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대병원이 경기남부권역 외상센터로 지정되어 설립을 서두르고 있을 때였다. 보건복지부에서 지원하는 예산을 계속 수령하기 위해서는 행정적으로 필요한 수많은 서류를 작성하여 제출해야 하는데, 병원 인력은 행정절차를 모르고 경기도청 담당 공무원은 의료현실에 문외한이라 접점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때 경기도청 보건정책과 유영철 과장이 적임자를 소개해주었다. 경기도청 소속 김태연 주무관이었다. 김태연은 서울백병원 중환자실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간호사 출신으로 경기도 보건정책과에서도 10년 동안 근무한 베테랑이었다. 마침 김태연은 해외연수 대상자로 선정되어 미국에서 2년 동안 의료 관련 이론을 배우기로 결정되어 있었는데, 아주대병원의 외상센터 설립사업이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연수 기회도 포기한 채 지원했다는 것이었다. 공무원들에게 해외연수는 승진의 지름길이다.
사실 외상센터는 병원 측보다 경기도에 더 필요한 시스템이다. 병원으로서는 여러 가지 골치 아픈 책임만 돌아올 뿐 만년적자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른 병원의 외상센터처럼 환자들은 적당하게 치료하고 정부예산 빼먹는 데만 전념한다면 충분히 흑자를 낼 수 있지만, 원칙주의자인 이국종이 버티고 있는 아주대병원으로서는 택도 없는 일이었다. 외상센터가 구조적으로 적자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중증외상 환자도 경상 환자와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기 때문인데, 외상센터를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적정 진료수가를 새로 책정해야 된다는 사실은 다들 알고 있으면서도 관료적인 경직성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경기도청에서 공무원 한 사람을 파견하여 아주대병원 외상센터 일을 전담하도록 결정한 것은 매우 고마운일로 아마도 도지사와 담당 국장 사이에 상당한 논의가 오갔을 터였다.
이국종은 김태연과 마주 앉았다. 그는 연수를 다녀오면 사무관으로 특진할 대상이었는데, 그 출셋길을 포기하고 병원에서도 가장 험난한 외상외과 파견근무를 지원한 돈키호테였다.
“왜 본인에게 소중한 기회를 포기하고 이 어려운 곳엘 지원했습니까?”
“아주대병원의 중증외상센터 설립문제는 경기도 보건국에서도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핵심 사업입니다. 제게도 보람 있는 일이 될 것 같아서 지원했습니다.”
당장 인력이 절실하게 필요한 자리이기는 하지만 그가 견뎌낼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그동안 당찬 결심을 하고 외상외과 전담간호사를 지원한 자들 가운데서도 70%가 1주일을 넘기지 못하고 병원을 떠났던 것이다. 그러나 도청 주무관이면 어느 병원이든 그만한 행정능력을 가진 사람이 없다. 이국종은 그날부터 김태연을 외상센터에서 근무하도록 조치했다.
이국종의 우려는 100% 기우였다. 김태연은 첫날부터 밤샘도 감수하며 업무 파악에 진력하더니, 이내 임상과 도청을 드나들며 엄청난 양의 업무를 수행해나갔다. 김태연은 아주대병원 행정부원장 박재호의 눈에도 쏙 들었다. 박재호는 대우그룹 출신의 탁월한 행정가로서, 꾼은 꾼을 한눈에 알아본다고, 김태연을 알뜰하게 챙기기 시작했다. 김태연이 박재호의 코치를 받고 만들어내는 각종 문서와 행정처리 방식은 매우 효율적이라 아주대병원 행정부서에서도 100% 수용했다. 관료들은 아무리 우수해도 민간기업 인사들의 의지와 효율성을 따라갈 수 없다.
김태연은 짧은 기간 비행훈련을 받은 뒤 곧바로 항공 출동에도 동참했다. 그는 눈썰미가 매우 좋아 같은 AS-365 기종이라도 경기소방항공대의 헬기가 중앙구조단의 헬기보다 훨씬 후지다는 사실도 금세 알아챘다. 그는 궂은 날에도 출동을 자청했고, 공중 강하도 이국종보다 훨씬 능숙하게 해냈다. 그는 낮이나 밤이나 피로한 내색 한 번 없이 언제나 먼저 출동을 자청했다. 김태연은 보건복지부와 병원 사이에 연신 발생하는 갈등요인도 원만하게 처리해냈다.
경기 소방항공대 이성호 비행대장이 신병으로 큰 수술을 받고 3개월 동안 출동비행을 하지 못했다. 이국종은 시간이 없어 문병 한 번 가보지도 못했다. 합병증까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걱정만 했는데, 오래지 않아 복귀했다는 소식을 듣고 안심이 되었다. 어느 날 안성에서 응급환자가 발생했다는 연락을 받고 경기 소방항공대에 연락했다. 이국종이 장비를 들고 헬기에 오르니 조종간을 잡고 있는 이성호가 뒤를 돌아보며 씩 웃었다. 이성호로서는 복귀 뒤 첫 출동이었는데, 그게 하필 이국종과 함께 출동하는 야간비행이었다. 팔자들 하고서는...
2014년 설 하루 전날, 부산-전남 간 국도에서 교통사고가 발생하여 젊은 여자 운전자가 중상을 입었다는 연락이 왔다. 경상도 전역의 대형병원에 근무하는 중진 의사들은 모두 명절휴가를 가야한다며 먼 아주대병원으로 긴급요청이 온 것이다. 그 대형병원들은 아주대병원보다 먼저 권역별 외상센터로 지정이 되어 있었다. 중간중간 환자를 건성으로 진단한 의사들이 간 파열과 대량 출혈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 정도면 휴가를 취소하고 당장 환자를 치료하는 게 상식이지만, 그 중진 의사들에게는 환자의 생명보다 자신의 휴가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워낙 히딴 곳이라 출동을 요청하기도 민망했지만, 연락을 받은 이세형 비행대장은 질문 한 마디 없이 곧바로 날아왔다. 도중에 기상이 악화되어 앰뷸런스로 중간지점까지 이송해오라고 연락하고 육군항공학교에 도움을 요청했다. 당직사관은 두말없이 폐쇄되어 있던 활주로를 열어주겠다고 했다. 헬기가 착륙하니 멀리서부터 당직사관이 달려왔다. 쉬고 있다가 각중에 눈보라 속을 달려온 그는 이국종과 이세형을 반가이 맞이하며 따끈한 두유 한 병씩을 건네주었다.
잠시 후 앰뷸런스가 도착하고 안에서 응급구조사가 뛰어내려 이국종에게 말했다.
“현재 내부출혈이 심해 혈압이 계속 떨어지고 있습니다.”
이국종은 신속하게 환자를 옮긴 뒤 기내에서 응급조치를 취하면서 아주대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 도착하니 헬기장에는 비번인 김영환 임상교수가 나와 있었다.
“이 시간에 웬 일이냐?”
“헬기 소리가 들리기에 뛰어왔습니다. 박성용 교수님이 마취 준비를 다 해놓았습니다.”
김영환과 박성용의 숙소는 병원 인근에 있었다. 두 사람은 평소에도 헬기 착륙 소리만 들리면 만사 젖혀놓고 밤중에도 병원으로 달려나와 각자가 알아서 필요한 일을 수행하곤 했다.
남산만큼 부풀어 있는 환자의 배를 열자 피가 분수처럼 사방으로 뻗혀 올랐다. 간 뒷부분에 있는 하대정맥까지 파열된 실질을 복구하고 흐트러진 간 실질만 부분적으로 절제해냈다. 남아있는 간 실질을 최대한 끌어 모아 봉합해나갔다. 생명의 분수령이었다. 간신히 흉부삽관까지 마친 이국종은 개복된 상태로 환자를 중환자실로 옮겼다. 이후에도 이국종은 두 차례 더 수술을 집도했다. 전라도에 있는 애인을 만나러 가던 부산아가씨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전라도 애인을 수원으로 불러올려 설 연휴를 함께 보내며 살아났다. 물론 이국종도 이들과 함께 설 연휴를 보냈다.
헬기 조종사 이세형‧이인붕, 경기소방대원 서신철‧이몽영‧임한근, 외상외과 김주량‧김효주, 병원 보안요원과 주차요원들, 헬기 항로를 유도해준 공군 근무자들, 육군항공학교 당직사관 및 그 동료들, 마취과 교수 박성용, 임상교수 김영환, 외상외과의 여러 전담간호사 등 20여명은 생면부지의 아가씨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설 연휴에 아랑곳하지 않고 정성껏 헌신했다. 모두가 각자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는 이국종이었다.
첫댓글 실황중개방송 같은 실감이네.
어찌 이토록 인간애가 끓는 글로 표현해주시나!
그대의 따뜻한 가슴에 큰박수를 보내여...!
그러고도 살아난다.
기적이 바로 이런 것,
정성스런 손길 끝에 있는 것...
존경 하고픈 양반
항상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좋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