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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진성이씨 후손들이여 ! 원문보기 글쓴이: 松河22翰邦57
금상즉위 원년인 갑자년에 제일 먼저 두 분 선정신(先正臣)의 사묘(祠廟)에 치제하라는
명을 내리셔서, 9월 17에 좋은 날을 잡아 선조(先祖)의 욕례(縟禮)를 거행하니, 선비로서
모인 자가 이천 여명이었다. 장차 일을 마치고 문순공(文純公) 의 사당에서 강론하여
결정하려는데, 제사를 돕던 유생들이 모두 의논하여 나에게 부탁하니 내가 감히 사양할 수
없었다. 10월 5일에 출발하여 인척인 유여언(柳汝言)과 함께 말을 타고 가다가 운야(雲野)에서
묵었다. 다음날 오후에 냇가의 가게에서 말을 먹이고 여언과 헤어졌다.
모두 사흘을 묵은 후 9일 오후에 부포(浮浦)의 친척인 이씨의 집에 들러 인척 유씨의 누이를
만나고 저녁에 의촌(宜村)의 용관(用觀) 형에게 가서 상계(上溪)에 갔다. 이어서 삼척(三陟)의
원님인 이박여(李博汝)의 집에 방문하여 묵었다. 다음날 박여와 함께 말을 타고 상계에 가보니
사방에서 말을 타거나 걸어서 모인 사람들이 연이어 있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
한서암(寒棲菴)에 들어가 주인을 만나니 소두(疏頭) 를 맡은 어른과 이 판서(李判書),
홍주(洪州)의 원님인 덕여(德輿) 이휘재(李彙載) 도 내의 노성한 어른 수십 명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방 안에서 잠깐 인사를 나누고 나니 박여 형이 상사(上舍) 유덕명(柳德明)과 함께 나더러
뒤쪽 마루에 가서 쉬자고 하였다. 감역(監役) 이만각(李晩慤)이 와서 만났는데 반가운 마음을
다하여 마치 예전부터 알던 것 같았다. 오후에 도석(道席)을 열었는데 선비 천여 명과
권망(圈望)을 맡은 분이 나의 이름을 도집례(都執禮)로 추천하기에 내가 자리를 피하여
굳이 사양하였으나 좌중에서 더욱더 부지런히 청하였다. 정언(正言) 유치호(柳致好)가
“문순공의 향사(享祀) 일이니 문원공(文元公)의 자손들이 이 임무를 사양해서는 안 되오.”
라고 하기에 부득이하여 자리에서 나와 상읍례(相揖禮)를 행하고 동그라미를 그리고
일어나니 밤은 이미 2경이었다.
11일 아침 다시 도석(道席)을 열고 같은 날에 고계(古溪) 이휘령(李彙寧) 을 제사하는 일을
했는데 이때의 도집례는 바로 유정언이었다. 식후에 이 고을의 원님과 예관, 차비관(差備官) 이
모두 들어와 먼저 선생의 제사를 거행하고 다음으로 고계공에게 제사를 지내었는데, 제관과
관장으로 모인 사람들이 도합 10여 명이었다. 제사를 마치고 관장에게 음복례를 거행하고
자리를 암서헌(巖棲軒)의 정당에 펴고 유생들은 방 안에 앉았다. 이윽고 자리를 마칠 때 내가
좌중에게 말하기를 “제가 오늘 성대한 예전(禮典)을 볼 수 있었고 또한 여러 군자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주선(周旋)하여 평생에 말하고 싶었던 마음을 이루게 되었으니 영광과 행운이
대단합니다.
그런데 청량산 한 구역을 구경하는 것은 바로 예전부터 그리던 것으로 지금 다행히도 신령이
사는 곳을 지척에 두고서 한번 가면 도달할 수 있으니 지금 구경하지 못한다면 이 산이 사람을
저버린 것이 아니라 사람이 이 산을 저버린 것이라 하겠습니다. 저는 유적을 찾아서 60년 동안
묵은 빚을 갚으려 하는데 여러 군자들 중에는 나를 따라 가실 수 있는 분이 계신지요?” 라고
하니, 유치호(柳致好) 계호(季好), 김건수(金健壽) 문서(文瑞), 신병흠(申秉欽) 이중(彛仲)이
일어나 호응하면서 “우리들도 또한 청량산에 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할 수가 없었습니다.
형께서 만약 앞에서 인도하신다면 우리들이 마땅히 뒤를 따를 것입니다.” 하였다. 그 밖에
의촌의 이휘경(李彙暻) 치운(穉運), 이휘윤(李彙潤) 수옥(水玉)과 원촌(遠村)의 이찬희(李贊羲)
서오(叙五) 등 수십 명이 내일 원촌에서 함께 모일 것을 약속하였다. 이만각(李晩慤)
근휴(謹休)는 재계 중이라서 함께 할 수 없으므로 깊이 아쉬운 마음을 표하였다. 이날 원촌
군망(君望)의 집에서 묵었다. 식후에 약속한 사람들이 다 모여서 서로 나뭇가지를 잘라서
지팡이를 삼고 짚신과 신을 빌려서 천천히 걸어서 분강(汾江)으로 해서 올라가 단사(丹砂)와
경암(景巖), 미천(瀰川), 고산(孤山)을 거쳤는데 고산은 바로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 의
옛 정자가 있는 곳으로 또한 매우 경치가 좋았다.
원촌에서 청량산까지의 거리는 30리인데 청량산의 동구에 도착하니 골짜기에 땅거미가 지고
가늘게 빛나는 달이 산에서 떠오르니 산 아래 거주민의 집들이 수풀 속에서 아득하게 보였다.
이곳에서 말을 내려 서로 부축하고 끌면서 돌 위로 오르는데, 돌로 이루어진 길에는 쌓인
돌들이 많고 등나무 넝쿨들이 그늘을 이루었으니 그 위험함과 고생스러움은 자못 전에 가
보았던 기이한 경치에 비한 것이 아니어서 능히 부여잡고 올라가 나아갈 수 없을 지경이었다.
초어스름녁에 정사(精舍)에 도착하였다. 정사는 산의 동부(洞府) 중간에 있는데 가옥의 구조는
모두 예닐곱 칸이며 청량정사(淸凉精舍)라는 편액을 걸어놓았다.
지난 계미년과 갑신년 사이에 도 내의 사림들이 노선생의 유적이 있는 곳이라고 해서
강학소를 설치하였다. 이 때 달빛은 비단 같고 산 빛은 그림 같은데 열 두 봉우리가
반공(半空)에 돌아가며 솟아서 험준하고 가지런하게 솟아 원근에 은근히 비추고 있으니
이 밖에 다시 어느 곳에 선령(仙靈)이 있을 지 알 수 없었다. 저녁에 개를 잡아 대접하였는데
산 중이라 소금이 없는 까닭에 장이 맛이 없었으므로 입맛에 맞지 않았다. 삼경까지 담소를
나누다가 취침하였는데 정신이 어지럽고 기운이 차가와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둘러보니 산 전체가 모두 돌이며 흙이 적은데 높고 뾰족하게 깍여서 늠름하게
높이 솟아 있었다. 물은 퇴적한 곳을 따라서 아래로 은은하게 흐르는데도 씻을 만한 계곡물이
없는 것이 흠이었다. 아침을 먹은 후 여러 벗들이 외청량(外淸凉)을 보려 하였다. 대개
외청량은 금탑봉(金塔峯) 꼭대기에 있는데 길이 어풍대(御風臺)에서 시작된다. 대(臺)는
금탑봉의 중간허리에 있는데 위 아래의 깎아 놓은 듯한 절벽은 몇 천 길이나 되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새나 민첩한 원숭이라 하더라도 잡고 넘어갈 수 없을 듯 했다. 옆으로 꺾인 길
하나가 중간에 걸려 있는데 가로로는 자리 하나 정도의 크기이며 세로로는 한 걸음 정도인데,
화살처럼 곧으면서도 평평하여 걸어갈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절벽의 형세가 갑자기 끊겨서, 아래 땅을 볼 수 없을 지경이다. 그러므로 다니는
사람들은 두려워 현기증이 나서 엎어지기 십상이다. 대개 만 길 낭떠러지에 길 하나가 깎여
만들어져 있으니 이는 진실로 조물주의 기이한 공(功)이다. 내가 현기증이 나서 가지 않겠다고
했더니 유계호가 나를 놀리면서 “이 산을 구경하자는 말을 먼저 한 사람이 누구인가?
여기까지 와서 외청량을 보지 않는다면 사수(泗水)에 가서 공자를 만나지 않는 것이
아니겠는가. 위험하면 부축해 주고 넘어지면 잡아줄 터이니, 물러서지 않는다면 내려
앉는 기러기에게라도 호령할 수 있을 것일세.”라고 하였다.
나 또한 일을 완수하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아쉬움이 있었기에 마지못하여 애써 허락하니
여러 사람들이 부축하고 보호하여 갔다. 봉우리를 돌고 길을 돌아서 한 조그마한 암자를
만났다. 그곳에 활처럼 솟은 큰 돌이 가로 누워 덮고 있는 가운데 물이 돌틈에서 떨어지는데,
형세가 높고 깎아지른 듯 하였다. 그러나 특별히 기이한 볼거리는 없었다. 대개 외청량이
세상에 유명해진 것은 어풍대의 덕이다. 잠시 쉰 후에 다시 어풍대를 나서서 길을 돌아
김생굴(金生窟)을 찾아갔다가 문수암(文殊菴)에 올라갔다. 문수암은 석벽 사이에 있는데
중들이 떠나간 지 몇 해가 되었다. 암자의 삼 면은 모두 석벽으로 되어 있었으며, 석벽
위에는 서리 맞은 포도가 있었는데 너무 익어 축 처진 모습이 볼만 하였다.
하인들에게 따오게 하여 맛을 보니 단 맛과 향기가 입을 매우 싱그럽게 하였다. 여러 벗들은 탁필봉(卓筆峯)과 만월대(滿月臺) 두 봉우리에도 올랐는데, 이 두 봉우리는 가장 높은 곳에 있어 어풍대보다 더 위험하였으므로 나는 정사로 돌아와 버렸다. 잠시 후에 두 봉우리에 올라갔던 사람들이 모두 내려와 방 안에 쭉 앉았다. 내가 사람들에게 “우리들이 오늘 한 유람은 모두 훌륭한 일입니다. 함께 선생의 향사에 참여하고 선생께서 시를 읊고 감상하시던 명산을 노닐었으니, 남악(南嶽) 형산(衡山)에서 주자께서 남헌(南軒) 장식(張栻)과 창수(唱酬)하신 일은 아득하여 찾을 길이 없지만 향산(香山) 의 옛 일은 그만 둘 수 없습니다.
게다가 호해(湖海)에서 한 번 흩어지면 훗날을 다시 기약하기 어려우니 우리들이 이날 이 일이 있을 줄 또한 어찌 알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유호인이 먼저 율시 한 수를 읊고 나는 치운, 문서와 함께 화답하였으며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차례차례 응하였다. 나는 또한 그 일을 짤막하게 기록하고서 이어서 성명과 거주지를 써놓고서 ‘청량동유록(淸凉同遊錄)’이라고 하였다. 이날 또한 개 한 마리를 장만하였고 밤에 대추떡까지 곁들여서 먹으면서 서로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며 밤은 새었다. 삼경이 되어 다시 밤이 깊은데 온 산이 모두 고요하니 몸이 봉래산과 영주산에 누은 듯하였고 노선생의 도화백구(桃花白鷗)라는 시를 외우니 선생께서 거니시던 유적이 어제의 일처럼 완연하여 눈에 들어오게 되니 선현의 행적이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다만 사물은 천지 사이에서 흥폐가 무상한데 산의 진면목은 그대로이니 옛날의 사찰들은 황폐하여 지키는 중은 없이, 나무하는 사람들만 날마다 찾아오고 들불로 날마다 태운다. 당시의 뱃노래 부르며 노닐던 곳이 모두 황폐하게 되어 날마다 민둥산을 보게 되었으니, 아! 이 역시 이 산의 불행인가 보다. 이것이 탄식스럽다. 14일에 하산하여 골짜기에서 나오니 산 빛과 봉우리의 색깔 조차 이별의 아쉬움이 있는 것 같았다. 걸어가면서 고개를 돌려 보니 슬픈 마음이 들어 앞서갈 수가 없었다. 5리 쯤 가서 광석탄(廣石灘)을 건너니 친구인 금낙원(琴樂源)이 청하여 그의 집으로 들어갔다. 이 친구 역시 이 모임에 참여한 사람이다. 대추로 만든 미음을 각각 한 그릇씩 올리고 또한 큰 대추 서너 되를 노자삼아 주었다.
오후에 용계(龍溪)를 거쳐 덕여(德輿)씨를 찾아가니 주인이 매우 반가워 하면서 굳이 만류하기에 청량산의 여러 벗들과 도산서원에서 유숙하기로 약속하였다는 말을 하고서 이별하였다. 밤에 서원에 도착하니 여러 벗들 중 혹은 오고 혹은 오지 않았다. 15일 일찍 일어나 사당에 봉심하고 광명실(光明室)에 들어가 서적을 열람하였다. 암서헌으로부터 천연대(天淵臺)로 올라가 두루 둘러보며 잠시 머물었다가 수옥(水玉) 형과 함께 분강서원(汾江書院)으로 향하였으니, 이 서원 또한 우리 집안과의 연고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봉심을 하고 후손을 만나보기를 청하니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의 제사로 인해 재계 중이라고 하였다. 이날 온 마을 안에 사람들이 없었는데 한 노인이 와서 매우 반겼다. 애일당(愛日堂)에 올라 잠시 쉬고서 밤에 의촌(宜村)에 가니 하계(下溪)에 사는 이 감역(李監役)이 사람에게 편지를 부탁하여 보내와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내용은 시간이 지나면 우리들이 내일 출발할 것인지 여부를 묻는 것이었다. 곧바로 사례의 편지를 썼다. 다음날 이감역과 찬희(贊羲) 서오(叙五), 분천(汾川)에 사는 벗 이아무개가 함께 와서 사례하면서 하루종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근휴(謹休)가 증별시를 주기에 이어서 화답하였다. 17일 출발하여 부포(浮浦)를 거쳐서 소두(疏頭) 어른을 산정(山亭)에서 뵙고 유숙하였다. 편항(鞭巷)으로 가는 길에서 천전(川前)에 사는 김덕원(金德元) 씨를 만나 잠시 인사하였다. 이 어른이 굳이 천전으로 함께 가자고 하였으나 피곤하다며 거절하였다. 18일은 대전(大前)에서 묵고, 19일에는 운야(雲野)에 도착하여 이틀을 묵은 후 집으로 돌아왔다.
* 금상 -- 역대 임금들이 즉위한 연도를 살펴 본 바, 고종으로 추정됨
* 갑자년 -- 1864년
* 문순공(文純公) -- 문순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시호이다.
* 소두(疏頭) -- 소두는 여럿이 연명으로 상소를 올릴 때 그 대표를 맡은 사람을 말한다.
* 덕여(德輿) 이휘재(李彙載) -- 이휘재(1795∼1875)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덕여(德輿), 호는 운산(雲山)이다. 1842년 경산현령으로 있으면서
문회재(文會齋)를 창건하여 문풍(文風)을 진작시킨 바 있고, 나중에 또 홍주목사로
있을 때 선정을 하였으므로 홍주 백성들이 비를 세워 그의 공덕을 기리기도 했다.
1853년 벼슬에서 물러난 후에는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다가, 1866년 병인양요 때에는
임금의 부름으로 나아가 많은 공을 세웠다. 한성부우윤 등을 역임했다. 남긴 저서로
《운산문집》 6책이 있다.
* 고계(古溪) 이휘령(李彙寧) -- 공 이휘령(1788∼1861)은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본관은 진성(眞城)이요, 자는 군목(君睦), 호는 고계(古溪)이다. 이황(李滉)의 10세 종손이다.
1816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청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벼슬을 하는 동시에 학문에 주력하여
가학인 이황의 성리학을 이었다. 〈십도집설 十圖集說〉과 〈방경무도사 邦慶舞蹈辭〉를
지은 것을 비롯 《고계집》 8권을 남겼다.
* 차비관(差備官) -- 차비관은 가훈도(假訓導)라고도 불린다.
훈도(訓導)ㆍ별차(別差)의 임무를 수행한다.
*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 --금난수(1530∼1604)는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의병장으로 본관은 봉화이며 자는 문원(聞遠), 호는 성재(惺齋) 또는 고산주인(孤山主人)이다. 경상북도 봉화출생이다.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헌(憲)이며, 어머니는 영양남씨(英陽南氏)로 교수 식(軾)의 딸이다. 처음 김진(金進)에게 글을 배웠고, 뒤에 이황(李滉)의 문하에 들어가서 수학하였다. 1561년(명종 16)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577년(선조 10) 제릉(齊陵)의 참봉을 비롯하여 집경전(集慶殿)과 경릉(敬陵)의 참봉을 지내고, 1585년 장흥고봉사(長興庫奉事)가 되었다. 그 뒤 직장(直長)·장례원사평을 지냈으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노모의 봉양을 위해 고향에 은거하다가 정유재란 때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키니 많은 선비들이 호응해서 참가하고 지방민들은 군량미를 헌납했다. 그해 성주판관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1599년 고향인 봉화의 현감에 임명되어 1년 만에 사임하고 집에 돌아왔다. 좌승지에 추증되고 예안(禮安)의 동계정사(東溪精舍)에 제향되었다.
* 향산(香山) -- 향산은 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 백락천의 호이다.
*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이현보(1467∼1555)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호는 농암이요, 시호는 효절(孝節)이다. 1498년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32세에 벼슬길에 올라 예문관검열·춘추관기사·예문관봉교 등을 거쳐, 1504년 38세 때 사간원정언이 되었으나 서연관의 비행을 논하였다가 안동에 유배되었다. 그 뒤 중종반정으로 지평에 복직되어 밀양부사·안동부사·충주목사를 지냈고, 1523년에는 성주목사 등을 두루 거쳐 호조참판을 지냈다. 1542년 76세 때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강호에 묻혀 한거하였다. 홍귀달(洪貴達)의 문인이며, 후배인 이황(李滉)·황준량(黃俊良) 등과 친하였다. 조선시대에 자연을 노래한 대표적인 문인으로 국문학사상 강호시조의 작가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어부가 漁夫歌〉를 장가 9장, 단가 5장으로 고쳐 지은 것을 비롯하여 〈효빈가 孝嚬歌〉·〈농암가〉·〈생일가 生日歌〉 등 시조를 남겼다. 1612년 향현사(鄕賢祠)에 제향되었다가 1700년 예안의 분강서원(汾江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농암문집》이 전한다.
참고자료; 문화콘텐츠닷컴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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