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홍제동(또는 학산리)에는 정씨 성을 가진 학식 높은 선비가 살고 있었다. 그에게는 매서운 눈빛과 어여쁜 용모를 지닌 당차고 아름다운 딸(정씨 처녀)이 있었다.
어느 날, 정씨 처녀가 집 안방에 앉아 바느질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커다란 호랑이 한 마리가 들이닥쳤다.
이 호랑이는 정씨 처녀를 해치지 않고 살며시 등에 얹은 뒤 바람처럼 달아났다. 호랑이가 향한 곳은 사람이 다가가기 힘든 대관령 국사성황사였다. 호랑이는 사실 대관령국사성황신(범일국사)의 명을 받고 온 사자(使者)였다.
딸이 사라진 것을 안 정씨 선비와 마을 사람들은 횃불을 들고 대관령 국사성황사로 찾아갔다. 그곳에 다다랐을 때, 정씨 처녀는 성황사 앞에서 국사성황신과 함께 서 있었다.
놀란 아버지가 딸을 부르며 옷자락을 잡고 이끌려 했으나, 딸은 이미 영혼이 떠나고 몸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입석/立石) 움직이지 않았다.
정씨 선비는 딸이 이미 인간 세상의 인연을 다하고 국사성황신의 아내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처녀의 몸을 억지로 떼어내지 못하고, 화공을 불러 처녀의 모습을 화사(畫師, 화폭에 옮김)로 그리게 한 뒤 국사성황사에 함께 모셨다. 이로써 정씨 처녀는 대관령국사여성황신으로 좌정하게 되었다.
첫댓글 대관령국사성황신(범일국사)과 대관령국사여성황신(정씨 처녀)이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된 설화는 강릉 지역에서 내려오는 대표적인 ‘신가간(神嫁姦, 신과 인간의 혼인) 설화’이다.
영험한 신이 인간 세상의 처녀를 아내로 삼아 강릉 땅을 함께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오늘날 강릉단오제에서 두 신을 함께 모시는 핵심적인 신화적 배경이 된다.
민속 신앙에서 남신(男神)과 여신(女神)의 결합은 음양의 조화를 의미하며, 이는 곧 마을의 평화, 다산, 농사의 풍요로 이어진다고 믿었다.
강원도 산간 지역 특성상 호랑이는 두려움의 대상이자 산신/성황신의 영험한 사자로 인식되었다. 호랑이를 통해 인연을 맺는 설정은 성황신의 신성함을 극대화한다.
거룩한 스님(범일국사) 출신의 남신과 지역 유가(儒家) 집안 처녀의 결합은 신성함과 민중의 친근함이 결합된 형태를 보여준다.
이 설화는 한낱 전설로 끝나지 않고, 현재 거행되는 강릉단오제 제의 절차 속에 그대로 녹아 있다.
구산제 및 봉안제 (음력 4월 15일) 때 대관령에서 신목(神木)을 베어 내려온 행렬은 강릉 시내로 들어가기 전, 호랑이가 정씨 처녀를 데려갔다는 정씨 처녀의 친가(현재 강릉시 홍제동 국사여성황사)로 향한다.
이날 두 신의 위패와 신목을 국사여성황사에 함께 모시는 봉안제를 올린다. 단오 본제가 열리는 음력 5월 3일까지 두 부부 신은 여성황사에서 함께 밤을 보내며 합사(合祀)된다.
음력 5월 3일 단오 본제가 시작되면 두 부부 신을 마차에 함께 모시고 축제장인 남대천 단오장으로 나아가는 화려한 영신행차(迎神行次)가 펼쳐진다.
동합(同閤)은 '한 집(한 방)에 함께 머무른다(함께 거처한다)'는 뜻으로
주로 강릉단오제와 같은 전통 제의나 민속 신앙에서 남신(男神)과 여신(女神)의 위패나 영정을 한곳에 함께 모시는 행위를 가리키는 고유 제의용어이다.
음력 4월 15일, 대관령에서 신목(神木)을 베어 내려온 행렬이 강릉 시내 홍제동에 위치한 국사여성황사(정씨 처녀의 친가 자리)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남신인 대관령국사성황신(범일국사)의 위패와 신목을, 여신인 대관령국사여성황신(정씨 처녀)의 위패와 합하여 한 사당 안에 함께 모신다. 이 합사(合祀) 과정을 '동합(同閤)한다'고 표현한다.
대관령 국사성황신과 국사여성황신이 부부로서 합환(合歡)하고 한자리에 머무르며 신위의 조화를 이루는 것을 뜻한다. 두 부부 신은 동합한 상태로 음력 5월 3일 단오 본제가 시작되어 남대천 단오장(성황당)으로 영신행차를 하기 전까지 여성황사에서 함께 밤을 보낸다.
민속 제의에서 '동합'은 남녀 신격을 한 공간에 함께 합사(合祀)하여 부부의 인연을 기리고, 음양의 조화와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전통 의식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