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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가미카제(神風) 특공대의 유래와 원인
가미카제(일본어: 神風, 문화어: 가미가제)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 전투기에 폭탄을 싣고 적함에 충돌하여 자살 공격한 일본 제국의 결사 특공대이다. “가미카제”는 13세기 원나라의 일본 원정 당시 태풍이 불어 침공군이 저지된 것을 “신이 일으킨 바람”이라 부른 데에서 따온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가미카제가 전쟁을 시작할 때부터 있었다고 알고있는데 사실은 자폭 공격하는 부대가 편성된건 전쟁 말기이다. 전쟁 중에도 자폭 공격을 하는 부대가 검토되었지만, 일본도 처음에는 자폭부대 편성을 꺼려했다.
가미카제 특공대를 편성하기 전부터 자발적으로 자폭 공격이 행해진 경우도 있었다. 1944년 4월 14일 안다만 제도로 향하는 육군 수송선을 호위하던 비행기가 미국 해군 잠수함이 발사한 어뢰 3기를 발견, 기관총을 난사하면서 어뢰에 돌진하여 전사하고 어뢰파괴에 성공했다. 1944년 8월 20일 미국 육군 항공군인 B-29 폭격기에 의한 야하타(八幡) 공습에서는 요격하러 나온 비행기가 폭격기에 몸통 박치기를 하여 공중 폭발을 일으켜 추락시켰다. 또 파편으로 인해 타격을 받은 폭격기도 함께 추락하여 B-29 2기를 격추하였다.
1943년 6월 29일 적함선에 대해 특공(특수 공격의 줄임말)을 행하는 「특수항공대」 편성의 구상이 본부에 제출되었지만, '아직 그럴 시기가 아니다'라며 이를 거부했다. 후에 마리아나 해전이 일본의 패배로 끝나자 다시 특공대 편성 의견이 나왔다. 마리아나 해전 이후에 「더이상 다이아타리(体当たり)」밖에 방법이 없다는 의견이 많아지고 일본 해군에서는 특공병기의 연구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이는 가미카제 특공대와는 관계가 없다.
1944년 10월 5일, 결국 필리핀에 특공을 가하기로 결정을 하고 필리핀에 자폭공격을 행했다. 일본이 특공을 행했던 이유는 앞으로 반년이면 연료가 전부 떨어질 것을 알고 어서 전쟁을 끝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때문에 필리핀 공격을 최후의 공격으로 하고 7:3으로 강화조약을 맺어서 만주사변때 일본으로 되돌리는것이 목적이였다.
미국은 물론이고 일본에서도 가미카제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당시 황태자였던 아키히토는 가미카제에 대한 장교의 설명을 듣자 그럼 병력을 소모하는 것뿐이 아닌가?라고 말했다.
1. 해상 병기
가미카제는 비행기 부대였지만, 해상에서도 이러한 것들이 있었다. 일본에서 개발한 소형잠수함 갑표적(甲標的)이라는 적에게 다가가 어뢰를 발사하는 병기가 개발되었는데, 실제 진주만공격때도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 갑표적은 어뢰발사후 다시 모함으로 돌아오는 것을 목표로 했으면 처음에는 자폭 공격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갑표적은 자력으로 모함까지 귀환하는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고 실제로 작전 수행후 돌아온 갑표적은 하나도 없었다. 사실상 일회용 병기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나중에는 이것을 토대로 인간어뢰가 구상되어 특공에 사용된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이 구사한 자폭 전술. 전투기로 적 함선에 충돌해서 공격하는 전술이다. 자살폭탄공격의 최종형이자 항공기 자살폭탄공격의 시초. 미군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하여 일본어 단어임에도 당당하게 영어권 사전에 등재되는 비범함을 자랑했지만 실체는 정부가 나서서 주도한 강제 인간폭탄, 혹은 행정살인에 불과하다.
일본의 자폭부대 "신푸톳코타이"(神風特攻隊, 신풍특공대)가 이름의 유래이다. 神風의 독음이 '신푸'이고 훈음이 '카미카제'인데 어떤 미국 기자가 어설픈 일본어 실력으로 '카미카제' 특공대라고 읽고 그렇게 써버려서 저 이름이 더 유명하게 알려졌고 나중에는 일본 뉴스의 내레이션에서도 '카미카제'라고 읽으면서 'Kamikaze' 로 정착되었다. 그 뒤로 Kamikaze는 자살공격의 대명사처럼 사용되게 되었다.
한국에선 '가미가제'라는 표기로도 알려져 있으나,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가미카제'가 올바른 표현이다
전후 일본에서 특공(特攻)이 곧 자폭 공격을 의미하는 것도 이것의 영향이다.
비슷한 전술로는 반자이 어택이 있다. 반자이 어택은 근접 총검 돌격이라는 점은 우라돌격과 비슷해 보이긴 하지만 개념부터 다르며, 기준면에서 차원이 다른 전술이다. 무엇보다도 1) 국가가 주도하여 조직한 2) 전체주의 인간폭탄 시스템이라는 점에서 비슷한 어떤 사례와도 다른 악랄한 의의를 지닌다. 게다가 다른 전투 행위와는 달리 충분히 교육받은 엘리트인 조종사들을 단순폭탄으로 소모한다는 막장성 또한 보여준다.
일본 군부 내부조차 처음 카미카제 특공대 계획을 받아들고는 말도 안 되는 계획이라고 따질 지경이었으니 말 다 했다. 인명경시라는 윤리적 문제도 문제지만 파일럿과 전투기라는 고급 인적, 물적 자원을 철통에 폭약 채운 폭탄 하나로 다룬 것이다. 오죽했으면 일본이 저지른 일본 제국의 만행을 감추려들었던 사카이 사부로조차도 카미카제는 신랄하게 비난했으며 전후 대놓고 대본영에게 개*끼들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이와모토 테츠조 같은 사람은 아예 대놓고 항명까지 하였으며, 생존한 특공대원들도 수뇌부가 억지로 시켜서 어쩔 수 없이 할 수밖에 없었다라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즉, 전쟁터에서 싸우다가 어차피 위험한 상황이라면 자폭으로나마 더 큰 피해를 주자가 아닌, 군에서 자폭만을 위한 훈련을 시키고 전쟁터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전투기로 자폭 공격하여 목숨을 일회용품처럼 버리게 하는 것이다.
2. 유래
몽골 제국, 원나라의 쿠빌라이 칸이 주도한 몽골-고려 연합군의 일본원정에서 이들이 바다를 건너오던 중 태풍에 싹 쓸려 버린 것을 말 그대로 신이 가호를 내려 준 것이라 생각해서 신이 일으킨 바람, 즉 神風(신풍)이라 이름 붙인 것이다. 두 차례에 걸친 원정 모두 이 태풍 때문에 헛수고가 되었다. 물론 일본이 거세게 저항한 것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천재지변 크리와 원나라가 삽질한 것이 더 컸다. 원나라의 군사력은 일본에 비해 넘사벽으로 강했으나, 문제는 원나라의 전공은 기병인데 일본을 상대할 때는 무조건 해군으로 승부를 봐야 한다는 게 문제였다. 원나라 입장에서 해군은 생소한 병과였기에 여기에 천재지변까지 겹쳐서 당연히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원나라의 원정군이 엿먹길 원했던 고려의 음모가 숨어 있었다는 설도 있다. 굳이 태풍이 있는 늦여름에 대규모 함대를 보냈다는 무리수 때문인데, 실제로 일본 정벌을 위한 선박 건조 등 온갖 뒤치다꺼리를 떠안은 것은 고려였으며 이에 대한 원한이 꽤나 깊던 상태. 그나마 고려군은 생존률이 높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꽤 훌륭한 음모론이다. 한편 원나라 쪽도 노리고 출전시켰다는 음모론으로는, 10만이나 되는 남송의 잔당군을 원정에 보낸 것으로 보건대 귀찮아서 처리하기 곤란한 남송 잔당을 태풍을 빌어 고기밥으로 던져준 것이 아닌가 하는 설도 있다. 그러나 이는 말 그대로 음모론이며, 실제로는 시급한 정벌 일정에 맞춰 독촉된 무리한 건조로 인하여 선박이 부실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이 사건 이후로 오랫동안 "일본은 신이 지키는 나라다!"라면서 자축했지만, 정작 그 시발점인 당시 가마쿠라 정권은 침략이 아니라 방어전인 만큼 몽골&고려 연합군과 싸운 무사와 영주들에게 별다른 봉토를 내려줄 수 없어서 무사나 영주들의 불만이 쌓이다 보니 얼마 못 가 몰락했다.
3. 시작
병사 개인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어차피 죽을 거 너 죽고 나 죽자식 자포자기 자살공격 사례는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동귀어진이란 말이 이럴 때 쓰는 용어이며, 태평양 전쟁을 예로 들면, 진주만 공습 당시 일본 해군 조종사 이이다 후사타 대위가 탑승기가 피탄당하자 미 해군 항공대 기지 격납고를 향해 돌진한 사례가 있다. 결국 실패하고 땅에 처박혔지만, 전사한 이이다 대위는 그의 기체 추락을 목격한 미군들에 의해 용맹한 적으로 인정받아 비교적 정중히 장사 지내졌다. 애초부터 죽으려는 미친 놈이 아니라, 어차피 기체 피탄으로 살 가능성이 없던 와중에 최후의 수단으로 한 행동이었기 때문에 적군인 미군에게도 인정받은 것이며, 이런 식의 최후의 자폭은 어느 문화권에서도 용맹한 죽음으로 칭송된다. 비슷한 예로 산타크루즈 해전 당시 일본군의 급강하폭격기가 비행불능 상태에 빠지자 호넷에 돌진해 함교에 화재를 일으킨 사례도 있다. 마찬가지로 미드웨이 해전 때 요크타운에 돌진한 사례가 있다고는 하는데, 이는 정작 미군 측에선 기록이 없어서 불분명한 편 (일본함대 공습에 나섰던 미군 B 25 중 한 대가 격추되면서 일본군 기함 아카기의 함교에 충돌할 뻔 했다는 증언이 있으나 조종사의 자폭 시도였는지는 불명 )자세한 것은 미드웨이 해전 문서를 참고하기 바란다. 전쟁 초기 일본 측에서는 이런 충돌을 타이아타리(몸통박치기)라고 불렀다.
참고로, 일본군이 개전 초부터 가미카제 전술을 공식적인 전술로 채택하고, 진주만 공습에서부터 적극적으로 사용하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건 전부 개소리로, 일본군의 파일럿들의 숙련도는 개전 초에 미군에 비해 월등하였으며, 진주만 공습 및 미드웨이 해전, 과달카날 전투 등 일본군이 항공전력을 모조리 말아먹은 모 전투 이전까지의 일본군 함재기들의 제식 공격전술은 통상적인 뇌격 또는 급강하 폭격이었다.
그밖에 필리핀 해 해전 당시 고마츠 상등비행병조의 사례가 있는데, 막 다이호에서 이함하던 고마츠는 모함으로 향하는 어뢰를 보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해수면으로 돌격, 자신의 기체로 프랜드 실드를 시전해 어뢰 한 발을 막아내고 산화한다. 다만 고마츠의 사례는 적군에 대한 공격 목적에서 자폭한 것이 아니라 위험에 처한 아군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고 장렬히 산화한 경우라 위의 사례하고는 다른 케이스. 당연히 이 항목의 개막장 카미카제 전술과 비교하기조차 미안한 경우다.
미군도 마찬가지였는데, 미드웨이 해전만 해도 먼저 공격한 미군 뇌격기 부대들은 자신들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돌입했다. 그러나 이러한 뇌격기 편대의 전멸을 각오한 돌입에 일본군 전투기들은 고공을 비워둔 채 저공에 몰려있었고, 미군의 급강하 폭격기들은 아무런 방해 없이 일본 항모를 잡아낼 수 있었다. 후에 뇌격기, 급폭기편대의 시간차 공격이 의도된 것이었냐는 언론의 질문에 루즈벨트 대통령이 답하기를 "죽을 것을 알면서 공격 명령을 내리는 지휘관은 없다. 자발적으로 돌입한 그들에게 우린 큰 빚을 졌다"라고 술회했다. 군인이 매우 위험하거나 죽을 확률이 높은 작전에 투입되는 것과, 병사를 죽이기 위한 작전에 투입되는 것은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그러나, 미군이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이라고 부르는 1944년 6월의 필리핀 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의 항공모함기동부대가 괴멸당한 이후, 일본군 일선 지휘관들은 알아서 부하들에게 자살공격을 훈련시키기 시작했다. 1944년 7월 21일, 일본의 군령부는 '대해지 제431호' 에 의거하여 특공작전을 정식으로 채용하였으며, 급기야 1944년 10월 5일 군령부는 지시하지는 않겠지만 현장의 자발적 공격은 반대하지 않겠다면서 자살공격을 정식으로 허가했다.
그러나, 최근 NHK에서 방송한 '일본 해군 400시간의 증언' 이라는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첫 카미카제 출격이 있기 이미 1년전 해군 군령부에서 논의가 있었고 가이텐과 MXY-7 오카, 신요과 같은 자폭 병기가 적어도 1944년 4월 이후부터 건조 방침이 구체화되고 있었다. 또한 특공에 대한 전과 보고 및 선전에 대한 지침이 군령부로부터 일선 부대에 전보로 하달한 것이 밝혀졌고, 일선 부대의 자발적 공격이라고는 하지만 카미카제 부대에 편제 명령을 하달하고, 심지어 1945년 1월 최고 전쟁 지도 회의에서 특공을 주축으로 하는 일본 열도 방위 계획 논의가 있었음이 밝혀짐으로써 카미카제가 명목상으론 '자원'이지만 국가가 강요한 정신나간 자폭 공격 계획이었음이 밝혀졌다. 그럼에도 항복 직후에는 전범 재판에 대비해서 특공은 수세에 몰려 어쩔수없이 일선 부대에서 자발적으로 시행한 것이지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다라고 증언하라는 지침서를 만들어 두기 까지 했다.
10월 20일에는 최초로 신푸 특별공격대가 편성되었다. 이후에는 아예 카미카제가 주 공격이 되고, 기존 전투병기가 호위병력으로 전락한다. 아예 그냥 일단 닥돌해서 죽어야 하는 가이텐, 신요, MXY-7 오카 같은 특공병기를 주력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주로 태평양 전선에서 카미카제가 실시되었으나, 만주 쪽에서도 소련군을 상대로 간간이 실시했다는 말도 있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쿠릴 열도에 상륙하는 소련군을 지원하는 소해정을 대상으로 돌격한 전투기도 있었고, 이는 일본군 최후의 카미카제 전과로 기록되게 된다.
자폭공격으로 격침되었음이 확실한 최후의 미군 함선은 1945년 7월 28일, 오키나와 근해에서 93식 중간연습기의 격돌로 침몰된 플레처급 구축함 DD-792 캘러헌이다.
4. 원인
• F6F 헬캣, VT신관을 대표로 하는 연합군(특히 미군) 방공능력의 비약적인 향상. 설상가상으로 여기에 더해 미해군의 방공전술이 무르익어 대공원형진을 내놓게 되면서 더한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다. 그 결과 전함 한 척이 수십 대의 일본군 전투기를 가볍게 학살해버리는 참극이 연출되었으며, 폭격, 뇌격을 위해 어쩔수 없이 군함에 가까이 접근해야 하는 공격기들은 종이비행기마냥 떨어졌다.
• 과달카날 전역을 거치면서 조종요원 손실이 계속 늘어난 반면 조종사 양성능력은 당시 다른 참전국들에 비해 상당히 낮았다. 애초에 일본군은 함대결전사상에 취해서 단기결전만을 염두에 둔 전략 때문에 장기적인 조종사 수급에 대해서는 심도 있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양성기관 수도 적었던 데다 폐쇄적이었고 거기에다 조종 능력과는 상관 없는 사안에도 교육생을 탈락시키는 등의 병크까지 더해졌다. 비뚤어진 엘리트 의식의 전형. 그런데 이렇게 소수정예로 뽑아놓고서는 정작 일선에서의 발언권은 매우 적었다. 그리고 조종사의 계급을 조종사 지원 전의 계급으로 묶고 진급에도 소태같이 굴었다. 조종사의 손실을 키운 간접적인 원인이며 숙련된 조종사의 보충이 어려웠다. 이러다보니 적 군함공격은 고사하고 적 군함까지 공격기들을 호위할 호위편대도 부족한 수준이였다.
• 거기다 초기에 밀어넣은 숙련된 베테랑 조종사들이 카미카제를 하면서 제대로 미 함대에 한 방 먹였다. 그래서 일본군 수뇌부는 이게 먹히는 작전인 줄 알고 계속 했는데 문제는 이 짓거리로 숙련된 조종사가 계속 죽어나갔다.
얼핏 보면 전투기 한두대를 희생해서 적 군함을 격침시킬 수 있는 효율적인 전술이다. 그러나 이걸 성공시킬 수 있는 베테랑 전투기 조종사를 양성하는 데 드는 엄청난 시간과 비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지극히 1차원적인 발상.
결국 근본적인 원인은 일본군이 품은 부조리함이다. 어찌나 말도 안 되는 작전인지, 처음 작전 계획을 들은 해군 장관부터 어이가 없어서 "이딴 걸 작전이라고 내놨냐?"고 따졌으며, 첫 카미카제 출격 때는 호위를 요청받은 부대의 지휘관이 "그딴 미친 짓에 붙일 호위 따윈 없음, 凸" 이라며 대놓고 씹었다. 기어이 카미카제 전술이 정식으로 채택된 회의에서도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꽤 많은 지휘관들이 반대했으나 전황이 너무나 막장이었던지라 결국 통과되고 말았다고 한다.
더 기가 막힌 점은, 이딴 자폭 행위는 중세 무사도를 기준으로 보아도 가장 금기시하는 행동이었다. 할복이나 옥쇄는 어디까지나 명예를 택했다면 최후의 한 사람까지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용감하게 싸우다가 죽어라였지 목숨은 내다 버려 자폭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용맹하게 싸우다 죽는것이 무사도 정신이지 무식하게 손에 수류탄 하나 들고 돌격하다 죽으라는 뜻이 아니었다. 하지만 메이지 시기를 거치면서 추신구라 같은 광기를 진짜 무사도로 착각한 사이비 무사들이 생겨나고 근대 시기에 무사도의 의미가 순수한 인명경시에 대한 경외로 변질되었다.(이 부분 역시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이 직간접적으로 연관돼 있다.) 거기에 더해 자신들의 체통과 보신주의에 목 말랐던 군부는 자폭 행위를 미화하면서 매우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하지만 전쟁 끝난 후 군부에서 고위직들 중 자결한 이는 손에 꼽을 정도이다.
5. 반응
5.1. 일본
"그들이 ‘천왕폐하 만세’를 외치며 용기있게, 기쁘게 떠났다는 것은 전부 거짓말이다. 그들은 마치 도살장의 양들과 같았고, 모두 고개를 숙인 채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어떤 사람들은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해 기간병들게 실려서 강제로 비행기 안으로 밀어넣어졌다."
- 뉴욕 타임즈와의 인터뷰 중 와타나베 츠네오 요미우리 신문 전 회장겸 주필의 증언
'카미카제를 미화하려는 생각을 절대 지지할 수 없다. 그건 미친 짓이다' '카미카제로 허망하게 죽어간 친구들을 평생 애도하며 살았다. 그렇게 친구들이 죽도록 내버려둔 것에 대해 후회하고 고통받고 있다' '카미카제는 절대 미화해서는 안 되며 다시 일어나서도 안 된다'
- 생존 카미카제 대원 칸베 유타카
'우리가 왜 그런 명령에 따랐고 왜 죽어야 했는지 묻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다. 당시에 ‘나는 카미카제를 하지 않겠다’고 말할 여지가 전혀 없었다' '카미카제는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다' '일본 젊은이들이 그 비극과 공포를 실질적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
- 생존 카미카제 대원 아사노 아키노리
'지금은 새벽이다. 밤 3시다. 오전 3시다. 아아! 죽고 싶지 않다. 외롭다. 왜 이리 외로운 걸까.'
- 하야시 타다오, 교토제국대학 재학 중 징집, 향년 24살 전사
카미카제는 전쟁 역사상 가장 효과적인 미사일이었다. 유도장치 역할은 조국의 영광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다고 나선 파일럿이 맡았다. 사실 카미카제의 작전 성공률은 지극히 낮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적에게 겁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또한 눈에 보이는 성과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이들이 자아내는 공포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영국 크롬웰 프로덕션, 2차대전사 항공모함전 편
아직까지도 이들 카미카제 조종사들을 광신적인 국수주의자로 보는 시각이 많다. 하지만, 사실 대부분의 조종사들은 애국심보다는 그저 의무감과 강요에 못 이겨서 어쩔 수 없이 출격 했다.
희생을 강요하는 편도임무였다.
- 히스토리 채널, 컬러로 보는 2차대전사 항공모함과 카미카제 편
"이렇게까지 해서 내리막길인 전쟁을 지속해야 하는건가? 승산이 없는 상황에 자포자기한 상층부가 마지막 발악을 하는 것 뿐 아닌가?"
こうまでして、下り坂の戦争をやる必要があるのだろうか?勝算のない上層部のやぶれかぶれの最後のあがきとしか思えなかった?
- 이와모토 테츠조가 44년에 제 2 항공전대에서 카미카제 특공대원을 모집하자 했던 말
"카미카제는 일본 고래의 기습작전에 따른 것인데, 한 번은 성공하더라도 10개월 동안 몇 번씩 시도하면 어떤 바보가 당하겠습니까? 덴노가 그걸 깨닫고 멈추도록 지시했어야 했습니다."
- 사카이 사부로가 카미카제에 대해 한 말
"제가 선두로 출격하죠. 병학교 출신자도 전부 출격시키겠습니다. 예비사관은 출격시켜선 안 되겠죠. 겐다 사령관님은 마지막에 와주십시오.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명령을 내린 사령부의 참모가 저와 함께 선두에서 출격한다면 343 항공대는 하겠습니다."
- 343 해군항공대의 비행대장 시가 요시오가 자기 부대에 카미카제 명령이 떨어진 것을 상관인 겐다 미노루로부터 듣고 맹렬히 반발하면서
"아직까지도 눈을 감으면 내가 가르친 학생들이 눈에 선한데 수많은 제자들이 카미카제 특공대로 끌려갔다. 어째서 일본군 사령부는 그런 어리석은 작전을 10개월이나 지속했는가. 모든 이들이 카미카제에 지원했다지만 죽으라고 보낸 겐다 미노루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살아있다. 모두 거짓말쟁이들이다."
- 일본군 비행학교 교관이 한 말
"나 같은 우수한 파일럿을 죽이다니. 일본은 끝장이야. 난 굳이 몸으로 들이받지 않아도 놈들의 갑판에 폭탄을 명중시킬 수 있다고. 난 덴노라든가 일본 제국을 위해서 가는 게 아냐. 사랑하는 내 마누라를 지키기 위해서 가는 거지. 전쟁에서 지면 미국 놈들에게 내 마누라가 강간당할 거 아닌가? 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죽으러 간다. 어때, 멋지지 않나?"
- 첫 특공대원 세키 유키오가 기자에게 남긴 말
"대일본 제국 카미카제 특공대의 일원으로 선발된 것은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는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짓이고 제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 생각할 수 없는 작전이다. 자살하고 싶어서 안달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과연 전체주의 국가다운 발상이라 할 수 있겠다. 이번 일로 반짝 효과를 볼 수는 있겠지만 패전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 카미카제 특공대원 우메하라 유지가 남긴 유서, 22세의 나이에 전사
"전쟁 중 '천황폐하 만세', '대일본제국 만세'를 외치며 죽었다고들 하는데 난 그런 전우는 단 한 명도 보질 못했어요. 모두가 마지막 순간 '오카상(お母さん, 어머니)'을 외치더군요."
- A6M 조종사였던 하라다 가나메가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 증언
"그런가? 그러면 저 햇병아리 조종사들을 모두 이와모토 테츠조처럼 슈퍼 에이스로 만든 후 특공시키는 건 어떤가?"
- 노부히토 대좌가 항공군 사령관을 설득할 때 한 말.
"그럼 병력을 소모시킬 뿐이 아닌가?"
- 아키히토 덴노가 전쟁 중 피난처에서 카미카제에 대한 장교의 설명을 듣고 한 말
사카이 사부로가 전시중에 카미카제에 대해 비난했다든가 거부감을 보였다는 일화는 없다. 사카이 사부로의 카미카제 비난은 전쟁 이후 '전쟁연구가'를 자칭하며 활동하던 시절에 나온 것들이다. 그러나 사카이가 잠시 소속됐던 343 해군항공대의 비행대장 시가 요시오와 카미카제 명령을 받고 그걸 시가에게 알린 343 항공대의 사령관 겐다 미노루의 대화(겐다 미노루가 카미카제를 주장했다고 비난하는 설을 사카이 사부로 등이 내놓은 적이 있는데, 정작 겐다가 주장했던 건 항공모함에서 이함하기 힘든 험한 날씨에 육상 기지에서 공격하는 이른바 'T 공격'이었다. 무조건적인 자폭 같은 건 염두에 두지도 않고 처음부터 가능한 한 기지로의 복귀를 전제로 한 전술이다.), 카미카제 명령을 받고 무시하면서 본인 부하들에게는 "죽으면 끝이야. 전투기에 오르는 건 계속 날아올라서 적기를 격추하기 위해서라고."라 하며 죽어도 카미카제를 시키지 않은 이와모토 테츠조, 뿐만 아니라 특공대원 당사자들조차도 대부분 미친 짓이나 병력만 낭비하는 무의미하기 짝이 없는 바보짓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어린 초등학생도 아는 상식이었으니 말 다했다.
처음은 일본 군부조차도 "이딴 미친 짓을 작전이라고 내놓은 거냐!?"고 따졌다. 모두 찬성한 건 아니라서 이와모토 테츠조 같은 이들은 카미카제에 대해 강력히 비난했다. 세키 유키오나 전후의 사카이 사부로처럼 아예 "일본이 드디어 망하려고 작정했구나" 라든가 "대본영은 미친놈들이다"라는 등의 욕을 퍼붓는 경우도 많았다. 이들은 그들 자신부터가 카미카제를 미친 짓이라고 봤기 때문에 본인들이 지휘하는 부대에서 부하 개개인이 자의로 하겠다면야 몰라도 절대로 본인들이 나서서 부하들에게 카미카제를 하라고 지시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폭탄이나 어뢰를 싣고 가서 평범하게 뇌격이나 급강하 폭격을 한 뒤에 그냥 돌아온 이들도 있다고 한다. 이에 정신 나간 대본영과 일선 지휘관들은 "야 이 미친놈아! 가서 죽으라고 보냈더니 살아 돌아와? 그러고도 황군이냐!" 라고 하면서 길길이 갈굼해댔다고 한다. 심지어 계속 돌아오는 파일럿들을 총살시키기도 했다. 덕분에 광기에서 벗어나서 전쟁에 회의를 느낀 파일럿도 있었을 정도이다. 카미카제의 창시자 중 한 명인 우가키 마토메는 확실하게 명중할 자신이 있으면 그냥 폭격하고 귀환해도 되냐고 부하가 질문하자 "허가할 수 없다!"고 반대했다고 한다. 물론 일부 지휘관들은 카미카제가 상식을 초월한 미친 행동임을 이해했기 때문에 "그래, 잘했다"면서 차마 카미카제를 실패하고 돌아온 이들을 질책할 수는 없었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어디에도 예외는 있는 법이다.
물론 지금까지도 논란이 많은 공격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 당시에는 그 방법밖에 없었어요. 확실하게 적 함선을 공격하기 위하여 특공으로서 돌입한다, 그것이 베스트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 NGC 다큐멘터리, '일본의 비밀무기 잠수항모 I-400'
인터넷에 꽤 널리 퍼진 이야기로 '카미카제 대원이 연합군 항모에 착함 후 항복했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산호해 해전에서 귀함이 불가능한 상태가 된 일본군 파일럿이 폭탄을 버린 후 요크타운에 착함해 항복했다는 이야기가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대단한 업적을 남긴 사람임에도 그의 이름을 찾을 수 없는 것으로 보아 이 특공대원의 일화는 그냥 하나의 소문일 가능성이 크다고 이전엔 적혀있었으나, 산호해 해전에서 일본군 파일럿이 폭탄을 버린 후 요크타운에 착함한 적은 없지만 착륙하려 한 사실은 있는게 확실한 것 같다.
해당 이야기는 이렇다. 이 웹사이트에 따르면 여기엔 이노우에가 오후 4시 30분경, 호위기 1대 없이 야간 비행 훈련도 제대로 못 받은 27대의 폭격기/뇌격기 혼합 편대를 내보냈다고 한다. 너무나도 피곤했던 일본 조종사들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초계비행구역의 끝자락에서야 기수를 돌리고선 적재되어있던 폭탄과 어뢰를 버렸는데 마침 와일드캣을 출격시키던 미항모 요크타운을 발견한것이다. 해가 저무는 어둑어둑한 그림자 속에서 와일드캣은 총 15대 중 8대의 케이트 뇌격기와 한대의 발을 격추시켰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 해군 조종사들은 야간비행 훈련의 부재와 피로가 겹쳐서 모른듯하다. 이 때 방향감각을 상실했던 일본 파일럿들은 아래에 아군 항모를 발견하고는 남은 폭격기/뇌격기 18대가 모두 항모 착함 준비를 했다고 한다. 편대장이 먼저 플랩을 내리고 기어를 내리고선 착륙하다가 아군 항모가 사실은 미군 항모라는 사실을 알아내고선 스로틀을 확 올리고는 빠져나갔다고 하는데 그때까지 요크타운도 적인지 아군인지 혼란스러워하던 때라 총알 한발 날라오지 않았다고 한다. 몇 시간 동안 힘들게 조종하면서 길까지 잃었다가 미국 군함을 찾았더니 공격할 무기가 없었다.
1999년 네셔널 지오그래픽 익스플로러와 2002년 올리버 노스와 함께하는 전쟁 이야기 (War Stories with Oliver North)에 나왔던 빌 서지 (Bill Surgi)라는 사람은 이 사건 당시 요크타운에 있었다고 한다. 그는 당시 상황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회상했다.
"그땐 석양이 지고 있었지. 서쪽엔 햇빛이 있었지만 동쪽은 이미 어두웠어. 요크타운은 초계비행 (CAP - Combat Air Patrol) 나갔던 F4F 와일드캣을 착함 시키려고 준비중이었는데 우리가 알아듣지도 못하는 불빛 신호를 뱉는 비행기들이 나타나서는 주위를 빙빙 도는거야. 이 항공기들은 곧 착륙하려는듯 랜딩 패턴을 그렸는데 착함 신호 장교 (LSO)는 초계비행 나갔던 F4F들을 착함시키려고 준비중이었을거야. 걔네들 외엔 착륙 할 항공기가 없었거든. 그런데 F4F는 접이식 랜딩기어가 있는데 LSO가 본건 양옆으로 넓은 항공기가 고정식 기어를 달고선 랜딩 패턴을 그리는거였어. 알고보니 일본의 99식 아이치 급강하 폭격기, 'Val'이었지. LSO는 착함 금지를 신호를 보냈고 일본 폭격기는 그 신호를 받아들이고선 옆으로 피하더군. 벅마스터 함장은 "착륙 시도하는 적을 쫓아내라"고 했고 미트볼이 좌현에 나타나면서 모두가 사격 개시했지. 예광탄이 적 전투기에 박히는데 마치 폭죽을 보는듯 했다네. 그때가서야 아마 자기네들 항모가 아니란걸 알아차렸겠지. 이상한 일이었다고 말하기에도 부족한 일이고 사실 우리도 모두 신경이 날카롭게 서있었거든. 그 혼란 속에서 초계비행 나갔던 몇몇 F4F가 아군 사격을 뚫고 나타났는데 윌리엄 W. 반스 (Willian W. Barnes) 소위는 오일 쿨러가 피격당해서 박살난채로 착륙하기도 했어. 그는 매우 화가 나있는 상태였는데 자기가 왜 아군의 사격에 맞았는지 알고 싶어 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