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세 가지 질문 (마 16:13-17)
13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이 시간에 “예수님의 세 가지 질문”이라는 제목입니다. 좋은 질문은 좋은 정답을 낳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늘 좋은 질문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유대 랍비들의 교육 방법 중 한 가지는 ‘좋은 질문을 권장하라’는 것입니다. 아이에게 ‘무엇을 배웠느냐’고 묻기 보다 ‘어떤 질문을 했느냐’고 묻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좋은 질문은 위대한 결과를 만들어내지만 잘못된 질문은 스스로를 시험의 수렁으로 빠뜨리는 결과를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인간의 타락도 사탄의 잘못된 질문을 받아들이는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도 3가지의 질문을 하셨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1. 예수님이 누구신지 질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로 가시는 길에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러자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14절). 그러자 주님은 다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16:15) 질문하셨습니다. 이 질문은 우리의 영생의 문제가 걸린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누구시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을 4대 성인 중 하나로 생각한다면 큰 문제입니다. 혹은 예수님을 여러 구세주 중의 한 분으로 생각한다면 역시 문제입니다. 거기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베드로가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라고 대답한 것처럼 한 분밖에 없는 나의 하나님, 나의 구주로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7) 칭찬하셨습니다. 주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라 한 것처럼 베드로의 이 고백은 오직 예수만이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고백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하나님 나의 구주이실 뿐 아니라 예수밖에는 다른 구원이 없음을 대답할 수 있는 사람만이 참된 구원의 백성입니다.
2. 예수님은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요21:15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주님의 교회 즉 양들을 맡기시기 전의 질문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이 질문을 세 번이나 하셨습니다. 원문으로 보면 더 흥미롭습니다.
헬라어에서 사랑의 종류에 4가지가 있는데 아가페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가리키고, 필레오는 우정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그리고 스톨게는 자식사랑이나 나라사랑과 같은 본능적인 사랑을, 에로스는 남녀 간의 사랑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주님이 먼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아가페(αγαπας)하느냐 물으시자 베드로는 내가 주를 필레오(φιλω)하는 줄 주님께서 아신다고 대답합니다. 두 번째 질문과 답변도 똑 같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거듭 신적인 사랑을 요구했으나 베드로의 수준은 우정의 수준밖에는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예수님도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필레오(φιλω)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물으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필레오(φιλω)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필레오로 대답합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도 장치는 아가페 수준으로 장성해야 한다는 힌트입니다.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나중에 십자가를 거꾸로 지고 주님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진실로 그리스도의 신부라면 주님 말고는 다른 것을 믿거나 다른 사랑함이 없어야 합니다.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그리스도 만큼 자라라 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만큼 우리도 주님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전16:22에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할 만큼 사랑은 중요합니다.
막12:30-31에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부라면, 그리고 우리가 사명 맡은 일군이라면 주님을 그 누구 무엇보다도 사랑한다는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3. 예수님은 얼마나 감사하느냐고 질문하십니다.
눅17:17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환자 열 명을 깨끗이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나 감사하러 온 사람은 그중에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섭섭해 하시면서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 이야기입니다. 신령한 측면에서 보면 우리들은 모두 죄로 말미암아 영의 나환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 보면 죄를 용서 받고 치유 받아 우리 심령의 죄병을 고쳐주시고 하늘의 영광까지도 받은 자들입니다. 이 복음을 믿고 주님을 받아들여 은혜를 받은 우리들이 할 일은 감사하는 것입니다.
살전5:16-18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했는데 아버지께서 예수 안에서 주신 복을 알지 못한 우리들을 바라볼 때 안타까워하실까요? 우리는 날마다 감사하고 춤추며 살아도 부족할 것입니다.
빌1:29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했습니다. 그만큼 큰 은혜입니다. 삭개오와 같이 기쁨과 즐거움으로 주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한 것처럼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믿는 우리들은 해와 같이 빛나며 살아야 마땅합니다.
찬송가 311장에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너 위해 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시고 예수님께서는 자기 몸 버려 피 흘려주셨다면 우리들도 몸과 마음을 드려 주님을 섬길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감사를 막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육신의 소원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세 친구들처럼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을 가지면 주님께 온전히 감사할 수 있습니다.
박성연 이화여대 경영대학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즘 머리 좋은 사람이 부모 잘 만난 사람 못 당한다는 우스갯소리를 자주 듣지만 아무리 부모를 잘 만난 금수저라도 잘 풀리는 사람, 다시 말해 하나님이 밀어주시는 하늘수저를 이길 수는 없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하신 이상 3가지의 질문은 우리가 반드시 대답해야 할 인생사활이 걸린 질문입니다. 주님을 누구라고 믿습니까?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얼마나 주님을 위해 희생하며 기뻐하고 즐거워하십니까? 그러므로 우리 모두 예수를 나의 생명의 구주로 믿고 오직 주님만 사랑하며 우리를 사랑해주심을 생각하면서 해와 같이 빛나는 가장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