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경기도 일곱 임금이 묻힌 동구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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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3.12.30. 20:22조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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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임금이 묻힌 동구릉
구리시 인창동에 위치한 동구릉은 조선시대의 임금 일곱명과 10위의 왕비와 후비 등을 안장한 왕릉이다. 1408년 태조의 건원릉(建元陵)을 시작으로 조선시대 왕족이 하나의 군락을 이루고 있다.
한양으로 도읍을 정한 태조는 살아생전에 고려 왕릉의 대부분이 개성 부근의 산악지대에 있어서 참배하기 불편할 뿐 아니라 왕릉을 관리하기도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연유로 자신과 자손들의 유택을 한양 가까운 곳에 정하고자 하였다. 태조가 죽은 뒤 태종의 명을 받아 서울 가까운 곳에서 길지를 물색하다가 검교참찬의정부사를 지낸 김인귀(金仁貴)의 추천을 받고 하륜(河崙)이 양주 검엄에 나아가 보고 능지로 정하였다고 한다. 항간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태조가 생전에 무학대사를 시켜 자기와 후손이 함께 묻힐 족분(族墳)의 적지를 선정하게 하여 얻은 것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만들어진 전설에 불과하다. 아홉 개의 능 하나하나가 조성된 사정을 보면 길한 능지 여러 곳을 물색하다가 이곳에 귀착한 것이다.
이곳을 동구릉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익종을 모신 수릉이 아홉 번째로 들어서던 1855년(철종 6)때이다. 그 이전에는 동오릉(東五陵)ㆍ동칠릉(東七陵)이라고 불렀던 사실이 『조선왕조실록』에 전하고 있다. 동구릉의 지세가 풍수지리이론에 합당한 유수한 지세임은 감여가들이 이곳에 아홉 개의 능 터를 찾아낸 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태종 때 명나라 사신들이 건원릉을 둘러보고 그 산세의 묘함에 감탄하여 “어떻게 이와 같이 하늘이 만든 땅덩이(천작지구(天作地區))가 있단 말인가? 필시 인간이 만든 조산(趙山)일 것이다”라고 감탄하였다 한다.
현재 59만 평을 헤아리는 광대한 숲에 조성된 동구릉에 들어서서 직선거리의 맨 끝에 있는 능이 태조의 건원릉이다. 건원릉은 고려 왕릉 중 가장 잘 조성된 현정릉(공민왕과 노국공주)의 능제를 기본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후 건원릉은 조선왕조 오백 년 왕릉의 기준이 되었다. 그 뒤 조성된 왕릉은 저마다 조금씩 규모와 형태가 다르지만 석물의 배치와 능제는 대부분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와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에 따라 비슷하게 조성되었다.
건원릉 정자각과 억새왕릉 © 유철상
건원릉의 봉분에는 잔디를 심지 않고 억새를 심었는데 고향을 그리워했던 아버지를 위해 태종이 태조의 고향에서 흙과 억새를 가져다 덮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건원릉의 정면 멀리 떨어진 곳에 홍살문을 세웠는데, 이곳에서부터는 성스러운 장소이니 악구가 범접해선 안 된다는 뜻이다. 왕의 능으로 오르는 길인 참도를 따라가면 정자각이 있고, 정자각 왼쪽으로 다른 능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작은 석물이 있다. 정자각 남쪽으로는 제사를 준비하는 3칸짜리 수복청이 있다. 그 옆에 용무늬 비 머리가 얹어진 태조의 신도비가 비각 안에 세워져 있다. 신도비는 중국 진송 때부터 비롯된 것으로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묘에선 자주 볼 수 있지만 왕릉 중에는 태조와 태종의 능에 신도비가 있을 뿐이다. 건원릉의 좌우로 8능 16위가 15유택을 이루고 펼쳐져 있다.
건원릉 동쪽 언덕에 자리 잡은 능은 제14대 선조와 그 비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의 능인 목릉(穆陵)이다. 선조의 능은 다른 능과 달리 조형미와 세련미가 떨어지는데, 이는 선조가 죽은 해인 1608년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고 난 직후라 왕릉의 조성에 심혈을 기울일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원래 선조릉은 건원릉 서쪽 줄기에 있었으나, 심명세(沈命世)가 목릉에 물이 차서 불길하다고 주장하여 인조 8년인 1680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그 아래쪽에 제5대 문종과 그 비 현덕왕후의 능인 현릉(顯陵)이 있다. 현릉은 병풍석의 방울과 방패무늬가 사라지고 고석이 네 개로 줄어들었다. 이는 망료위 대신 제향 후에 축문 등을 태우는 ‘예감’을 마련한 최초의 능이라고 하며 이것 역시 능제의 검소함을 주창한 『국조오례의』의 양식을 적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현릉 아래에 자리 잡은 수릉은 제23대 순조의 원자인 문조와 그 비 신정익왕후의 능이다.
건원릉 서쪽 아래에 있는 능은 제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의 능인 휘릉(徽陵)이다. 15세 어린 나이에 계비가 되었으며, 26세에 남편 인조를 잃고 대비가 되어 효종과 현종 그리고 숙종에 이르기까지 왕실의 어른 조대비로 지냈지만 소생이 없었다. 인조의 정비인 인열왕후가 파주시 탄현면에 있는 장릉에 있는데, 1688년 12월에 장렬왕후만 이곳으로 옮겨왔다.
제21대 영조와 그 계비 정순왕후의 능인 원릉(元陵)은 휘릉 아래에 있다. 정자각 오른쪽으로 3칸짜리 비각 안에 3기의 비가 서 있다. 영조는 살아생전에 정비 정성왕후 곁에 묻히기 위해 서오릉의 홍릉에 터를 잡아두었지만, 그 터에 이상이 생겨 이곳 계비 정순왕후와 함께 쌍릉에 잠들어 있다.
제24대 헌종과 그 비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의 능인 경릉(景陵)은 동구릉의 아홉 번째 능이다. 이곳은 풍수가들이 “용세(龍勢)와 혈증(血譄)이 확실하고 열이면 열이 다 좋다”라고 평하는 명당 중의 명당이다. 국상을 입고서 열세 군데의 길지를 찾아 나선 끝에 이곳에 자리 잡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경릉에서 바라보는 전망은 동구릉 중에서 으뜸이다.
경릉 아래쪽에 제20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의 능인 혜릉(惠陵)이 있다. 단의왕후는 11세에 세자빈에 책봉되어 33세의 나이로 창덕궁 장춘원에서 세상을 떠나 이곳에 홀로 묻혔고, 경종과 계비 선의왕후는 성북구 석관동의 의릉에 있다.
혜릉에서 조금 들어가면 제18대 현종과 명성왕후가 쌍릉에 묻힌 숭릉(崇陵)이 있다. 병풍석 없이 난간을 둘렀는데, 경릉처럼 두 봉분을 이어서 둘렀다.
경릉 정자각 © 유철상
경릉은 세 개의 봉분이 나란히 놓인 삼연릉(三連陵)으로, 조선 왕릉 중 유일한 형식이다. 가장 오른쪽이 헌종, 가운데가 효현왕후, 왼쪽이 효정왕후의 능이다.
조선 왕릉 519년 동안 지속된 조선의 왕릉은 왕실의 권위를 드러내면서 자연조화적 조영술을 따랐다. 유교와 풍수 등 한국인의 세계관이 압축돼 있고 왕실의 장례 및 제례 등을 조명할 수 있어 문화재로서 가치가 풍부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일곱 임금이 묻힌 동구릉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4 : 서울·경기도, 2012. 10. 5., 신정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