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김우중(金宇中·69) 전(前) 대우그룹 회장은 실패한 경영자로, 이건희(李健熙·63) 삼성그룹 회장은 성공한 경영자로 평가받는 분위기입니다. 하지만 불과 몇년 전만 해도 이같은 평가를 내리기가 어려웠고, 또 머지않은 장래에 어떻게 상황이 바뀔지 단언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물론 기업경영이란 철저하게 ‘결과’와 ‘실적’에 따라 선악(善惡)이 결판나는 영역이지만, 어쨌든 김 회장의 단점은 확대 재생산되어 인구에 회자되고 있고 이 회장의 장점은 실제 이상으로 미화하는 것 같아 조금 아쉽습니다. 어쨌든 한국 재계 역사에서 두 거물인 김우중 회장과 이건희 회장은 몇가지 점에서 중요한 경영 스타일의 차이를 보입니다.
▶김 회장은 창업자요, 이 회장은 재벌 2세입니다.
무슨 뚱단지 같은 얘기냐구요? 사물을 대하는 관점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얘기입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세와 ‘피할 것은 피해야 한다’는 자세의 차이입니다. 교육자 집안이었던 김 회장의 가정이 찢어지게 가난한 것은 아니었지만, 김 회장은 어린 시절 집안을 보살피기 위해 신문배달과 냉차 장사를 하며 동생들을 돌보았다고 합니다. 강인한 생존 정신을 유년시절부터 몸에 익혔지요. 이후 그의 인생에서 ‘두드리면 열리고 도전하면 이긴다’는 신념은 굳어졌습니다. 김 회장의 첫번째 직장인 한성실업 김용순(金容順) 회장은 오래 전 언론 인터뷰에서 “김우중은 아무리 어려운 업무라도 어떻게 해서든 완벽하게 마무리짓는다. 하도 통이 크고 의협심이 강해 내가 우리 집사람에게 ‘우중이가 크게 되면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감옥소 들어갈 놈이야’라고 말했다”고 밝혔답니다. 무슨 예언의 메시지 같지요. 창업을 하다보니 말도 잘해야 합니다. 하지만 재벌 후계자는 그리 달변이 아니라도 주변에서 ‘알아서’ 알아 듣습니다. 그래서 김 회장은 다변에 달변이지만, 이 회장은 말이 적은데다 눌변입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와 ‘피할 것은 피해야 한다’의 차이가 오늘날 대우와 삼성을 갈라놓은 분기점인 것 같습니다.
▶김 회장은 생각과 거의 동시에 행동하는 편입니다. 때로 행동이 생각을 앞지르기도 합니다. 비행기가 공항에 도착하면 문이 열리자마자 가장 먼저 내리는 사람은 백발백중 김 회장입니다. 업무도 총론부터 각론까지 직접 꼬치꼬치 챙깁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김 회장이 거래은행 대리를 찾아가 90도 가까이 고개 숙여 인사하는걸 목격한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회장은 오랫동안 심사숙고한 뒤 행동합니다. 집안의 최고 가훈도 ‘경청(傾聽)’이라고 합니다. 다만 그는 특유의 상상력으로 큰 맥만 짚어주지요. 대신 각론은 전적으로 아랫사람에게 맡깁니다. 이 회장이 이따금씩 ‘툭’ ‘툭’ 던져주는 메시지를 계열사 사장들이 해석하지 못해 쩔쩔 대면 이학수(李鶴洙) 구조조정본부장이 “이건 이런 얘기이고 저건 저런 말이고”라는 식으로 해석을 해줍니다. 1997년에 닥친 IMF 외환위기를 거쳐 ‘빅딜’이 시작됐을 때 그런 점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당시 전경련 회장직을 맡고 있던 김 회장은 각종 빅딜 사안에 대해 일일이 개입하고 간섭했습니다. 하지만 이 회장은 삼성차와 대우전자의 빅딜 건에 대해 당시 비서실 경영진에게 결정권을 주고 본인은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답니다. 극히 예외적인 사례를 제외하면, 막상 긴급한 의사결정이나 결론을 내려야할 때 이건희 회장은 묵묵부답 침묵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양(量)과 질(質)의 대결입니다. 두 사람은 1993년을 기점으로 전혀 다른 경영방침을 채택합니다. 당시 김 회장은 ‘세계경영’을 선언했고, 이 회장은 ‘신(新)경영’을 주창했습니다. 세계경영이란 간단히 말해 ‘양 제일주의’에 바탕을 둔 확장 지향의 경영철학이라면, 신경영은 ‘질 제일주의’를 근간으로 한 내실 위주의 경영철학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납니다. 그러다보니 김 회장은 품질보다는, 생산원가를 줄이고 판매량을 늘리는데 특히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는 때로 자동차라는 하이테크 제품도 그냥 와이셔츠 판매하듯이 팔면 된다는 인식의 발언을 한 적도 있습니다. 가령 1995년7월 외교안보연구원 특강에서 김 회장은 “자동차는 하이테크가 아니라 미들테크다. 우리는 미들테크 분야에서의 경쟁이라면 결코 뒤지지 않는다. 그리고 싼 차를 만들어 판매량을 늘린 이후 서서히 질을 높여가는 것이 유리하다”고 말했습니다. 싸게 만들어 많이 팔아 시장점유율을 높이면 된다는게 김 회장의 기본 골격입니다. 그러다보니 AS도 상대적으로 덜 주력했습니다. 이에비해 이 회장은 “품질이 나쁘면 몇십만대라도 쓰레기통에 버려라”고 했고, 실제 당시 불량으로 만들어진 무선전화기 수만대가 불태워지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 회장의 경영철학과 실제로 현장에서 그렇게 하는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최근 가까운 어떤 사람이 삼성전자 무선전화기를 구입했는데 배터리를 넣으면 아예 닫히지가 않는 불량품이었다고 합니다. 초일류기업 삼성 이름으로 나온 간단한 무선전화기가 완전히 엉망이라는 군요. “하청업체에서 만든걸 삼성 로고만 붙이다보니 그렇다”는 답을 들었답니다. 그래서 삼성측에 “사소한 잘못이 전체 이미지를 망친다”고 몇번 얘기를 했는데도 아예 무반응이랍니다. 삼성이 이제 배부른 부자 회사가 된 건 분명해 보입니다.)
▶인재관도 다릅니다. 김 회장은 초기 성장기에 경기고 동기생들을 중용했습니다. 김 회장이 과거 학맥(學脈)의 정(情)에 이끌렸다기보다는, 비즈니스를 펼쳐나갈때 경기고 출신의 인간관계를 활용할 여지가 많았기 때문에 중용했을 것입니다. 또 김 회장은 한국은행이나 산업은행 등 금융권 출신의 외부 인재도 많이 스카우트했습니다. 이경훈, 김태구 등 과거 대우그룹의 간판급 전문경영인이 그런 사례이지요. 하지만 80년대 후반 이후에는 별로 새로운 인재영입이나 물갈이를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과거 대우그룹 사장들중에는 십년 가까이 재직한 ‘장수 사장’들이 유독 많았습니다. 조직의 경직화와 관료화를 만든 요인중 하나입니다. 이에비해 이 회장은 ‘기업은 곧 사람’이라는 아버지 이병철(李秉喆) 회장의 뜻을 따라 학연이나 지연 등을 따져 인재를 중용하지는 않았습니다. 친인척도 가능하면 배제했구요. 그리고 지금까지도 국내외에서 인재가 있다면 앞뒤 안가리고 열심히 스카웃하고 있습니다. 이 회장은 예스맨, 관료화된 인간, 화학비료형 인간(생색이나 내고 자기를 과시하는데 열심인 유형으로, 음지에서 묵묵히 일하는 퇴비형 인간의 반대 개념이라고 합니다)들을 특히 싫어한답니다. 이들의 공통된 특징이 무엇일까요? 이 회장에 따르면, 바로 이들은 능숙한 말솜씨로 여러가지를 말하는데 대개 1인칭 화법이 아니라 3인칭 화법을 즐겨 쓴답니다. ‘내가 하겠다’가 아니라 ‘사원이라면 이렇게 해야 한다’는 식이지요.
▶부실기업을 보는 눈이 다릅니다 대우그룹의 성장사는 '부실기업 인수합병사(史)'와 비슷합니다. 김 회장은 과거 부실로 여겨졌던 전자, 기계, 중공업, 자동차 분야의 쓸만한 회사들을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인수한뒤 이를 정상화시킵니다. 김 회장은 평소 부하들에게 “이 바보들아, 부실기업을 헐값에 사서 조금만 노력하면 비싸게 팔 수 있는데 얼마나 좋은가”라고 말했답니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삼성그룹과 이 회장은 부실기업은 지뢰(地雷)같은 걸로 여겼습니다. 다만 이 회장은 우량회사와의 전략적 제휴의 중요성은 여러 곳에서 강조해 왔습니다.
▶개인적으로, 김 회장은 대(對) 정치-언론 관계에 적극적인 반면, 이 회장은 정치-언론 관계에 소극적입니다. 김 회장이 개인적으로 친하게 지낸 정치인과 언론인의 숫자는 적지않습니다. 전경련 회장 시절에는 출입기자들과 대화하는걸 무척 좋아했지요. 김 회장은 충만한 자신감으로 정치와 언론에도 자신의 영향력이 효과를 미칠 수 있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심지어 대권(大權) 욕망을 가져보기도 했지요. 그런 점이 대우 몰락의 한 원인(遠因)이 되었을 것입니다. 반면 이 회장이 개인적으로 친한 정치인과 언론인의 숫자는 얼마일까요? 서울사대부고 동기인 홍사덕(洪思德) 전 국회의원 정도를 제외하면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이 회장이 자발적으로 한 언론 인터뷰는 한번도 없었습니다.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김 회장이 ‘1인 체제 경영’과 ‘1인 운영 회사’를 강화시켜 왔다면 이건희 회장은 시스템 위주의 회사를 만드는데 주력해 왔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김 회장은 일벌레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김 회장은 지난 30년간 딸 결혼식과 아들 장례식 등 단 이틀만 쉬었다는 워크홀릭(workholic)입니다. 1996년의 경우 그는 20회의 해외출장을 통해 35개국을 다니며 257일을 해외에서 보냈다. 매일 3시간씩 비행기를 탄 셈입니다. 그와 함께 해외여행을 했던 최인호 작가는 “유격훈련을 받는 느낌이었다”고 말했습다. 오죽하면 수행비서도 김 회장의 체력을 따라가지 못해 평균 3년 단위로 바뀌었을까요. 골프도 이번 해외도피 기간중에 약간 배웠을 따름입니다.(부인 정희자(鄭禧子) 여사 소유로 경기도 포천에 아도니스 골프장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김 회장 자신은 골프 치는 걸 시간낭비로 알았답니다. 김 회장은 평소 “부평공장(30만평)을 한 바퀴 돌면 18홀을 도는데 왜 골프를 치느냐”고 반문했답니다. 하지만 이번 도피 기간중에는 골프를 몇번 쳤는데 좋았던 모양입니다. “이렇게 좋은 운동을 왜 이제서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했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손병두(孫炳斗) 전(前) 전경련 부회장은 “김 회장을 전경련 회장으로 모시고 있을 때 한번은 롯데호텔에서 업무를 상의하다가 새벽 2시반쯤 헤어져 집으로 돌아와 잠들었다. 조금 있다가 전화가 와서 받아보니까 김 회장이었다. ‘여기 전경련 회장실인데 지금 나올 수 있나?’라고 했다. 시계를 보니 새벽 5시반이었다. 그러니까 이 분은 거의 한숨도 자지 않은 것이다. 일에 관한 한 이 분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국내외를 바삐 오가는 그를 위해 비서가 하는 일은 한 가지였다고 합니다. 바로 밤 2시가 넘어 잠이 든 김 회장을 새벽 4시30분쯤 눈에 안약을 넣어 깨우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김 회장은 바이어와의 만남이 밤 10시쯤 끝나면 그때부터 내부회의를 주재했습니다. 비행기도 주로 밤에 탔습니다. 시간을 아끼고 호텔비도 절약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고 합니다. 이에비해 이 회장은 ‘오너의 결정이 없어도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시스템 제일주의 회사를 만드는데 공을 들였고, 어느 정도 성공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삼성이란 조직은 국내에서 가장 막강한 조직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회장도 김 회장에 못지않게 대단한 집중력을 가지고 있지만 워크홀릭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 회장은 김 회장과 달리 승마와 골프, 영화감상 등을 비롯한 다양한 취미와 여가활동을 한다는 차이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굳이 분류하자면 김 회장은 농경사회적-산업사회적 근면성에 집착한 반면, 이 회장은 상상력과 창의력을 중시하는 IT화된 근면성을 보다 중시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