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자숙님
12월 3일
불법 사드철거 김천 평화 촛불 916회
한 해의 마지막 달이다. 이제 사드배치 반대투쟁도 햇수로 9년째 접어들려고 하고 있다. 이 긴 세월 묵묵히 기둥이 되어준 수연 님이 오늘 찐빵과 차를 나눠주고 있다. 매주 따뜻한 어묵이나 떡볶이 등을 만들기에 "너무 힘들지 않냐?"고 하니, "사람도 적은데 따뜻한 거라도 먹어야 덜 서글프죠." 대답했다.
소성리에 집을 짓고 정착한 두 남매, 은총님과 강형구 장로의 잔 부딪치기도 정겹다.
오늘의 사회자 김종희 기획팀장의 시작 발언.
"소성리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전쟁무기, 이곳 김천을 향해 있는 전쟁무기 사드를 뽑고, 평화로운 김천을 그리고 한반도를 만들기 위해서 오늘도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서로 따뜻한 마음 많이 나누면서 사드 뽑고 평화를 심기 위한 그 길에 오늘도 한 걸음 뚜벅뚜벅 내딛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이 땅의 자주와 민주화, 통일의 그 길에 푸른 정춘을 바치신 열사들을 생각하며 잠시 묵념의 시간을 갖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힘차게 부르며 시작했다.
평화는 얼지 않는다!
소성리에 평화를!
김천에 평화를!
사드 뽑고 평화 심자!
소성리 지킴이 은총님의 발언.
"저는 2002년부터 촛불을 들었어요. 그때 작은 교회들 다니면서 너무너무 실망을 해가지고 작은 교회는 이제 그만 다니고 큰 교회 가서 아무도 모르게 그냥 예배만 드리고 오자 그렇게 마음을 먹었는데, 인천 주안장로교회가 굉장히 큰데 어느 날 조용기 목사가 와가지고 목사 둘이서 그 큰 체육관 같은 교회에서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를 하더라고요. 자리를 박차고 나왔는데 지금 같으면은 소리라도 지르고 나왔을 거예요.
나와가지고서 민중교회를 찾아봤더니 향린교회를 만나가지고 신앙 갈등을 거의 해소하고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를 하면서 그때 아기였던 우리 애들 데리고 추우니까 오뎅국물 사먹여가면서 촛불 들기 시작했는데 여러분은 지금 여기서 사드 뽑느라고 촛불을 드는 걸로 알고 있어요.
저는 그때 국가보안법은 간첩을 억지로 만든 법이다라고 막연하게 알고 있었어요.
어디서 체계적으로 공부한 건 하나도 없었지만 그랬는데 이렇게 거리 대학(제가 길거리를 10여 년 이상 다니니까 거리 대학이라고 말하는데) 한 10여 년 이상 다녀보니까 우리나라의 적폐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2015년도에 전주 황토현에서 동학혁명 121주년인가 대회가 있었어요.
거기에서 처음으로 평통사를 소개받았어요. 근데 저는 거리에서 대학 다니면서 우리나라의 최대 적폐가 남북 분단이라고 생각했어요.
노동 문제 기타 등등등 있지만 저는 우리나라의 최대 적폐는 남북 분단이고 이 남북 분단의 원흉이 누구냐, 그거는 북한도 남한도 아니고 미국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우리나라의 최대 적폐를 제대로 진단하고 제대로 그 암덩어리를 돌려내려면 메스를 제대로 대야 되는데 과연 수많은 평화통일 단체 중에서 제대로 하는 게 어디일까 생각했는데 버스 안에서 자기소개하면서 평통사를 소개하는 김종일 대표를 보면서 그야말로 성령이 내리는 것 같았어요.
지식 백과에 적폐를 뭐라고 써 놨냐면 (제가 오늘 이 발언하려고 이걸 검색을 해봤습니다.)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관행 부패 비리 등 폐단을 말한다. 이를 뿌리 뽑으려면 조직 사회 국가 전반의 전방위적 개조와 혁신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관련 책임자에 대한 문책과 처벌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환경 경제용어 사전이래요. 정치적으로 정말로 개혁하지 않고서는 우리나라의 통일은 요원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처럼 생각을 온 국민이 한다면 진작에 통일되었을 거라고 저는 믿어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냥 쟤 뭐 하는 거야 하고 이렇게 지나가고 여기 있는 사람들만 이렇게 하고 있는 게 너무너무 안타깝습니다.
이 첨예한 분단의 적폐를 드러내려면 우리가 이 추운 날 이렇게 와서 있듯이 이렇게 있는 걸로 끝내지 않고 저 김종희 선생님처럼 여기에서 끊임없이 공부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8년째 이러고 있으니까 가랑비에 옷이 젖고, 콩나물에 물 주면 물이 싹 내려가지만 콩나물은 자라듯이, 저도 조금씩 조금씩 자라서 조금은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런데 SNS활동을 하다보니 악성댓글로 상처를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분열, 갈등하고 있는 카페 모습에서 마음이 많이 다쳤다고도 했다.
"제가 활동하면서 신조로 여기는 거는 우리끼리 웬만하면 다투지 말고 혹시 의견 충돌이 나면 소근소근 의견을 내고, 그냥 내가 다소곳이 숙이자 그런 마음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 수구 세력들은 돈과 권력에 눈이 멀어서 막 그 사람들이라고 갈등이 없겠어요? 근데 똘똘 뭉쳐가지고 계속 뭔가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잖아요.
주절주절 댔는데 여기 있는 분들이 이렇게 추운 날 7년째 8년째 이렇게 투쟁하면서 초심을 잃지 말고 이 가슴을 뜨겁게 한 게 무엇인지 그것을 꼭 붙잡고 웬만한 갈등은 다 싸안고 넘어갔으면 좋겠습니다."
딸도 사위도 평통사 회원인 은총님, 목소리도 카랑카랑, 시원스럽다.
가수로만이 아니라 촛불시민으로 연대하러 왔다고 자기 정체성을 밝힌 정진석 님.
꼭 김천촛불 노래 조만간에 만들도록 노력하겠다며 소성리 노래를 불렀다.
산아래 옹기종기 이어붙은 마을들...
소성리 밤하늘에 별들 총총...
'소성리'
11월 27일 황경하 님이 제안하여 서울에서 열린 고 조현철을 기억하는 이야기 콘서트에 참여한 소감을 이야기했다. 그날 현철 님 어머님 아버님도 다 참석하셔서 고맙다고, 함께 함에 힘이 되었다고 말씀하셨단다.
'우리가 평화다'
'평화성지 소성리'
소성리 마을은 작은 마을 별들이 올망졸망...
기록팀 구자숙.
"김단야 손녀분이 구미에 살고 계시는데 연락이 오기를시신이 없는 사람은 국립묘지에 안장할 수가 없었는데 국립묘지 안장법이 바뀌어 (김단야는 1938년에 소련에서 사형당했기 때문에 시신이 없어 현충원에 안장할 수 없었다.) 국립묘지에 가게 됐다는 통지가 왔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자기 할아버지가 드디어 할머니와 같이 안장할 수 있구나 하면서 너무 좋아가지고 가족끼리 빨리 해치우려고 했는데 6.10만세운동 기념사업회 황선근(?)회장님 연락이 왔대요.
'김단야는 6.10만세 운동의 주역이기도 한데 그런 분을 가족끼리 그냥 장례 치르게 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같이 하도록 할 테니까 천천히 하자.'
'대전 현충원에서 한 평만 주겠다고 했는데 그렇게 하지 말고( 같은 독립장을 받은 시신 없었던 최재형도 7월달에 8평을 했다.) 김단야도 8평을 해야 된다.
그리고 독립운동가들은 친일파와 따로 모을 수 있도록 해달라' 이런 요구사항을 걸고 현충원하고 협상하고 있다고 그렇게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얼마 전에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기획실장이 전화가 왔어요.
'서울에서 김단야 기념사업회가 상당히 지금 진전을 보고 있다. 2024년도에는 기념사업회를 만들려고 하고 있다. 그래서 한번 서울로 오라'고 하더군요.
내 혼자 한 게 아니고 같이 했는 건데 하는 생각에 '오셔서 우리 팀들을 같이 만나서 같이 이야기 들어보는 게 어떻겠어요?' 하니까 그분이 12월 5일 이후에 오겠다고 하더라고요.
오시겠다는 연락이 오면 제가 사발통문을 돌리겠습니다. 아마도 여러분들도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이어서 김단야(본명 김태연)가 개령에서 3.24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한 일과 6.10만세운동 기획, 그의 체포와 죽음을 설명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28058
"독립운동 인정 받으려니, 글자 하나 하나 다 돈"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김단야 후손을 다시 만나며
http://www.ohmynews.com
"마지막으로 덧붙이면은, 저는 우리가 싸우는데 날짜가 길어지면서 사람들이 떨어져 나가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왜냐하면 반대 운동은 사실 밀어붙이기가 되게 어렵거든요.
이어갈 수 있는 힘을 스스로 쌓아야 되는 거예요. 저는 그게 공부고 그게 시민단체 활동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지치지 않고 끝까지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힘을 가질 수 있도록 공부하고 단체 활동도 열심히 했으면 싶습니다. 저는 우리 김천 교육너머에서 이런 활동을 했습니다."
김성래 진보당 김천지역위원회 준비위원과 이기수 전국택배노조 김천지회장이 마지막으로 인사를 했다.
이렇게 우리 916번째 촛불은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