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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01월31일(수요일) 서울 [덕수궁&중명전&이화여고 100주년기념관&배재학당역사박물관&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서울유관순기념관&서소문 성지 역사박물관] 탐방일정
08:20~08:50 연신내역에서 지하철 3호선을 타고 종로3가역으로 가서 1호선으로 환승하여 시청역으로 이동 [30분 소요]
08:50~08:55 시청역 1번 출구로 나와서 덕수궁 매표소로 이동
08:55~09:00 덕수궁 관람권을 구입 [1천원]
09:00~09:15 덕수궁 석조전대한제국역사관으로 이동
09:15~09:30 2024년1월24일 인터넷에서 사전 예약(예약번호 : 202401242451)한 석조전 심화해설(소요시간 65분~70분) 수강을 대기
[예약 확인 및 입장
- 예약자 이름과 전화번호 또는 접수증으로 확인
- 관람시간 3분 전부터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 안내데스크에서 확인 후 입장 가능]
[해설 시작시간 경과시 입장할 수 없음]
탐방지 : 서울 [덕수궁&중명전]
[덕수궁(德壽宮)
이칭별칭 : 경운궁(慶運宮), 정릉동행궁(貞陵洞行宮)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정동)
서울특별시 중구에 있는 조선시대 고종의 거처로 이용된 궁궐. 사적.
덕수궁은 처음 월산대군의 집터였던 것을 임진왜란 이후 선조의 임시거처로 사용되어 정릉동 행궁으로 불리다가 광해군 때에 경운궁으로 개칭되었다. 이후 1907년 순종에게 양위한 고종이 이곳에 머무르게 되면서 고종의 장수를 빈다는 의미에서 덕수궁(德壽宮)이라 다시 바꾸었다.
1897년(광무 1)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긴 이후부터 중화전을 비롯하여 정관헌, 돈덕전, 즉조당, 석어당, 경효전, 준명전, 흠문각, 함녕전, 석조전 등 많은 건물들을 지속적으로 세워졌다. 이곳은 고종의 재위 말년의 약 10년간 정치적 혼란의 주무대가 되었던 장소로, 궁내에 서양식 건물이 여럿 지어진 것이 주목된다. 1963년 1월 18일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역사적 변천
덕수궁이 있는 자리는 원래 조선 초기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집이 있었던 곳으로, 선조가 임진왜란 뒤 서울로 돌아와서 이 집을 임시거처로 사용하면서 궁으로 이용하게 되었다. ‘정릉동 행궁’이라고 불린 이곳에서 선조가 죽고 뒤를 이어 광해군이 즉위하였다. 그해 창덕궁이 완성되었으므로 광해군은 이곳을 떠났으며, 경운궁이라는 궁호를 붙여주었다.
조선 후기에 덕수궁은 궁궐다운 건물도 없었고 왕실에서도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다만 광해군이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를 이곳에 유폐시킨 일이 있고, 영조가 선조의 환도(還都) 삼주갑(三周甲)을 맞아 배례를 행한 일이 있을 정도였다.
고종 말년 조선 왕조가 열강 사이의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고종이 경운궁으로 옮기자, 비로소 궁궐다운 장대한 전각들을 갖추게 되었다. 1897년(광무 1)에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 때를 전후하여 궁내에는 많은 건물들이 지어졌으며 일부는 서양식으로 지어지기도 하였다. 궁내에는 역대 임금의 영정을 모신 진전(眞殿)과 궁의 정전(正殿)인 중화전(中和殿) 등이 세워졌고, 정관헌(靜觀軒)·돈덕전(惇德殿) 등 서양식의 건물도 들어섰다.
고종이 경운궁에 머무르고 있던 1904년(광무 8)에 궁에 큰불이 나서 전각의 대부분이 불타 버렸다. 그러나 곧 복구에 착수하여 이듬해인 1905년(광무 9)에 즉조당(卽阼堂)를 비롯하여 석어당(昔御堂), 경효전(景孝殿), 준명전(浚明殿), 흠문각(欽文閣), 함녕전(咸寧殿) 등이 중건되었으며, 중화문(中和門), 조원문(朝元門) 등이 세워졌다. 이후 1906년 정전인 중화전이 완성되고 대안문(大安門)도 수리되었다. 이후 이 문은 대한문(大漢門)으로 개칭되었고 궁의 정문이 되었다.
1907년 고종은 제위를 황태자에게 물려주었으며 새로 즉위한 순종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태상황(太上皇)이 된 고종은 계속 경운궁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이 때 궁호를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1910년에 서양식의 대규모 석조건물인 석조전(石造殿)이 건립되었다.
한편, 왕실의 크고 작은 일들이 이곳에서 일어났다. 1897년(광무 1)에 영친왕 이은(李垠)이 여기서 태어나서 1907년(융희 1)까지 거처하였고, 1904년(광무 8) 헌종의 계비 명헌태후 홍씨(明憲太后洪氏)가 인수당에서 별세하였으며, 황태자비 민씨(閔氏)도 석어당에서 별세하였다. 1907년(융희 1) 8월 순종은 돈덕전에서 즉위하였고, 고종의 순헌귀비 엄씨(純憲貴妃嚴氏)가 즉조당에서 별세하였다. 고종은 1907년 왕위를 물려주고 13년 동안 함녕전에서 거처하다가 1919년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이와 같이 덕수궁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약 10년간 나라와 왕실의 크고 작은 일들이 일어났던 곳이며, 궁내의 각 건물들이 그러한 역사적 사건의 무대로 활용되었다.
그 뒤 별다른 사건을 겪지 않다가 1945년 광복 후 덕수궁 석조전에서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려 한반도 문제가 논의되었으며, 1947년 국제연합한국위원회가 이 자리에 들어오게 되어 덕수궁은 새로운 역사의 현장이 되었다.
석조전은 6·25전쟁 중에 내부가 불탔다. 이후 덕수궁은 공원으로 바뀌어 일반에게 공개되었고, 석조전은 1986년까지 국립현대미술관으로 활용되었다.
내용
덕수궁은 당초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사가(私家)이던 것을 선조 때 임시로 왕이 거처로 사용하면서 궁이 된 것인 만큼, 궁이 자리잡은 위치나 건물의 배치에 있어서도 조선시대의 다른 궁궐들과는 다른 면모를 보인다.
그 위치는 한성부(漢城府)의 서부 황화방(皇華坊)과 정릉동(貞陵洞) 일대로 이곳은 원래 태조의 계비 강씨(康氏)의 무덤인 정릉(貞陵)이 있던 곳이다. 능은 태종 때 옮겨지고 그 자리에 월산대군의 집이 지어졌던 것이다.
이곳은 도성 내의 주요 가로와도 직접 면하여 있지 않은 곳으로 조선 후기에 제작된 고지도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곳은 궁이 있는 곳으로는 여겨지지 않던 것으로 보인다. 덕수궁은 결국 고종 말년에 왕이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갑자기 궁궐로서의 모습을 갖추었으며, 건물의 배치도 이때 들어와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현재의 상태에서 그 위치를 알아보면, 궁의 서쪽은 미국대사관 남쪽 길을 따라 러시아공관이 있던 언덕 일대와 신문로 일대에 해당되고, 북쪽은 영국대사관을 거쳐 성공회(聖公會) 앞길을 따라 덕수초등학교 담 위쪽을 지나 신문로에 이르는 지역에 해당된다. 이 자리에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 이후로 영국, 미국, 러시아의 공관 터를 내주면서 궁내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고 서양식 건물이 지어지고 도로가 생기게 되었다.
건물의 배치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정전과 침전(寢殿)이 있는 부분, 선원전(璿源殿)이 있는 부분, 그리고 서양식 건물인 중명전(重眀殿)이 있는 부분이다. 이 가운데 궁의 중심이 되는 곳은 정전과 침전이 있는 곳으로, 정전인 중화전이 남향하여 있고 정남쪽에 중화문, 그 남쪽에 정문인 인화문(仁化門), 동쪽에 대안문, 북쪽에 생양문(生陽門), 서쪽에 평성문(平成門) 등이 있었다.
정전의 뒤편에는 석어당과 즉조당이 있는데, 이 두 건물은 고종이 이곳에 오기 전부터 있던 건물들이다. 정전의 동편에 침전인 함녕전이 있고 함녕전의 서쪽에 덕홍전(德弘殿), 북쪽에 서양식 건물인 정관헌, 동북쪽에 수인당(壽仁堂), 동쪽에 영복당(永福堂)이 있었다. 중화전의 서북쪽에도 많은 건물이 있었으며 관명전(觀明殿)·보문각(寶文閣) 등이 중요한 것들이었다.
중화전은 처음 중층지붕의 장대한 규모로 세워져, 2층으로 조성된 월대(月臺) 위에 정면 5칸, 측면 4칸의 건물이었다. 그러나 1904년 화재 뒤 재건되면서 규모를 줄여 단층건물로 만들었다. 중화전 주변에는 사방에 행각이 세워져 있어 중화문에 연결되어 있었으나 이것도 철거되어 없어졌다. 중화문 역시 당초는 중층건물이었으나 재건되면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건물로 축소되었다.
함녕전은 정면 9칸, 측면 4칸에 한쪽 후면 4칸이 더 붙은 ㄱ자형을 하고 있으며, 익공형식(翼工形式)의 간결한 건물이다. 1985년 중화전 및 중화문과 함녕전이 보물로 지정되었다.
석어당은 궁내 유일한 2층 전각으로 본래 이 건물은 한때 인목대비가 유폐되었던 곳이며, 역대 국왕들이 임진왜란 때의 어렵던 일을 회상하여 선조를 추모하던 곳이기도 하다. 1906년 재건된 건물이 지금 남아 있으며 단청을 하지 않은 건물이다.
정관헌은 서양식 건물로 고종이 다과를 들고 음악을 감상하던 곳으로, 한때는 태조·고종·순종의 영정을 봉안하기도 하였다. 조적식 벽체에 석조기둥을 세우고 건물 밖으로 목조의 가는 기둥을 둘러 퇴를 두르듯이 짜여진 건물이다.
평성문 밖 지금 미국대사관 서쪽에는 이층 서양식 건물로 접견실 또는 연회장으로 쓰던 중명전이 있었고, 그 북쪽에 만희당(晩喜堂)·흠문각, 서쪽에 양복당(養福堂)·경효전 등이 있었다.
이 주변 일대의 건물에 대하여는 전체를 수옥헌(漱玉軒)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선원전이 있던 지금 덕수초등학교와 전 경기여자중고등학교 일대에는 선원전 외에 사성당(思成堂)·흥덕전(興德殿)·흥복전(興福殿)·의효전(懿孝殿)이 있었다.
이밖에 궁의 북쪽과 남쪽 담장에는 구름다리가 가설되어 러시아공관 북쪽 언덕에서 큰 길을 건너 경희궁으로 이어졌고 지금의 지방법원이 있는 자리로도 이어졌다. 남쪽의 구름다리는 그 건너에 과거 의정부(議政府)가 옮겨와 있었기 때문에 궁과의 내왕을 편하게 하기 위하여 설치한 것이었다.
궁의 배치는 1904년 큰 화재가 있은 뒤로 변화되었고, 서양식 건물들이 지어지면서 기존의 건물과 조화를 잃게 되었는데, 특히 나중에 지어진 석조전 등 서양식 건물들은 기존의 정전 건물들과 축(軸)도 일치되지 않고 그 위치도 정전과 인접하여 대규모로 지어지면서 종래의 궁궐의 공간적 규범을 깨뜨리고 말았다.
화재 뒤 건물이 중건되면서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정문의 변경이었다. 덕수궁의 정문은 정전의 정남쪽에 있던 인화문이었는데, 1906년 중건공사를 하면서 정전의 동쪽에 있던 대안문을 수리하고 그 명칭도 대한문으로 고쳐 이 문을 정문으로 삼았다.
이에 따라 궁으로의 진입은 동쪽 모퉁이에서 시작되어 서쪽을 보고 들어가다가 다시 동쪽으로 꺾여 정전에 이르게 되었다. 대한문은 1968년 도시계획에 의하여 덕수궁 담장이 안쪽으로 옮겨지면서 1970년에 안으로 옮겨졌다.
궁내에 서양식 건물이 들어선 것은 19세기 말부터이며, 이 가운데 돈덕전·석조전이 가장 큰 규모의 건물이었다. 돈덕전은 평성문 밖 북쪽에 있었으나 철거되었고, 그 남쪽 가까운 위치에 석조전이 세워졌다.
석조전은 정면 54m, 너비 31m의 장대한 3층 석조건물로, 이 건물이 들어서면서부터 이웃한 궁의 정전과 주변의 한식 건물들이 가지고 있던 고유한 건축구성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더욱이, 석조전의 남쪽에 일본인들이 미술관을 세우고 그 앞에 서양식 연못을 만들면서 궁의 본래의 모습이 상당히 파괴되었다.
의의와 평가
덕수궁은 조선 말기에 궁궐로 갖추어진 곳이기는 하지만, 구한말의 역사적 현장이었으며 전통목조건축과 서양식의 건축이 함께 남아 있는 곳으로 조선왕조의 궁궐 가운데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탐방코스 : [덕수궁 석조전대한제국역사관~심화 해설 수강~돈덕전~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중화전~석어당~즉조당~준명당~정관헌~덕홍전~함녕전~덕수궁 대한문~중명전]
탐방일 : 2024년01월31일(수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서울 중구 정동 : 최저기온 1도C, 최고기온 8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3시간30분 소요)
* 09:30~10:40 석조전대한제국역사관 심화해설 수강 [소요시간 65분~70분]
[주제 : 대한제국 황실 가족 (고종과 순종, 영친왕을 중심으로 한 대한제국 황실 가계와 인물의 생애)]
[덕수궁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으로 재탄생
연합뉴스 기사 입력일 : 2014.10.07.
5년간 복원공사 마치고 대한제국 선포일인 13일 개관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덕수궁 석조전이 대한제국 출범일인 오는 13일 '대한제국역사관'으로 다시 태어난다.
덕수궁 관리를 전담하는 문화재청은 2009년부터 올해까지 지난 5년간의 석조전 복원 공사를 모두 마치고 대한제국역사관으로 다시 태어났음을 알리는 개관식을 이날 개최한다고 7일 밝혔다.
문화재청은 자주적 근대 국가를 지향한 대한제국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면서 이 시대 최고 근대건축물인 석조전 복원의 건축사적 의의를 알리는 한편 대한제국의 사회 변화와 개혁을 확인하고 황실 생활상을 재현하는 전시를 구현하는 데 주력했다고 덧붙였다.
이를 위해 석조전 역사관은 크게 대한제국 황실의 생활상을 재현한 재현실과 전시실로 구성한다.
재현실은 완공 당시의 가구를 배치함으로써 대한제국의 현장감과 생동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하며, 전시실에는 패널과 영상 등의 전시물이 있어 대한제국의 역사와 황실 가족에 대한 이해를 돕도록 한다고 문화재청은 덧붙였다.
구체적으로 보면 2층에서는 대한제국 황실 가계도와 관련 사진을 보여주며, 1층에서는 석조전의 탄생과 대한제국의 선포, 대한제국 황제 즉위와 퇴위 절차 등을 소개한다.
석조전에 입고한 가구는 총 133점. 석조전 건립 당시 고가구 41점과 영국에서 구입한 골동 가구 79점, 복제 혹은 새로 제작한 가구가 13점이다. 옛 가구는 원래 있던 자리를 찾아 배치했다.
대식당도 재현했다. 식기는 대한제국 황실에서 사용한 이화문 서양 식기를 참조해 재현 제작했으며, 테이블 장식은 20세기 초 영국 빅토리안, 에드워디안 양식을 채택하고 커트러리(cutlery)와 유리잔, 촛대는 20세기 초 영국 제품으로 충당했다.
재현실에는 황제 서재와 황후 거실, 그리고 귀빈대기실을 구현했다.
역사관 개관일인 13일은 1897년 광무황제(고종)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로 즉위한 사실을 선포한 날이다.
문화재청은 "이날을 대한제국역사관 개관일로 택한 것은 대한제국의 의의를 되새기는 취지가 담겨있다"고 밝혔다. 개관일 덕수궁은 야간을 제외하고는 무료 개방한다.
석조전 복원 역사·전시 자문위원인 이태진 전 국사편찬위원장은 "덕수궁은 우리 근현대사의 애환이 서린 역사의 현장"이라면서 "이런 대한제국의 아픈 역사를 한자리에서 볼 수 있어 매우 뜻깊다"는 소회를 밝혔다.
석조전은 대한제국 광무황제(光武皇帝=고종)를 위한 공간으로 1898년 영국인 하딩(J·R Harding)이 설계하고 1900년 공사를 시작해 1910년 완공됐다. 석조전 옆 덕수궁미술관(국립현대미술관 분관)은 1938년 이왕가미술관(李王家美術館)으로 사용하기 위해 새로 지은 건물이다.
석조전은 영친왕(英親王·1897~1970)의 귀국 때는 숙소로 사용되다가 일제강점기에 이왕가미술관으로 변형되고 해방 이후에는 미소공동위원회 회의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국립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궁중유물전시관 등지로 사용되면서 원형이 많이 훼손됐었다.
이에 문화재청은 2008년 원형 복원을 결정하고, 이듬해부터 올해까지 총예산 약 141억 원을 투입해 석조전을 복원했다.
문화재청은 이를 위해 "대한제국기 건립 당시의 설계도면과 옛 고증사진, 신문자료뿐만 아니라 영국과 일본 등의 석조전 자료들도 조사해 고증·확인했으며, 근대건축과 역사 등 관계 전문가의 조언을 구하는 등 복원에 충실을 기했다"고 덧붙였다.
역사관 관람 신청은 덕수궁 누리집(www.deoksugung.go.kr)을 통해 할 수 있다. 만 65세 이상 노인과 외국인 등은 1회당 총 5인까지 현장접수가 가능하다.
내부공간이 협소해 1회당 관람시간은 45분으로 한정한다. 1일 관람횟수는 평일 12회(총 240명), 주말 16회(총 320명)이며, 1회당 20명(인터넷 예약 15명, 현장접수 어르신과 외국인만 5명)에게 공개한다. 역사관은 당분간 임시로 무료(덕수궁 입장료 1천원 별도) 개방할 방침이다.]
* 10:40~10:50 덕수궁 돈덕전(德壽宮 惇德殿) 관람
[덕수궁 돈덕전(德壽宮 惇德殿)
덕수궁 석조전 뒤편에 있는 서양식 2층 건물로, 외국 공사를 접대하는 공간으로 사용하였다. 건물의 명칭인 ‘돈덕(惇德)’은 오경(五經) 중 하나인 《서경(書經)》의 글귀 '惇德允元(돈덕윤원, 덕이 있는 이를 도탑게 하고, 어진 이를 믿는다)’에서 인용한 것이다. 현판의 글씨는 당나라의 서예가 구양순(歐陽詢, 557~641)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쓴 것으로, 현판의 원본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보관·전시 중이다.
역사
1902년(광무 6) 10월에 있을 고종의 즉위 40주년 기념식의 연회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립하였으나, 공사가 늦어지고 당시 국내외 사정으로 기념식이 연기되다가 결국 취소되면서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식의 연회장으로 사용되지 못하였다. 1903년(광무 7) 돈덕전이 완공된 이후에는 고종이 외국 공사를 만나는 연회장으로 사용되거나 외국의 귀빈들이 묵는 영빈관 등으로 활용되었으며, 대한제국의 2대 황제 순종은 1907년 7월 돈덕전에서 즉위식을 했다. 1907년 11월 순종이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고 난 후에는 고종이 외부인을 만나는 공간으로 사용되었고, 1919년 고종이 승하한 후로는 덕수궁과 함께 방치되었다. 이후 돈덕전이 언제 훼철되었는지 기록으로 남아있지는 않으나 1920년대 일제에 의해 철거된 것으로 추정된다. 2015년부터 돈덕전 복원·정비사업이 시작되어 2023년 5월 덕수궁 돈덕전 복원이 완료되었고, 2023년 9월 정식으로 일반에 공개되었다.
붉은 벽돌과 회색 벽돌을 쌓아 만든 2층 건축물로, 고딕 건축 양식과 르네상스 건축 양식을 절충하여 디자인하였다. 복원된 돈덕전의 1층은 당시 대한제국의 모습을 보여주는 상설전시실과 국제행사가 가능한 기획전시실로 구성되었으며, 2층에는 한국 근대 외교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는 상설전시실과 대한제국 외교사 기록을 보관하고 있는 아카이브실이 자리하고 있다.]
* 10:50~11:00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관람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은 한국 근대미술을 품은 고궁 속 미술관이다. 우리나라 근대미술의 형성과 전개 과정을 체계화하여 근대미술에 나타난 미의식과 역사관을 정립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우리 민족의 문화적 정체성을 구현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미술관이 자리한 덕수궁의 석조전 서관은 1938년에 완공된 우리나라 근대 건축양식을 대표하는 건물로서 4개의 전시실과 휴게공간, 아트숍 등을 갖추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은 근대미술 전문기관으로서 근대미술의 조사와 연구, 근대미술 관련 기획전 및 소장품을 전시하고 각종 교육프로그램의 개발과 운영, 학술 활동과 출판, 근대미술 관련 정보의 국제적 교류 등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1998년 개관 이래 2005년까지 총 38회의 기획 및 소장품 전시를 개최하였으며, 약 250만 명의 관람객이 미술관을 찾았다. 그뿐만 아니라 작품설명회, 강연회 등의 학술행사를 개최하여 미술 전반에 관한 이해를 돕고 있으며,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운영하여 도심 속에 있는 복합문화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수도권 지하철 1, 2호선 시청역 1번 출구에서 70m에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은 국립현대미술관의 덕수궁 분관으로, 서울특별시 중구의 덕수궁 석조전 서관에 자리해 있다.
덕수궁관은 일제강점기인 1937년 나카무라 요시헤이의 설계로 이왕가미술관으로 지어졌다. 1950년 한국 전쟁 중 전화(戰火)를 입어 석조의 구조만을 남기고 전부 소실된 것을 1953년 수리하였다. 1973년부터 국립현대미술관의 본관으로 사용되었다. 1986년 국립현대미술관이 과천으로 이전하였고, 1998년 국립현대미술관의 분관으로 정식 개관하였다.
개관 당시 이전에도 사용되어 오던 덕수궁미술관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다가 2013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들어서면서 덕수궁관으로 개명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서울관) - 동시대 현대미술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미술관
소재지 : 서울 종로구 삼청로 30
경복궁의 동문인 건춘문 앞에 위치한 국립현대미술관(서울관)은 동시대 현대미술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미술관이다. 1986년 개관한 과천관, 1998년에 개관한 덕수궁관에 이어 2013년 개관한 서울관은 조선시대 소격서, 종친부, 규장각, 사간원이 있던 자리에 자리 잡고 있다. [마당] 개념을 도입하여 건축한 국립현대미술관(서울관)은 누구나 즐기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건물의 내외부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주변 명소와도 조화를 이루도록 설계되었다. 국립현대미술관(서울관)은 전시실을 비롯하여 디지털정보실, 멀티미디어홀, 영화관 등 다양한 시설을 갖춘 복합예술문화센터로서 한국 현대 미술품 전시 및 신매체 융복합 전시를 진행한다.]
* 11:00~11:10 덕수궁의 정전인 중화전(中和殿)을 관람
[덕수궁의 중화전 및 중화문(德壽宮의 中和殿 및 中和門)
대한민국의 보물 제819호(1985년 1월 8일 지정)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5-1
건립시기 : 구한말
덕수궁의 중화전 및 중화문(德壽宮의中和殿및中和門)은 각각 덕수궁의 정전(正殿)과 정전으로 드나드는 정문이다. 덕수궁의 본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다.
중화전 앞뜰에는 공식적인 조정회의나 기타 국가적인 의식이 있을 때 문무백관들의 위치를 표시한 품계석(品階石)이 어도(御道) 좌우로 배열되어 있다. 원래 중화전 영역 주위에는 장방형으로 2칸 폭의 행랑이 둘러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모두 철거되고, 현재는 동남부 모퉁이의 7칸만 남아 있다.
역사
경운궁의 정전은 즉조당(卽祚堂)이었는데, 고종이 대한제국의 황제가 되면서 1902년 즉조당 앞에 새로 중층 건물을 지어 중화전이라 하였다. 경운궁 중화전은 고종황제가 경운궁에 재위하는 동안 정전으로 사용하였던 건물로, 광무 8년(1904년) 함녕전에서 시작된 화재로 소실된 후 1906년 단층 전각으로 중건되었다. 이때 신축 공사 과정은 "중화전영건도감의궤"에 상세히 기록되었다.
건물
중화전
2중의 넓은 월대 위에 세워진 중화전은 창덕궁 인정전(仁政殿)과 같이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의 다포계 팔작지붕을 하였다. 기단의 둘레는 난간을 두르지 않았으며, 사방에 계단을 설치하였다. 건물은 약간 서쪽으로 방향을 튼 남향을 하였다.
하월대는 지대석 위에 장대석 두 벌대를 쌓고 그 위에 갑석을 얹었으며, 상월대는 장대석 두 벌대로 설치되었다. 상·하월대 상면에는 잘 다듬은 방형 화강석 박석을 깔았으며, 하월대 전면 좌우와 후면에는 각기 계단이 한 벌씩 놓였다. 기단 상부는 전을 깔았고 좌우에는 향로를 놓았다.
내부 중앙 후측 고주 사이에는 어좌가 놓여 있고, 그 뒤에는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를 그린 병풍이 있으며, 그 상부에는 보개(寶蓋) 천장이 마련되었다. 천장은 모두 우물천장인데, 내진(內陣) 천장의 중심부에는 위로 쑥 들어간 감입형 천장을 설치하고, 그 안에 두 마리의 용을 조각하여 황제를 상징하였다. 전·후면 어칸에는 사분합 꽃살문, 어칸 좌우 한 칸과 양측면 남쪽 두 번째 칸에는 삼분합 꽃살문, 나머지 칸에는 모두 삼분합 꽃살창을 설치하였으며, 상부 전체에는 빛살 광창을 설치하였다. 내부 바닥은 전돌을 깔았다.
가구(架構)는 기둥 윗몸을 창방으로 짜 맞추고 그 위에 평방을 놓았으며, 기둥머리에는 안초공을 설치하고 내4출목, 외3출목의 포작을 짜 올렸고, 그리고 주심포 사이 어칸에 3개, 나머지 칸에 2개씩 공포를 배열하였다.
중화문
중화전과 함께 재건된 중화문은 경운궁의 중문이자 중화전의 정문이다. 전을 깐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중앙열 세 칸에 모두 판문을 달았다.
중화문은 건물 전면을 덮을 정도로 넓고 완만한 돌계단 위에 세워졌다. 가운데 문은 좌우의 문보다 문둔테 만큼 높으며, 문 위에는 풍형 홍살을 꾸며 놓았다. 비록 단층이기는 하지만 기둥의 높이가 훤칠하게 높아서, 문을 통해 중화전의 위풍이 나타나도록 설계되었다. 구조는 다포계 형식으로 살미첨차들이 서로 붙고, 내부는 운공형식으로 조각되어 있으며 팔작지붕이다. 가구는 5량가이다.]
* 11:10~11:20 덕수궁 석어당(德壽宮 昔御堂) 탐방
[덕수궁 석어당(德壽宮 昔御堂)
건립기간 : 1904년(광무 8)
건축양식 : 중층 팔작지붕 익공(翼工)집
규모 : 1층 정면 8칸, 측면 3칸, 2층 정면 6칸, 측면 1칸, 중층
덕수궁의 침전(寢殿)으로 덕수궁의 정전인 중화전(中和殿) 뒤편에 있다. 건물의 명칭인 석어당(昔: 옛 석, 御: 어거할 어, 堂: 집 당)은 '옛 임금이 머물던 집'이라는 뜻으로 임진왜란으로 한양을 떠났던 선조가 1593년(선조 26)에 돌아왔을 때 머물던 건물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다.
역사
석어당(昔御堂)이라는 이름은 원래 덕수궁 즉조당에 붙여진 별칭이었다. 즉조당(卽阼堂)은 석어당의 북서쪽에 위치한 건축물로, 조선의 16대 왕 인조가 즉위한 장소인데, 1773년 영조는 ‘옛날에 왕이 머물던 건물’이라는 의미로 '昔御堂(석어당)'이라는 글씨를 어필로 써서 즉조당에 걸도록 하였다.
실제 석어당이 덕수궁에 건립된 것은 1896년(고종 33) 경이다.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면서 경운궁이 궁궐로서의 격을 갖추도록 수리를 지시하였고, 이 과정에서 석어당이 건립되었다. 이후 1897년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궁하여 즉조당을 정전(正殿)으로, 석어당을 침전(寢殿)으로 사용하였다.
1904년 경운궁에 큰 화재가 일어나 경운궁에 있는 대부분의 전각이 불탔는데, 이때 석어당도 즉조당·중화전 등과 함께 소실되었다. 현재의 석어당 건물은 화재 직후에 옛 모습 그대로 중건한 것으로, 당시 복원된 건물이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구조 및 형태
덕수궁에서 유일한 2층 목조 건축물로, 건물의 크기는 1층 정면 8칸, 측면 3칸, 2층 정면 6칸, 측면 1칸이다. 일정한 길이로 가공한 장대석을 쌓아 기단을 만들었으며, 방형의 주춧돌 위에 사각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초익공 형식의 공포를 올렸다. 석어당의 1층 중앙에는 대청마루를 두었고, 양 옆으로 온돌방을 설치하였다. 서쪽 온돌방에 설치된 계단을 통해서 2층으로 올라갈 수 있으며, 2층은 누마루 형태로 설계되어 주변을 조망할 수 있다.]
* 11:20~11:30 덕수궁 즉조당(德壽宮 卽阼堂) 탐방
[덕수궁 즉조당(德壽宮 卽阼堂)
덕수궁에 있는 전각으로, 광해군과 인조가 즉위한 곳이다. 석어당과 준명당 사이에 위치한다. 광해군과 인조가 이곳에서 즉위하였으며, 전각의 명칭인 즉조(卽阼)는 '임금의 자리에 오른다.'는 뜻으로 인조가 즉조당에서 왕위에 오른 것을 기념하기 위해 훗날 영조가 지었다.
역사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인해 경복궁과 창덕궁이 화재로 소실되었고, 의주로 피난을 갔다가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는 머물 곳이 없자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살았던 집에 거처를 마련하여 임시로 머물렀다. 광해군 때 창덕궁과 창경궁이 중건되기 전까지 이곳에 머물렀으며, 광해군과 인조가 경운궁(현 덕수궁) 즉조당에서 즉위식을 가졌다.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은 1897년 환궁하면서 경운궁(현 덕수궁)을 법궁(法宮)으로 삼았고, 즉조당을 ‘태극전(太極殿)’으로 개명하여 정전(政殿)으로 사용하였다. 즉조당은 덕수궁 중화전이 완공될 때까지 덕수궁의 정전으로 사용되다가 1904년 덕수궁에 큰 화재가 일어나 소실되었고, 이듬해인 1905년에 복원되었다.
구조 및 형태
정면 7칸 측면 4칸의 건축물이다. 정면 3칸을 대청마루로 두었고, 나머지는 온돌방으로 설계했다. 장대석으로 쌓은 높은 기단 위에 네모 뿔대 모양의 주춧돌을 놓고 방형 기둥을 세웠다. 공포는 초익공식이며,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구성하였다. 좌측의 준명당(浚眀堂)과의 사이에는 담장을 놓지 않았고, 복도각으로 건물을 연결하였다.
현판의 글씨는 고종이 직접 쓴 것으로, '즉(卽)'자 옆엔 '어필(御筆)', '당(堂)' 자 옆에 '光武九年乙巳七月 日(광무구년을사칠월 일)'이라고 쓰여져 있다.]
* 11:30~11:40 덕수궁 준명당(德壽宮 浚眀堂) 탐방
[덕수궁 준명당(德壽宮 浚眀堂)
건립시기·연도 : 조선 말기, 1897년(신축)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덕수궁
서울특별시 중구에 있는 대한제국기에 중건된 전각.
정면 6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건물. 고종이 러시아공관으로부터 경운궁(慶雲宮, 현 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기기 위하여 많은 건물을 중건하였던 1897년에 새로 지었다. 내전(內殿)의 하나로 외국사신을 접견하던 곳인데, 현재의 건물은 1904년 불이 나 타 버린 뒤에 즉조당(卽阼堂)과 함께 지어진 것이다.
이 건물의 서쪽과 북쪽으로 가퇴(假退)를 덧달아 내놓았으며, 뒤쪽에 온돌방 4칸을 덧붙여 전체적으로 ㄴ자모양 평면을 이루고 있다.
왼쪽으로부터 2·3·4번째 칸은 대청으로 통하는 현관으로 개방하였으며, 대청은 침전에서 흔히 쓰는 3칸대청이 아닌 2칸대청이다. 대청 오른쪽에 온돌방을 두고 다시 그 옆 한 칸은 누마루로 구성하여 즉조당의 누마루와 구성상 대칭을 이루고 있다.
장대석 바른층쌓기한 높은 기단 위에 네모뿔대의 다듬은 초석을 놓고 방주(方柱)를 세웠는데, 기둥 위는 창방(昌枋)으로 결구(結構)하고 주두(柱枓 : 대접받침)를 놓아 보머리[樑頭]를 받치고 있다. 또, 끝이 둥글게 된 보머리 밑에는 기둥 윗몸으로부터 초각(草刻)된 부재를 내어 이를 받치고 있는 초익공식을 이루고 있다.
기둥 사이 창방 위에는 소로[小累]들을 놓아 굴도리로 된 주심도리(柱心道里) 밑의 장여를 받치고 있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팔작기와지붕의 용마루와 추녀마루는 양성을 하지 않고, 용두(龍頭)를 놓아 장식하고 있다.
앞과 뒤의 대청 툇간(退間)에는 띠살창호를 달고 위쪽에 빗살로 된 교창(交窓)을 달았으나, 온돌방과 이를 둘러싼 툇간에는 井자살로 된 창호들을 달았다. 또, 온돌방에 딸린 굴뚝[煙堗]은 뒤편에 따로 검은 벽돌로 쌓고 위에 연가(煙家)를 놓아 장식하고 있다.
종래 화재가 난 뒤 경효전(景孝殿)과 흠문각(欽文閣)에 모셔져 있던 고종과 순종의 어진(御眞)을 준명전(濬明殿)과 그 서행각(西行閣)에 옮겼다는 기록으로 보아 준명당은 불타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해왔다.
그러나 이는 준명전과 준명당을 같은 건물로 착각한 데서 온 잘못된 판단이며, 『경운궁중건도감의궤(慶運宮重建都監儀軌)』를 보면 현재의 준명당은 1904년에 중건된 것임이 분명하다.
중건 이전의 준명당은 1897년에 지은 건물이고, 즉조당은 조선 중기의 건물이므로 두 건물은 서로 다른 건축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나, 중건되면서 새롭게 전체로서 구성되었기 때문에 평면구성을 제외한 구조·색채·형태 등에서 통일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후원에는 나지막한 언덕이 있고 거기에 벽돌로 쌓아 만든 굴뚝이 남아 있어 당시의 후원 조경방법을 일부나마 전해 주고 있다.]
* 11:40~11:50 덕수궁 정관헌(德壽宮 靜觀軒) 탐방
[덕수궁 정관헌(德壽宮 靜觀軒)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정동 5-1)
건축시기 : 1897년 ~ 1901년 사이 (창건)
설계자 : 아파나시 이바노비치 세레딘사바틴(Афанасий Иванович Середин-Сабатин)
덕수궁에 있는 양관, 덕홍전과 함녕전의 북쪽 언덕에 있다.
덕수궁은 근대에 지은 황궁이니만큼 경내에 서양식 건물, 양관(洋館)이 여러 채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정관헌이다. 다만, 다른 양관들과 달리 한국 전통 가옥의 일부 요소가 혼합된 형태이다. 러시아 제국 건축가 아파나시 이바노비치 세레딘사바틴이 설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현존하는 덕수궁 내 양관 중 가장 오래되었다.
‘정관(靜觀)’ 뜻은 '조용히(靜) 내다 본다(觀)'이다.
건물의 용도는 확실하지 않으며 여러 의견이 있다. 그 중 고종이 커피를 마시며 음악을 감상했던 카페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공식 기록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어진 관련 기사만 나온다. 1901년(광무 5년) 2월에 태조 이성계의 준원전 본 어진을 이곳에 모시라는 기록을 시작으로, 고종과 순종의 초상화를 보관하고 그렸다는 기록이 있다. 마지막으로 나타나는 《순종실록부록》의 기사도 1912년에 여기 있던 어진들을 중화전으로 옮겼다는 내용이다.
실록보다 더 기사량이 많은 《승정원일기》에는, 어진 외에도 신하들을 접견한 것과 봉심(奉審 : 왕명으로 왕실의 사당이나 무덤, 초상화 등 여러 시설과 물건들을 관리하고 점검하던 일)에 대한 내용이 보인다. 그러나 역시 휴식이나 커피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정관헌이 애당초 카페였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도 있다.
1915년 덕수궁 실측 자료인 〈덕수궁 원안〉에 따르면, 내부에 서양식 욕실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지하층에는 조리시설을 갖춘 주방이 딸려 있었다. 이를 통해 정관헌의 정확한 용도는 알수없으나, 적어도 일상적인 생활이 가능한 전각으로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전용카페는 아니더라도 황실의 휴식 공간임은 맞다는 주장도 있다. 1920년 5월에 《매일신보》에 실린 기사 〈자규(子規)야 우지마라 주인(主人) 잃은 덕수궁(德壽宮)을 백량동작생황진이 옛이야기가 아니로구나〉에서는 정관헌을 '고종이 아기였던 영친왕과 함께 여름 더위를 잊던 곳'이라고 언급했다. 그리고 정관헌은 황실 가족들이 살던 내전 권역에 있다. 내전의 일을 공식적으로 잘 기록하지 않는 관습을 고려하면, 기록에 어진 내용만 나온다해서 섣불리 카페나 휴식 공간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정확한 창건 연대는 모른다. 다만, 현재 남아있는 덕수궁의 건물들 중 즉조당, 석어당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1897년(건양 2년) 이후에 처음 지은 것이고, 상술한 1901년(광무 5년)에 적힌 태조 어진의 정관헌 봉안 기록을 종합하면, 저 사이에 건립한 듯 하다.
1919년 고종 승하 이후 덕수궁은 비었고 1933년 일제는 덕수궁을 공원화하면서 많은 전각들을 허물었다. 그럼에도 정관헌은 살아남았다. 다만, 관람객들을 위한 찻집, 카페로 쓰이면서 건물 구조도 바뀌었다.
8.15 광복 이후에도 한동안 '덕수궁 휴게실'이라는 이름으로 기능했다. 1954년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에서 주최한 광복절 기념 음악회를 비롯하여 각종 모임 및 행사가 이따금씩 열렸다.
윤정희가 출연한 1977년 영화 〈야행〉에서 카페로 영업 중이던 정관헌의 내부 모습이 잠깐이나마 나온다. 현재와는 다르게 칸마다 쇼윈도가 설치되었고 기타 현대식 시설도 갖춰져 있었다.
문화재청에서 2004년 2월 6일 등록문화재 제82호로 지정했다. 그러나 이미 덕수궁 전체를 사적 제124호로 관리하고 있었기에 영역이 겹친다는 이유로 2008년 6월 23일 자로 지정 해제했다.]
* 11:50~12:00 덕수궁 덕홍전(德弘殿) 탐방
[덕홍전(德弘殿)
일제시대 덕수궁의 알현실로 조성된 건물.
목차
1 개설
2 위치 및 용도
3 변천 및 현황
4 형태
5 관련사건 및 일화
개설
덕홍전은 원래 명성황후(明成皇后)의 혼전인 경효전(景孝殿)으로 건립되었으나, 1912년에 고종황제의 알현실로 개조된 이후 덕홍전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덕홍전으로 교체된 이후 고종은 이곳에서 외빈과 신료들을 접견하였다(『순종실록부록』 5년 12월 2일).
위치 및 용도
덕홍전은 경운궁 내 함녕전(咸寧殿) 서쪽, 중화전(中和殿)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본래는 경효전이라고 하여 혼전의 제례에 이용하였으나, 나중에 덕홍전으로 이름을 바꾸고 알현을 위한 장소로 사용하였다.
변천 및 현황
덕홍전은 원래 명성황후의 혼전인 경효전의 용도로 건립되었다. 경효전은 명성황후의 전호(殿號)이다.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으로 왕비가 돌아가시자 최초로 정해진 시호는 순경(純敬), 전호는 덕성(德成), 능호는 숙릉(肅陵)이었다. 당시 빈전(殯殿)은 경복궁태원전(泰元殿)으로 정했고, 혼전(魂殿)은 경복궁문경전(文慶殿)으로 정했다. 그러나 고종은 왕비의 장례를 바로 진행하지 않았다. 1896년 경복궁에서 경운궁으로 이어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했으며,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새롭게 경운궁을 정비하도록 지시했다. 이때 왕비를 위한 빈전으로 경복궁의 경소전(景昭殿)을 경운궁에 이건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1896년 9월 4일에 왕비의 시신을 경복궁 태원전에서 경운궁 경소전으로 옮겨 모셨다. 또한 1897년(고종 34) 1월 6일에는 왕비의 시호, 능호, 전호를 모두 새롭게 교체하였다. 시호는 문성(文成), 능호는 홍릉(洪陵), 전호는 경효(景孝)로 개칭하였고, 3월 2일에 시호를 다시 명성(明成)으로 바꾸었다.
고종은 1897년(광무 1) 경운궁으로 환궁한 이후에도 왕비의 장례를 바로 치르지 않고 대신 조선이 황제국에 오르는 의식을 거행했다. 1897년 10월 12일에 고종은 환구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황제가 되었으며(『고종실록』 34년 10월 12일), 빈전에 나아가 왕후를 황후로 추존하였고, 명성황후의 국장은 11월 21일에 거행되었다. 명성황후의 혼전인 경효전은 이미 경소전으로 정해져 있었고, 우주(虞主)를 봉안한 이후 경효전의 역할을 담당했다.
1904년(광무 8) 경운궁에 화재가 발생했는데 경효전으로 사용하던 경소전 역시 소실되었다. 화재 직후 명성황후의 우주는 준명전(濬明殿) 서행각에 임시 봉안하였고, 후에 수풍당(綏豐堂)으로 옮겨 모셔졌다. 이후 수풍당이 경효전이 되었다. 경운궁 화재 이후 중건 과정에서 경소전이 위치하고 있던 곳에는 원래 모습대로 새로운 건물이 만들어졌다. 당시의 기록인 『경운궁중건도감의궤(慶運宮重建都監儀軌)』에는 건물명을 경효전으로 기록하고 있다. 재건된 경효전은 동쪽에 4칸의 이안청(移安廳), 서쪽에 4칸의 중배설청(中排設廳)을 두었고, 정면에 내삼문인 융안문(隆安門)과 좌우 각 4칸의 행각을 두었다. 행각 밖에는 12칸의 어재실(御齋室)과 4칸의 숙목문(肅穆門)을 두었다. 또 숙목문 밖에는 25칸의 ㅁ자형 건물인 장방처소(長房處所)와 3칸의 돈례문(敦禮門)을 두었다.
경운궁 중건을 통해 다시 경효전이 만들어졌지만 정작 명성황후의 우주는 돌아오지 못했다. 당시에 을사늑약이 체결되는 등 정세가 매우 불안해지면서 고종 역시 함녕전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계속 중명전(重明殿)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에 고종이 함녕전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명성황후의 우주는 계속 수풍당(綏豐堂)에 머물렀고, 고종이 서거한 이후인 1921년 3월 31일에서야 창덕궁 선정전(宣政殿: 효덕전(孝德殿))에 모셔졌던 고종의 우주와 함께 종묘에 부묘되었다.
그 와중에 경효전을 덕홍전으로, 즉 제례와 관련된 건물을 알현실로 바꾸는 공사가 진행되었다. 1912년 9월 10일자 『매일신보(每日申報)』에서 ‘덕홍전의 준공’이라는 제목 아래 “창덕궁 이왕 전하의 알현실 되는 인정전(仁政殿)에 의거하여 덕수궁에 건축 중인 덕홍전은 이미 낙성하여 6일 밤부터 점등하였는데 상세히 들은즉 공사비 6만여 원을 들여서 실내 장식과 다른 것들도 극히 화려한데 대벽화는 화백 천초신래자(天草神來子)의 것으로 필치가 용건하여 근래의 걸작이라더라.” 하는 글이 실려 있기도 하다.
공사가 진행되었다고 하지만 건물의 구조에는 큰 변화가 없었으며 다만 내부 마감은 크게 변했다. 바닥은 혼전[경효전]에 적합하게 전(甎)으로 마감되어 있었는데, 이것을 마루로 바꾸었다. 창호에는 커튼을 덧대어 설치했고 내부에 조명기구로 샹들리에를 설치하였다. 기존의 월대를 축소했고 진입 계단에 변화를 주었으며 동쪽의 함녕전, 서쪽의 귀빈실과 통행할 수 있도록 복도각을 설치했다. 현재도 복도각과 연결되었던 부분에는 서양식 판문이 설치되어 있어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덕홍전으로 변경되면서 경효전 건물 자체는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경효전 주위의 부속 건물들은 크게 변했다. 경효전이 있을 당시에는 주변 건물들이 모두 제례와 관련된 건물들이었기 때문에 이것이 모두 새롭게 바뀐 것이다. 이때에는 기존 관제인 궁내부(宮內府)가 해체되고 이왕직(李王職)이 들어선 시기였다. 덕홍전 공사가 진행되면서 덕수궁 소속 이왕직 청사가 이곳에 자리 잡게 되었고 찬시실, 귀빈실이 새롭게 만들어졌다. 덕홍전 전면의 삼문은 맞배지붕에서 팔작지붕으로 변경되었다. 귀빈실과 덕홍전 전면의 행각은 현재도 경운궁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때 만들어진 건물들에 대해 『매일신보』 1914년 1월 1일자 기사에서는 “일선제도(日鮮制度)를 절충한 것”이라고 했다. 즉 조선과 일본의 건축 기법을 모두 합한 건축물이라는 내용이다. 건축물 외형은 조선의 전통 양식을 따른 듯하지만 내부 구조체는 일본의 방식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을 보면 건축 외형이 조선의 전통적인 양식을 따랐다고 하지만 전체적인 입면 비례가 전통적인 조선의 건축과는 확연히 다를 뿐만 아니라 건축적으로도 매우 수준이 떨어지는 건축물임을 알 수 있다.
형태
덕홍전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평면을 하고 있고, 기둥은 방형기둥을 사용했다. 지붕은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이익공의 공포를 갖춘 건물이다.
관련사건 및 일화
덕홍전은 고종의 알현 장소였으므로 일제시대 총독과 고위 관료들의 신임 인사 및 외교사절들의 인사를 받던 곳이었다.]
* 12:00~12:10 고종황제가 거처하던 침전인 덕수궁 함녕전(德壽宮 咸寧殿)을 탐방
[덕수궁 함녕전(德壽宮 咸寧殿)은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의 덕수궁에 있는 고종황제가 거처하던 침전이다. 1897년에 지어졌으며, 1904년 함녕전에서 시작된 덕수궁 대화재로 소실되었고 1906년에 재건되었다. 1985년에 대한민국의 보물 제820호로 지정되었다.
역사
1897년 2월 고종이 아관파천을 마치고 경운궁으로 환궁할 때에는 아직 함녕전이 지어지지 않아 즉조당을 침전으로 사용했다. 즉조당이 협소하여 침전으로 사용할 새로운 건물이 필요했고, 같은 해 6월 19일 상량문제술관으로 윤용선을 임명하는 등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 때 경복궁에 있던 건물인 만화당(萬和堂)을 이건하여 이를 개수하여 건설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궁궐지》에는 36칸의 만화당 건물을 경운궁으로 이건하였다 설명하는데 만화당과 함녕전의 전각 규모와 문의 배치가 서로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승정원일기》, 《매천야록》 등을 근거로 옮겨진 만화당 건물은 어진봉안처로 삼았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지어진 함녕전은 1904년에 아궁이에서 화재가 발생하는 바람에 화재가 발생하여 전소된다. 이 때 발생한 불은 경운궁 중심을 덮쳐 당시 중층으로 지어진 중화전, 선조때부터 전해져오던 건물인 즉조당과 석어당을 모두 파괴한다.
따라서 다시 지은 함녕전은 1904년 음력 3월에 주춧돌을 올렸고 8월에 기둥을 세운 뒤 12월에 마룻대를 올리는 상량을 마쳤다. 이 때 전체적인 구조에도 변화가 있었다.
1919년 고종이 여기서 사망하자 빈전과 혼전을 함녕전에 마련하였고 혼전은 효덕전(孝德殿)이라 하였다. 3·1 운동 당시 탑골공원에 모였던 군중 일부가 대한문을 통해 들어와 효덕전에 참배하고 만세를 이어가기도 하였다.
2009년에 행각을 복원하였고 2019년에 광명문을 원래의 위치로 이전하여 복원하였다.
구조 및 기능
목조건물이다. 정면 9칸, 측면 4칸에 한쪽 후면 4칸이 더 붙은 'ㄱ' 자형을 하고 있으며, 익공으로 결구된 간결한 건물이다. 만화당을 옮겨 지었는데 만화당은 본래 침전이 아니었기 때문에, 함녕전에도 용마루가 남아있고 쇠서 1개의 몰익공 공포를 가진다.
고종(高宗)이 왕위를 물려준 다음 순종(純宗)이 창덕궁으로 옮기자 고종이 거처하던 침전(寢殿)이다. 행각(行閣)이 있었으며 정문은 광명문(光明門)이다.
행각
남행각은 전면 16칸인데, 왼쪽에서 7번째부터 3칸은 치중문이고 그로부터 3칸 건너뛰어서 한 칸은 평강문으로 추정한다. 서행각에는 향복당과 풍안당이라는 당호가 있었고, 문도 한 칸 있었다. 북행각은 정면 9칸 규모의 만희당이 있었으며 문도 한 칸 있었다. 민도리형식으로 지어졌으며, 홑처마로 구성되었고 지붕은 우진각지붕이었다.
북측행각 바깥에 1913년 구여당(九如堂)을 지으며 규모가 확장되었고, 복도를 조성하였다.
광명문
광명문(光明門)은 황제의 침전인 함녕전의 정문이다. 1897년에 지었다가 1904년에 화재로 소실되었고, 그 해 12월에 재건되었다. 이후 일제시대에 덕수궁을 공원으로 만들고 이왕가미술관을 지을 때 광명문을 미술관의 남쪽으로 이전했다.신기전, 흥천사명 동종, 자격루가 여기서 전시되었다.
2016년 광명문을 제자리로 이전하기 위해서 문화재청이 실시한 발굴조사 결과, 광명문과 배치형태가 같은 건물지 1동을 확인하였다. 건물지는 12기의 적심시설을 가진 정면 3칸, 옆면 2칸의 건물지로, 경운궁 중건 배치도(1910년) 상의 광명문지와 그 위치와 배치상태 그리고 평면형태가 같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후 '광명문 제자리 찾기' 프로젝트를 통해 2018년 원래의 자리로 이전되었다.]
* 12:10~12:20 덕수궁 대한문(德壽宮 大漢門) 탐방
[덕수궁 대한문(德壽宮 大漢門)
덕수궁의 정문으로, 원래 이름은 대안문(大安門)이었다. 대안문은 경운궁(덕수궁의 옛 이름)의 동쪽에 위치한 문으로, 처음부터 경운궁의 정문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경운궁의 본래 정문은 인화문(仁化門)이었는데, 1902년 경운궁의 정전인 중화전(中和殿)을 건립하면서 인화문을 철거하였고, 그 결과 덕수궁의 동문이었던 대안문이 덕수궁의 정문이 되었다. 건물의 명칭이었던 대안(大安)은 ‘나라가 편안하고 국민을 편안하게 하라’라는 뜻이었다. 1904년 경운궁에 발생한 대화재로 인해 경운궁의 중요 전각이 대부분 피해를 받았는데, 대안문 역시 피해를 입어 수리를 진행하였다. 1906년에 수리를 완료였고, 이 과정에서 건물의 이름을 대한문(大漢門)으로 바꾸었다. 당시 현판의 글씨는 남정철(南廷哲)이 썼다.
대한문의 원래 위치는 지금의 자리에서 33m 가량 동쪽으로 떨어진 곳이었다. 태평로 도로가 확장되고, 덕수궁 궁역이 축소되면서 대한문은 태평로 도로 한가운데에 위치하였고, 1970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었다.
구조 및 형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건축물이다. 지붕은 우진각지붕으로 용마루와 추녀마루에 회반죽을 발라 양성바름을 하였고, 망새와 용두, 잡상 등을 설치하여 지붕 위를 장식하였다. 건립 당시에는 문 앞에 월대와 계단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한문의 기단과 계단은 훼손되었고, 2021년부터 대한문 앞 월대를 발굴 및 복원하는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 12:20~12:30 덕수궁 대한문에서 서울 중구 정동길 41-11 번지에 있는 중명전으로 이동
* 12:30~13:00 중명전(重眀殿) 관람
[중명전(重眀殿)
위치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길 41-11 (정동)
중명전은 대한제국의 중요한 현장이다. 1904년 경운궁(현 덕수궁) 대화재 이후 중명전으로 거처를 옮긴 고종황제의 편전으로 사용되었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이곳에서 불법적으로 체결되었으며 그 후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국제사회에 알리고자 1907년 4월 20일 헤이그 특사로 이준 등을 파견한 곳도 바로 중명전이다. 한편 중명전은 1925년 화재로 외벽만 남기고 소실된 뒤 재건하여 외국인을 위한 사교클럽으로 주로 쓰이다가 자유당 정부가 들어서면서 국유재산으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은 영구 귀국한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에게 중명전을 돌려주었다. 1977년 중명전은 다시 민간에 매각되었고, 2003년 정동극장에서 매입한 뒤 2006년 문화재청에 관리 전환하여, 2007년 2월 7일 사적으로 덕수궁에 편입되었다. 2009년 12월 복원을 거쳐 2010년 8월부터 전시관 [대한제국의 운명이 갈린 곳, 덕수궁 중명전]으로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덕수궁 돌담길을 돌아 뒤쪽으로 가면 정동극장이 있고, 그 골목으로 들어가면 중명전이 있다. 중명전은 원래 정동지역 서양 선교사들의 거주지에 속해 있다가, 1897년 경운궁(현 덕수궁)이 확장되면서 궁궐로 편입되었다. 이때 당호를 [수옥헌]이라 짓고, 주로 황실 도서관 용도로 사용되었으나 1901년 화재로 전소된 후 재건되어 지금과 같은 2층 벽돌 건물의 외형을 갖추게 되었다. 건물의 설계는 독립문, 정관헌 등을 설계한 러시아 건축가 사바찐이 하였다.
이용안내
이용시간 : 09:30~17:30
쉬는날 : 매주 월요일
주차시설 : 있음
문의및안내 : 02-751-0734 ]
[덕수궁 중명전(德壽宮 重眀殿)
대한민국 사적 제124호 덕수궁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길 41-11 (정동)
수량 / 면적 : 1동 2층, 대지 2,399㎡, 건축면적 877.8㎡
건축시기 : 1899년 (창건), 1901년 (중건), 2010년 (복원)
설계자 : 아파나시 이바노비치 세레딘사바틴(Афанасий Иванович Середин-Сабатин)
목차
1. 개요
2. 이름과 현판
3. 역사
3.1. 조선 · 대한제국 시기
3.2. 일제강점기
3.3. 광복 이후 ~ 현재
4. 관람
5. 복원 오류 논란
1. 개요
덕수궁의 별전(別殿). 대지 727평, 규모 236평이며 덕수궁 본궁과는 돌담벽 사이로 떨어져 있다.
을사늑약을 체결한 장소이다. 즉, 망국의 출발점인 비극의 장소이다.
2. 이름과 현판
'중명(重眀)' 뜻은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는다' 또는 '거듭하여 밝다'이다. 《주역(周易)》의 이괘(離卦)에서 따온 이름이다. 그러나 상술했듯 이곳에서 망국을 알리는 을사조약을 체결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실제 역사와는 매우 어긋난 모순적인 이름이다. 발음이 비슷한 준명당과 헷갈려하여 준명전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특이하게 '명'자를 흔히 '밝을 명' 자로 쓰는 '明'이 아닌 '眀' 자로 썼다. 얼핏 보면 잘 구분이 안가지만 '明'에서 '날 일(日)'이 아닌 '눈 목(目)'이 들어가있다. '明'과 모양만 다른 같은 글자이며, '밝게 볼 명'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를 두고 여러 설이 있다. 그 중 일제가 '明'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眀'을 대신 썼다는 주장과, 반대로 일본(日本)을 싫어한 대한제국 정부에서 '日'이 들어간 '明'대신 '眀'을 썼다는 이야기가 있다. 결론을 말하면 둘 다 낭설이다. '眀'은 '朙'의 이체자이며 엄연히 대한제국 이전부터 쓰던 한자이다. 진짜로 '明'이 마음에 안 들었다면 창경궁에 있는 명정전은 물론 다른 전각들의 편액에 들어간 '明'을 모조리 갈아치웠을 것이다. 이런 거짓 정보에 속지 말자.
현재 현판은 2010년 8월에 복원한 것이다.
3. 역사
3.1. 조선 · 대한제국 시기
원래 덕수궁 궁역(宮域)이 아니었다. 1884년(고종 21년) 11월에 미국 장로교 선교사 호러스 뉴턴 알렌이 마련한 곳으로, 이 일대는 알렌의 집 말고도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등 선교사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었다. 1886년(고종 23년)부터는 독신 여성 선교사들의 거처로 변모했고, 1887년(고종 24년)에 알렌이 미국으로 돌아간 후 미국 북장로회 소속 선교사인 애니 앨러스(Annie J. Ellers)가 여성 교육기관인 정동여학당(현재의 정신여자고등학교)을 세웠다.
정동여학당은 1895년(고종 32년)에 연지동으로 옮겨갔고 1897년(광무 원년) 대한제국 정부에서 부지를 매입하여 덕수궁 영역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기존 건물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서양식 도서관인 수옥헌(漱玉軒)을 지었다. 이 때 미국인 건축기사 다이가 설계감리를 했다고 한다. 정확한 완공일자는 모르나 1898년(광무 2년) 1월 말에 준공을 앞두고 있었다는 주한일본공사관의 기록을 보아 그 무렵에 완공한 듯 하다.
수옥헌 건립 이유를 고종의 미국 의존성에서 기인한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고종은 을미사변 이후 일본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러시아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친러파와 러시아 외교관들이 도리어 고종을 압박하는 형세가 되었다. 서울역사편찬원의 전임연구원 장경호에 따르면, 러시아에 부담을 느낀 고종은 덕수궁 환궁 전후로 해서 더욱 미국 의존도를 높였고[4] 여러 번 미국공사관으로 망명할 의도를 비공식적으로 내비쳤다. 그런데 당시 미국에서는 한국에 대한 정치적 중립을 지킨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고, 그러자 고종이 차선책으로 미국공사관 바로 옆에 임시 피난처 개념으로 왕립도서관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런 정황은 1897년(광무 원년) 10월 경에 주한 미국 공사였던 호러스 뉴턴 알렌이 미국 국무부 장관에게 보낸 문서에 자세히 나와있다.
(전략) 특히 황제는 우리 공사관으로 오고 싶어합니다. 저는 황제가 다른 열강들을 불신한다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러시아가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가 보호처를 말해줄 수 없다는 점을 기회가 있을 때 언급했습니다. (중략) 황제는 지금 그가 여기로 영구히 파천해 온다는 것을 기대할 수 없게 되자 소위 "왕립도서관"이라는 것을 우리 공사관 옆문에 설치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곳은 미국인들로 둘러싸인 곳입니다. 제가 그린 "왕립도서관"을 참조하십시오. 저는 황제가 위험이 닥치면 이 도서관으로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후략)
1897년 10월 13일에 알렌 공사가 미국 국무부 장관에게 보낸 문서
어쨌든 수옥헌은 완공 이후 도서관으로서 수많은 황실의 서책들과 보물들을 보관하는 장소가 되었으며, 그 외에도 독일의 알베르트 빌헬름 하인리히 친왕 접견 등 외국의 주요인사들을 맞이하는 공간으로도 쓰였다.
1901년(광무 5년) 11월 16일에 수옥헌 일곽의 건물 한 채에서 불이 났다. 불은 삽시간에 수옥헌으로 번져 수옥헌은 소실되고 말았다. 호머 헐버트가 발간한 《더 코리아 리뷰》 - 1901년 11월 호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이달(11월) 16일 새벽 2시경, 미국공사관 바로 서쪽에 붙어 있는 제실도서관(수옥헌) 후면의 외곽 건물 한 채에서 이유모를 화재가 발생했다. 만약 거기에 어떠한 응급조치가 있었다면, 본 건물로 번지기 전에 불길은 쉽게 꺼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장소는 방치된 듯 했으며, 물동이 서 너개가 없었던 탓에 정부는 매우 귀중한 건물을 잃고 말았다. 도서관에는 숱한 귀한 서책들이 있었는데 이것들은 피아노 한 대를 포함한 가구 일체와 함께 모두 불타 사라졌다."
호머 헐버트, 《더 코리아 리뷰》 - 1901년 11월 호
화재 이후 러시아 제국 건축기사 아파나시 이바노비치 세레딘사바틴의 설계 감리 하에 재건했다. 이 때 지금의 2층 벽돌 건물로 바꾸었다.
1904년(광무 8년) 4월에 덕수궁 본궁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고종이 이곳에 기거하면서 편전 겸 침전으로 활용했다. 이후 1907년(광무 11년)에 고종이 강제퇴위당하고 순종이 즉위할 때까지의 약 3년 동안 사실상 대한제국의 실질적인 황궁 기능을 담당했다.
1905년(광무 9년) 11월에 이토 히로부미와 을사오적이 을사조약을 여기에서 강제체결했다.
수옥헌에서 중명전으로 이름을 바꾼 시기가 언제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중명전 이름이 공식 기록에서 처음 등장하는 시기가 1906년(광무 10년) 11월(음력 9월) 이후인 것을 보아 그 무렵에 바꾼 듯 하다.
3.2. 일제강점기
1910년 한일병합 이후에는 덕수궁 궁역 축소화에 따라 덕수궁 궁역에서 분리당했다. 경성구락부가 인수하여 외국인들의 사교클럽으로 활용했다. 1925년에는 조리실의 화재사고로 외벽을 제외하고 전부 불탔으며 이후 재건했다.
3.3. 광복 이후 ~ 현재
1945년 8.15 광복 이후에는 국가가 소유 및 관리했다. 1950년 6.25 전쟁 당시에는 서울을 함락한 북한군과 공산당이 사용했다가 수복 이후 다시 대한민국 정부에서 소유했다. 1963년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영구 귀국한 영친왕과 이방자 부부에게 중명전 사용권을 이양하여 영친왕 부부가 소유했다가 영친왕이 사망한 이후 다시 민간에게 위탁, 매각했다. 그러면서 점차 역사성을 상실하며 일반 점포로 전락했다.
1983년에 서울특별시청에서 시장령에 따라 중명전을 인수하여 서울시 유형문화재 53호로 지정했고[9] 2003년에 정동극장이 인수했지만, 앞뜰이 주차장으로 쓰이고 건물 지하는 폐건물마냥 방치된 모습이 2006년 MBC 〈느낌표 - 위대한 유산 74434〉에서 방영하면서 논란이 일었다.
이후 2006년에 문화재청에서 소유했고 2007년 2월에 사적 124호 지정으로 덕수궁 궁역으로 재편입했다. 이후 고증을 통해 대한제국 시기의 모습대로 복원해 2010년 8월에 일반에 개방했다. 2016년 8월부터 오래 된 시설을 보수하고 20세기 초 권역의 평면도를 검토해 당시 지반 높이를 반영시키고 석축과 계단을 복원하여 11개월의 공사 끝에 2017년 7월에 민간에 재공개했다.
4. 관람
현재는 을사조약 및 대한제국 국권회복을 위한 전시관으로 사용한다.
1층에 제1실 ‘'덕수궁과 중명전', 제2실 '을사조약의 현장', 제3실 '을사조약 전후의 대한제국', 제4실 '대한제국의 특사들' 등 총 4개 실로 전시실을 구성했다.
중명전 1전시실에서는 덕수궁과 정동 일대를 축소 모형으로 제작하고 그 위에 영상을 투사하여 개항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중명전과 덕수궁 권역의 변화를 시각적으로 구현했다.
중명전 2전시실에서는 당시 의복을 고증해 입힌 극사실 인물모형들을 사용해 을사조약 체결 장면을 재현함으로써 체결 현장을 눈으로 보듯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게 했다. 이근택의 복장에 고증 오류가 있는데, 부장 상복의 카라에는 별이 2개가 아닌 3개가 있어야 한다.
중명전 3전시실에서는 을사조약 체결 전후로 숨가쁘게 돌아가던 국제정세와 국내외 조약 체결 반대의 움직임을 구현했다.
중명전 4전시실에서는 주권 회복을 위해 1907년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된 대한제국 헤이그 특사들의 활동을 각종 영상으로 재구성했다.
중명전 2층에는 고종이 외국 사신들을 맞았다는 알현실이 있다. 같은 층에 문화유산 국민신탁 사무실도 같이 위치해있어 개방을 안했지만, 2017년 말부터 알현실에서 특별전을 열어 개방한다.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관람이 가능하며, 관람과 관련한 더 자세한 내용은 덕수궁관리소로 문의하면 안내받을 수 있다. 안내실 전화는 02-751-0734.
5. 복원 오류 논란
중명전을 복원하면서 고증을 잘못했다는 논란이 있다. 근대사료 연구자인 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2016년 7월 25일 한겨레에 1905년 당시 미국에서 출간한 러일전쟁 사진집에 실린, 당시 미국공사관 마당에 도열한 경비병들의 모습과 그 뒤로 보이는 중명전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공개했다. 사진을 보면 중명전 건물 정면 가운데 부분에 1층 현관과 2층 베란다까지 함께 튀어나온 포치가 있다. 그러나 현재 복원한 중명전은 1층 현관만 튀어나와 있고, 2층 부분은 다른 면의 테라스와 같이 돌출하지 않은 구조라 복원을 잘못했다는 것이다.
2010년 문화재청이 대한제국 시기 사료들을 토대로 복원했으나 2층과 벽면 부위 등의 고증이 불명확하다는 지적을 계속 받아왔는데 이 사진 자료의 공개로 확실히 밝혀진 셈. 당시 복원공사 자문을 맡았던 김정동 목원대 명예교수는 “구한말 건물 정면을 근접해 찍은 사진은 처음 본다. 복원 당시 건물 정면 원형에 대한 자료가 별로 남아 있지 않아 벽체의 원형을 추정하면서 복원했던 만큼 이번에 발굴된 사진은 앞으로 건물 지붕과 정면 등을 재복원할 때 중요한 근거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문화재청 측은 "당장 재복원 방침을 정하기는 어려우며 앞으로 전문가 자문회의를 통해 원형 사진을 검토해 재복원 여부 등을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현재까지 원형 복원을 하지 않았고 관련 계획도 알려진 게 없다.
중명전은 본래 벽돌 구조에 목조 바닥으로 이루어진 구조였다. 그러나 현대에 철근콘크리트가 추가되었고 문화재청이 복원 공사를 할 때 이것을 그대로 유지했다.]
* 13:00~13:05 서울 중구 정동길 41-11 번지에 있는 중명전에서 서울 중구 정동길 26 번지에 있는 이화여자고등학교 백주년기념관으로 이동 [이동거리 319m, 5분 소요]
탐방지 : [이화여고 100주년기념관&배재학당역사박물관&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서울유관순기념관]
탐방일 : 2024년01월31일(수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서울 종로구 : 최저기온 1도C, 최고기온 8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1시간55분 소요)
* 13:05~13:10 이화여고 100주년기념관을 사진촬영
[이화여고 100주년기념관은 1975년의 화재로 철거된 프라이홀 자리에 건립한 교육관으로 서울 중구 정동길 이화여고 동문 옆에 있다. 화재로 철거되기 전까지 프라이홀은 구 손탁호텔을 대신하여 기숙사와 실험실, 교실 등으로 활용되었다. 프라이홀의 복원을 위한 졸업생들의 오랜 노력 끝에 2004년 이화여고 100주년기념관이 준공되었다.
지하 1층, 지상 5층의 멀티미디어 교육관으로 갤러리, 카페, 음악실, 개인연습실, 시청각실, 공동작업실, 교사연구실 등의 다양한 시설들을 갖추고 있다. 1층과 2층의 화암홀은 공연에 적합한 최신 시설과 장비를 갖추고 있어 뮤지컬, 콘서트 등 다채로운 공연과 교육 행사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위치는 수도권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6번 출구에서 230m에 있다.]
* 13:10~13:18 서울 중구 서소문로11길 19 번지에 있는 배재학당역사박물관으로 이동 [0.5km, 8분 소요]
* 13:18~13:35 배재학당역사박물관 관람
[배재학당역사박물관은 교육, 종교, 정치,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 근대사를 새롭게 조명할 자료와 담론이 모여드는 공간이다.
배재학당은 1885년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한국 최초의 서양식 근대 교육기관이다. 고종황제는 1887년 [유용한 인재를 기르고 배우는 집]이라는 뜻으로 이곳에 배재학당이란 이름을 하사하였다. 2008년 배재학당역사박물관으로 새롭게 태어난 배재학당 동관(서울시 기념물 제16호)은 1916년 준공된 유서 깊은 근대 건축물로, 아펜젤러가 초기부터 영어 수업을 비롯한 전인 교육을 실천했던 공간이자 김소월, 주시경, 나도향 등 수많은 근대 지식인들을 배출한 신교육의 발상지며, 신문화의 요람이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에는 근대 교육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귀한 소장품들과 함께, 상설 전시실, 기획 전시실, 체험 교실 등을 갖추고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 근대사를 새롭게 조명할 자료를 소장하여 전시한다. 수도권 지하철 1, 2호선 시청역 10번 출구에서 240m에 있다. 주위에 덕수궁과 서울시립미술관이 있어서 함께 둘러보면 좋다.]
13:35~13:37 덕수궁길 61 번지에 있는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으로 이동 [161m, 2분 소요]
13:37~14:20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관람
[서울시립미술관(서소문본관)은 시대와 미술의 변화에 부응하고 서로를 채우며 성장해 가는 네트워크 미술관이다.
서울 도심 한복판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자리 잡은 서울시립미술관은 1920년대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옛 대법원 건물을 전면부만 그대로 보존한 채 신축하였다. 미술작품을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보존하여 다양한 기획전을 통해 일반 시민들에게 미술을 알리고, 현대미술의 발전을 위해 이와 관련된 출판 활동과 작가 지원 프로그램을 시행하며 다양한 교육 강좌를 운영하여 미술 문화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미술관 본관 1, 2, 3층에는 총 6개의 전시실이 있는데, 이 중 1개는 상설전시실로 [천경자의 혼]을 상시 전시하고 있다. 지하에는 교육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강의실과 세미나실이 자리하고 있다. 각 예술 분야의 자료를 소장한 자료실도 갖추고 있으며, 전시용 도록과 아트상품을 판매하는 뮤지엄샵과 카페테리아 등의 편의시설도 운영하고 있다. 서울시립미술관은 정동극장, 정동제일교회가 있는 고전미 넘치는 장소를 품은 정동길 옆에 있어 미술관 관람의 여운을 이어갈 수 있다.
서울 중구 덕수궁길 61
영업시간
매주 월요일 휴무
- 입장 마감 시간 평일 19시 / 주말, 공휴일 17시
[덕수궁 돌담길에서 정동길로 접어들면 고풍스러운 건물 한 채가 우뚝 서 있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이다. 전시보다 먼저 미술관 건물 자체의 건축미가 두드러진다. 미술관 측은 르네상스 양식인 옛 대법원 건물의 전면부는 그대로 보존하고 후면부에 현대식 건물을 신축했다. 미술관에 들어섰을 때 가장 처음 만나는 공간이 바로 옛 건물의 전면부와 새 건물의 벽면을 유리로 연결한 매개 공간이다.
특히 유리 천장으로 쏟아지는 자연광은 정말 매력적이다. 서울시립미술관의 전시회는 전문성과 대중성을 적절히 조화시키는 것으로 유명하다. 샤갈, 피카소, 마티스, 마그리트, 고흐 등 미술에 문외한인 사람도 익히 알 만한 세계 유명 화가들의 전시회는 물론 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 미술관 봄나들이전 등 특색 있는 기획 전시를 선보인다.]
[서울시립미술관은 2024년 서울시립 사진미술관 개관을 앞두고 한국현대사진뿐만 아니라 동시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구본창(具本昌, 1953년생)의 회고전 ≪구본창의 항해≫(2023.12.14. ~2024.3.10.)를 서소문본관 1, 2층에서 개최합니다.
구본창 작가는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한국현대사진의 시작과 전개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가 작가이자 기획자로 개최한 ≪사진 새시좌(視座)≫(1988.5.18.~6.17., 워커힐미술관, 서울)에 출품된 작품들은 ‘연출 사진(making photo)’이라는 새로운 형식으로 한국 사진계와 미술계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습니다. 사진이 객관적인 기록이라는 전통적 역할을 뛰어넘어 회화, 조각, 판화 등 다양한 매체의 속성을 반영해 주관적인 표현이 가능한 예술 세계라는 인식은 그의 전 작품을 관통하며 한국 현대 사진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습니다.
구본창 작가의 이번 대규모 회고전은 작가가 섬세한 기질을 지녔던 내성적인 소년 시절부터 현재까지 수집해온 사물과 이를 촬영한 작품, 중학생 때 촬영한 최초의 <자화상>(1968)을 포함한 사진들, 대학생 때 명화를 모사한 습작 등 그간 접하기 어려웠던 작품과 자료를 선보이는 ‘호기심의 방’으로 시작됩니다. 이어 작가가 유학 시절부터 제작한 <초기 유럽>(1979~1985) 시리즈부터 최근의 <익명자>(1996~현재)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총 50여 개의 작품 시리즈 중 선별한 43개 시리즈의 작품 500여 점과 자료 600여 점을 시기와 주제에 따라 ‘모험의 여정’, ‘하나의 세계’, ‘영혼의 사원’이라는 부제 하에 전시합니다. ≪구본창 사진전≫(2001.5.4.~6.24., 로댕갤러리, 서울)으로 대중에게 각인된 <태초에>(1991~2004)와 <굿바이 파라다이스>(1993) 시리즈, 그리고 ≪구본창(Bohnchang Koo)≫ (2006.7.7.~7.30., 국제갤러리, 서울)으로 조선백자를 국내외에 널리 알렸던 <백자>(2004~현재) 시리즈는 사실 그의 깊고 넓은 작품세계 일부라 할 수 있습니다. 본 전시는 도시풍경을 스냅 형식으로 담은 작품, 자신을 피사체로 삼아 다양하게 변주한 작품, 자연을 추상적으로 형상화한 작품, 오래된 사물이 지닌 손길과 시간을 섬세하게 담은 작품 등 다양한 소재와 형식의 작품을 폭넓게 선보입니다. 특히 1989년 단체전에서 단 한 번 일부 소개됐던 솔라리제이션(solarization) 기법의 <무제>(1989) 시리즈를 전시해 작가의 독특한 초현실적 미감을 보여줍니다. 또한 임진왜란, 일제강점기, 6·25전쟁, 군사독재라는 굴곡진 역사를 간직한 광화문 부재를 낮과 밤에 기록한 <콘크리트 광화문>(2010) 시리즈를 최초로 발표합니다. 이러한 작품에 더하여 주요 관련 자료를 전시하고 충실한 설명으로 감각적인 사진 안 깊은 곳에 켜켜이 쌓인 작가의 노고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이야기를 온전히 드러내 작품의 진면목을 널리 알리고자 합니다. 또한 작가의 성장 과정, 시기별 작품 전개 양상, 국내외 인사와의 인연과 영향, 국내외 전시 참여 계기와 전시 기획자로서의 면모 등을 면밀하고 체계적으로 작성한 연보를 통해 구본창 작가와 한국현대사진이 어떻게 연결돼 발전되어왔고 해외로 확장됐는지 상세히 파악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는 작가가 지닌 오래된 열성적 수집 습관으로 작품 및 전시 관련 자료를 소중히 보존해왔기에 가능했습니다.
자신의 길을 찾아 용기 내 먼 항해를 떠났던 1979년에서 45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구본창 작가의 작품은 국내외 유수의 미술관에 소장되었고, 전시 역시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는 작가가 그간 작업을 위해서 전국 곳곳을 찾아다녔고 세계 각지를 누비고 다녔으며, 원하는 대상을 만나기 위해서 수 년에 걸친 기다림도 마다하지 않았던, 지난하지만 기꺼운 여정 끝에 다다른 눈부신 결과입니다. 그동안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 기획자로 국내외 전시를 통해 한국사진의 세계화에 기여했고, 한국 사진계의 선배, 동료, 후배들의 작업을 해외에 알렸으며 시대를 앞서가는 실험적인 작품활동으로 사진을 현대미술의 장르로 확장해온 구본창 작가의 회고전은 여러 면에서 유의미한 전시입니다. ‘구본창의 항해’를 따라 너와 나, 우리의 존재와 삶의 의미에 관해 깊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연계 프로그램전시 연계 프로그램 「작가와의 대화: 구본창의 작품 제작」을 진행합니다. 한희진 학예연구사의 사회로 구본창 작가의 주요 작품을 시기별로 제작 방법 변화에 따라 이야기 나누며 작가의 작품세계를 깊이 이해해 보세요.
- 일시: [1회차] 2024. 1. 27.(토) 14:00-16:00 [2회차] 2024. 2. 17.(토) 14:00-16:00
- 장소: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지하 1층 세마홀
- 대상: 누구나
- 모집정원: 회차별 150명
- 참 가 비: 무료 ]
14:20~14:35 서울 중구 통일로4길 30-1 번지에 있는 서울유관순기념관으로 이동 [이동거리 0.9km, 15분 소요]
14:35~15:00 서울유관순기념관 관람
[서울유관순기념관은 유관순 열사의 독립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이화여자고등학교 내에 1974년 완공한 전시관이다. 이곳은 유관순 열사가 공부하며 거닐던 곳으로, 1919년 3월 1일 유관순을 비롯한 이화학당의 학생들이 이 교정의 기숙사 뒷담을 넘어 남대문 쪽으로 달려가 만세를 불렀던 역사의 현장이라는 점에서 장소의 역사성이 살아있는 곳이다. 완공 이후 여러 차례 증축을 통해 현재 1,700석 규모의 강당으로 되어 있으며, 이화인의 시작과 끝인 입학식과 졸업식이 이곳에서 거행된다. 또한, [유관순상] 시상식을 비롯한 각종 행사가 이곳에서 열린다.
1층은 교회로 사용되고 3층은 이화여고 총동창회로 사용되고 있으며, 2층 홀에 유관순 열사의 사진자료와 유품들을 볼 수 있는 전시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2층 홀에서 전시하는 사진 자료의 양이나 규모 면에서 충남 천안에 있는 유관순기념관에 비해 매우 소박하지만, 서울 도심에서 유관순 열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귀중한 장소이다. 또한 학교 내에는 유관순 동상과 유관순 열사가 빨래했던 우물터가 남아 있다. 이 밖에도 이화여자고등학교 교내에는 심슨기념관, 이화여고 100주년기념관 등의 역사 관광지가 있어 유관순기념관과 함께 둘러볼 수 있다.
안내전화 : 02-752-3353
입장료 : 무료
이용시간 : 10:00 ~ 17:00
휴무일 : 매주 일요일]
* 15:00~15:12 서울 중구 칠패로 5 번지에 있는 서소문 성지 역사박물관으로 이동 [이동거리 764m, 12분 소요]
탐방지 : 서소문 성지 역사박물관
탐방일 : 2024년01월31일(수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서울 종로구 : 최저기온 1도C, 최고기온 8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40분 소요)
* 15:12~15:41 서소문 성지 역사박물관 탐방
[2019년 6월 개관한 서소문 성지 역사박물관은 순교한 천주교인들을 기리는 곳이지만 건축 디자인으로도 유명하여 많은 사람의 발걸음을 이끄는 곳이다. 서소문 일대에서는 60여 년간 수많은 사람이 천주교 박해를 받았으며, 희생당했다. 따라서 서소문 역사 공원에는 박해받은 천주교인들의 영혼들을 기리는 현양탑이 세워져 있다.
2014년 방문했던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이곳을 방문할 정도로 한국의 천주교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며. 건축 디자인 면에서도 특별해 2019년 서울시 건축상 최우수상을 받았다. 건물 내부는 굵은 직선과 곡선으로 이뤄졌으며 외부는 붉은색 벽돌로 지어져 강렬한 인상을 준다.
박물관에서는 천주교 박해와 관련한 전시와 예술 작품을 만나 볼 수 있다. 매주 목요일에 서소문 역사탐방 해설을 진행하고 있어 서소문 성지와 천주교의 역사에 관한 상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서소문 성지 역사박물관은 독특하게 지하에 자리하고 있으며, 지하 2층에서는 상설 전시를 만나 볼 수 있다.
계단을 따라 지하 3층으로 내려오면 하늘광장을 만나게 된다. 하늘광장은 경건함을 가득 담은 공간으로 절제된 사각형의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늘, 빛, 직선만이 존재하는 이 공간은 천주교 박해의 먹먹함과 슬픔이 그대로 담겨 있다.]
* 15:41~15:52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에서 경찰청.동북아역사재단(중) 정류장까지 도보로 이동하여 탐방 완료 [11분, 666m 이동]
15:52~16:05 경찰청 맞은편에 있는 경찰청.동북아역사재단(중) 정류장에서 구산역1번출구.예일여고 정류장으로 가는 752번 버스 승차 대기
16:05~16:33 경찰청.동북아역사재단(중) 정류장에서 구산역1번출구.예일여고 정류장으로 이동 [28분, 12개 정류장 이동]
덕수궁 안내도
중명전 위치도
서소문 성지 역사박물관 위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