내용은 제외하고 형식만 남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례를 하나의 상징적인 의식으로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1525년 11월 6일 쯔빙글리가 공의회 홀에서 제안한 논제들을 옳지 않습니다.
처음 두 논제는 같은 주장인데
구약의 할례가 신약의 세례로 대체되었다는 주장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신약의 세례가 시작되면서 구약의 할례는 멈췄다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이 주장은 옳은 주장이 아닙니다.
할례와 관계없는 이방인의 관점으로
단순하게 도식적으로 할례와 세례의 관계를 이해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구약의 유대인은 할례를 받았고 신약의 이방인은 세례를 받는다고 단순하게 이해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쯔빙글리는 유대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쯔빙글리는 우리와 같은 이방인입니다.
우리 이방인들은 할례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의 조상들도 할례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그 조상인 아브라함 때부터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할례가 신약의 세례로 대체되었는지 아닌지 알아 보려면
예수님의 승천 이후 처음 세례가 시행된 오순절(AD 30년) 이후
유대인 기독교인들(할례자들)이 할례를 계속했는지, 더 이상 하지 않았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사도행전에는 유대인 기독교인들(할례자들)이, 계속 유아들에게 할례를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제가 알기로 두 군데 있습니다.(사도행전 11:1-3절, 21:17-24절)
그 중에서 짧게 설명드릴 수 있는 것 하나를 말씀드립니다.
사도행전 11:1-3절
1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2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3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예수님의 승천 이후 처음으로 유대인(할례자)들이 세례를 받아 기독교인들이 된 날은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오순절(AD 30년) 이었는데, 이날 삼천명의 유대인들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고넬료등에게 복음을 전한 때는 AD 37년입니다.
2-3절을 보면,
예루살렘의 할례자들, 곧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 제자들이
베드로가 할례자로서 무할례자인 고넬료 등과 교제나눈 것을 비난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예루살렘교회의 사도들과 제자들은
자신들이 "할례자들"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곧 이들이 생각하는 자신들의 정체성은 "할례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오순절의 세례 이후
계속 유아에게 할례를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에, 오순절(AD 30년) 이후, 이때(AD 37년)까지,
자신들에게서 태어나는 남자 아이들에게 할례를 주지 않았다면 이 아이들은 무할례자들입니다.
그러면 무할례자들인 자신의 아이들과 같은 집에서 생활하면서
베드로가 무할례자의 집에 가서 한 번 교제 나눈 것을 비난한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 제자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할례자들"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보면,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 제자들은 이때까지 할례를 계속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쯔빙글리의 주장은
신약의 세례가 시작되면서 구약의 할례는 멈췄다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오순절 이후에도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계속 할례를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할례와 신약의 세례가 기능적으로 같다는 주장은,
곧 신약의 세례가 구약의 할례를 대체했다는 주장은 옳은 주장이 아닙니다.
할례와 관계없은 이방인의 관점으로 단순하게 도식적으로 생각하여 오해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쯔빙글리는, 유아세례를 옹호하기 위해, 위와 같은 오해로
개혁주의 언약신학을 개발하여 세례에 관한 초대교회 교부들의 신학마저 부정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논제,
- We cannot prove the custom of re-baptizing either by examples, texts, or arguments
drawn from Scripture; and those who are re-baptized crucify Jesus Christ afresh.
우리는 성경에서 가져온 예화, 본문, 논증으로 재세례의 관습을 증명할 수 없으며,
재세례를 받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다시 못 박는 것입니다.를 보면
쯔빙글리가 이 논제에서 주장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성경에 재세례의 예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예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행 19: 3-5절,
3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4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5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On hearing this, they were baptized into the name of the Lord Jesus.)
행 19:3-5절을 보면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았던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의 세례와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는 모두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입니다.
하지만 세례요한의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와 같은 중생케하는 세례는 아니었습니다.
이에 대해 교부 Origen(185 - 254)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We next remark in passing that the baptism of John was inferior to the baptism of Jesus
which was given through His disciples.
Those persons in the Acts (Acts 19:2) who were baptized to John’s baptism and
who had not heard if there was any Holy Ghost are baptized over again by the Apostle.
Regeneration did not take place with John, but with Jesus through His disciples it does so,
and what is called the laver of regeneration takes place with renewal of the Spirit.
(Commentary on John, Bk VI.17)
Origen 은
세례요한의 세례는 제자들을 통해 주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보다 못한 것(열등한 것)이었다고 말하며
세례요한의 세례로는 중생이 일어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로 중생이 일어난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았던 제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도록 한 것입니다.
그런데 행 19:3-5절은
재세례파가 자신들 주장의 근거로 제시하기에는 적절치 않은 부분이 있는 말씀입니다.
세례요한의 세례는 유아세례와 같은 잘못된 세례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았던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를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더구나, 세례요한의 세례가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와 같은 세례라고 이해했던 쯔빙글리에게는
이 말씀이 재세례의 예가 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제가 보기에, 재세례를 반대하는 쯔빙글리에게는 해결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쯔빙글리는 이를 어렵지 않게 해결했습니다.
행 19:5절의 세례(baptism)가 가르침(teaching)을 의미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Zwingli's Commentary on True and False Religion, page 194-195)
이렇게 바꾸면, 행 19:3-5절은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았던 제자들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baptism)를 받은 것이 아니라,
주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침(teaching)을 받았다는 말씀이 됩니다.
쯔빙글리는 이와 같이 성경에 쓰인 단어의 의미를 바꿔서
성경에는 재세례의 예가 없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쯔빙글리가 제안한 마지막 논제의 두번째 주장은
"재세례를 받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다시 못 박는 것입니다." 인데
제가 보기에 이 말은 쯔빙글리가 할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례로 죄사함을 받는 것은
믿음으로 세례를 받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죄사함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재세례를 받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다시 못 박는 것입니다" 라는 말은
세례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곧 세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죄사함을 받는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만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쯔빙글리는 세례로 죄사함받는다는 것을 부정한 사람입니다.
쯔빙글리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우리가 죄사함을 받는다고 이해하였습니다.
하지만, 세례를 받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죄사함을 받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곧 세례에서 성례적인 효과를 모두 제거해서, 세례를 상징적인 의식으로 만든 사람이 쯔빙글리 입니다.
그러니까
세례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쯔빙글리가
재세례를 받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다시 못 박는 것입니다 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쯔빙글리의 이 말은 위선이고 거짓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중세 카톨릭은 처음으로 세례에서 믿음을 제외하여
................ [세례]를 받아 [구원]을 얻는다 고 이해했었는데
종교개혁 1 세대인 루터는
[믿음]으로 [세례]를 받아 [구원]을 얻는다 고 이해했고
루터와 같은 종교개혁 1 세대인 쯔빙글리는
세례에서 믿음 뿐만 아니라 처음으로 세례의 효과인 구원도 제외하여
................ [세례]를 받는다 .............. 라고 이해했던 것입니다.
세례에서 내용은 모두 없애고 형식만 남긴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 [구원]을 얻는다 고 이해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종교개혁 1 세대인 루터와 쯔빙글리는 세례에 대해 각각 다른 이해를 하였던 것입니다.
3-3. 종교개혁 2세대인 칼빈의 세례에 관한 이해를 보면
루터의 이해와 같은 이해(A)를 하기도 했고, 쯔빙글리의 이해와 같은 이해(B)를 하기도 했습니다.
곧 칼빈은 세례에 관하여 두 가지 이해(A, B)를 했던 것입니다.
칼빈은, 성찬에 관하여 말할때 (기독교강요 4. 17. 1),
그 앞인 4권 14, 15,그리고 16장에서 자신이 설명했던 세례를, 성찬과 함께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습니다.
For as God, regenerating us in baptism, ingrafts us into the fellowship of his Church,
and makes us his by adoption,
so we have said that he performs the office of a provident parent, in continually supplying
the food by which he may sustain and preserve us in the life to which he has begotten us
by his word.
하나님께서 세례로 우리를 중생케 하셔서, 그의 교회의 교제 안으로 접붙이시고
양자삼아 주셔서 자신의 아들로 삼아 주신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낳아 주신 그 생명(the life)을 지탱하고 보존할 수 있는
양식을 지속적으로 공급하심으로써 섭리적인 부모의 직분을 수행하십니다
이 말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낳아 주신 그 생명(the life)은,
바로 하나님께서 세례로 중생케 하셔서 주신 새 생명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세례를 통해 중생케하셔서 주신 새 생명이
바로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낳아 주신 그 생명이라고 칼빈은 말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칼빈은 하나님께서 세례를 통해, 말씀으로 우리를 낳아 주셔서, 새 생명을 주시고
성찬으로 그 새 생명을 유지시키신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례로 우리를 중생케 하셔서” 라는 칼빈의 말은 세례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는 루터의 이해와 같고 쯔빙글리의 이해와는 다릅니다.
루터는 세례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the work of God) 이라고 이해하였습니다.
하지만, 쯔빙글리는 세례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 앞의 사람의 일(a work of a person before God,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사람의 일)이라고 이해하였습니다.
그리고, 칼빈은 자신의 신명기설교를 통해 세례로 죄사함을 받는다 라는 말도 하였습니다.
And that is the reason why in Baptism
we truly receive the forgiveness of sins,
we are washed and cleansed with the blood of our Lord Jesus Christ,
we are renewed by the operation of his Holy Spirit.
[John Calvin, Sermons on Deuteronomy, p. 1244.]
바로 이런 이유로, 세례를 통해,
우리가 참으로 죄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을 받고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의 성령의 역사로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칼빈은 기독교강요를 통해 세례로 중생한다는 말도 했고
자신의 신명기 설교에서는 세례로 죄사함을 받는다는 말도 했던 것입니다.
곧 세례를 통해 죄사함과 중생을 얻는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막 16:16절 예수님 말씀에서 [구원]은 죄사함과 중생입니다.
그러므로 칼빈은 막 16:16절 말씀을
[믿음]으로 [세례]를 받아 [구원]을 얻는다 라고 이해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칼빈이 기독교강요 4. 15. 3 에서
“But we must realize that at whatever time we are baptized, we are once and for all
washed and purged for our whole life. Therefore, as often as we fall away, we ought to
recall the memory of our baptism and fortify our mind with it, that we may always be
sure and confident of the forgiveness of sins”
For, though baptism, administered only once, seemed to have passed,
it was still not destroyed by subsequent sins. (pg. 1305). 4. 15. 3. edited by John McNeill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언제 세례를 받든지 단번에 씻겨지고 평생 동안 정결케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떨어져 나갈 때마다 우리는 세례를 기억하고 그것으로
마음을 굳건히 하여 죄 사함을 항상 확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단 한번만 받은 세례는 지나간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후의 죄로 인해 여전히 파괴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라고 말한 것을 보면
칼빈은 단 한번 받는 세례에, 세례받기 전의 죄 뿐만 아니라 세례받은 후의 죄까지,
곧 평생의 죄를 사하는 효력이 있다고 이해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칼빈은 고넬료가 받은 세례를 오해하여
[믿음]으로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그리고 [세례]를 받는다 라고 바꿨습니다. (기독교강요 4. 15. 15)
고넬료는 성령세례(행 10:44절)를 받고, 그리고 세례(행 10:48절)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세례를 통해 죄사함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던 칼빈은
고넬료와 그의 친척, 친지들이 세례로 죄사함(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세례받기 전에 받은 성령세례로 죄사함(구원)을 받았다고 오해하였습니다.
고넬료가 성령세례(행 10:44절)로 죄사함을 받았다고 생각하니까;
고넬료가 그 이후에 받은 세례(행 10:48절)로 죄사함을 받았다고 말할 수 없게 되고
그래서 고넬료가 "확신의 증가를 위해 세례를 받았다"는 말을, 곧 성경에 없는 말을 한 것입니다.
쉽게 말해,
칼빈은, 고넬료가 죄사함을 받고 그리고 세례를 받았다고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믿음으로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죄사함)을 얻을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구원(죄사함)을 얻는다 그리고 세례를 받는다 라고 바꾸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칼빈은, 막 16:16절 예수님 말씀을
[믿음]으로 [세례]를 받아 [구원]을 얻는다 라고 이해하여
초대교회 교부들, 그리고 루터의 이해와 같이 이해(A)하기도 했고
[믿음]으로 ..................... [구원]을 얻는다 (그리고 [세례]를 받는다) 라고 이해하여
쯔빙글리의 이해와 같이 이해(B)하기도 했습니다.
쯔빙글리와 칼빈(B)은,
그 과정은 같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세례에 대해 같은 이해(B)를 하게 된 것입니다.
종교개혁당시에, 개혁은 종교적인 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정치 사회 문화등 모든 면에서
“Ad Fontes” [ (back) to the sources, 원천으로 (돌아 가자) ] 라는 개혁이 있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종교개혁가들의 모토 또한 “Ad Fontes” 이었습니다.
곧 종교개혁가들은 기독교역사상 유례가 없는 새로운 신학을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성경과 초대교부들의 신학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루터와 칼빈(A)은 막 16:16절 말씀을
[믿음]으로 [세례]를 받아 [구원]을 얻는다 라고 이해하였으므로
성경과 초대교회교부들의 신학으로 돌아갔다고 할 수 있지만,
쯔빙글리와 칼빈(B)은 막 16:16절 말씀을
[믿음]으로...................[구원]을 얻는다 (그리고 [세례]를 받는다) 라고 이해하였으므로
성경과 초대교회 교부들의 신학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세례에 대하여 새로운 신학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4. 종교개혁 이후,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세례에 관한 초대교회 교부들, 루터, 그리고 칼빈의 이해(A)인
[믿음]으로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라는 예수님의 막 16:16절 말씀에 따라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쯔빙글리와 칼빈의 이해(B)인
[믿음]으로 ................... [구원]을 얻는다 (그리고 [세례]를 받는다) 는 말에 따라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은, 막 16:16절 예수님의 말씀에서 [세례]와 [구원]의 순서를 바꾼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에서 [세례]와 [구원]의 순서를 바꾸면
세례의 정의가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
곧, 우리를 중생케 하는 세례인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에서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을 고백하는 세례”로 바뀝니다.
[믿음]으로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그리고 [세례]를 받는다 라고 바꾼 것이므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그리고 [세례]를 통해서 이를 고백한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의 정의가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을 고백하는 세례”로 바뀐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세례의 정의는 성경에 없습니다.
종교개혁 때, 쯔빙글리와 칼빈(B)에 의해서 만들어진 세례의 정의이기 때문입니다.
정리하면
[믿음]으로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초대교회 교부들은
[믿음]으로 [세례]를 받아 [구원]을 얻는다고 이해했고
중세카톨릭은,
................. [세례]를 받아 [구원]을 얻는다고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종교개혁이후에는
[믿음]으로 ..................... [구원]을 얻는다 (그리고 [세례]를 받는다) 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기준으로 보면
각 시대의 구원론이 다 다릅니다.
초대교회 교부들의 구원론, 중세 카톨릭의 구원론, 그리고 종교개혁이후의 구원론이 다 다릅니다.
초대교회 교부들은, 믿음으로 세례를 받아 구원을 얻는다고 이해했고
중세 카톨릭은 세례를 받아 구원을 얻는다고 이해했고
종교개혁 이후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라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세례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면 구원론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면 믿음도 다른 믿음이 됩니다.
[믿음]으로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라는 예수님 말씀에서,
[믿음]은 [세례]를 통해 우리를 [구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쯔빙글리와 칼빈(B)이 바꾼 말인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그리고 [세례]를 받는다)는 말에서,
[믿음]은, [세례]없이 (또는 세례받기 전에), 우리를 [구원]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믿음은
세례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입니다.
세례를 통해 죄사함과 중생(성령의 내주하심)을 얻게 하는 믿음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믿음은, 그 믿음의 행위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입니다.
반면에, 쯔빙글리와 칼빈(B)이 바꾼 말에서 믿음은
세례없이 (또는 세례받기 전에)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입니다.
곧 이 믿음은, 믿음의 행위없이, 그 자체로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쯔빙글리와 칼빈(B)은 유례가 없는 새로운 믿음, 곧 다른 믿음을 더한 것입니다.
위에서 소개한 Irenaeus 의 글에서 Irenaeus는
"사탄의 부추김을 받아 하나님을 향한 중생(거듭남)인 세례를 거부하고
따라서 온전한 믿음(whole faith)을 포기한 사람을 이단"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곧 죄사함과 중생을 얻게 하는 세례를 거부한다는 것은
온전한 믿음(whole faith)이 아닌 다른 믿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막 16:16절)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쯔빙글리와 칼빈(B)처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그리고 [세례]를 받는다) 라고 이해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믿음이 아니라 다른 믿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자신들은 [믿음]으로 ................... [구원]을 얻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믿음이 아닌 다른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이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구원, 곧 죄사함과 성령의 내주하심(중생)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