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가 구청에서 무료로 해주는 치매검사를 받았는데, 경미한 인지장애라는 결과가 나왔다는 거다. 요즘 스마트폰에다 치매예방 앱을 깔고 매일 숫자찾기 게임을 하는데 재미있다며 내게도 해보라고 권한다. 일흔 중반이면 노령이긴 하지만,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여성 한의학 박사 1호로 지금도 쉬지 않고 배우기를 즐기는 언니가 인지장애라니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싶어 속으로 웃었다. 그런데 나도 일전에 서울에 오래 머물다가 경주집에 돌아왔을 때 아파트 출입구 비번이 갑자기 떠오르지 않아 당황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언니의 전화를 받고부터 인지장애라는 말이 계속 신경쓰였다. 유튜브에서 치매예방 프로그램을 찾아보니 주로 낱말찾기 게임이다. 가로 세로로 글자를 뒤섞어 놓고 1분에 3글자 이상의 단어를 3개씩 찾아내는 것인데, 보통 한 게임당 7~8개의 문제를 풀어야한다. 처음에는 어렵게 느껴졌지만, 그것도 자주하니까 요령이 생겨 이제는 금방 단어를 찾아낼 수 있다. "60대가 이 문제를 다 맞히면 두뇌가 상위 5%안에 든다"라든가 "10명 중 1명만 만점이 나오는 퀴즈" 라는 말로 출제자가 넌지시 내 도전 정신을 자극한 덕분이다. 아무튼 이 정도면 아직 치매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내친 김에 좀 강도 높은 두뇌 훈련을 해볼까 해서 이번에는 영시를 외워보기로 했다.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무작정 영시를 외우게 했더니 저절로 머리가 깨어 어려운 영어 단어의 뜻을 이해할 뿐아니라 덤으로 수학도 쉽게 풀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어서다. 다 늙은이 머리로도 그게 가능할지 궁금하다. 우선 로버트 프로스트의 '풀베기'(mowing)를 골랐다. 로버트 프로스트는 원래 농부인데, 그분의 시는 영국의 서사시와는 달리 일상의 삶을 그린 최초의 미국식 영시라고 한다. '풀베기'는 고요한 숲속에서 자신의 긴 낫이 내는 소리를 대지에게 하는 속삭임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원래 시적 감성이 부족한 내가 더구나 영시를 이해한다는 건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거듭 암송을 하다보니 '풀베기'는 시인이 자신의 시작(詩作)을 비유한 시라는 해설을 용케 알아들을 수 있었다. 모두가 잠든 시각, 원고지 위에서 사각이는 펜의 소리가 농부인 시인의 귀에는 대지 위를 가볍게 옮겨다니며 풀을 베고 있는 낫의 소리처럼 들렸으리라. 글쓰기는 풀베기처럼 게으른 시간이 거저 주는 선물도, 요정에게서 손쉽게 얻을 수 있는 황금도 아니다. 그건 신성한 노동만이 알고있는 가장 달콤한 꿈인 것이다. 단지 기억력에 도움이 될까 해서 우연히 택한 프로스트의 시가 머리가 아니라 가슴을 일깨워 준다. 난 그동안 고요한 숲속을 벗어나 시끄러운 세속의 골목길을 헤매다니느라 한때 내게 큰 위로였던 글쓰기라는 달콤한 꿈을 잊고 지냈다. 다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그 숲속으로 긴 낫을 챙겨 들고 가봐야겠다. 내 서투른 풀베기 솜씨로 건초더미를 만들어낼 수는 없겠지만, 그냥 혼자서 열심히 낫질을 하며 치매예방 놀이라도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