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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08~214) 중앙SUNDAY 김명호(57세)교수는... 성공회대 중국학과 교수로 있다. 경상대·건국대 중문과에서도 가르쳤다. 1990년대 10년 동안 중국 전문서점인 싼롄(三聯)서점의 서울점인 ‘서울삼련’의 대표를 지냈다. 70년대부터 홍콩과 대만을 다니며 자료를 수집한 데다 ‘서울삼련’ 대표를 맡으며 중국인을 좀 더 깊이 알게 됐고 희귀 자료도 구했다 <208>소련·북한, 신중국 선포 1주년에 ‘6·25 참전 요망’ 전보 |제209호| 2011년 3월 13일
▲1950년 10월 5일 속개된 중공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한반도 출병을 주장하는 펑더화이(서있는 사람). 마오쩌둥이 기록을 못하게 하는 바람에 후일 화가 가오촨(高泉)이 참석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당시의 모습을 재현했다. [김명호 제공]
1950년 10월 1일, 중국은 신중국 선포 1주년을 맞았다. 이날 마오쩌둥은 경축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선물을 받았다. “한국전 출병”을 건의하는 스탈린과 “3·8선이 위험하다. 우리 힘으로는 위기를 극복할 능력이 없다. 조선땅에 들어와 작전을 펴 달라”는 북한 수상 김일성의 전보였다.
그날 밤 마오는 중공 동북국 서기 가오강(高崗)을 베이징으로 호출했다. “한국군 제3사단이 북진을 시작했다”는 총참모장 녜룽전(聶榮臻)의 보고를 접한 직후였다. 가오강은 자타가 공인하는 마오의 후계자였다. 동북 인민정부 주석과 동북군구 사령관까지 겸한 실질적인 동북왕(東北王)이었다. 거의 비슷한 시간에 동북 변방군 사령관 덩화(鄧華)도 “출동 준비를 완료하고 대기하라”는 마오의 급전을 받았다.
◀우리에게 『아리랑』의 저자 님 웨일스로 더 알려진 미국 여류작가 헬렌 포스터는 펑더화이와 사진 한장 찍는 것이 소원이었다. 항일전쟁시절 옌안(延安)에서 헬렌 포스터의 요청에 응한 펑더화이.
이튿날 오전, 마오는 중공 중앙 서기처 확대회의를 소집했다. 출병문제를 자유토론에 부쳤다. 신중론이 우세하자 10월 4일부터 정치국 긴급회의를 열자며 회의를 끝냈다. 회의장을 나서는 총리 저우언라이를 불러 펑더화이(彭德懷)에게 비행기를 보내라고 지시했다. 당시 펑은 시안에 있었다.
10월 4일 오후 3시, 중난하이 이넨탕(頤年堂·이년당)에 마오쩌둥, 주더, 류샤오치, 저우언라이, 런비스 등 5대 서기를 비롯해 가오강, 천윈(陳雲), 동비우(董必武), 린보취(林伯渠), 장원텐(張聞天), 린뱌오(林彪), 덩샤오핑(鄧小平), 랴오수스(饒漱石), 녜룽전, 양상쿤(楊尙昆), 후차오무(胡喬木)가 자리를 잡았다. 이 정도면 전 중국이 모인 거나 다름없었다. 워낙 사안이 사안인지라 죽음을 눈앞에 둔 런비스까지 참석했을 정도였다. 실제로 2주 후에 사망했다.
회의 참석자들은 발언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지만, 내심 출병을 반대했다. 펑더화이는 기상관계로 회의 시작 한 시간이 지나서야 도착했다. 펑이 나타나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마오가 입을 열었다. “조선 출병에 유리한 점과 불리한 점을 토의하는 자리다. 각자의 견해를 발표하자.” 뭐든지 기록하기를 좋아하는 저우언라이와 녜룽전이 받아 쓸 준비를 하자 “기록도 중요하지만, 하고 싶은 말을 못할 수가 있다”며 제지했다.
린뱌오가 “출병 불가론”을 폈다. “우리는 20년간 전쟁만 해왔다.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해방전쟁도 끝나지 않았고 해방구의 토지개혁은 시작도 하지 않았다. 원기를 회복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미국과는 힘을 겨뤄본 적이 없다. 일단 출병하면 언제 끝날지 모른다. 전쟁은 끝이 보여야 한다. 참전보다는 동북의 군사력을 강화시키는 편이 우리에게 유리하다.” 이어서 결론을 내렸다. “조선은 인구가 몇 백만밖에 안 된다. 우리는 5억이다. 몇 백만 명을 구하기 위해 5억이 나선다는 것은 계산상으로 맞지 않는 일이다. 어쩔 수 없다면 몰라도 피하는 게 상책이다.” 다들 수긍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린뱌오는 한국은 물론이고 중국 인구도 잘 몰랐지만, 참석자 모두 그런 건 문제로 치지도 않았다.
다음 날 속개된 회의에서 펑더화이는 한반도 출병을 주장했다. “어차피 미국과는 한판 겨룰 수밖에 없다. 저들이 압록강 변에 포진하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온갖 구실을 내세워 국경을 교란시킬 것이 뻔하다. 늦게 싸우는 것은 일찍 싸우는 것만 못하다. 전쟁이 끝나면 다시 건설하자.”
소식을 기다리던 스탈린은 저우언라이의 소련 방문을 요청했다. 저우는 회의 결과를 보지 못하고 모스크바로 향했다. (계속)
<209>마오쩌둥 “조선은 바뀔 수 없는 혈맹” 참전 결정 |제210호| 2011년 3월 20일
▲한국전에 참전하기 위해 베이징을 떠나며 노모의 전송을 받는 철도 노동자 웨이즈제(魏志杰) [김명호 제공]
저우언라이가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 스탈린은 크리미아의 별장에서 휴양 중이었다. 저우는 린뱌오와 함께 스탈린이 있는 곳으로 갔다. 정치국원들을 대동하고 기다리던 스탈린이 운을 뗐다. “김일성의 용감한 모험은 실패했다. 남한에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이 많고 군사력도 우세하다고 큰소리쳤다. 나는 그의 말만 믿고 남침에 동의했다. 미군의 상륙작전으로 현재 위기에 처해 있다.”
스탈린은 소련의 참전이 불가능한 이유를 설명했다. “우리는 북한에서 병력을 철수한다고 이미 발표해 버렸다. 전쟁터에서 미군과 충돌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대신 공군을 동원해 엄호하겠다. 그것도 적 후방까지 들어가는 것은 곤란하다. 전투기 추락으로 조종사가 포로가 되거나 시신이 발견되면 국제적으로 파장이 크다.”
중국은 문제될 것이 없다면서 두 가지 이유를 들었다. “중국인과 조선인은 머리 색깔이 똑같고 생긴 게 비슷하다. 구분하기가 힘들다. 중국과 미국은 외교관계가 없다. 뭘 하건 행동이 자유롭다.” 이어서 “중국이 출병하면 소련은 의무를 다하겠다. 치타와 남부 지역에 비행기·대포·탱크·차량·총기·탄약 등을 운반해 놨다. 당장 동북으로 이동이 가능하다”며 종목, 수량, 전달 방법까지 설명했다. 통역을 위해 배석했던 스저(師哲·마오쩌둥의 4대 비서 중 한 사람. 소련과의 연락을 도맡아 했다)는 후일 회고록에서 “스탈린은 소련과 북한 사이에 합의가 끝난 사항을 중국이 받아들이기만 기다리는 사람 같았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마오쩌둥의 장남인 베이징 기계창 부서기 마오안잉(毛岸英)도 참전을 자원했다. 1950년 10월 단둥(丹東)에서의 마지막 모습(뒷줄 왼쪽 둘째). 11월 25일 공습으로 사망했다.
저우언라이는 출병이 불가능한 이유를 장시간 설명했다. “중국인들은 오랜 세월을 전쟁의 고통에 시달렸다. 이제 겨우 회복과 건설이 시작됐다. 다시 전쟁에 뛰어들면 빈곤과 고통을 개선할 방법이 없다. 경제 건설은 입에 담을 수도 없다. 전쟁은 애들 유희가 아니다. 일단 발을 담그면 빠져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거둬들이기가 더 힘들다.”
스탈린은 시종 냉정하고 침착했다. “중국이 출병을 안 하면 북한은 길어야 5일에서 일주일밖에 버티지 못한다. 전몰 당하느니 하루라도 빨리 철수시켜 후일을 기약하는 게 낫다. 소련은 북한과 접해 있는 구간이 짧다. 철수 병력 대부분이 중국의 동북 지역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다.
적들이 한반도를 점령하면 미군이 압록강 변에 포진한다. 공중에서 폭탄을 퍼부어대면 내륙은 그렇다 치더라도 동북은 편할 날이 하루도 없다. 그런 와중에 건설이 가능할지 의문”이라며 북한군을 한반도에서 철수시키는 문제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주력 부대와 무기, 물자, 간부들을 일단 동북으로 철수시키면 기회를 봐서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기에 유리하다. 노약자와 부상병들은 소련 경내로 들어오게 하자.” 린뱌오는 유격전에 관심이 많았다. 북한군을 한국의 산악지대에 분산시키자고 했다. 스탈린은 “폭이 좁고 길쭉한 지역이라 활동에 한계가 있다. 한 차례만 수색해도 소멸된다”며 묵살했다. 오후에 시작한 회의는 이튿날 새벽까지 계속됐다. 상대방의 의중을 탐색하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저우언라이가 소련으로 출발한 이틀 후 마오쩌둥은 참전을 결정했다. “많은 동지들이 출병을 반대한다.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일이 있다. 항일전쟁과 해방전쟁을 치르는 동안 조선 인민과 당의 동지들은 우리의 혁명을 위해 피를 흘렸다. 조선은 수백, 수천 가지 이유를 들이대도 바뀔 수 없는 혈맹이다. 미국은 우리보다 대포가 많다. 그러나 역사는 대포로 쓰는 것이 아니다. 저들이 원자탄을 쓰면 우리는 수류탄으로 맞서자. 우리가 모른 체하면 일본이 중국을 침략했던 길로 미국이 들어온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주먹 한 방 날려서 백 개가 날아오는 것을 면하자.” (계속)
<210>“조선 출신 해방군 보내달라”…김일성, 남침 직전 요청 |제211호| 2011년 3월 27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피(血)는 피로 갚아야 한다’는 등 출병을 요청하는 벽보가 도시·농촌 할 것 없이 난무했다. 1950년 겨울 베이징 교외 난위안쩐(南苑鎭). [김명호 제공]
마오쩌둥의 한국전 참전은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소련과 북한의 등쌀에 떠밀린 흔적이 역력하다. 1949년 3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무력으로 한반도를 통일하겠다”는 계획을 털어놓고 지지를 희망했다. 스탈린은 거절하는 대신 “남한 군대가 싸움을 걸어오면 반격을 핑계 삼아 38선을 넘어버려라. 단 중국의 지지가 있어야 한다”고 충고했다.
김일성은 스탈린이 시키는 대로 했다. 같은 해 5월 초, 마오쩌둥의 속내를 떠보기 위해 노동당 중앙위원 김일(金一)을 비밀리에 베이핑(北平·10월 1일 신중국 선포 후에 베이징으로 개명)으로 파견했다. 김일을 만난 마오는 김일성의 구상을 반대하지 않았지만 동의하지도 않았다. 남한의 뒤에는 미국이 있었다. 전쟁이 벌어지면 북한은 상대가 안 됐다. 중국에 지원을 요청할 것이 뻔했다. 내전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병력을 동북으로 이동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반도에 관심 가질 겨를도 없었다. 대만과 티베트 문제, 서남지역의 국민당 잔존 세력과 토비(土匪) 토벌, 토지개혁 등 생각만 해도 골이 지끈지끈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마오가 말했다. “해방군 주력의 대부분이 남쪽에 있다. 미국이 개입했을 경우 신속한 지원이 불가능하다.” 간단한 대화였지만 여건만 되면 지원을 고려해 보겠다는 의미였다.
◀마오쩌둥의 입에서 “항미원조(抗美援朝)는 집과 나라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전국적으로 관제 시위가 줄을 이었다. 1950년대 초 광둥(廣東)성 광저우(廣州)
며칠 후 두 사람은 서쪽 교외에 있는 향산(香山)의 쌍청별야(雙淸別墅)에서 다시 만났다. 북한 인민군 정치부 주임을 겸하고 있던 김일은 “인민군 간부를 배양해야 한다”며 중국 인민해방군 소속 조선 국적 병사들을 귀국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마오쩌둥은 토를 달지 않았다.
남의 나라 땅에서 북벌전쟁, 항일전쟁, 국·공전쟁을 거치며 단련된 전사들은 영문도 모른 채 조국땅을 밟았다. 몇 개월 후 동족상잔의 비극에 투입되리라는 것을 과연 알기나 했을지 궁금하다. 한국전쟁 초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이들의 귀국은 남침 2개월 전인 이듬해 4월 중순, 마지막 병력이 원산항에 도착하는 날까지 계속됐다. 3개 사단을 꾸릴 수 있는 규모였다.
중국과 소련은 9월 말에도 무력통일을 지지해 달라는 북한의 요청을 받았다. 양측은 짜기라도 한 것처럼 거절했다. 1950년 1월 모스크바에서 ‘중·소동맹호조조약’ 체결을 위한 회담이 진행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중국과의 신조약이 체결되면 소련은 중국의 동북지역에서 누리던 권익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스탈린의 시선이 한반도를 향했다.
1월 19일 스탈린은 “김일성이 무력으로 조국통일을 실현하겠다며 스탈린 동지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평양 주재 소련 대사관의 전보를 받았다. 11일 후 스탈린은 북한의 남침을 승인하면서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불렀다. 한반도에 대한 전략을 공격으로 전환하겠다며 당부를 반복했다. “직접 만나보니 마오쩌둥은 동북아 문제에 정통한 사람이다. 그의 의견을 구해라. 중공의 동의가 없으면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만일 미국이 간여한다면 소련은 조선을 도울 수 없다. 중국 외에는 의지할 곳이 없다. 마오에게는 당분간 비밀로 해라.”
3월 중순 김일성은 베이징 주재 북한대사 이주연(李周淵)을 통해 마오쩌둥 면담을 요청했다. 마오도 집히는 게 있었던지 이주연에게 구두로 전달했다. “통일에 관해 의논할 문제가 있으면 극비리에 와라.”
마오쩌둥은 대국의 최고 지도자답게 의심이 많았다. 중난하이(中南海)에 거주하는 소련어 통역을 일주일간 톈진(天津)으로 놀러 보낸 후 김일성을 만났다. (계속)
<211>마오쩌둥, 외신 통해 북한 남침 사실 알아 |제212호| 2011년 4월 3일
▲1951년 4월, 중국인민부조위문단(中國人民赴朝慰問團) 단장 랴오청즈(廖承志 왼쪽 첫째 당시 통전부 부부장 겸 신화사 사장)와 부단장 마오둔(茅盾 오른쪽 첫째 당시 국무원 문화부장) 일행을 북한군 총사령부로 초청한 김일성과 박정애. [김명호 제공]
1950년 5월 13일 밤, 마오쩌둥을 만난 김일성은 “소련이 남침에 동의했다. 직접 중국 측에 전달하라고 해서 왔다”면서 유창한 중국어로 지지를 요청했다. 마오는 즉답을 피했다. 음식 얘기로 시간을 끌며 김일성이 눈치채지 않게 저우언라이를 소련대사관으로 파견했다. 거짓말인지 아닌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이튿날 소련 측에서 답변이 왔다. “조선 동지들과의 회담에서 빌리프(스탈린) 동지와 그의 친구들은 조선인들의 계획에 동의했다”면서 중국을 난처하게 만들고도 남을 내용을 첨가했다. “이 문제는 중국과 조선의 동지들이 공동으로 해결해야 한다. 중국 동지들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토론을 통해 해결 방법을 찾아라. 상세한 내용은 조선 동지들을 통해 듣도록 해라.”
마오는 그동안 자신을 따돌린 스탈린의 처사가 괘씸하고 불쾌했지만 도리가 없었다. 5월 15일 김일성과 다시 만난 자리에서 “속전속결로 끝내라. 생산시설만 집중적으로 파괴하면 된다. 대도시를 점령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고 충고했다. “미국이 참전하면 우리도 군대를 보내 돕겠다”며 김의 자존심을 슬쩍 건드렸다. 마오 몰래 소련으로부터 전쟁물자를 공급받은 김은 “동의한 것만으로 족하다”며 자리를 떴다.
김일성이 베이징을 떠난 다음 날 마오는 스탈린이 보낸 전보를 받았다. 의견을 구한다며 단둥(丹東)에서 선양(瀋陽)까지 인민해방군 몇 개 사단을 배치해 주기를 희망했다. 마오는 그날로 답전을 보냈다. “해방군의 동북 투입은 당장이라도 가능하다. 그간 전쟁을 치르느라 소모가 컸다. 소련 측에서 장비와 무기만 제공한다면 병력은 전혀 문제될 게 없다.” 스탈린도 “장비는 우리가 해결하겠다. 단, 하루라도 빨리 부대를 동북의 동남지구에 배치하기 바란다”고 화답했다.
6월 25일, 마오는 오후가 되어서야 프랑스 통신사를 통해 북한군의 남침 소식을 들었다. 김일성의 정식 통보는 사흘 후, 그것도 베이징 주재 북한 무관을 통해서였다. 같은 날, 스탈린이 보낸 전보도 받았다. “김일성은 용기가 대단한 사람이다. 그를 설득시킬 수가 없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결심과 믿음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중공 총서기였던 후야오방(胡耀邦)은 당시 마오의 충격이 얼마나 컸던 지를 회고록에 남겼다. “주석은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고 면도도 하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나서야 비로소 수염을 깎았다.”
6월 28일,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했다. 소식을 접한 마오쩌둥은 걱정이 태산 같았다. 인근에 사는 비서 스쩌(師哲)에게 심경을 토로했다. “김은 전략과 책략이 틀려먹었다. 성질이 급하다 보니 출병 시기도 잘못 잡았다. 기반이 없는 남쪽으로 더 내려갈까 봐 눈을 붙일 수가 없다. 인천 쪽은 미군이 완전히 철수하지 않았다. 제주도도 마찬가지다. 미군이 서쪽으로 상륙하면 북한군은 허리가 잘린다. 그러면 아주 위험해진다.”
마오는 김일성에게 “우리의 경험에 의하면 잠시 쉬었다가 다시 공격하는 것이 현명하다”며 잠시 호흡을 가다듬으라고 건의했다. 김은 마오의 말을 듣는 듯했지만 결국은 무시했다.
북한군이 남쪽으로 밀고 내려가자 마오쩌둥도 서서히 참전 준비에 착수했다. (계속)
<212>“6·25 출병은 경솔”… 린뱌오, 작심하고 마오에게 직언 |제213호| 2011년 4월 10일
▲전황 보고차 귀국하는 일선지휘관들을 환송하는 중공군 총사령관 겸 정치위원 펑더화이(왼쪽 첫째). [김명호 제공]
한반도 출병을 준비하던 마오쩌둥은 지휘관 선정을 서둘렀다. 저우언라이와 둘이서 류보청(劉伯承), 린뱌오(林彪), 덩샤오핑(鄧小平), 가오강(高崗), 천이(陳毅), 뤄룽환(羅榮桓) 등을 놓고 심사숙고 했다.
저우언라이는 소련에서 군사학을 공부했고, 실전경험이 풍부한 류보청을 추천했다. 마오는 생각이 달랐다. 난징(南京)에 군의 최고학부를 설립하고 류보청에게 관리를 맡길 생각이었다. 당시 해방군의 고급 지휘관 중에는 거칠고 교양 없는 사람이 많았다. 마오는 “큰 재목은 큰일에 써야 한다”며 덩샤오핑도 제외시켰다. 천이는 대만 해방을 준비하느라 주둔지인 화둥(華東) 지역을 떠날 수 없었고, 뤄룽환은 겉모습만 멀쩡했다. 잔병이 많았다. 가오강(高崗)은 동북(東北)의 왕(王)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후방에 버티고 있어야 군수물자의 원활한 공급이 가능했다.
1950년 9월 초 마오와 저우언라이는 우한(武漢)에 있는 린뱌오를 호출했다. 린뱌오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 튀어 나왔다. “직언을 용서해라. 미국 군대가 우리 경내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군대는 함부로 움직이는 게 아니다. 출병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경솔하다. 미군이 압록강 연안에 배치된다 해도 나쁠 게 없다. 가까이 온 적은 협상하기가 쉽다. 남북한이 싸우건 말건 그건 자기들 문제다. 단, 미 제국주의가 동북을 침범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한바탕 붙는 수밖에 없다. 그때는 내가 직접 신발끈을 동여 매겠다.”
마오는 화들짝 놀랐다. 저우를 힐끔 쳐다봤다. 눈만 껌벅거리며 여간 놀란 표정이 아니었다. 린뱌오의 손을 꼭 잡고 식당으로 향했다. “전쟁보다 더 중요한 일을 해결하자. 밥 먹으러 가자.” 린뱌오는 남이 자기 몸에 손대는 것을 싫어했다. 몇 걸음 걷다가 슬그머니 손을 빼더니 계속 엉덩이에 문질러 댔다. 마오는 못 본 체 했다. 저우와 눈이 마주치자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살짝 옆으로 흔들었다. 이제 남은 건 펑더화이(彭德懷)밖에 없었다.
마오는 국방위원회 주석 자격으로 회의를 소집했다. 총사령관 주더(朱德)가 “홍군 시절 부총사령관이었고, 지금도 전군의 부총사령관”이라며 펑더화이를 추천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마오가 박수를 치며 다른 참석자들의 의견을 물었다. 반대가 있을 리 없었다.
펑더화이는 고생 복을 타고 난 사람이었다. 후난(湖南)성 빈농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논어를 부지런히 읽었다. 8살 때 모친이 이상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호적에서 성과 이름을 완전히 지워버리라는 말을 남겼다. 밑으로 남동생이 3명 있었다. 10살 때부터 빈 밥그릇 들고 남의 집 문 앞을 기웃거렸다. 기를 쓰고 익혔던 성현의 말씀은 세상살이에 도움이 안 됐다. 없는 사람들의 도리(道理)를 찾기 시작했다. 군대 외에는 갈 곳이 없었다.
입대 며칠 전 외사촌 누이 저우루이롄(周瑞蓮)이 찐빵을 들고 찾아왔다. 약혼이라도 하고 가라며 졸라댔다. 펑은 빵을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1918년 스무 살 때였다. 2년 후 루이롄은 아버지가 진 빚 때문에 동네 지주에게 팔려가게 되자 바위에서 몸을 던졌다.
펑더화이는 평생 저우루이롄을 잊지 못했다. 고향에만 돌아오면 루이롄이 살던 집 주변을 배회하며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세상, 너무 불공평하다”고 뇌까렸다. 30여 년 후 한국전에서 돌아온 후에도 그랬고, 중화인민공화국 원수 계급장을 단 후에도 그랬다. (계속)
<213>마오 “내 아들을 조선에 지원병 1호로 보내겠다” |제214호| 2011년 4월 17일
▲1949년 4월 베이징 교외 샹산(香山)에 머무르던 마오쩌둥과 장남 마오안잉. [김명호 제공]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는 한국전에 파병할 지원군(支援軍)의 명칭을 놓고 숙고했다. 뭐든지 트집 잡기 좋아하는 민주인사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뒷말을 없애기 위해서였지만, 부총리 황옌페이(黃炎培)가 그럴싸한 의견을 내놨다. “지원군(支援軍)은 파견군을 의미한다. 우리는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다. 국가와 국가 간의 대립으로 몰고 갈 필요가 없다. 우리 인민들이 조선 인민들을 지원(支援)하기 위해 자원(自願)한 걸로 하자.” 이어서 미국 독립전쟁 시절 프랑스가 지원군(志願軍) 명의로 정부군을 미국에 파견해 영국군과 싸운 사실을 상기시켰다. 마오는 귀가 솔깃했다.
1950년 10월 7일 밤, 마오는 중국인민지원군(中國人民志願軍) 사령관 겸 정치위원 펑더화이를 “늦은 저녁이나 하자”며 집으로 초대했다. 전선으로 나가는 지휘관을 위한 일종의 송별연이었다. 이날 마오는 장남 마오안잉(毛岸英)을 지원병으로 추천했다. 펑더화이는 농담인 줄 알았다. “나는 주석의 집에 지원병을 모집하러 온 게 아니다. 주석을 모병관으로 임명한 적도 없다”며 웃었다.
잠자코 앉아있던 마오안잉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다급하게 지원 이유를 설명했다. “나는 소련에서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레닌 군정대학을 마쳤다. 기갑부대 중위로 독·소전에도 참전했다. 지원병 1호로 나가겠다.” 아들이 펑더화이에게 하는 말을 들으며 좋아 죽겠다는 표정을 짓던 마오는 펑더화이와 눈이 마주치자 “이 애는 우리가 못하는 러시아 말과 영어도 다 할 줄 안다. 조선에 나가면 소련인, 미국사람들과 부딪칠 일이 많을 텐데 어떻게 할거냐”라며 싱글벙글했다. 펑더화이는 항일전쟁 시절 나이 40이 넘어서야 결혼 비슷한 걸 했지만 아직도 슬하에 자녀가 없었다.
일이 이쯤에 이르자 펑더화이도 결심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 통역이라면 몰라도 전투요원으론 절대 안 된다.” 그날 밤 펑더화이는 잠을 설쳤다. 걱정이 태산 같았다. 작은 사고라도 났다 하는 날에는 정말 큰일이었다. 생각만 해도 온몸이 오싹했다.
10월 19일 새벽, 펑더화이는 베이징반점을 나섰다. 오전 9시, 전용기가 선양(瀋陽)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가오강(당시 동북 인민정부 주석. 동북군구 사령관을 겸했다)과 함께 동북군구 사령부로 직행했다. 몇 시간 동안 압록강 도강 계획을 보고받았다. 오후에 미그-15 전투기 4대의 호위를 받으며 국경도시 안둥(安東, 1965년 단둥(丹東)으로 개명)으로 향했다.
그날 밤, 압록강 연안에는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무장 군인과 노동자, 군용차량, 포차가 강변에 바글바글했다. 가끔 조명탄이 터지고 강 건너 신의주 쪽에서 은은히 포성이 울렸다. 불빛 하나 없는 녹색 군용 지프 한 대가 압록강 대교를 건넜다. 펑더화이와 경호원 2명이 타고 있었다. 무전장비를 실은 차량이 뒤를 따랐다. 4일 후 마오안잉도 압록강을 건넜다.
펑더화이는 마오안잉을 자신의 집무실 부근에서 비서 겸 통역으로 활동하게 했다. 보초 근무를 못하게 하고 총도 지급하지 않았다. 항상 눈앞에 어른거려야 마음이 놓였다. 부사령관 덩화(鄧華)와 홍쉐즈(洪學智), 펑더화이 집무실 근무자 외에는 아무도 마오안잉의 신분을 몰랐다. (계속)
<214>마오안잉, 압록강 건넌 지 한 달 뒤 미군 폭격으로 사망 |제215호| 2011년 4월 24일
▲1946년 1월, 19년 만에 상봉한 마오쩌둥 부자의 모습. 이날 모스크바에서 귀국한 마오안잉은 두 명의 소련인 의사와 함께 옌안(延安) 공항에 도착했다. 당시 원인 모를 고열에 시달리고 있던 마오쩌둥의 얼굴에 병색이 완연하다. [김명호 제공]
펑더화이(彭德懷)는 폐광지역인 평안북도 대유동 골짜기에 항미원조 지원군(중공군) 사령부를 설치했다. 금광 사무실이었던 목조 건물에 지휘부를 차렸다. 한때 금맥을 찾아 헤매던 흔적들이 주변에 허다했다. 방공시설을 따로 만들 필요가 없었다.
11월 7일까지 계속된 중공군의 제1차 작전으로 우리 국군과 미군은 청천강 이남까지 후퇴했다. 유엔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는 “크리스마스 전까지 한국전쟁에 종지부를 찍겠다”며 총공격을 준비했다.
11월 24일 오후, 미군 비행기 두 대가 대유동 상공을 한 시간 남짓 휘젓고 돌아갔다. 동체에 ‘BLACK WIDOW(미국산 독거미)’라고 쓰여 있는 정찰기였다. 징조가 심상치 않았다.
그날 밤, 한반도 북단의 폐광에서 중공군 당 위원회 긴급회의가 열렸다. 부사령관 홍쉐즈(洪學智)가 펑더화이의 안전을 책임지기로 의결했다. 이튿날 새벽, 홍쉐즈는 펑더화이에게 산중턱에 있는 동굴로 집무실을 이전하자고 건의했다. 마오안잉(毛岸英)이 폭사하기 몇 시간 전의 일이었다.
펑더화이의 수행부관이었던 양펑안(楊鳳安)에 의하면 펑더화이는 호통을 치며 당 위원회의 결정을 거부했다.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고 판단한 홍쉐즈는 펑더화이가 화를 내건 말건 죽을 힘을 다해 멱살을 잡고 문 쪽으로 나갔다. 넋을 잃고 있는 경호원을 향해 사령관의 침구와 붓, 벼루, 전보용지를 들고 따라오라고 소리를 질렀다. 부사령관 덩화(鄧華)가 동굴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약 두 시간이 지났을 무렵 펑더화이가 양펑안에게 상황실에 가서 전선 상황을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B-26 전폭기 두 대가 지휘부 상공을 지나고 있었다. 상황실에는 참모 네 명이 있었다. 두 사람은 입구에, 아침밥을 거른 마오안잉과 서북 출신의 참모 한 사람은 안쪽에 있는 난로를 쬐며 볶음밥을 데우고 있었다. 보고할 문건을 챙겨 든 양펑안이 문을 여는 순간 방금 전에 봤던 전폭기가 회항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양펑안은 빨리 피하라며 소리를 질렀다. 수십 발의 폭탄이 비오 듯했다. 하늘과 땅이 불바다로 변했다. 국공전쟁을 치르면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무서운 광경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펑더화이의 집무실도 불구덩이에 휩싸였다. 세월이 한참 지나서야 네이팜탄이라는 것을 알았다.
상황실 입구에 있던 사람들은 목숨을 건졌지만, 안쪽에 있던 마오안잉과 참모 한 사람은 화염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압록강을 건너온 지 34일 만이었다. 보고를 받은 펑더화이는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직접 확인하겠다며 동굴을 뛰쳐나갔다. 현장은 참혹했다. 시신의 식별과 수습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러시아제 시계와 애들 장난감처럼 예쁘게 생긴 호신용 권총 한 자루가 발견되자 펑더화이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4년 전 소련을 떠날 때 스탈린에게 받은 선물이라며 자랑하던 마오안잉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참으로 기구한 삶이었다.
마오안잉은 1922년 10월 24일 후난(湖南)성 창사(長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마오쩌둥, 엄마는 일본과 영국에서 교육학·철학을 전공한 베이징대학 윤리학 교수의 딸이었다. 다섯 살 생일을 며칠 앞두고 우한(武漢)으로 떠난 아버지는 폭동을 주도하고 징강산(井岡山)으로 들어갔다. 여덟 살 때 모친이 체포되는 바람에 두 명의 남동생과 함께 감옥생활을 했다. 생모가 총살당하자 보석으로 풀려난 마오안잉은 동생들을 데리고 거리를 방황했다. 공산당 지하조직의 도움으로 프랑스를 거쳐 소련으로 떠나기까지 5년간 상하이 거리를 헤매며 구걸과 호떡집 종업원, 인력거꾼 등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그사이 막내 동생은 세상을 떠났고(일설에는 실종), 바로 밑의 동생은 경찰에게 곤봉으로 머리를 얻어맞아 불치의 병을 얻었다.
마오안잉이 귀국하는 날 마오쩌둥은 병중이었다. 의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비행장에 나가 아들을 맞이했다. 19년 만의 부자 상봉이었다. 이틀간 같은 방에서 10끼를 함께 먹으며 즐거워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건강도 회복했다.
저우언라이와 리커눙(李克農·사회부장 겸 외교부 부부장, 정보 총책이었다)으로부터 장남의 사망 사실을 보고받은 마오쩌둥은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후일 경호원 중 한 사람이 기록을 남겼다. “주석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지만, 그 처연한 옆모습은 차마 보기 힘들었다.” |
첫댓글 모택동은 전략이나 여러 면에서 김일성보다 한 수 위인 것 같네. 그리고 자식을 돌보지 않은 점에서는 둘은 천양지차.
그나저나 중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얻은 것이 무엇인가. 북한과 '혈맹'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다진 것 말고 또 있을까.
로마가 한창 세력을 넓힐 적에도
지도자들의 자제와 귀족의 젊은 후세들이 모두 전장에서 경력을 쌓아야 했지.
특권층들이 군역을 기피하는 나라는 미래가 의심스러워~~ㅎ
그렇다고 억지로 선군을 외치는 윗동네도 별로 나은 것 같지도 않고....ㅋ
전쟁의 참혹함을 알았던 모택동과
그건 별건으로 하고 남북통일의 과업을 독차지하고 싶었던 일성이와는 천양지 차이가 아닐까?
순망치한을 개입의 명분으로 삼았던 중국의 속내는 지금도 진행중일 터이고~
어렵네 어려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