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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 안식 축일 | 광복절 | 한반도 평화 기도 주일 (8월 15일) 강론
<성모 안식 - 인간의 운명과 희망> (루가 1:46b-55, 요한 6:51-58)
"... 교회 전통과 정교회의 ‘성모 안식’ 이콘은 이러한 신학의 깊이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오늘 제대 앞에 놓인 이콘을 살펴 주십시오. 아기 예수님을 낳았던 어머니 마리아는 이 세상을 떠나 잠들었습니다. 지상에서 삶을 함께 나누던 많은 제자들과 성인들, 신앙의 동료들이 느끼는 슬픔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마리아는 천상에서 강보에 싸인 작은 아기가 되어 예수님 품 안에 안깁니다. 지상에서 어머니로서 아기 예수님을 안았던 성모님이 천상에서 아기가 되고, 지상의 아기 예수님이 천상에서 마리아를 안은 ‘어머니’가 되는 놀라운 신비입니다.그런 탓이겠지요. 21세기의 성인 한 분은 지상의 삶을 고별하기 전에 이 신비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날이 태어나기에 좋은 날이요, 죽기에 좋은 날이다.”
지상과 천상의 역전, 아기와 어머니의 역전, 이 역전이야말로 성모 안식 축일의 핵심입니다. 하느님 구원 사건의 세상이 생각하는 질서를 하느님의 질서로 뒤바꾼다는 뜻입니다. 낮은 이들을 들어 올려서 하느님과 함께하도록 위치를 바꾸는 사건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노래는 성모의 안식으로 그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인간의 ‘안식’은 세상과 죽음의 질서를 뒤엎는 해방이자 구원입니다. 우리 역사의 자유와 해방을 이어나가고, 새로운 삶의 질서를 위해 수고하고 헌신할 때, 우리는 성모 마리아 안에서 일으켰던 하느님의 구원 역사에 참여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이 지상의 모든 수고를 끝내는 날, 천상에서 어머니이신 주님 품에 안기어 새로운 아기로 태어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운명입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인의 희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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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 안식 축일 | 광복절 | 한반도 평화 기도 주일 (8월 15일) 강론
<성모 안식 - 인간의 운명과 희망> (루가 1:46b-55, 요한 6:51-58)
주임사제 주낙현 요셉 신부
+ 나의 바위, 나의 구원이신 하느님,
내 머리의 생각과 내 입술의 말들이 주님 마음에 들게 하소서. 아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평안하신지요? 작년만 해도, 코로나 감염증 상황에서도 우리는 성당에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폭우에 쓰러진 성당의 회화나무를 두고 여러 추억과 고마움을 새기며 나무 고별식도 할 수 있었습니다. 성모 안식 축일 아침에 모여서 축일의 기쁨으로 서로 격려하고 용기와 희망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난 해방 75주년을 깊이 새기며,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어떻게 평화를 만들어야 할지를 깊이 다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안타까움은 해가 바뀌어도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성당의 문이 닫혔습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나이와 경험, 지위와 소유를 넘어서서, 하나의 몸인 교회를 이루고 하느님을 향하여 바치는 행동이 희미해져서는 안 되겠습니다
8월 15일 오늘, 우리는 해방의 기쁨을 축하하며 그 일에 헌신했던 수많은 사람의 피와 땀을 생각해야 할 텐데, 이 날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이념과 주장을 거칠고 볼썽사납게 펼치려는 목소리가 거리를 활보합니다. 사회와 이웃의 안전을 염려하며 코로나 확산 방지에 최선을 다해 협력해야 할 때인데, 자신의 이권과 주장을 앞세우는 일이 부끄러움도 없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우리 신앙인의 생각과 눈길은 전혀 달라야 합니다. 특히, 지난 1년 반이 넘는 동안 외로움과 병고에 시달리고 있는 분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답답한 처지에서도 바깥출입이 쉽지 않은 분들이 많습니다. 요양원에서 가족과 손을 마주 잡지 못하고 누워 계신 분들을 생각합니다. 병원에 누워 육체의 고통을 감내하며 삶을 정리하시는 분들의 마지막 숨결, 이를 안타깝게 지켜보는 분들의 눈물을 바라봅니다.
지난 몇 주만 해도 우리 교우들은 사랑하는 동생을, 아버지를, 그리고 형님과 선생님을 차례로 하느님 품에 보내드려야 했습니다. 이 세상에,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진 이름입니다. 김완영, 이달형, 김기현, 이삼현 베드로. 이 이름과 얼굴을 특별히 기억해 주십시오.
지난해 초부터 오늘까지 우리가 슬픔 속에서 먼저 떠나보내야 했던 많은 얼굴을 다시 한번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억합니다. 선물로 받았던 이 지상의 생명을 삶의 막바지에서 오로지 하느님께 바치고 있는 분들을 사랑의 눈물로 바라봅니다. 이제 그 생각과 눈으로 더 넓고 멀리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 세상 안에서 너무도 안타깝게 쓰러지고 있는 사람들, 압제의 고통에서 신음하는 사람들, 여전히 생명을 빼앗기는 사람들을 향한 생각과 눈길로 더 깊어져야만 합니다. 이 모든 일에서 우리 자신의 운명이 무엇인지, 우리 자신의 삶을 어떻게 가다듬어 살아야 할지를 되새겨야 합니다.
광복절과 성모안식축일, 그리고 주님의 부활을 축하하는 주일이 겹치는 오늘은 참으로 특별하고 복된 시간입니다. 36년이 넘는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난 해방의 기쁨은 오늘 우리가 읽은 성모 마리아의 노래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루가 1:51~53).
예수님을 몸에 모시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던 성모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역사 안에서 이루실 일을 내다보며 해방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76년 전 우리 역사에서 경험했던 감격입니다. 아니, 2천 년 전부터 주님께서 여전히 우리 삶에서 이루시기 시작한 구원의 행동입니다. 이 행동에 동행하고 동참할 때, 우리 삶은 주님의 부활이라는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약속입니다. 우리 인생이 다다를 궁극적인 희망에 관한 선언입니다.
여전히 시끄럽고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우리 삶의 운명과 희망을 오늘 전례독서에 따라 되새기려 합니다.
첫째, “평화를 이루기까지 있는 힘을 다하라”는 당부입니다(시편 34:14). 오늘 시편에서 노래한 이 평화를 생각합니다. 오늘은 우리 베드로 주교님께서 회장으로 섬기시는 한국교회협의회(NCCK)와 함께 한반도 평화통일 공동기도주일로도 지킵니다. 분단과 한국전쟁 이후, 여전히 갈등과 분열, 미움과 분노가 음습한 기운과 어두운 그림자가 되어 이 땅을 덮고 있습니다. 이 그늘 아래 너무 오래 살았던 탓인지, 우리 삶도 쉽게 갈등하고 갈라지며, 미워하고 화를 내는 것만 같습니다.
오늘 ‘평화를 향한 기도 주일’을 위한 공동 설교에서 한국 정교회의 암브로시오스 대주교님은 이 시편에 마음에 두고, 교부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교회를 이룬 신자가 함께 지켜야 할 분명한 평화의 덕행을 전해주셨습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톰은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평화를 이루기까지 있는 힘을 다하여라. 이 말은 사람들과의 평화만이 아니라 또한 하느님과의 평화도 의미합니다. 그것을 이루기까지 있는 힘을 다하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이 평화를 멀리하고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평화는 지상을 두고 하늘로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너무나도 평화를 원한다면, 평화를 다시 지상으로 데려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일이 이루어지려면 방해하는 모든 것들, 특히 어리석음과 오만함을 떨쳐버려야 합니다.”
대주교님은 이어서 성인을 인용합니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고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불립니다… 이렇게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린다면, 분열과 다툼을 조장하는 이들은 사탄의 아들이라 불리게 됩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형제와 다투려는 마음이 생길 때는, 그것은 그리스도의 지체와 다투는 것이라는 것을 잘 생각하고 당신의 분노를 멈추십시오.”
우리 지난 역사가 어떠했든, 그 역사의 상처와 그늘에만 머문다면 우리는 분노에 사로잡힌 괴물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맺는 개인의 관계가 어떠했든, 혼자만의 섭섭함과 오해만 곱씹어 머문다면, 우리는 미움과 배신감 안에서 자신의 삶을 망치고 맙니다.
평화의 왕이신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이 따를 일은 아닙니다. 평화가 우리의 계산과 거래로 만들어지지 않고,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깨달음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나’ 자신이 주장하는 평화를 이루려 하지 않고, 주님의 평화를 ‘자기’ 몸으로, 공동체로 드러내는 일에 힘을 다하여야 합니다.
둘째, “빛의 자녀답게 살아달라”는 부탁입니다. 사도 바울로 성인은 오늘 전례독서 에페소서에서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어둠의 세계에 살고 있지만 지금은 주님을 믿고 빛의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빛은 모든 선과 정의와 진실을 열매 맺습니다. 이것이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입니다”(에페 5:8-9).
착함보다는 교활한 악이 득세하고 있습니다. 정의보다는 권력과 돈에 따른 불의와 불평등이 지배하는 세태입니다. 그리고 진실과 성실보다는 거짓과 모함, 나태와 비방이 세상뿐만 아니라 교회마저도 좀 먹고 있는 현실입니다.
지난 주일, 주님의 변모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빛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할지를 확인하고 다짐했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십시오.
주님은 당신의 삶으로 이 세상에 하느님의 빛을 드러내셨습니다. 그것은 생명을 살리는 빛입니다. 그늘에 따뜻한 온기를 가져다주는 빛입니다. 우리 모두를 아름답게 정화하는 빛입니다. 저녁 하늘 높은 곳에서 펼쳐지는 황혼처럼 우리와 세상을 아름답게 물들이는 빛에 우리를 맡기며 살아가야 합니다.
인간 삶의 목표는 하느님을 만나고 자유롭게 되어서 빛나는 존재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거룩하게 변화하는 과정에 끊임없이 참여하는 일이 신앙입니다. 교부 성인 이레네우스의 가르침을 다시 전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살아있는 인간 자체이며, 참된 인간의 삶은 하느님을 바라보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이 어려움 속에서도 세상의 그늘을 살피면서 세상의 빛이 되는 사람입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변하여 세상에 하느님의 빛을 비추는 환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복된 빛의 사람들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모 마리아처럼 우리는 주님을 몸에 모시고 우리 생명을 내어주며 살아가야 합니다. 마리아는 작고 가난한 시골 소녀였으나,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 가녀린 몸을 당신께서 몸소 이 땅에 오시는 통로로 사용하셨습니다. 마리아는 그때부터 주님을 몸에 모시고, 주님과 동행하며 살았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을 잉태하여 하느님의 계획에 자기 몸을 내어 주었듯이, 이 지상 생활의 끝에서 자기 생명의 마지막과 전부를 하느님께 내어 주었습니다.
우리도 생명의 빵으로 오신 예수님을 성모 마리아처럼 우리 몸에 품고 모시며 살다가, 주님과 더불어 우리 삶 전체를 하느님께 내어줍니다. 이것이 성찬례의 신비이며, 영성체의 은총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안식은 교회 전통마다 참으로 아름다운 상상과 귀한 깨달음으로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성모 안식 축일을 ‘성모 몽소 승천’ 축일로 부릅니다. 마리아의 몸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말입니다. 교리적인 논쟁은 차치하고, 여기에 담긴 아주 섬세한 뜻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우리 인간의 운명이 마지막에 어떻게 될 것인지에 관한 거룩한 희망이 아름다운 상상력으로 펼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성공회와 정교회는 오랜 교회의 전통에 따라, 이 축일을 성모의 ‘안식’(dormition) 축일로 부릅니다. ‘안식’(잠들다)이라는 말은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죽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을 떠난 신자는 모두 잠들어 하느님 품 안에서 쉰다는 뜻입니다.
제가 자주 인용하는 성공회 사제 시인인 존 던 신부님은 인간의 마지막 행로에 관하여 빼어난 통찰을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죽음아, 뽐내지 마라>라는 시에서 별세를 “몸과 뼈는 안식을 누리고, 그 영혼은 구원을 얻는 일”이라고 노래하고, 그때 “정녕, 죽음이 죽으리라”고 선언했습니다.
교회 전통과 정교회의 ‘성모 안식’ 이콘은 이러한 신학의 깊이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오늘 제대 앞에 놓인 이콘을 살펴 주십시오. 아기 예수님을 낳았던 어머니 마리아는 이 세상을 떠나 잠들었습니다. 지상에서 삶을 함께 나누던 많은 제자들과 성인들, 신앙의 동료들이 느끼는 슬픔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마리아는 천상에서 강보에 싸인 작은 아기가 되어 예수님 품 안에 안깁니다. 지상에서 어머니로서 아기 예수님을 안았던 성모님이 천상에서 아기가 되고, 지상의 아기 예수님이 천상에서 마리아를 안은 ‘어머니’가 되는 놀라운 신비입니다.
그런 탓이겠지요. 21세기의 성인 한 분은 지상의 삶을 고별하기 전에 이 신비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날이 태어나기에 좋은 날이요, 죽기에 좋은 날이다.”
지상과 천상의 역전, 아기와 어머니의 역전, 이 역전이야말로 성모 안식 축일의 핵심입니다. 하느님 구원 사건의 세상이 생각하는 질서를 하느님의 질서로 뒤바꾼다는 뜻입니다. 낮은 이들을 들어 올려서 하느님과 함께하도록 위치를 바꾸는 사건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노래는 성모의 안식으로 그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인간의 ‘안식’은 세상과 죽음의 질서를 뒤엎는 해방이자 구원입니다. 우리 역사의 자유와 해방을 이어나가고, 새로운 삶의 질서를 위해 수고하고 헌신할 때, 우리는 성모 마리아 안에서 일으켰던 하느님의 구원 역사에 참여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이 지상의 모든 수고를 끝내는 날, 천상에서 어머니이신 주님 품에 안기어 새로운 아기로 태어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운명입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인의 희망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였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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