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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2일 [연중 제32주일]
마태오 25,1-13
『더 높은 기도』: 나는 기도가 기대되는가?
오늘 복음은 ‘열 처녀의 비유’입니다.
현명한 처녀들은 여분을 가지고 있었고 미련한 처녀들은 챙겨놓지 못했던 ‘기름’은 무엇을
상징할까요? ‘성령’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적당할 것입니다.
신학에서 “성령과 기름 부음은 동의어로 쓰일 정도”(『가톨릭교회교리서』 695)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으로 붙은 등잔불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성령의 열매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참포도나무에 접목시켜 주신 그분께서는 우리가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갈라 5,22-23)와 같은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해”(736) 주십니다.
이것으로 미루어본다면, 미련한 처녀들은 사랑, 기쁨, 평화와 같은 감정들이 사그라졌을 때 성령을 받겠다고 기도하러 가는 사람을 의미하고, 사랑과 기쁨과 평화의 감정이
꺼지지 않도록 관리를 잘하는 신앙인을 의미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서 기도와 영성의 차이가 발생합니다.
기도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규칙적으로 하느냐’, ‘필요할 때만 하느냐’의 차이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사막 달리기 경주할 때 선수들은 일정 걸음을 내디딘 후에는 반드시 물을 마신다고 합니다.사막에서는 땀이 바로 증발해버리기 때문에 목마를 때만 물을 마신다면 탈수증으로 쓰러
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현명한 방법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탈수증에 쓰러진 선수들을 보면 물통에 물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마셔야 내 것이 됩니다. 만약 수험생 자녀를 위해 어떤 엄마가 100일 기도를 했다면 그 엄
마는 영성이 높은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필요할 때만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자녀의 시험과 상관없이 매일 그렇게 기도할 수 있다면 그제야 ‘기름’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 환경은 이렇게 기도의 수준이 높아지는 데 큰 방해를 주는 요소들이 많습니다.만약 미사를 몇 번 했는지, 묵주기도를 몇 번 했는지 보고해야 한다면 어떨까요?
이는 묵주기도에 천천히 젖어 드는 것을 방해하는 원인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복음 나누기 7단계’와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3분 묵상하고 무슨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요?
적어도 30분은 집중해서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묵상은 3분만 해도
된다고 여기게 만듭니다. 그리고 더욱 안 좋은 것은 기도가 ‘부담’이 되게 합니다.
묵주기도를 더 많이 바치기 위해 빨리 바쳐야 하고 묵상 나누기를 위해 묵상한 것도
아닌 자기 생각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러면 레지오도 힘들어지고 소공동체 모임도 부담스러워 나가지 않게 됩니다.
만약 기도가 행복한 것이라면 남이 시키지 않아도 혼자서 꾸준히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희 큰형은 한때 매일 악몽에 시달렸습니다. 가위에 눌렸고 심지어 악마에게
공격당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귀신 잡는 해병대, 그리고도 수색대 조교였던 형은 자존심상 주님께 도움을 청할 수는 없었습니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어느 날은 성호를 긋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날은 오랜만에 편히 잠들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다음 날도 성호를 긋고 잤습니다.
그런 습관이 수십 년이 지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형은 이제 성호경을 제대로 긋는 기도의 수준에 오른 것입니다.
이렇게 영성을 높여갈 수 있습니다.
가끔 자기를 키우던 가족이 먼저 죽자 반려견이 매일 무덤에 와서 슬퍼하다가 돌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이 정말 반려견이 주인을 사랑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한 번 왔다가 다시는 안 온다면 이는 그저 자기 위로일 뿐입니다.
그러나 매일 같은 시간에 온다면 정말 그분과 그분한테서 나오는 사랑이 그리워 오는
것입니다.
남편이 바람을 피워서 살기가 싫다는 한 자매에게 저는 매일 한 시간씩 성체조배를
해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경우 20~30%만 꾸준히 실천합니다. 그 자매도 매일 성체조배를 했습니다.그리고 1년 동안 꾸준히 그렇게 한 이유를 물었더니, 남편이 아닌 자신이 변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더 이상 남편이 밉지 않고 며칠 만에 집에 돌아와도 밥을 차려주고 이부자리를
마련해준다고 합니다.
미워할 때보다 기도할 때 행복하니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 자매는 성체조배 한 시간 할 정도로 영성이 높아진 것이고 그렇게 현명한 처녀로
인정받게 됩니다.
사실 기도는 힘이 드는 일입니다.
십자가에 자신을 봉헌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더라도 꾸준히 할 수 있는 이유는 그만큼 좋은 열매가 맺힘을 믿기 때문입니다.
매일 새벽 만나를 거두러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1월12일 [연중 제32주일(평신도 주일)]
마태오 25,1-13
성인(聖人)이란?
가장 큰 사랑으로 사소한 일상을 정성껏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세번째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Gaudete et Exultate)는 교황님께서 전 세계 모든 그리스도
인들에게 보내신 ‘성덕(聖德)에로의 초대장’입니다.
교황님께서는 ‘성덕’과 관련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핵심 정신인 ‘보편적 성화’를
다시 한 번 우리에게 강조하셨습니다.
“성인(聖人)의 길은 주교나 사제, 수도자의 전유물이 절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처지에서 거룩하고 흠없는 삶을 살도록
초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건조하고 평범한 신앙생활에 안주하지 않고 성인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성덕이란 예수 그리스도 삶의 신비들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이 부활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 특히 소외된 이들에 대한 친밀성, 그분의 가난,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을 본받아 실천하는 것이 성덕입니다.”
따지고 보니 주님께서는 세상 안에서 살아가시는 평신도들께 아주 적극적인 초대장을
보내고 계십니다.
성인이 되는 길도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각자 몸담고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서, 각자에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면서, 각자 고유한
벙법으로 성덕의 길을 걸어가시는 것입니다.
주방에서 일하시는 어머니들은 최선을 다해 요리하는 것이 성인이 되는 길입니다.
최선을 다해 도마질을 하는 것입니다.
배우고 익힌 방법에 따라 정성껏 지지고 볶는 것입니다.
가족들이 흡족해하는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요리의 달인’이 되는 것이 성덕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거기다 조금 더 보탠다면, 요리할 때 억지로, 짜증내며 하는 것이 아니라 환하고
기쁜 얼굴로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만드는 요리에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요리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렇게 요리하고 계신다면 그는 이미 훌륭한 성인 후보자입니다.
저는 가끔씩 우리 형제들 가운데, 성인 후보자가 있을까?
싶어서 형제들을 살펴봅니다.
정말 깜짝 놀란 일은? 100퍼센트는 아니지만 몇명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대체로 한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형제들은 보면 볼수록 더 보고 싶은 사람, 늘 자주 차 한잔 했으면 하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사람,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사람, 아마 이 시대 성인은 그런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거기에 조금 더 보탠다면 가장 큰 사랑으로 사소한 일상을 정성껏 살아가는 사람,
작고 보잘 것 없는 피조물 안에 깃든 하느님의 손길을 찾는 사람, 내게 호의적이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환한 얼굴로 살아가는 사람이 곧 오늘의 성인일 것입니다.
우리 시대 성인은 대단한 기적을 일으킨다거나 특별한 삶을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작은 일에 열중합니다.
그 무엇도 물리치지 않고 그 어떤 청도 거절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존재, 사건, 만남을 하느님께로 더 나아가는 계기로 삼습니다.
성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대단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와 완전 동떨어진 별세계 사람들도 아닙니다.
우리가 감히 범접하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사람들도 아닙니다.
대신 그들은 우리 보다 조금 더 기도에 집중했던 사람들, 그래서 우리보다 조금
더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우리보다 조금 더 긴 호흡을 지녔던 사람, 우리보다 조금 더 넓은 안목으로 세상을
바라봤던 사람들입니다.
우리보다 조금 더 겸손했고, 우리보다 조금 더 따뜻한 인간미를 지녔던 사람들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32주일 강론>
(2023. 11. 12.)(마태 25,1-13)
<열 처녀의 비유>
“그때에 하늘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마태 25,1-6)”
여기서 ‘열 처녀’는 ‘신부’가 아니라 신부의 ‘들러리’입니다.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라는 말은, 다섯은 머리가 나쁘고,
다섯은 머리가 좋았다는 뜻이 아니라, 겉으로 보기에만 성실하게 보이고 내적으로는
그렇지 않은 신앙인들과 겉으로나 내적으로나 항상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신앙인들이 섞여 있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산상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들에 연결됩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마태 7,24).”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마태 7,26).”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생활하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잘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인의 지혜’이고, 그렇게 하는 사람이 슬기로운 사람입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실행하지 않고 대충 살아가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열 처녀가 모두 ‘등’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모두 신앙인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기름’은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행하는 ‘삶’을 상징합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의 경우에, 등을 한 번 켤 수 있는 기름만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평소의 일상적인 신앙생활에서는 충실한 신앙인들과 잘 구분되지 않고 겉으로 보기에는 잘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들의 진짜 모습은 심판 때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 비유는 산상설교에 있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열 처녀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는 말은, 신랑의 도착이 늦어지는 상황을 나타내는, 즉 주님의 재림이 인간들의 생각보다 많이 늦어지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일 뿐이고, “깨어 있어라.” 라는 가르침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재림과 종말이 늦어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 일이 이루어지면 너무 빠르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으니 조금만 더 늦추어 달라고 간청할 사람들이 많을지도 모릅니다.
재림과 종말이 아니라, 개인의 임종으로 바꿔서 생각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시간의 주인’은 내가(우리가) 아니라
주님이시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하고 대답하였다.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5,7-13).”
실제 상황이라면 기름을 나누어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비유’이고, 사용된 표현들은 ‘상징’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고, 신앙생활을 잘하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기도해야 하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대신 해 줄 수는 없습니다.
회개와 신앙생활은 본인 자신이 스스로 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남의 덕’으로 구원받을 수는 없습니다.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것과 대신 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보속’을 대신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를 대신 해 줄 수는 없습니다.
‘신앙’의 경우에도, 믿음을 갖도록 도와줄 수 있고, 도와주는 것이 당연한데, 믿는 일 자체를 대신 해 줄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가족이라도 그렇게는 안 됩니다.>
“문은 닫혔다.” 라는 말은, 모든 것이 다 끝나버렸고,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음을 뜻합니다.
‘문’이라는 말에서 산상설교의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마태 7,7).” 라는 말씀을 연상할 사람이 있겠지만, 문을 두드려서 열리는 것은 모든 것이 끝나기 전의 일이고, ‘열 처녀의 비유’에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주님의 심판은 ‘한 번’이고, ‘불가역적인 일’입니다.
그래서 회개와 신앙생활은 문이 완전히 닫히기 전에 해야 하는 일입니다.
<문이 언제 닫히는지 우리는 모르기 때문에, 아직 완전히 닫히지 않은 ‘지금’ 해야 합니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라는 말은, “나는 너희를 모른다.” 라는 뜻이 아니라, “너희는 들어올 수 없다.” 라는 뜻입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종말과 재림과 심판의 날과 시간이 인간의 생각보다 훨씬 더 빨리 닥칠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