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고 성장하고, 선교사가 되다 (1859-1884년) (6) 조선으로 가는 길 그사이, 미북장로회 소속으로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의료 선교사 알렌(Horace N. Allen)이 1884년 6월 9일자로 조선행을 지원했고, 7월 20일 허락이 떨어져 같은 해인 1884년 9월 20일 알렌이 제물포를 거쳐 서울에 정착함으로써, 조선 최초의 개신교 정주(定住) 선교사가 되었다. 이로써 목회 선교사 언더우드의 의료 선교사 파트너는 헤론에서 알렌으로 변경되었다. 조선 선교사로 임명된 언더우드는 빠르게 필요한 준비를 해나갔다. 우선 1884년 11월 3일에 버건노회에서 강도사 자격을 받았고, 11월 14일 뉴브런즈윅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같은 날 저지시의 장로회 노회로 교적을 변경했다. 이로써 언더우드는 개혁교회 소속이 아닌 미국북장로회 소속의 목사가 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회사와 집안을 돌보고 있던 큰형 존 T. 언더우드는 가톨릭 선교사들이 잠입하여 활동하다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다 죽은 나라로만 알려져 있는 바로 그 조선에 동생이 개신교 개척 선교사로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동생이 이제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884년 여름, 형은 동생 을 영국에 보내 친척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도록 했다. 1884년 12월, 언더우드는 뉴욕을 출발하는 것으로 조선을 향한 긴 여행의 첫발을 뗐다. 큰형은 시카고까지 따라가 동생을 배웅했다. 언더우드는 시카고에서 대륙횡단 기차로 갈아타고 샌프란시스코로 갔고, 12월 31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으로 가는 기선에 올라 은둔의 나라 조선을 향했다. 옷 가방 하나와 커다란 카메라 한대, 타자기 한대. 언더우드가 미국을 떠날 때 손에 들고 있던 짐의 전부였다. 태평양을 건너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한 것은 이듬해인 1885년 1 월 25일 일요일 아침이었다. 이때부터 정확히 두 달간 언더우드는 요코하마에서 조선어를 배우며 본격적인 선교 준비에 들어갔다. ▲언더우드가 요코하마에서 보낸 첫 선교편지(1885년 1월 26일자). ⓒ장로회역사관 조선보다 훨씬 앞선 1854년에 개항한 일본의 경우, 1859년부터 유럽과 미대륙의 여러 선교단체가 일본의 개항지내 외국인 거류지에 선교사들을 파송해놓고 있었다. 그중 언더우드가 본래 속했던 미국 개혁교회 소속 선교사들도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는데, 예를 들어 1865년 일본인 최초로 개신교 세례를 받은 야노 모토타카(矢野元隆)에게 세례를 집례한 발라(J. H. Ballagh) 선교 사도 그중 한 명이었다. ▲헵번 선교사. 하지만 언더우드는 요코하마에 머물 때 같은 북장로회 소속의 헵 번(James C. Hepburn) 선교사의 집에서 유숙했다. 헵번 선교사는 1859년 일본에 파송된 개척 선교사 중 한 명으로 의료 선교사이기도 했지만, 1867년 일영사전을 편찬했고, 1872년 개혁교회의 브라운(S. R. Brown) 선교사와 함께 복음서를 번역한 뒤, 1874년 ‘신약성서 공동번역 위원회’가 조직될 때 핵심 위원으로 성 경의 메이지 역본(1887) 출판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는 등 일본어역 성서 출판에도 큰 역할을 했다. 또한 현재도 명문 사학으로 자리 잡고 있는 도쿄의 메이지가쿠인대학( )을 설립하기도 하는 등 전방위적으로 활동을 펼치고 있던 베테랑 선교사였다. 선교사로 이제 막 첫발을 뗀 스물다섯 살의 젊은 언더우드가 이렇게 경험이 풍부한 70세의 노선교사 집에서 두 달간 머물며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엿볼 수 있었던 것은, 언더우드에게 크나큰 배움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사전 편찬, 교리서 번역, 성경 번역, 학교 설립 등 언더우드의 선교 초기 사역은 헵번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처럼 닮았다. 요코하마에서 조선행 증기선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언더우드는 요코하마에서 활동하는 미국성서공회의 루미스 선교사를 비롯한 여러 선교사들을 만날 수 있었고, 귀국길에 오른 주조선 초대 미국 공사 푸트 부부도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더욱 값진 것은 요코하마에서 조선인들을 소개받아 조선의 상황에 대해 듣고, 조선어를 배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언더우드가 이 시기 만난 조선인 가운데에는 바로 앞선 1884년 12월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실패한 뒤 일본으로 망명한 서광범 등의 개화당 인사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수정 역, 《마가복음》과 첫 페이지, 1885년. ⓒ대한성서공회 더욱이 언더우드의 마음을 조선으로 향하게 한 주인공인 이수정도 요코하마에서 만날 수 있었다. 요코하마의 미국성서공회에서는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을 1000부 인쇄해놓고 조선으로 들어갈 선교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언더우드는 바로 이 《마가복음》으로 이수정에게 말을 배우며 조선에 들어갈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언더우드가 요코하마에 도착한 지 한 달 뒤인 2월 27일에는, 미국 북감리회의 조선 개척 선교사로 파송된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배재학당 설립자) 선교사 부부와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시병원 설립자) 의사 부부, 그리고 미북감리회 여성해외선교부에서 파송된 스크랜턴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이화학당 설립자) 여사 이렇게 다섯 명이 미국에서부터 건너와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교파는 달랐지만, 조선의 선교를 꿈꾸는 이들은 요코하마에서 한마음 으로 조선어를 배우며 서로를 다독이며 기도로 준비했다. ▲왼쪽부터 미북감리회의 스크랜턴, 아펜젤러, 메리 스크랜턴 선교사. 그리고 1885년 3월 25일, 언더우드는 북감리회 선교사들 가운데 선발대로 뽑힌 아펜젤러 부부와 함께 조선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배는 3월 28일 나가사키에 기착한 뒤 4월 2일에 부산, 4월 5일에 드디어 목적지인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이 글은 한국교회총연합에서 발행한 <한국교회 선교사 전기 시리즈>의 "개척자 언더우드" 내용입니다. #풀가스펠뉴스 #언더우드 #선교사 #한교총 #한국교회총연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