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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2
#요한계시록 #Revelation 18:11
11 땅의 商人들이 그를 爲하여 울고 哀痛하는 것은 다시 그들의 商品을 사는 者가 없음이라
The merchants of the earth will weep and mourn over her because no one buys their cargoes anymore–
Et negotiatores terræ flebunt, et lugebunt super illam : quoniam merces eorum nemo emet amplius :
καὶ οἱ ἔμποροι τῆς γῆς κλαίουσιν καὶ πενθοῦσιν ἐπ’ αὐτήν, ὅτι τὸν γόμον αὐτῶν οὐδεὶς ἀγοράζει οὐκέτι,
땅의 왕들은 땅에서 올라온 둘째 짐승의 명을 받아 거짓 교회인 큰 음녀 바벨론에게 권력을 부여하고 음녀와 음행을 저질렀다면, 땅의 상인들은 바다에서 올라온 첫째 짐승의 명을 받아 거짓 교회인 큰 음녀 바벨론에게 재력을 쥐어주고 음녀와 음행을 저지르며 다른 사람들도 자기들과 함께 음녀와 음행을 저지르게 하고 사익을 취한 자들이다. 어떤 장사꾼이 거짓 교회에 들어가 헌금이란 명목으로 많은 돈을 뇌물로 바치고 중요한 직책을 얻고서 자기의 직위나 담임목사나 당회의 힘을 빌어 교인들로 하여금 자기의 제품을 구매하게 함으로써 더 많은 재물을 얻는 경우가 그러하다. 장사꾼은 비단 거짓 교회 뿐만 아니라 무언가 있어보이는 교회는 전부 그런 식으로 이득을 얻을 대상으로 보기 때문에 보통의 교회 내에서도 심심치않게 발견된다. 비단 그런 장사꾼이 아니라 하더라도 자신이 종사하는 직종의 영업실적을 목적으로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은 전부 음녀와 음행을 저지르거나 심지어 광야의 여인을 강간하려는 상인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상업에 종사하는 신자들은 아무리 좋은 취지와 의도라 하더라도 행여나 자신의 사업이 교회로부터 모종의 금전적인 이익을 얻도록 유도하지는 않는지 각별히 유의하며 주의하여야 한다. 교회가 건물을 짓는다거나 공사를 한다거나 큰 돈이 들어가는 비품을 마련해야 하는 경우 대체로 종사자 교인이 있으면 그 교인을 통하거나 참여시켜서 진행하는 경우가 많은데, 아무리 교회와 교인 관계라 하더라도 그런 금전적인 부분이 얽혀있으면 교회는 내심 교인의 헌신을 바라게 되고 교인은 다른데보다 좀 더 높은 가격을 원하게 되므로 가급적 교회가 원천적으로 교인들과 무관한 관계자를 찾거나 교회로부터 제안받은 교인이 스스로 거절하는 것이 신앙적으로 서로에게 유익하다. 거짓 교회가 복음 사역이 아닌 영리 목적의 사업을 벌이고 사업체를 구성하는 것은 자기와 음행을 저지를 상인을 모집하는 것이다. 교회를 표방한 방송이나 언론은 겉으로는 복음 전파와 선교를 표방하지만 실상은 거짓 교회와 상인들이 교회를 이용해서 돈을 벌려는 상술에 불과하다. 교인 또는 지역사회에 편의와 유익을 주려는 목적으로 카페를 비롯한 여러 시설을 운영하는 것은 행여나 영리목적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무상제공 또는 재료 원가 정도만 충당할 수 있는 정도의 최소한의 요금만 받아야 한다. 어떤 사기업은 회장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아예 기업의 운영방침에 기독교를 내세우기도 하였으나 오래 지나지 않아 직원들을 대하는 방식을 비롯한 여러 방면에서 반성경적인 행태가 드러나게 되었는데, 이는 그 회장과 기업이 시작은 창대했어도 갈수록 음녀와 음행하는 상인으로 전락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 시대에 성전에는 가축을 사고파는 상인들과 환전상들이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거짓 교회인 음녀와 상인들이 음행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감히 성전에서 그러한 음행을 두고 보실수가 없으셨으므로 그들을 내어쫓으신 것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자기들의 재산 일부를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을 속인 죄로 벌을 받아 죽임을 당하게 된 것은 주님께서 성령으로 처음 시작하신 교회 내에서 돈을 주고 명성을 얻으려는 상행위라는 음행을 저지르려 했기 때문이다. 마술사 시몬은 비록 잘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라고는 하더라도 감히 성령의 은사를 돈을 주고 사려는 상인의 음행을 저지르려 했기 때문에 베드로 사도에게서 거의 정죄에 가까운 혹독한 책망을 받았던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그것도 주일에 이런저런 명목으로 자행되는 바자회나 특산물 등의 매매행위나 교회학교의 달란트시장 행사도 상인들이 음녀와 벌이는 음행이나 다름이 없다. 교회 신자를 자처하면서도 자기의 사업이나 장사를 위해서 아무 거리낌 없이 주일을 지키지 않는 자들은 음녀와 음행하는 상인에 가깝다.
주님 강림 후 거짓 교회인 큰 음녀 바벨론이 파멸되자 땅의 왕들과 마찬가지로 상인들도 애통해 하는 것은 음녀 바벨론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더이상 그 음녀와 음행의 쾌락을 느낄수도 없고 음녀를 통해서 부를 축적하지도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통상적인 정치 경제 체제가 모두 무너져버렸기 때문에 상업 자체도 의미가 사라져 버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주님께서 강림하시기 전에는 거짓 교회인 음녀 바벨론이 건재해 있기 때문에 이 땅의 어떤 개별 교회가 사라지게 된다 하더라도 그 교회의 상인들은 잠시 아쉬워하기는 하겠지만 금세 다른 교회를 찾아 떠날 수 있으므로 절망하거나 낙담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런 교회 내 상인들은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친 후에는 큰 음녀 바벨론의 파멸을 애통해하는 상인들만큼의 슬픔을 가지게 된다.
#20210802
#신명기 #Deuteronomy 28:23-24
23 네 머리 위의 하늘은 놋이 되고 네 아래의 땅은 철이 될 것이며
24 여호와께서 비 대신에 티끌과 모래를 네 땅에 내리시리니 그것들이 하늘에서 네 위에 내려 마침내 너를 멸하리라
하늘이 놋이 된다는 것은 비가 내리지 않는다는 뜻이고 땅이 철이 된다는 것은 아무런 씨앗이 자랄 수 없다는 뜻으로서 한마디로 극심한 기근을 표현하는 것이다. 다윗은 비록 자기가 지은 죄가 아니었어도 여호수아가 멸하지 않기로 약조한 기브온 족속이 사울 왕에게 학살 당한 억울함을 오랫동안 풀어주지 않고 방치하였다가 3년 동안의 극심한 가뭄의 재앙을 겪게 되었다. 희대의 악당 아합과 이세벨 시대에는 여호와께서 선지자 엘리야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3년 6개월 동안이나 극심한 가뭄의 재앙을 내리셨다. 나오미의 가족은 당시 극심한 가뭄을 피해서 모압 땅으로 이주하였었는데 그 때는 이스라엘이 사사 옷니엘이 죽은 이후에 다시 우상숭배 등의 범죄로 인해 모압 왕 에글론의 지배를 받던 때였다. 왼손잡이 에훗이 모압 왕 에글론을 죽이고 모압을 무찔러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이후에는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에 풍성한 소출을 허락하셔서 나오미와 며느리 룻이 돌아오게 된다. 소돔과 고모라는 하늘에서 내리는 유황불로 멸망을 당한 후에 지금까지도 아무런 소산물도 내지 못하는 땅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일설에 의하면 그 지역에서 나는 열매는 겉보기에는 먹을 수 있을 것처럼 보여도 막상 손으로 잡으면 바스라져버리고 그 안에는 모래와 먼지만 가득했다고 한다. 땅의 소산물은 비단 그것 자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소유를 대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소산물을 거두지 못하도록 비를 내리지 않으시겠다는 것은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을 얻을 수 있는 환경을 차단해버리시겠다는 것으로 확장할 수 있다. 사도 시대에는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큰 흉년을 예언하였고 글라우디오 로마 황제 때에 예언된 흉년이 실현되었다. 이 흉년은 특별히 성령께서 아가보에게 감동을 주셔서 하신 예언이었는데, 아마도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극렬하게 훼방한 유대인들과 이에 무관심한 로마 제국의 범죄에 대한 징벌적 흉년이 아니었을까 싶다. 대체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어서 국교 수준으로 자리를 잡거나 적어도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섭리로써 어느 정도의 경제적 성장을 누리게 된 반면에, 복음을 탄압하고 핍박하는 국가들은 경제적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대한민국과 북한의 사정만 비교해봐도 명약관화 하다. 때문에 오늘날 한국 교회가 복음대로 행하지 않고 죄의 분량을 채우게 된다면 대한민국의 경제는 북한 수준으로 추락해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여기에서는 육신의 기근에 대해서만 나오고 있지만 여호와께서는 선지서에서 범죄한 백성이 당하게 될 영적인 기근으로서 여호와의 말씀에 대한 기갈을 당하게 되리라고 저주하신다. 즉, 여호와의 말씀이 내리지 않는 영적 기근은 우리 눈으로는 보이지 않아서 체험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몸이 굶주리는 것보다 더 치명적인 저주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육신이 굶주리는 것은 육신의 생명을 해칠 뿐이지만 여호와의 말씀이 없어 영혼이 굶주리는 것은 둘째 사망에 이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사 시대 엘리 제사장 때에는 여호와의 이상이 희귀하였고 선지자 말라기 이후부터 예수님께서 오시기까지 4백여 년 동안에는 여호와의 아무런 말씀도 선지자를 통해서 들을 수 없어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등의 유대교 지도자들이 율법을 자기들 멋대로 왜곡해서 백성들을 그릇되게 인도하였다.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국교로 정식 인정을 받은 후부터 교부 시대까지는 성경을 아는 지식의 향연이 꽃피웠으나, 로마카톨릭이 불법적으로 교회의 수장 자리를 꿰어찬 중세 시대에는 사람들로 성경을 읽지 못하게 하는 복음의 암흑기가 오랫동안 이어졌다. 그 후 루터 및 칼빈 선생 등의 신앙개혁가들을 통해서 복음의 양식은 다시금 넓고 깊게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복음의 참된 해석 뿐만이 아니라 거짓 복음들 까지도 복음을 참칭해서 노아의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어서 마치 홍수 때에 마실 물을 찾기가 더 어려운 것처럼 참된 복음의 양식을 찾기가 더 어려워지게 되었는데, 이는 분명 전적으로 교회와 교인들의 책임이라 할 수 있다. 범죄하는 교회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막으시고 티끌과 모래와도 같은 세속 사상을 내려주시기 때문에 아무리 성경을 연구한다 하더라도 세속적 기준으로 해석하게 되므로 아무런 선한 것이 나올 수 없게 되는 것이다.
#20190802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원수의 부당하고 불의한 행태로 인한 손해를 그대로 감수하라는 뜻이 아니다. 원수가 나에게 행하는 불법에 대해서는 국가나 사회가 보장하는 법적 권한 안에서 적법하게 대응을 하되, 이를 넘어서서 개인적인 복수심에 불타서 지나친 보복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울러 원수가 자기 잘못을 인식하고 화해와 배상을 약속한다면 이를 흔쾌히 받아들이고 과거의 묵은 감정을 없애는 것을 의미한다. 복음적인 의미로는 신자가 '복음으로 인해' 누군가로부터 원수와 같이 핍박을 당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에 대해 섭리하실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자기에게 복음 때문에 원수처럼 행하는 자를 증오하지 말고 긍휼한 마음을 가질 것을 뜻한다. 스데반 집사가 동족들에게 돌에 맞아 죽을 때 그들에게 죄를 돌리지 말 것을 기도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 가르침을 오해하게 되면 우리는 용서라는 미명하에 범죄자에게 면죄부를 남발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궁극적으로는 범죄자의 처벌을 부인하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마저도 훼손하게 된다. 일본이 촉발한 대 한국 경제침략에 대해서, 일본이 우리의 원수라면 마땅히 한국 교회는 그들을 용서하고 사랑해야 하지 않느냐는 일부 기독교인들의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일본의 부당한 경제제재를 그대로 감수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정당하고 투명한 방법으로 대응하되 복수심에 사로잡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본의 치졸한 공격에 대해서 정부는 정부대로, 국민은 국민대로 적절한 방법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사랑도 용서도 없는 무자비한 행위라고 보면 곤란하다.
그렇게 원수에 대한 사랑과 용서를 강조하는 기독교인들은, 과연 자기 자녀가 불량배에게 심하게 맞고 오더라도, 학폭을 당하더라도, 성범죄를 당하더라도 범인을 너그럽게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가? 사업장이 건물주의 횡포로 날아가더라도 웃으면서 그 손해를 감수할 수 있는가? 노동에 대한 임금을 떼어먹혀도 악덕 사장을 용서할 수 있는가? 원수를 사랑하라는 기독교인들은 북한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을 사랑할 수 있는가? 내가 보기엔 그런 주장을 하는 기독교인일수록 저들에 대한 분노와 혐오가 극에 달해 있던데. 그런 기독교인들은 원수 같은 좌파 문재인 대통령을 사랑으로 용서할 수 있는가? 도리어 없는 흠을 거짓으로 만들어 침소봉대 하고 있지는 않은가?부디 한국 교회의 가르침이 바리새인과 같지 않았으면 좋겠다.
#매일성경 #에스겔 16:15-34
고귀한 왕의 더할 나위 없는 은혜를 입어 왕후의 지위까지 얻은 여인이 저지른 배은망덕한 음행은, 성경의 기록만 보더라도 너무나 낯뜨겁고 민망할 정도이다. 이 여인이 저지른 배은망덕함과 음란한 행위는 인격파탄의 끝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아니, 실제로 인간사에서 이런 완악한 짓을 벌인 여인이 과연 누가 있을까 싶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여인의 죄를 열거하는 왕의 애절한 심정을 같이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그녀의 죄를 고발하면서도 너무나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고통스럽게 참을 수 밖에 없는 왕의 심정이 절절이 느껴진다. 그녀가 외간 남자들을 아무나 왕궁으로 끌어들여 남편인 왕이 보는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음란한 행위를 벌여도 이를 말리지 못하고 두고 보기만 해야 되는 남편의 심정이 느껴진다. 아내를 사랑하여 이것저것 귀한 보물을 주었는데, 그것을 가지고 아내가 다른 정부들에게 주는 것을 보면서 극심한 자괴감을 느껴도 꾹꾹 눌러 참아내는 남편의 심정이 느껴진다. 심지어 남편에게서 자기 몸으로 낳은 친 자녀들을, 음란한 정부들을 위해서 불살라 죽이는 끔찍한 광경을 보고도 그 어찌할 수 없는 괴로움을 속으로만 삭히고 있는 남편의 단장의 고통이 느껴진다. 하나님께서는 그 배은망덕하고 음란한 여인이 바로 예루살렘 백성들이라고 하신다. 마치 에스겔에게 예언을 주신다기 보다는, 예루살렘 백성들의 패역함으로 인해 타들어가는 속내를 죽마고우에게 털어놓듯이 에스겔에게 하소연하시며 털어 놓으시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배은망덕하고 영적인 음행을 저지른 것은 역사적으로 지금까지 계속 반복되어 오고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을 때에도 이 택함 받은 백성들은 이방 족속의 손을 빌려 하나님의 아들을 잡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오늘날 교회의 담임목사 중에는 자기가 비천한 데에서 주님의 복음 사역자로 귀하게 택함 받아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마치 이 음란한 아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맡기신 것을 도둑질 하고, 그리스도께서 짝지워 연합하여 주신 교회를 자기의 영적인 음란함으로 말미암아 끊어내고 다른 교회와 불륜을 저지른다. 음란한 아내가 정부들을 위해 자기 자녀들을 불살라 죽인 것처럼, 이 패역한 담임목사는 그리스도의 자녀라고 할 수 있는 교인들을 내어 쫓거나 나가도록 방치한다. 음란한 아내가 저자거리에서 아무 남자하고나 음행을 저지른 것처럼 이 패역한 담임목사는 교회의 복음 사역은 뒷전으로 하고 외부로 나다니기에만 바쁘다. 그러고서는 자기가 연합한 교회에서 더 이상 세속적인 유익을 누리지 못한다고 판단되자 몰래 바람피우듯이 다른 교회를 찾아 나서고 끝내는 그리스도께서 짝지워 주신 그 신령한 연합을 자기 마음대로 끊어내버린다.
그리스도께서 그 패역한 담임목사에 대한 울부짖음이 내 귀에는 이렇게 절절하게 들리는데, 그는 패역한 예루살렘 백성들과 같이 들을 귀가 없으므로 듣지 못하고 자기의 음란한 탐욕대로 마음껏 영적 간음을 저지르고 있다. 이런 교회와 담임목사의 현실에 신령한 마음으로 애통해하는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선지자 에스겔을 친구처럼 삼으셔서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으신 것과 같이,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고민을 기꺼이 털어 놓으시는 친구로 삼으신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