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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무게 앞에서(왕하4:1-7)-2024.11.17
모든 인생은 삶의 무게가 있습니다. 각 사람마다 무게가 다를 뿐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삶의 무게는 긍정적인 무게가 아니라 부정적인 무게를 말하는 것이지요. 인생의 고난이나 환난이나 어려운 일을 말합니다. 물론 좋은 일을 무게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각 사람의 평가는 삶의 무게 앞에 선 자세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삶의 무게를 대처하는 방식으로 그 사람을 평가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삶의 무게를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고 낙심하며 포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삶의 무게를 헤쳐가는 방식이 다양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무게를 덜어보려고 분주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믿음으로 해결하려 할 것입니다. 이른바 믿음의 분량에 따라 차이가 난다는 말입니다. 온전히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며 해결하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믿음을 가진 자라 할지라도 전혀 믿음과는 상관없는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당연히 그런 자들은 믿음이 전혀 없는 자일 것입니다. 우리 보기에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지요.
그래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보면 믿음이 있는 사람인지, 혹은 믿음이 없는 사람인지 분별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오늘 인생의 기구한 운명 앞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한 여인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이 여인은 자기 삶의 무게를 믿음으로 극복한 여인입니다. 선지자의 생도 중에 한 사람이 아내와 두 아들을 남긴 채 죽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그는 아주 가난한 신학생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아내와 두 아들에게 빚만 남긴 채 떠난 것입니다. 얼마나 가난했으면 한 병 기름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빚만이 아닙니다. 빚 때문에 아들들이 종이 될 판이었습니다. 채주가 두 아들을 취하여 종으로 삼겠다고 통보했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심각한 것이지요. 가난을 유업으로 받은 여인은 살길이 막막했습니다. 뾰족한 대안도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여인이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온 것입니다. 엘리사를 찾아온 여인의 믿음이 참 좋은 믿음인 것 같습니다. 일단 선지자를 찾아간 것 자체가 믿음이 있다는 긍정적 신호인 것이지요. 왜냐면 자기에게 다가온 운명을 타개하기 위해 여인은 얼마든지 다른 방도를 강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여인이 선지자를 찾아온 것 자체가 잘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믿는 자는 그래야 합니다. 선지자를 찾았다는 것은 하나님을 찾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대리인이기 때문이지요. 여인은 믿음도 좋은 여인이지만 심성도 고운 여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여인은 죽은 자기 남편의 믿음을 매우 높게 평가했습니다(1절). 자기 남편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였다는 말입니다. 자기에게 남겨준 유산은 없고 빚만 남기고 떠난 남편이 야속하고 원망스러울 수 있었을 테지만 여인은 자기 남편의 믿음을 존중히 여겼습니다. 듣기는 쉬우나 행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솔직히 이런 상황에서 못된 여인이라면 신세 한탄을 하든지 남편의 섭섭함이나 험담을 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여인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시쳇말로 참 착한 아내였다는 것이지요. 물론 우리는 여인을 칭찬하고 싶지 않습니다. 여인이 가진 믿음을 소개하고 싶은 것이지요. 여인의 믿음은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를 헤쳐 나가는 동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여인의 믿음을 통해 우리 믿음을 점검해 보려고 합니다. 여인은 어떻게 자기 삶의 무게를 감당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부르짖었습니다
자기 인생의 무게 앞에서 여인은 먼저 선지자를 찾았습니다. 선지자를 찾아간 것은 정말 잘한 일입니다.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바르게 분출했기 때문입니다. 여인은 선지자에게 부르짖었습니다. 부르짖었다는 말은 고민을 토로한 것이지요. 자기 인생의 무게를 선지자 앞에 다 내려놓은 것입니다. 본문의 분위기로 볼 때 자기 안에 있는 인생의 고충들을 상담했던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아마도 엘리사는 여인의 심정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죽은 사람이 가난한 선지자의 생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구보다 그의 남겨진 가족들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고 살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선지자의 마음이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과부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긍휼히 여기시는 세 부류의 사회적인 약자들이 있습니다.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입니다. 그런 과부가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온 것입니다. 당시 엘리사는 어두운 시대를 밝혀주는 하나님이 특별하게 쓰시는 종이었습니다. 엘리사는 다양한 기적들을 베풀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지요.
본 장에는 엘리사가 행한 대표적인 기적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수넴 여인에게 아들을 주는 기적(8-17절)과 그 아들을 살려낸 기적(18-37절), 음식물의 독을 제거한 기적과 보리떡 이십개로 무리를 먹이고도 남은 기적(42-44)등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했습니다. 이번에도 선지자는 기적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드러냈습니다. 사실 엘리사의 기적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고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엘리야의 하나님이 엘리사의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엘리사에게 선지자의 아내가 찾아간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대리인을 찾아간 것이기에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지요. 자기를 찾아온 여인에게 선지자가 묻습니다. 그의 질문은 두 가지입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해주기를 원하느냐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네 집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첫 번째의 질문은 여인의 소원을 말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여인 안에 들어있는 소원을 밖으로 끌어내는 작업을 의미합니다. 선지자는 여인의 어려움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을 통하여 자기 소원을 드러내게 하시는 것이지요.
이는 마치 주님이 여리고에서 자기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울부짖던 두 소경들에게 물으시던 질문과 흡사합니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마20:33)는 질문 말입니다. 주님이 그들의 소원을 모르시겠습니까? 알지만 그들의 입을 통한 고백을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야 소원이 극대화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구하지 않으면 어떤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구하는 이에게 주십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백이 중요한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은 네 집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는 사모함이 있느냐는 질문이지요. 소원과 사모함은 다릅니다. 소원은 있으나 사모함이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회 안에 믿음 생활을 잘하려는 소원을 가진 자들은 많습니다. 그런데 믿음 생활을 잘하기 위한 사모함이 없는 자들이 많습니다. 공부를 잘하려는 소원을 가진 학생들은 많으나, 공부를 열심히 하려는 사모함이 없는 학생들이 부지기수라는 말이지요. 결국 소원은 사모함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모함이 없는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는 소원일 뿐입니다.
소원에 대한 사모함이 있는 자는 자기 가진 것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습니다. 자기 것을 내려놓지 않은 채 자기 소원을 이루려는 것은 헛된 소망입니다. 소원을 이루려는 자는 간절함이 있습니다. 사모함이 있다는 말이지요. 사모함을 가진 자는 어떤 자존심도 없습니다. 자기 소원을 이루려는 강한 열망은 사모함을 통해 성취되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여인의 형편을 뻔히 알면서도 네 집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말하라고 묻습니다. 이는 여인의 사모함을 극대화시키려는 것이지요. 쉽게 말해서 여인의 마지막 자존심 같은 것을 내어놓게 하시는 것이지요. 그것을 기적의 불쏘시개로 사용하려는 것입니다.
그런 예는 열왕기상 17장에 나오는 엘리야를 통해서도 발견됩니다. 이스라엘 땅에 삼년반 동안 가뭄이 들었습니다. 그때 엘리야가 시돈에 속한 사르밧에 있는 가난한 과부의 집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물을 달라 합니다. 극심한 가뭄 속에서 한 방울의 물도 귀할진대 한 잔의 물을 달라니요? 그것만이 아닙니다. 뻔뻔스럽게도 떡 한 조각을 가져오라고 합니다. 그러자 여인이 자기 형편을 고합니다. 자기는 떡은 없고 통에 가루 한 웅큼과 병에 든 기름 조금이 있다고 말입니다. 오죽하면 나뭇가지를 주어다가 자기 아들과 마지막 음식을 만들어 먹고 죽을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그것으로 자기를 위해 작은 떡을 만들어오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야속한 미션이 아닙니까? 주의 종이라는 사람이 이렇게도 과부의 사정을 모른단 말입니까? 하지만 엘리야는 그것으로 축복의 씨앗을 만들고 싶었던 것입니다. 결국 과부의 순종으로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는 기적을 보았습니다. 이는 그녀의 가진 것을 축복의 마중물로 사용하시려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였던 것이지요. 본문의 엘리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인의 마중물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엘리야 선지자 역시 여인이 가진 전 재산 한 병의 기름을 기적의 마중물, 축복의 마중물로 사용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무에서 유로 하십니다. 없는 것에서 있게 하신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유에서 유로 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있는 것으로 일하신다는 말입니다. 절대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늘에 올라가서 별을 따오라고 시키지 않습니다. 없는 돈을 대출해서라도 하나님께 바치라는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아니하십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말입니다.
지금 우리 손에 들려진 것으로 역사하시기를 원하신다는 말입니다. 선지자는 여인의 소원을 이루기 위한 마중물이 필요함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네 집에 무엇이 있느냐고 질문하신 것입니다. 비록 여인이 가진 것이라고는 한 병의 기름밖에 없었지만, 기름으로 그 가정을 축복하시려는 선지자의 의중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선지자의 그런 질문을 통해 엿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선지자에게 이 문제를 해결해 주고 싶은 강렬한 의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선지자에게 그런 의지가 없었다면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질문은 선지자의 공감 능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인의 문제에 선지자는 절대적인 공감을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유능한 상담자는 공감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내담자의 마음을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수용하려는 공감 능력이 있어야 유능한 상담자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라포형성이라고 말합니다. 라포(Rapport)는 상호간의 신뢰와 친근감으로 이루어진 인간관계를 의미합니다. 일종의 공감대인 것이지요. 예수님은 이런 공감 능력이 매우 탁월하셨습니다.
(2) 적극적으로 순종했습니다
선지자를 찾아가 부르짖은 여인의 반응을 보십시다. 여인은 선지자의 질문에 고분고분 대답했습니다. 그만큼 여인이 갈급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희한한 처방을 내립니다. 믿음이 없는 자라면 그런 기대를 했을는지 모릅니다. 선지자가 얼마간의 돈을 주든지, 혹은 다른 방법으로 자기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는 확언을 받아내든지 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자기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기를 원하는 것이지요. 그냥 아무런 자기들의 수고로움이 없이 말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방식은 그렇지 않습니다. 반드시 우리의 작은 헌신이나 희생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영적인 법칙은 심는대로 거둔다는 말입니다.
선지자가 내린 처방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선지자는 다짜고짜 빈 그릇을 빌어 오라는 것입니다. 이집 저집을 다니면서 빈 그릇을 빌려오라는 것이지요. 할 수만 있거든 많이 빌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빈 그릇으로 무엇을 하려는지 여인의 머리는 복잡했을 것입니다. 아니면 이웃에게 다니면서 그릇을 빌리는데 자존심이 상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여인의 형편을 아는 이웃들이 그릇을 빌리는 여인을 향하여 갑자기 왠 빈 그릇이냐고 자존심 상한 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미션은 여인의 믿음을 시험해 보려는 의도가 분명합니다. 여인은 묻지도 않고 순종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어 답을 알고 있기 때문에 궁금증이 덜하지만 당시 여인의 궁금증은 대단했을 것입니다. 도대체 빈 그릇을 빌려오라는 의도가 무얼까라는 궁금증 말입니다. 설마 빈 그릇에 기름을 채워주시리라고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녀는 선지자의 말에 아무 말 없이 순종한 것입니다. 그녀의 소원과 사모함이 동시에 작동한 것이지요. 분명한 것은 여인의 믿음만큼 그릇을 빌려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미션은 여인의 믿음만큼 나타날 것입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두 아들과 함께 빈 그릇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으라는 것입니다. 문을 닫으라는 말은 문제에 집중하라는 것이지요. 믿음은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문을 닫으라는 말씀은 은혜의 특성을 가르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은혜는 비밀스러운 특징을 갖고 있거든요. 그래서 은혜는 받은 자만 압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으려면 은혜에 집중해야 합니다. 은혜를 방해하는 모든 것을 차단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문을 닫으라는 것입니다. 은혜에 집중하라는 말이지요.
그런 다음에 모든 그릇에 기름을 부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차는 대로 옮기라는 것이지요. 당시 분위기로 볼 때 그 자리에 선지자는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면 기름이 그치자 여인이 하나님의 선지자에게 나아가서 상황을 고하였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7절). 그것은 은혜의 효과를 보다 더 크게 상승시키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현장에 선지자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인은 어떤 기름을 부었을까요? 아마도 자기 집에 그녀가 가지고 있던 한 병의 기름을 부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기적의 마중물로 사용하셨던 것이지요. 그런데 부어도 부어도 기름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기름이 떨어진 것은 그릇이 다했기 때문입니다. 기름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그릇이 떨어진 것이지요. 이것이 은혜입니다. 사실 기름은 하나님의 은혜, 성령의 능력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그릇은 각 사람의 상태를 의미하지요. 그런 차원에서 볼 때 기름이 떨어질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은혜는 절대 고갈되지 않습니다. 다만 준비된 그릇이 없으니까 기름을 받을 수 없는 것이지요. 그릇이 작으니까 기름을 채울 수 없는 거예요. 결코 잊지 마십시오. 기름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그릇이 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여인은 자기가 빌려온 그릇만큼 기름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입니다. 자기가 준비한 그릇만큼 기름을 채울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원리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릇을 많이 준비하지 않습니다. 그릇만큼 채워지는 것이 당연한 줄 알면서도 말입니다.
여인은 그릇을 빌렸습니다. 그리고 빈 그릇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았습니다. 그리고 기름을 그릇만큼 채웠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발달단계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믿음의 과정이 이렇다는 것입니다. 점진적으로 믿음이 발달하면서 실체가 드러나는 것이지요. 이른바 빈 그릇을 빌라는 것보다 문을 닫으라는 말씀이 더 진보적이고, 문을 닫으라는 말보다 차는 대로 채우라는 말이 더 진보적입니다. 과부는 이 모든 지시를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채우심을 경험한 것입니다.
(3) 채우심을 경험했습니다
여인은 초자연적인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그릇만큼 채워주심을 경험한 것이지요. 준비된 그릇에 기름이 채워졌습니다. 참으로 신비로운 체험이었을 것입니다. 오죽하면 여인은 자기 아들에게 다른 그릇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그것은 빈 그릇마다 채워지는 기름을 보면서 아쉬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인은 설마 이럴 줄 알았다면 좀 더 열심히 발품을 팔아서라도 더 많은 그릇을 준비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때가 있습니다. 여인은 그 상황이 무척 아쉽고 후회스러웠을 것입니다. 선지자가 자기에게 귀뜸만 해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상상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여인은 자기 아들에게 다른 그릇이 없느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솔직히 다른 그릇이 없음을 아들보다 여인이 더 잘 알고 있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아들에게 그렇게 질문한 것은 회한의 질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빈 그릇을 좀 더 많이 빌려서 준비할 걸’이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아들이 다른 그릇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기름이 그쳤습니다. 얼마나 아쉬웠을까요? 이처럼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바로 지금이 은혜받을 때임을 교훈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고린도후서6장2절입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말입니다. 감사하옵는 것은 우리가 사는 지금이 우리가 은혜 받기 가장 좋을 때라는 말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때가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중단된 때는 한번도 없었습니다. 누군가에는 은혜의 문이 닫혀있을지라도 누군가에게는 은혜의 문이 열려 있었다는 말입니다. 다만 이렇게 풍요로운 은혜의 시대는 지금이 가장 적기라는 말입니다. 장차 하나님의 은혜가 완전히 닫히는 때가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은혜 받을만한 때에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은혜받을 그릇을 준비해야 합니다.
기름이 그치자 여인은 곧장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에게로 나아갔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대한 보고와 감사의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일의 되어짐을 고했을 테지요. 선지자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의 고백을 들은 후에 기름을 처리하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그 기름을 팔아서 빚을 갚고 남은 것을 생활비로 충당하라는 것입니다. 솔직히 그 기름이 얼마나 되었는지, 혹은 그 기름이 그녀의 삶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분명한 것은 벼랑 끝에 선 과부의 삶을 하나님이 책임져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녀의 삶의 무게를 하나님이 대신 져주셨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본문을 통해 우리 삶의 무게를 어떻게 지고 살아야 할지를 생각해 봅니다. 비록 내 삶의 무게라도 나 혼자 짊어지고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가는 것처럼 낑낑대지 마시고,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밀어주시고 나의 앞에서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나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이 나의 삶을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되셔서 내게 준비하신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은혜 주시는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은혜 주시는 하나님이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그 하나님이 지금 내 안에 나를 성전삼고 계십니다.
그 은혜가 항상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내게 주실 은혜는 지금 받지 않으면 영원히 받지 못할지 모릅니다. 오늘의 은혜는 오늘 족하고, 내일의 은혜는 내일에 족한 것입니다. 은혜 주시는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너무 아쉽지만 오늘의 은혜는 오늘로 마감입니다. 여인에게 주시는 은혜는 그날로 마감된 것입니다. 또 다시 다른 날을 잡아서 빈 그릇을 준비한다고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물론 또 다른 은혜가 준비되어 있을 테지만요. 빈 그릇을 기름으로 채우시는 은혜는 그날에 족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본문의 여인을 통해 다시 한번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계기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면 가장 먼저 은혜에 대한 소원과 사모함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은혜를 받을만한 그릇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런 후에 은혜에 집중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받은 은혜에 대해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또 다른 은혜가 부어질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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