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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1975년 5월 13일 오후 3시를 기해 발동된 이른바 대통령긴급조치 제9호는 10.26으로 박정희시대가 막을 내린 다음인 1979년 12월 8일에 해제될 때까지 4년 7개월 동안 유신헌법의 부정 반대 왜곡 비방, 개정 및 폐기를 주장하거나 청원 선동, 또는 선전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시키고, 사전 허가 없는 학생들의 집회 시위 및 정치 간여를 금지시키면서 위반자는 영장 없이 체포하여 그 기간 중 1천 4백 여 명이나 형에 처한 야만적 반민주적인 조치였다.
역사에서 종기처럼 도려내고 싶은 세월, 악몽처럼 잊고 싶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역사란 아무리 추악한 얼굴을 지녔다고 해도 되돌려놓고 성형수술을 시킬 수는 없는 법이다. 역사란 그렇게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법칙 때문에 교훈으로 남는 것이다.
어쨌든 내가 감옥살이를 한 것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잡혀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그 날 출근하기가 무섭게 나는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형사들에게 끌려갔다.
영등포경찰서 정보과 취조실은 만원이었다. 수십 명이 잡혀와 있었는데 대부분이 대학생이었고 그 가운데는 여학생도 십여 명이나 되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학생들이 유신헌법 철폐를 부르짖으며 시위를 벌였다는 사실과, 또 시위를 벌이다가 붙잡혔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언론 통제가 이렇게 무서운 줄을 나는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학생들의 머리가 터지고 옷이 찢어지고 한 모습들을 보니 잡혀올 때의 광경이 어떠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한 사람씩 형사와 마주앉아 진술조서를 받는데 걸핏하면 고함이 터지고 따귀가 올라갔다.
그런 북새통 속에서도 나도 사흘 동안이나 조사를 받은 다음 구속영장이 떨어져서 서울지방검찰청으로 송치되었다. 생후 처음으로 ‘은팔찌’를 찬 것을 물론 포승에 꽁꽁 묶여서였다.
담당검사실에서 신원진술서를 쓰고 취조를 받은 뒤 그날 밤부터 시퍼런 수의(囚衣)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신분장(身分狀)이라는 것을 작성하고 구치소에 갇혔다.
그 방은 한 평이 겨우 넘어보이는 독방인데 다 낡아빠진 시퍼런 광목 이불 한 채가 한 구석에 놓여 있을 뿐이었다.
새벽에 지저귀는 새들의 노래 소리를 들으며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쇠창살이 박힌 창문 바로 앞에 미류나무가 몇 그루 서 있었는데 참새들이 거기에 앉아 새아침을 노래하고 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주루룩 눈물을 흘렸다. 내 입으로 쏟아낸 말들이 후회스러워서가 아니었다. 형사와 검사에게 뺨을 얻어 맞으면서 듣던 욕설보다도 미물인 저 참새들의 지저귐이 훨씬 더 멋지고 아름답게 들려서였다. 지각 없는 새들의 지저귐이 차라리 ‘인간적’으로 들렸던 것이다.
우주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 별-지구라는 행성이 절대로 인간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실을 나는 분명히 느꼈다. 이 지상의 이웃, 다른 숱한 지구 가족을 위해 인간이 지난 수천 수만 년 간 해준 것이 과연 무엇이었는가. 도대체 이 지구상에서 인간 아닌 어느 생물이 자기네끼리 서로 잡아 가두고 때리고 죽이는가. 새처럼 날지도 못하고 물고기처럼 헤엄치지도 못하면서 지구의 주인 행세를 하는 인간들아, 무엇이 잘났기에 자유로와야 할 동족의 영혼을 구속하고 괴롭히는 것이냐.
보름 뒤 공소장(公訴狀)을 받고 첫 재판에 나갈 때까지 나는 그 방에서 보냈다.
내가 어디로 잡혀가 있는지 행방을 몰랐음인지, 아니면 면회가 금지된 탓인지 가족이건 친구건 그 동안 찾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구 헝클어진 머리칼에 멋대로 자란 수염, 퀭한 눈, 때에 전 수의 차림으로 나는 마침내 법정에 섰다.
“아범아!”
“여보!”
귀에 익은 목소리에 나는 꽁꽁 묶인 윗몸을 비틀어 뒤돌아보았다.
몇 사람 되지도 않은 방청객 사이에서 겁을 먹고 서 있는 두 여자는 홀어머니와 아내가 틀림없었다.
검사가 공소장을 큰 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피고 한종달은 평소부터 자유 민주주의의 신봉자로 자처하면서 유신 체제를 뒤엎고 사회 질서를 혼란케 하며 국민 총화를 분열시킬 목적으로… 유신 헌법은 망국의 악법이므로 철폐시켜야 한다고 주위 사람들을 선동하고 국가 원수를 모독했으며 긴급조치를 왜곡 비방하는 언동을 자행한 사실이 유(有)한 바….”
요지는 그러므로 징역 5년을 구형한다는 것이었다.
며칠 동안 화장지를 구할 수 없어서 감방의 더럽고 꺼칠꺼칠한 벽지를 뜯어 밑씻개로 쓴 탓에 항문이 쓰라려 우거지상을 하고 서 있던 나는 너무나 기가 막혀 자신도 모르게 입이 벌어지는 것과 동시에 항문의 오무림살이 풀어지면서 피시식하고 비웃음 같은 방귀가 새어나왔다. 하지만 입으로까지 웃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5년이라니! 말 한 마디의 대가가 징역 5년이라니, 도대체 이게 말이나 되는 수작인가. 어머니와 아내가 뒤에서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결국 2심에서 나에게는 징역 3년이 선고되었다.
호송버스는 독립문을 지나 거창한 대문 안으로 들어서서 안마당에 멈추어 섰다. 차에서 내려 보안과로 끌려들어가 신병 인수인계가 끝나자 길고 좁다란 복도를 지나 커다란 창고 같은 건물인 감방으로 갔다. 거기서 ‘지도’라고 쓰인 완장을 찬 작업복 차림의 지시를 받았다.
“지금 입구 있는 옷은 빤쓰 하구 난닝구만 빼 놓구선 몽땅 벗는다! 실시!”
시키는 대로 옷을 벗고 엉거주춤 서 있자 또 다음 지시가 떨어졌다.
“뒤루 돌아! 엎드려! 빤쓰 내리구 똥구멍을 깐다! 실시!”
다음에는 양말 속까지 뒤집어 보여주고 나서 수의를 타 입었다. 그리고 검정 고무신을 타서 신고 노란 플라스틱 밥그릇도 하나 받아 들었다.
입감(入監) 절차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다시 보안과로 돌아가 수인번호와 목찰(木札)을 받아 챙긴 다음 마침내 기다리던(?) 감방으로 입실했다.
육중한 철문이 철컹 소리를 질러대자 나는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
한 평 반이 못 되어 보이는 감방은 손바닥만한 창문이 하나, 출입구 위에 역시 손바닥만한 시찰구(視察口), 그 아래로 비슷한 크기의 식구통(食口桶)이 외부와 통하는 구멍의 전부였다.
고개를 돌려 보니 바닥 한쪽 구석에는 넝마가 다 된 너덜너덜한 이불이, 다른 한 구석에는 플라스틱 변기통이 놓여 있고, 그 밖에 뚜껑 없는 찌그러진 주전자가 하나, 비닐 양동이가 하나 있었다. 솜이 제멋대로 밀리고 뭉친 지저분한 이불 속에 ‘죄인’의 육신을 맡기니 위로는 머리가, 아래로는 발이 삐져나와서 모로 누워 새우처럼 등을 웅크릴 수밖에 없었다.
여덟 시 취침 나팔이 울리고 나서도 몇 시간이 지나도록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새해 정월이면 칠순을 맞는 홀어머니와 아내와 두 아이를 둔 가장인데도 이제부터 3년 동안이나 이 안에 갇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 3년 동안 이 철장 안에 새처럼 갇혀서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단 말인가. 어쩌면 연약한 그들의 힘만으로는 이 삭막하고 살벌하고 잔인하고 혹독한 세상에서는 3년씩이나 버티지도 못할 것이다. 그들은 나무열매나 따 먹고 사는 원숭이가 아니니까.
난 무죄다, 무죄야! 아무 죄도 없다구! 소리 죽여 흐느끼며 나는 속으로 절규했다. 이건 절대로 내 잘못이 아니라 실수다, 실수였어! 빌어먹을, 어리석은 실수를 저질렀지 뭔가! 왜 좀 다른 녀석들처럼 입을 다물고 살 줄 몰랐던가. 선과 악, 정의와 불의, 진실과 허위, 그리고 어떤 것이 민주요, 어떤 것이 독재며, 대통령과 총통의 차이쯤은 능히 분별하고 판단할 수 있으면서도 다 그런거지 뭐, 될 대로 돼라 난 모르겠다, 하고 요령껏 기회만 엿보며, 제 한 몸 편하고 제 가족 먹여 살릴 궁리나 하는, 약삭빠른 족속의 하나가 되지 못했는가 말이다.
왜 주책없이 도덕적 양심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녀석들 앞에서 속을 뒤집어 다 털어내 보였던가 말이다. 그 비정한 조직, 몰인정한 인간들 앞에서 무슨 대단한 자유 정의 민주의 투사나 된답시고 입바른 소리를 쏟아냈느냐 그거다. 이 모양 이 꼴이 됐다고 해서 누구 하나 ‘유신 독재와 싸우다가 옥고를 치르는 민주 투사의 가족’이라며 식구들에게 돈 한푼 쌀 한톨 보태줄 사람도 없을 뿐 아니라 되레 어리석은 아들, 미련한 남편, 죄수 아비를 둔 집안이라고 손가락질이나 당하기 십상이지 뭔가.
돈 키호테 같은 녀석! 하지만 위대한 돈 키호테-‘우수에 찬 얼굴의 기사’가 이런 명언을 남긴 걸 멍청한 넌 생각하지도 못했으니 이제 와서 누구를 탓하고 원망하랴.
그렇게 자책하고 후회하며 나는 숟가락으로 감방 벽에 이렇게 새겼다.
-산초 소자야, 네 말이 옳다. 지금 한창 기세를 떨치고 있는 저 악한 별의 힘이 다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는 게 상책이다-
어디선가 새벽 종소리가 울려왔다. 꿈결처럼 들리더니 기상 나팔 소리가 완전히 잠을 깨웠다. 새 소리도 어디선가 들리는가 싶었는데 이내 다른 소리에 묻혀버렸다. ‘새벽 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하는 새마을 노래와 ‘좋아졌네 좋아졌어, 몰라보게 좋아졌어’하는 노래 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찢어질 듯 울려 퍼졌던 것이다. 새들이 소음 공해를 피해 달아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어쨌든 살아야 했다. 새아침이 밝은 건 사실이니까. 나는 잠을 설쳐 빠개질 듯 아픈 머리를 억지로 쳐들고 일어나 이불을 갰다.
“차려잇!”
자칭 ‘담당’인 5급 을류 교도관보(矯導官補)-간수가 복도에서 우렁차게 외침으로써 아침 점호가 시작되었다.
점호가 끝나자 주전자에 식수를, 양동이에 용수(用水)를 받고 하나밖에 없는 식기에 시꺼멓게 절은 무장아찌와 소금국과 4자가 찍힌, 보리와 콩을 다져서 구멍탄처럼 찍어낸 이른바 ‘가다밥’을 한꺼번에 받았다.
목구멍이 메슥메슥 치밀어 올랐지만 눈물과 한숨으로 수많은 나날과 다달을 보내야 할 식구들을 생각하며 천천히 꼭꼭 씹어 삼켰다. 식사가 끝나고 설거지를 마친 다음엔 맨손체조를 하고 제자리 뛰기를 하며 몸을 풀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그 놈의 지긋지긋한 ‘새벽종’과 ‘좋아졌네’가 또 스피커에서 쏟아져 나왔다. 감옥살이 내내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조악한 식사보다도 그 소리에 시달린 것이었다. 좋아지기는 무엇이 좋아졌다는 말인가. 정말 좋아진 것이라고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쥐뿔이나 새뿔처럼 없었다.
아내 혜경이 보험회사 외무원으로 생활 전선에 나선 사실은 그 다음달 첫 번째 면회를 와서 이야기할 때 알았다. 혜경은 어머니와 한 달 건너씩 교대로 면회를 왔는데 노약한 시어머니와 철 모르는 자식들을 버려두고 도망질치지 않는 것만 해도 고마웠다.
어머니는 면회 올 때마다 더 늙어 보이고 힘이 약해져 보여서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그러더니 그 해를 채 못 넘기고, 칠순을 한 달 남겨두고 영영 면회길을 멈추고 말았다.
“뺑끼 준비!”
점심시간이 지나면 똥통을 비웠다. 변기통을 감방에서는 ‘뺑끼통’이라고 불렀다.
누군가 한가로울 때 이렇게 읊었다. ‘산다는 것은 흔적을 지워가는 것’이라고. 그 말도 옳은 듯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이기는 했으나 잊으려고 애쓰는 건 좋은 일이었다. 처음 몇 달은 나를 밀고한 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감방 벽에 새겨놓고 저주를 했지만 증오도 세월의 먼지가 앉으니 차츰 색이 바래져갔다. 내가 용서를 하건 망각을 하건 그들은 오욕칠정(五慾七情)으로 허우적거리며 장삼이사(張三李四)의 삶을 이어갈 것이다.
내가 가슴 속의 증오를 더 키우지 않기로 작정한 것은, 사실 그들만 탓할 것도 없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궤도도 아닌 곳으로 멋대로 굴러가는 미친 기차에 올라 탄 데에 잘못이 있었다. 아니, 그보다는 길도 아닌 곳으로 마구잡이로 몰고 가는 미친 기관사 탓이라고나 할까. 그런 기관사는 역사의 열차에서 마땅히 끌어내려져야 옳았다.
그렇게 나는 열한 달을 감옥에서 살아 넘겼다.
비몽사몽간에 잡혀가 희극 아닌 희극적 재판을 받고 감옥살이가 시작되었듯이 출옥도 어느 날 밤 갑자기 이루어졌다.
형기가 절반도 더 남아 있는데 석방하는 것이 무슨 까닭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풀려난다는 것, 눈에 보이는 자유를 되찾는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었다.
그날 밤 취침 나팔이 불고 나서 한 시간 남짓 지났을 무렵 감방의 철문이 열리더니 담당이 불러냈다.
보안과에 가서 짐 검사부터 했다. 처음 들어올 때에는 완전히 맨몸 뿐이었지만 그동안 차입해준 책이며 옷이며 담요 따위가 제법 보따리를 꾸릴 만했던 것이다. 그런 다음 신체검사를 마치고 으리으리하게 커다란 철문을 빠져나왔다.
그렇게 감옥살이 열한 달을 치른 다음부터 내 심신은 만신창이가 되어 내리막길로 굴러떨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 황원갑 중편소설 <별유천지> 일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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