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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어느 날 요하난 벤 스테파노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을
깨닫기도 쉽지 않으나, 삶으로 이루기 또한 만만치 않으며, 나아가 가르쳐 이루게 하기란 더없이 쉽지 아니 한 게다. 그러니 양식을 헤프게
베풀어서는 안 된다. 가치성을 인식하고 기본을 갖춘 이들에게 때를 따라 알맞게 나누어주어라.”
새
역사가 시작되었어도, 그 인생의 기본을 이루지 못한 경우에는 불교와 기독교, 또는 다른 신종교들을 먼저 거쳐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Hong, 1301)
말씀과
양식 / [Audio]
“예수님께서는
어느 날 요하난 벤 스테파노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을 깨닫기도 쉽지 않으나, 삶으로 이루기 또한 만만치 않으며, 나아가 가르쳐
이루게 하기란 더없이 쉽지 아니 한 게다. 그러니 양식을 헤프게 베풀어서는 안 된다. 가치성을 인식하고 기본을 갖춘 이들에게 때를 따라 알맞게
나누어주어라.’” 이 내용은 창세기의 요셉이 이집트에서 7년의 풍년에 양식을 저장했다가, 다시 7년의 흉년에 백성들에게, 그리고 가나안 땅에서
내려온 자기 형제들에게 조금씩 그 양식을 나누어준 일화에 기초한 말씀입니다.
꿈과
역경
“말씀을
깨닫기도 쉽지 않으나, 삶으로 이루기 또한 만만치 않다.” 말씀을 깨닫는 것, 하나님께서 누군가에게 말씀을 주실 때, 한꺼번에 왕창 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도 그의 미래를 꿈으로 살짝살짝 조금씩 열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꿈을 꿀 때는 엄청난 비전이 순간 보이지만, 그가 그 꿈을 손으로 만지기까지는 형들에게 미움도 받고, 이집트에 노예로 팔리기도 하고, 거기에서
보디발의 아내에게 유혹을 받기도 하고, 또 그것을 이겨 냈더니 오히려 모함을 받아서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그리고 바로의 관원들의 꿈을 풀어
주었더니 은혜를 갚겠다고 하더니만 또 그것을 잊어버리고 감감 무소식이기도 하고, 이렇게 고난과 좌절을 겪고 겪으면서 요셉이 총리가 된 것입니다.
이집트의 양식을 관리하는 총감독이 된 것이지요. 그가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하나님께서는 혹은 격려하시고, 혹은 미래를 열어 보여 주시고, 혹은
좌절을 경험하게도 하시고, 노예로 팔리게도 하시는 엄청난 고난과 역경을 겪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많은 백성들의 생명을 책임지는 이에게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의 심정과 처지와 입장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만큼의 연단과 우여곡절을 겪게
하십니다. 그러면서 그가 ‘아, 백성들이 이렇게 어렵게 살아가고 있구나!’하는 것을 깨닫고 체감하고 체휼하게 하시는 것이지요. 요셉도 그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총리대신이 되었고, 그랬기 때문에 형제들의 어려움과 백성들의 어려움을 익히 알 수 있었습니다. 밑바닥 인생을, 아니 그 감옥은
지하 감옥이니, 오히려 보통사람들의 세계보다 더 밑바닥까지 내려갔다 올라 온 셈입니다. 죽음이 눈앞에 보이는 그 문턱까지 내려갔다 온 것이지요.
그랬기에, 그가 단순히 양식을 책임지는 이로 끝나지 않고, 이집트 사람들의 ‘아버지’로 추앙받을 수 있을 만큼 따뜻한 심성을 지닌 관리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청동
성벽
이처럼
말씀을 깨닫기도 쉽지 않으나 그것을 삶으로 이루기 또한, 삶으로 하나하나 이루어 가면서 그 경지에 올라가기 또한 만만치 않으며, 나아가 그것을
가르쳐 이루게 하기란 더없이 쉽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다니엘의 경우를 보면, 그 역시 최고의 자리에 올라갔는데, 왕권이 바뀌면서 옆에 있던
신하들이 시기하여 사자 굴에 들어갔다 나오잖아요? 총리가 된 후에도 다니엘은 그처럼 죽음을 맛보고 살아나오는 역경을 겪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이 깨달은 것을 가르쳐 이루게 하기란, 또는 그것을 세상 가운데 펼쳐 이루기란 그만큼 더없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깨닫기가 어려운 만큼이나
그것을 이루고 세상 가운데 펼쳐 나가기도 쉽지 않으니, 쉽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권투 선수들이 도전자를 만나서 15라운드의 경기를 뛰기도 어렵지만, 이기고 나면 그것이 자신에게 청동 성벽이 되어 줍니다. 특히 마라톤이나
높이뛰기와 같은 기록경기에서 자기가 어떠한 기록 이상으로 올라섰을 때에는, 자신이 세운 그 신기록이 자기에게 능선이 되고 봉우리가 되고 청동
성벽이 되어 준다는 것이지요.
이처럼,
신앙의 길에서 어느 한계 이상으로 올라서는 일 역시 어렵지만, 성을 쌓는 일처럼 그것이 자신을 흑암의 세계로부터, 적들로부터 지켜 주는 방벽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이 밑으로 추락하지 않을 수 있도록 자기를 받쳐 주는 발판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그것은 단순히 어려운 일이
아니고, 분명 기쁨과 희락의 열매가 있는 결실의 작업이고, 아이를 해산하는 것과도 같은 창조의 과정인 것이지요. 이전에 없던 ‘길’이나
‘세상’을 새로운 말씀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은 기존 것에 비하여 새로운 창조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겨자씨와
누룩
“그러므로
양식을 헤프게 베풀어서는 안 된다.” 그 말씀을 세상 가운데 펼칠 때, 아무렇게나 마구 펼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가치성을 인식하고
기본을 갖춘 이들에게 때를 따라 알맞게 나누어주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가치성을 인식하고 기본을 갖춘 이들’은 어떠한 능선에 올라서는
이들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누가복음 13:18 이하의 말씀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전능하신 분의 왕국은 무엇과 같을까? 내가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
그것은 겨자씨와 같은데,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전능하신 분의 왕국을 무엇에 비길까? 그것은 누룩과 같은데, 어떤 여자는 그것을 가져다가, 가루 서
말이 온통 부풀어 오를 때까지 그 속에 섞어 넣었네.’”
여기에
나오는 ‘누룩을 가진 어떤 여자’처럼, 예수님께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렇게 부풀어 오를 때까지, 그들의 인생이 거듭날 때까지 말씀을 그들에게
넣고 계신다는 의미로 당신의 입장을 비유하신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누룩과 같은 우리의 말씀을 넣어야 할 대상은 우선 기독교입니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유대교와 이슬람권을 포함하는 범아브라함권이 될 수 있고, 그러면서 가까이에 있는 김성도 이후의 새로운 ‘재림종단들’도 그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양식을 헤프게 베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가치성을 인식하고 기본을 갖춘 이들에게 때를 따라 알맞게
나누어주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역사의
거목
아래
단락을 보시면, “새 역사가 시작되었어도, 그 인생의 기본을 이루지 못한 경우에는 불교와 기독교, 또는 다른 신종교들을 먼저 거쳐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남녀 간에 사랑하는 이들도 마찬가지예요. 처음에 우연히 만나서 사랑하게 되었는데, 상대의 가치와 인격과 깊은 내면의 세계를 다
이해하지 못하고 옆 사람들을 기웃거리다가 다른 이에게로 가는 경우도 있지요.
그처럼
섭리를 만나고서도, 다시 불교로 기독교로 또는 통일교나 신천지와 같은 신종교로 가서, 거기에서 세월을 보내고 다시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생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까지 부지런히 양식을 저장하고, 그 말씀들을 자신의 삶에 밑거름으로 부지런히 해서, 자신의 삶을
위대한 거목으로 만들어 가며, 그 나무의 줄기와 가지를 높고 넓게 펼쳐서, 수많은 새와 동물과 인생이 그 그늘 속에 들어와 깃들여 쉬게 하는
따뜻한 심성을 지닌 경륜 있는 지도자들로 성장해 가야 할 것입니다. (Hong, 2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