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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의 로마서 집필과 예루살렘 귀환 여정
사도행전 20:1~12
오늘 본문 말씀의 초반부를 가지고 지난 주일에 사도 바울의 영혼 사랑의 열정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눈 바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의 소요 사태가 그친 뒤 그의 마게도냐 지역에 올라가서 지난 1년 여 동안 그가 행한 사역과 고린도에 가서 행한 사역에 대하여 매우 간결하게 기록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기록 너머에 있는 사도 바울의 전도 사역에 대하여 다시 한번 살펴보고 고린도 교회에서 로마서를 집필한 것과 그 후 예루살렘에 돌아오는 과정에 있었던 일들을 살펴보면서 그 영적 교훈을 배우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먼저 사도 바울의 마게도냐 사역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에베소에서 삼 년 동안 사역을 한 사도 바울은 매우 위급한 상황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1절을 보면,
“소요가 그치매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부른다’는 헬라어 단어가 ‘메타펨포’라는 말은 ‘자기에게 오도록 초대하다’는 뜻입니다. 아마도 사도 바울은 그 에베소 시의 은장색 데메드리오와 그 동업자들이 일으킨 폭동 수준의 사도 바울과 동료들과 기독교회를 향한 폭력적 소요 사태 때문에 잠시 은거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의도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교회의 장로들을 자기의 은거지로 불러서 자기가 떠난 후에 교회를 섬기는 가지 목회 지침들을 알리고 헌신을 당부한 후에 바다 건너 마게도냐로 가려고 드로아 항구로 내려갔습니다. 드로아 항구에서 사도는 분쟁과 구제 헌금에 대한 오해를 품는 등 많은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는 고린도교회에 간 동역자 디도를 기다립니다. 그러는 중에 드로아에 있는 교회에서 말씀을 증거하는 중에 큰 부흥이 일어나서 사람들이 몰려왔지만 사도는 마음이 편치 않아서 성도들과 작별하고 배를 타고 마게도냐로 건너갔습니다.
마게도냐에는 빌립보 교회가 있고 데살로니가 교회가 있고 베뢰아 교회가 있습니다. 2절에 보면, 사도행전을 쓴 의사 누가는 사도 바울이 그 지방에 다녀가면서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권하다’는 헬라어 ‘파라칼레오’는 위로와 격려의 의미가 많습니다. 사도는 그곳의 교회 성도들이 궁핍과 환난 중에도 신실하게 신앙 생활하는 것을 보면서 큰 기쁨과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격려하였던 것입니다. 그곳에는 자주 장사 루디아도 있고, 점치는 귀신 들렸다가 나은 여종도 있고, 빌립보의 간수장도 있고, 4절에 나오는 신실한 사도 바울의 동역자들인 베뢰아 교회의 수바더와 데살로니교회의 아리스다고와 세군도, 더베 교회의 가이오도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신실한 주님의 백성들이요 주님의 제자들을 보면서 열정이 솟아올라 많은 말로 그들을 격려하며 가르쳤습니다. 그러던 중에 지난 주에 살펴본 대로 디도가 고린도교회에서 돌아와 교회가 다시 안정을 찾고 회개하였으며 사도 바울의 권위를 인정하고 사도 바울을 사모하고 있다는 기쁜 소식도 전해왔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사도는 교회 안에서 가르치는 사역만 하지 않고 그리스 북부의 드넓은 미개척 이방 지역 깊숙이 전도 여행을 떠나기로 작정하고 실행에 옮깁니다. 그것에 대한 짧은 기록이 로마서 15:19 말씀에 나옵니다. 그 구절을 읽어드리면,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로마서 15:19,20)
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일루리곤’은 그리스 서북부 아드리아 해안 지방을 가리킵니다. 일루리곤은 그리스 북부 발칸반도 서쪽 지역으로서 지금의 알바니아, 몬테니그로, 코소보라는 나라가 있는 지역입니다. 사도 바울은 벌써 로마를 가기도 전에 유럽 내륙으로 그의 발걸음을 불쑥 집어 넣고 복음을 한번도 듣지 못한 이방인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아마도 그 기간은 반 년 정도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복음의 불모지이자 처녀림인 유럽 깊은 곳까지 복음을 들고 갔던 바울의 그 발걸음은 얼마나 담대하고 얼마나 용기 있는 행동입니까? 한번도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겠다는 사도 바울의 전도 원칙은 이렇게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광대한 지역에 복음이 전파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우리 생애 동안 할 수 있는 대로, 복음을 듣지 못한 이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여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듣고, 복음의 그 위대하고 풍성한 복과 은혜를 깨달아서 구원을 받고 주님께 돌아오게 하는 전도자의 위대한 영광에 동참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난 후에 사도 바울은 일루리곤에서 돌아와 드디어 헬라 지역에 도착하였습니다. 헬라라는 이름은 그리스를 일컫고 특별히 그리스 남부 지역 아가야 지역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헬라의 중심 도시는 단연코 고린도였으니 그곳은 아가야의 로마 총독의 관저가 있는 아가야의 수도였습니다. 고린도교회는 그 동안의 사도 바울의 네 번의 편지와 자신의 한번의 방문 그리고 디모데와 디도 등의 동역자들을 보내왔던 사도의 끈질긴 목회의 열매로 다시 정상적인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린도 방문은 이번이 세 번째인데, 그 동안 교회 내에서 사도 바울을 대적하던 이들은 이제 고개를 숙였고 사도 바울의 사도적 권위 아래 복종하였으며 부활을 부인하던 자들도 돌아왔고 유다 교회를 위한 구제 헌금도 기쁘게 동참하겠다고 결의하고 실천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회개와 순종이 이루어지는 것을 볼 때까지 고린도교회를 세 번째로 방문하는 것을 미뤄왔던 사도 바울은 마침내 그의 세 번째 방문에서 마음의 평화와 완전한 기쁨을 되찾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이제 고린도교회의 안정된 모습을 보면서 평안하게 다음 사역지인 로마와 그 너머 서바나를 향하여 선교 여행을 계획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로마로 가기 전에 로마에 이미 존재하는 기독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쓸 필요를 느끼고 차분하게 편지를 쓰기 시작합니다. 그가 편지를 쓴 장소는 로마서 16:23 말씀에 나오는 가이오 성도의 집이라 생각합니다. 거기에 보면 이르기를
“나와 온 교회를 돌보아주는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하고”
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가이오가 사도행전 18:7 말씀에 나오는 디도 유스도라는 사람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디도 유스도 가이오는 처음부터 자기 집에서 교회를 시작하였는데 적지 않게 큰 부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는 사도 바울과 그 일행들의 식사와 숙소도 제공하며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모여 예배 드릴 때에 많은 편의를 제공하고 나그네 된 자들을 너그럽게 대접하고 교회를 위해서도 관대하게 물질로 내어서 섬겼던 것이 분명합니다. 이는 로마서 16:23 말씀의 가이오가 사도와 교회를 ‘돌보아주었다’는 헬라어 단어 ‘크세노스’는 후하게 남을 대접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가이오의 집 한적한 방에서 그가 장차 가게 될 로마를 바라보면서 그곳에 있는 성도들에게 장문의 편지를 쓰기 시작합니다. 그 편지 로마서의 내용은 그 동안 사도 바울이 각처에 다니면서 전도하면서 유대인과 이방인들 앞에서 증거하였던 복음 곧 구원의 도리입니다. 그가 로마서 편지를 쓴 시기는 아마도 주후 57년 이른 봄이었을 것입니다. 그의 나이 57세 정도 때에 그는 저 멀리 로마에 있는 기독교인들을 만나볼 설레임을 가지고 그들이 혹시라도 갖고 있을 자기에 대한 이런 저런 오해와 그릇된 소문에 휩싸여 자기가 가면 거절할까 염려하면서 이 편지를 쓴 것입니다. 그렇게 편지를 써서 복음을 분명하고 체계적으로 먼저 전해주고서 그들이 나중에 사도와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았을 때에 편한 마음으로 마주할 수 있도록 이렇게 편지를 썼던 것입니다. 이 결과 우리는 오늘날까지 사도 바울이 가는 곳마다 전했던 복음의 핵심 내용을 로마서를 통하여 충분히 알게 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전했던 복음의 핵심 내용은 무엇이었는지 사도 바울이 쓴 로마서를 잠깐이나마 개관함으로써 다시 상기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모든 사람들은 예외없이 죄로 말미암아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받은 유대인이라고 해서 더 의로운 것도 아니고 율법 없는 이방인도 마찬가지로 모든 은밀할 것을 다 드러내어 심판하시는 종말의 그 날에는 예외없이 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떨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자랑하는 모세의 율법을 지킨다고 노력한다 해도 이 무서운 심판의 운명을 피할 수 없게 한다고 사도는 선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불완전한 율법 외에 한 다른 의를 죄인된 인류에게 주셨으니,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의 길입니다. 이 의는 차별이 없으니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동일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는데, 이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드려진 속량의 대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길이 열렸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어떤 덕행과 수고와 혈통적 신분으로 된 것이 아니요 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의로움의 복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게 됩니다.
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로움의 복을 받은 좋은 모델로 아브라함울 들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율법을 받기 전에, 할례를 받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아들이 없는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질 것이라는 약속을 의심없이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아브라함의 그 믿음을 하나님은 그의 의로움의 근거로 삼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의와 그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는 자들도 역시 아브라함이 믿어 의를 얻은 것처럼 그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기에 우리 행위의 공로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더 깊이 들어가면,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신앙은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를 믿는 자 역시 그와 함께 죽은 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그가 부활하심과 함께 부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대표성의 원리로써 설명합니다. 첫 사람 아담의 후손된 모든 인류, 모든 사람은 아담이 대표가 되어 하나님 앞에서 선악과를 따 먹어 하나님을 배반하는 불순종을 범함으로써 그가 죄인이 되고 마귀의 종이 되고 저주와 죽음과 영벌에 이르렀습니다. 이처럼 그의 후손들인 모든 인류는 아담 안에서 예외없이 죄인이 되고 저주와 사망과 영벌을 상속하게 된 것입니다. 이와 동일하게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대표로서 하나님 앞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 그를 믿는 자들도 그리스도의 순종 안에서 아무 공로 없이 의로움과 축복과 부활과 영생의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자들은 의롭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생에 이르는 복을 받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땅에서 계속하여 죄를 범하고 악을 행하여도 영생을 얻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담과 그 후손들의 죄를 사하고 의롭게 하기 위하여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려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셨지 않습니까? 그렇게 우리 죄 때문에 예수께서 죄 없는 자로서 우리 대신 죄인으로서 처참하게 죽으셨거늘 어찌 우리가 주님을 죽이는 그 악한 죄를 다시 범해서야 되겠습니까? 예수께서 우리 옛 사람을 가지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는 죄에게 종노릇하지 말라는 목적으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은 후에 죄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죄를 짓지 아니할 수 없는 연약함이 믿는 자들에게도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 안에서도 죄악의 힘이 여전히 강하게 역사하여 그를 죄의 권세 아래로 끌어갑니다. 아무리 그 구원받은 자 안에서 거듭난 새 사람이 의로운 길로 가기를 원하지만, 옛 사람과 새 사람이 거듭난 사람 안에서 서로 싸워서 죄의 힘 아래로 끌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듭난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도 죄를 한번도 범하지 않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모든 성도들도 역시 옛 사람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거듭난 새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섬기는 이중적 갈등이 늘 있다고 바울은 선언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내적 갈등이 존재할지라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한 사람에게는 그 안에 성령이 내주하시면서 그를 돕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아무리 해도 할 수 없었던 의의 요구를 이제는 성령께서 도와주심으로써 의의 요구를 충족시키게 됩니다. 아무리 해도 극복할 수 없고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육신의 타락한 본성의 요구에도 이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겨나갈 수 있게 됩니다. 성령은 예수님을 믿는 자 안에 거하면서 죄의 소욕과 싸워 이기도록 계속하여 도와주시기에 성도에게 남아 있는 몸의 타락한 행실들이 영으로써 서서히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은 연약한 중에 있는 믿는 자를 위하여 늘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함으로 도와주심으로써 결국에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됩니다. 이렇듯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의 기도로써 돕고 영원전부터 예정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붙들어주시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 보좌 우편에서 계속하여 기도해주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결코 잃어버림을 당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무서운 핍박이 와서 택하심을 입은 주의 백성은 끝까지 절대로 잃어버려지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개인 구원론에 관한 사도 바울의 로마서 마지막 종결 부분인 로마서 8:37 이하에서는 이렇게 장엄한 확신의 고백으로 끝이 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로마서 8:37~39)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우리도 역시 결코 구원받을 수 없는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와 심판 아래 있는 죄의 종이요 마귀의 종이요 지옥 백성이었지만, 하나님의 조건 없는 완전하고 영원한 사랑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영원 전부터 택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치르신 대속의 죽음의 희생과 성령으로 인하여 죽음에서 일어나신 부활의 능력을 통하여 그의 택한 백성들도 값없이 죄사함을 받고 의롭게 되고 영생 부활을 얻은 자가 된 것입니다. 이 은혜를 입은 자들은 이 땅에 사는 동안 타락한 옛 본성의 시험과 세상의 유혹과 박해와 마귀의 흔들어대는 영적 시험이 있어서 잠시 넘어지고 흔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끝내는 그의 아들 안에서 부어진 새 생명의 능력과 하나님 아버지의 영원하신 자비와 예수 그리스도의 끈질긴 중보 기도와 믿는 자 안에서 도우시는 성령의 끈질긴 도우심으로 모든 시험을 이기고 박해를 이기고 끝까지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 안에서 끊어지지 않고 장차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사도 바울에게 계시하신 복음의 풍부한 은혜와 축복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이 놀라운 구원의 복음을 가는 곳마다 전하곤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도 사도가 복음을 선포할 때마다 따르는 표적을 베푸심으로 그 선포된 복음이 진리임을 확실히 보증해주시곤 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이 증거한 그 동일한 복음을 듣고 믿어 영광스러운 구원에 참여한 자요 이미 영생을 얻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그 영생을 매일 매일 이루어가고 있는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차 완전한 생명과 평화와 영광으로 충만한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예수님의 재림과 더불어 이르게 될 때에는 우리는 반드시 그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 부활의 영광을 영원히 누리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 성도들이 듣고 믿고 그 가운데 굳게 선 이 부활 영생의 복음을 우리도 굳게 붙듭시다. 그리고 이 복음 진리를 우리 자신의 목숨보다 더 사랑하고 이 복음 진리를 위하여 사도가 그토록 핍박을 견디며 땀과 눈물과 피를 흘리면서 증거했던 것처럼 우리도 최선을 다하여 이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파하도록 힘을 다하여 증거합시다.
이렇게 그 로마서가 집필이 다 끝나자 사도 바울은 고린도 시의 동편 항구인 겐그레아 도시에 있는 겐그레아 교회의 뵈뵈라는 여집사님을 통하여 그 편지를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냅니다. 그리하여 약 석달 간에 걸친 사도 바울의 헬라 지역의 체류 기간이 다 끝이 납니다.
그리고 이제 사도는 3차 전도 여행을 마무리하고 이방 교회 성도들이 그 동안 희생하며 모은 구제 헌금을 유대교회를 지도하는 야고보를 비롯한 지도자들에게 건네서 이방인교회와 유대 교회의 연합을 도모하고자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합니다.
처음에 사도 바울의 계획은 매년 4월 말 정도에 열리는 예루살렘의 유월절 명절에 참석하고자 계획합니다. 그러려면 헬라 지역의 유대인들을 한군데 모아서 예루살렘까지 태우고 가는 배를 타고 가는 것이 가장 편리합니다. 이방 지역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의 명절에 참석하려고 때로 배를 찾아서 계약을 맺고 함께 그 배를 타고 예루살렘까지 여행을 가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에게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유대인들 중에 사도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이 그를 해치려고 공모를 한다는 것입니다. 3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거기 석달 동안 있다가 배 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할 그 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 마게도냐를 거쳐 돌아가기로 작정하니”
유대인들은 사도 바울을 그 예루살렘으로 가는 유월절 명절에 가는 배에서 은밀하게 죽여서 지중해 바다에 밀어 던져 흔적도 찾을 수 없게 처치하려고 여러 사람이 공모를 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이 성도들에게도 알려져서 사도는 유월절 명절에 가는 것을 중단하고 유월절 후의 명절 곧 유월절 후 49일 후에 열리는 오순절, 맥추절에 가려고 계획을 변경합니다. 헬라에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가는 배 대신에 윗지방 마게도냐로 돌아 가기로 작정하여 길을 떠납니다. 그 때 동행하는 사람의 명단이 4절에 나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아마도 이들은 자기 교회의 대표로서 예루살렘에 갖고 가는 구제 헌금을 담당하여 가져와 사도 바울과 함께 예루살렘에 가는 이들입니다. 여기에 나온 성도들의 교회가 베뢰아 교회, 데살로니가교회, 더베 교회, 아시아 곧 에베소 교회가 있습니다. 그 외에도 동역자 디도와 의사 누가가 있으니, 사도 바울까지 합치면 약 10명이나 됩니다. 사도 바울은 혼자 사역하기보다는 팀사역을 더 좋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주님의 복음을 위하여 일할 때 혼자 하기보다는 함께 힘을 모아서 동행하면서 일하는 것이 좋습니다. 함께 일하다보면 서로 다른 부분 때문에 비록 어려움이 따르고 성과를 내는 데에도 시간이 더딜 수 있지만 그러나 더 오래 일할 수 있고 더 멀리 함께 갈 수 있습니다. 우리 함께가는교회 모든 성도님들도 주님을 섬기는 교회에서나 가정에서나 직장에서 다른 성도들과 가족들과 동료들과 함께 일하되, 겸손과 인내와 사랑으로써 함께 일하여서 더 큰 행복 속에서 더 오래 더 풍성하게 큰 성과를 내는 우리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사도 바울이 돌아가는 길에서 드로아 항구에 들러 교회에서 일어난 특별한 일을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유월절 명절을 위한 배를 타지 않고 그 다음 명절인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려고 마게도냐 쪽으로 올라 갔습니다. 그리고 마게도냐의 빌립보 교회에 들렀다가 사도 바울은 그곳에 머물던 의사 누가와 함께 그곳에 남고, 나머지 일행들은 먼저 배를 타고 에게해를 건너 드로아 항구에 도착하여 사도 바울과 누가가 건너오기를 기다렸습니다. 5절로부터 ‘우리’라는 단락이 시작되는 것을 보면, 그 동안은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가 사도 바울과 함께 있지 않다가 이 때부터 동행함을 말해줍니다. 6절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고 하였으니, 사도 바울과 누가는 배를 타고 닷새만에 드로아로 건너옵니다. 예전에 드로아 항구에서 사도 바울이 밤에 환상 중에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이리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 사도 바울이 곧장 배를 타고 건넜는데, 그 배는 하룻만에 건너갔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바람이 역풍이 불기 때문에 이렇게 힘들게 배가 온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드로아에서 7일 동안 머물렀던 것도 아마도 배의 출항이 바람 때문에 어려워서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런데 드로아에서 사도 바울이 머물 때에 그곳에 있는 드로아 성도들이 마침 주일을 맞아 사도 바울과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 주간에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여기서 보면 주간의 첫날은 주일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주일에 그들은 떡을 떼려고 모였는데, 이것은 그 당시에 초대 교회 성도들이 주일 저녁에는 성찬식과 애찬식을 늘 하곤 했던 관례가 있었던 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주일 저녁에 주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밤에 성찬식을 거행했던 것처럼 함께 모여 떡을 뗐고 애찬식도 거행했습니다. 애찬식은 성도들이 집에서 음식을 가지고 와서 함께 나누어 먹는 사랑의 교제의 식사였습니다. 이처럼 초대 교회에는 성찬식을 매주일 했습니다. 그 의미가 중세 로마 교회에서는 미사로 변질되고 그 의식이 일종의 제사 의식처럼 변질되면서 루터나 칼빈 등이 종교개혁을 일으킬 때 미사를 폐하고 성찬식을 일년의 네 번 정도 드리도록 권면하여 그 가르침을 저희 장로교회가 따르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올해 성찬식을 1월에 했었는데 9월에 다시 성찬식을 거행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오순절까지 가고자 일정이 빠듯해서 그 다음날 출발하고자 하여 그 날 저녁에 시작된 강론을 밤중에까지 계속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 밤중에 유두고라는 청년이 떨어져 죽는 사고가 발생합니다. 8절로부터 12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가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하고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
이 모인 장소는 개인의 가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삼층 집인데 천장은 낮고 저녁이 시작된 집회에서 사도 바울이 하룻밤밖에 그들과 함께 머물 일정이 안 되니까 그 날 밤을 새가면서 복음을 전하며 그들의 질문과 질의에 답변하면서 가르침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강론하다’라는 단어는 헬라어 ‘디알레고마이’인데, 이는 ‘토론하다’는 의미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사도의 강론이 길어지자 유두고라는 청년이 그만 늦은 밤 촛불의 연기와 열기 속에서 낮은 천장 안의 탁한 공기 때문에 창문 쪽에 가서 맑은 공기를 마시고자 걸터 앉았다가 그만 깊은 잠에 빠져서 아래로 툭하니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9절에 보면, 사람들이 내려가서 일으켜 보니 죽었다고 했습니다. 죽었다는 판정을 내린 사람은 아마도 의사였던 누가가 직접 내렸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분명 죽었습니다. 호흡이 끊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곧 삼층에서 내려오더니 그 청년을 안았습니다. 그 때의 동작에 대하여 10절에 보면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라고 하였습니다. 그 위에 몸을 엎드렸고 또 그 몸을 안았다고 하였으니, 이는 과거 엘리야가 죽은 사렙다 과부의 아들을 다락의 자기 침상에 올려놓고 행한 행동과 같은 것입니다. 열왕기상 17:21 말씀에 보면,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의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의 사람 엘리야가 사렙다 과부의 아들의 죽은 몸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렸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도 이미 죽은 유두고 청년의 몸에 자기 몸을 엎드렸고 그를 품에 안았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이미 죽은 그 청년 유두고의 심장이 다시 뛰고 호흡이 다시 돌아온 것을 보고 사도는 놀라서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진정시키기 위하여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라고 말하고 다시 올라가서 성찬을 떼고 애찬을 나눈 뒤에 밤이 새어 새벽이 될 때까지 계속 말씀을 전하고 떠났습니다. 그리하여 죽었다가 살아난 청년 때문에 성도들은 큰 위로를 얻고 다시 한번 죽은 자의 부활의 능력을 체험적으로 경험하고 믿음이 새로워졌습니다.
이 사건에서 사도 바울은 유두고 청년이 졸았다고 책망한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 청년은 아마도 노예 청년일 가능성이 큽니다. 하루 종일 주인의 명령을 따라 낮에 일에 시달리다가 저녁에 시간을 내서 주일 예배에 참석하였는데 그 날 육체 노동에 시달리고 밤 늦게까지 강론이 있으므로 결국 그렇게 깊은 잠에 빠진 것이므로 결코 그 젊은이가 비난받을 것은 아닌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유두고를 다시 살리신 이 사건을 통하여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은혜의 가르침은 우리가 세상일을 하다가 지치기도 하고 어려운 시련을 만나 고통 중에 있을지라도 주님을 섬기고 주일을 지키며 최선을 다하여 신앙 생활을 하는 중에 어려운 일을 겪게 된다면 결국은 우리 주님께서 은혜를 주시고 도와주시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님과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연약한 몸과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최선을 다하여 예배와 기도와 헌신을 통하여 주님을 신실하게 섬기는 것을 주님께서 잘 아시기에, 우리가 삶의 여정에서 큰 시련을 겪을 때에 결코 우리를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 반드시 우리 삶에 개입해주시고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실 것이 확실합니다.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우리 구원의 주 영원하신 하나님은 영원히 살아 계십니다. 우리를 늘 눈동자같이 지켜 보호하고 계십니다. 우리 성령님 역시 우리 안에서, 우리 곁에서 동행하시며 우리를 늘 도와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결코 구원의 보배를 결코 잃지 않을 것입니다. 그 무엇이라도 결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삶에도 이런 저런 거친 시련의 풍랑이 닥쳐올지라도 우리 주님은 결코 우리를 홀로 두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그의 놀랍고 기이한 능력으로 우리를 끝까지 붙들어주실 것이요 지켜내 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큰 위로와 기쁨으로 모든 고난을 이겨내고 영광의 주님 기다리는 저 천성 문 들어갈 때까지 믿음으로 승리하도록 우리를 꼭 붙잡고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