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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銅彌勒半跏像 의 考察
-----朝鮮美術史草稿의 一片
고유섭
1.
((李王家博物館所藏寫眞帖))상권 제10조에 금동여의윤관세음(金銅如意輪觀世音)이란 제목과 사진이 있고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이 상(象)은 원래 적할도금(赤割鍍金)을 베푼 것으로서 후에 황금도금(黃金鍍金)으로 개식(改飾)하고:마손(磨損)되에 다시 도칠치박(塗漆置箔)하여 재년(載年)을 경과한 듯하다. 이제 그 잔칠(殘漆)한 사이로 돈후(敦厚)한 석년(昔年)의 도금(鍍金)이 혁혁(赫赫)함을 볼 수 있어 군데군데 황금색을 교출 (交出)하고 대좌(臺座)는 칠색(漆色)이 유흑(黝黑)하나 그 밑엔 석년의 도금이 있는 듯 하다. 상모(相貌)는 단려(端麗)하고 풍자는 소쇄(瀟灑)하다. 불가침(不可侵)의 영위(盛威)의 기운을 구비하고 굴슬곡굉(屈膝曲肱)하여 여원 몸을 앞으로 구부렸으며 반안(半眼)을 하강(下瞰)하여 속계 중도(衆度)를 침사(沈思)하고 있다. 그 안모(顔貌)의 풍려(豊麗)함에 비하여 체구와 사치가 청수(淸瘦) 장연(長姸)함은 다소 처창지한(凄熗之恨)을 면치 못하겠다 할 것이나 이는 묘엄(妙嚴)한 취치(趣致)의 발로로서 숙시(熟視)하면 도리어 숭고한 기운(氣韻)이 생동함을 깨닫게 한다. 이는 일탈(逸脫)한 의기로써 조작하지 않으면 농히 이루지 못 할 바이다.
세요(細腰)에 감은 경라(輕羅)는 초초(楚楚)하며. 소쇄한 풍자를 조성하고 양요(兩腰)의 비대(紕帶)가 길게 늦어치고 주름의 수법이 유려하고 의단(衣端)의 곡절(曲折)은 변전(變轉) 자재하여 조취(造師)가 도무지 단소치역(單素之域)을 초탈(超脫)하며 추밀한 의장(意匠)에 추부(趨赴)하려는 것을 보아 삼국시대 말기의 작품인 듯하다.
이상이 즉 이왕직박물관 소창(所藏)인 금동미륵상에 대한 해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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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여기에 논하고자 하는 소위 여의륜관음(如意輪觀音) 혹 일명 미륵보살(彌勒菩薩)이라 함은 도면에서 보는 바와 같은 반가상(半柳像)에 대한 명칭이다. 그러나 여의윤관음(如意輪觀音)이란 것과 미륵보살이란 것은 판이한 두 개 독립된 개념(槪念)임에 불구하고 동일상을 착잡한 개념으로 호칭함은 불상 연구에 곤란을 초래함이요, 이내 곧 각기 불상의 표현에 대한 일정한 의궤(儀軌)가 없음을 포증(表證)하는 것이다. 불구하고 대개 미륵이라 함은 범어(梵語)로 Maitreya라 하고 파리어(巴利語)로 Metteya라하는 것으로 음역(音譯)하여 대탄려야(梅坦廲耶)라 하고 의석(義驛)하여 자씨(慈氏)라 하고 아일다(阿逸多:無能勝) 현재 일생보처(一生補處)의 보살로서 도솔천(兜率天에 있어 56억 7천만년 뒤 이 세상에 테어나 성불(成俳)하여 중생을 제도할 부처라 한다. 석가의 직제자중에도 미륵이란 인물이 있었으니 이 미륵이란 개념에는 이상적 인격으로서의 그것과 역사적 인물로서의 그것이 있다. 양자의 관계는 불명하나 미륵이 장래(곧 當來)할 부처로서 숭앙(崇仰)되거는 부처가 입멸(入滅)한 후의 사실이다. 미륵은 석가의 유법(遺法)을 부촉(付囑)받은 자로、교법의 계승자요 유지자로 인증(認證)된다. 입멸한 석가의 대신으로 구재자의 출현을 촉망(囑望)하는 정은 드디어 미륵의 출세를 기다릴 사이 없이 곧 미륵의 현재 소거(소거)인 도솔천에서 태어나려는 사상이 발생하여 한 때는 현재불로서의 아미타(아미타) 의 신앙이 정토 왕생)정토 왕생)의 사상을 능가하게까지 되었다.
이에 대하여 여의륜관음은 범명을 Cintamani라하여 음역하여 진타마니(眞陀摩尼) 의석하여 여의륜(如意輪)이라 한다. 여의는 여의보주(如意寶珠) 즉 진타마니요, 윤(輪)은 윤보(輪寶)이니, 즉 사구라(捨佉羅)를 이름이다. 이 관음보살은 여의보주의 삼마치(三摩地: 三昧境)에 머물러 법륜(法輪)을 눌려서 재세간(在世間) 출세간(出世間)의 중생을 유익하계 하는 것으로 신앙되는 것이다.
현재 블교 교리사의 완전한 연구가 집성되지 못하여 신앙변천의 시대적 구획이 곤란함과 불상조성에 인정한 의궤(儀軌)가 없었던 관계로 나의 논고하고자 하는 이 반가상 (半跏像)의 정명(定名)을 확립하기는 오히려 후일의 문제로 보류함이 안전할 것이요、또 하나는 미술품의 대상으로 볼 제정명의 여하가 선결문제가 되지 않겠으므로 이 문제에 대하여는 깊이 묻어 가치 아니하고 우선 이 반가상의 벌생을 찾은 후-그 예술적 가치를 정립하여 보려는 것이 본론의 안목이기에 다음에는 그 발생 또는 원생(原生) 형태를 잠깐 살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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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반가상의 원태(原態)에 대하여는 일찍이 하마다(濱田靑陵)박사가 쥬우구 사(中宮 寺) 여의 륜관음에 대하여 논고함에 있어 다소 자세한 고증을 선단(先新)함이 있으므로 이 원시 문제는그의 논고에 추종하여 두려한다. 이 반가상 같은 자세는 원래 의자생활을 하는 민족 간에는 한 휴식태(休息態)의 자세였다. 또 도면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일부 완굉(腕肱)을 굴곡시켜 볼(面頰)을 지지함도 사유(思惟)하는 상(相)도 되려니와 휴식상(休息相)이 됨도 사실이다. 이러한 실제 사실을 대상으로 하는 예술적 표현이 생김도 있음직한 사실이다. 불상조각의 기원인 인도에도 이러한 안식의 자세를 취한 조각이 궁중생활을 표현한 일부 산치(Sanchi) 문에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종교예술에 있어 숭앙(崇仰)의대상이 될 주요 인물을 이러한 안식의 자세로서 표현함은 부적당한 것이매 간다라(Gandhara)의 불타상에도 이러한 안식의 표현을 가진 조각이 없다. 다만 사실적 부조(浮影)중 불전(佛傳)을 표현한 권도적(卷圖的) 설화조각 중에 부처가 출가전 궁녀들이 잠자는 가운데 홀로 평상위에 일어나 앉아 있는 곳에 이 반가상의 좌상어 표현되어 있음을 본다.(Foucher, L'Art Greco'g'ouddhigue du Gandhara, Tomeli, fig.447)• 그러나 블타의 본조(本尊)이외의 그의 협시(夾侍)나 속인({§人)등을 표현할 바에는 다소 안락한 자태를 취한 형상(形象)올 표현함에 하등 불가항이 없을 뿐더러、부처가 결가부좌의 엄숙한 태도를 취함에 대하여 자세의 변화를 요구함이 또한 미술상 요구에도 필요한 추세도는 가능한 추세로 볼 수 있을 것이나 이에 반가상이 출현될 이유가 다대하다 할 것이다. 정반왕(淨飯王)이 그 왕비(王妃)의 꿈에 대하여 선인(仙人)과 대화하는 간다라 조각 중에는 이 미술상의 목적으로 변화 대조를 표현하기 위하여 중앙에는 국왕이 의자에 앉고 좌우의 인물이 반가적 자세를 취하고 있다 (Gruenwedel, Buddhistis' che Kunst in India, fig,7 S Foucher, fig.151). 이 구도(繼間)를 곧 불타와 두 협시의 삼존상(三尊相: Trinitfy)으로 번안한 것이 Loriyan·Tangai 발견의부 조에 나타나 있다(G. ebenda fig. 147. F. ebenda fig.408)· 이는 불타가 중앙 연대위에 절가(結~l)한 좌우에 두 보살이 반가에 가까운 파탈(破脫)한 자세로 왼쪽 협시는 왼손으로, 오른 쪽 협시는 오른손으로 팔굽을 굽히고 무릎을 꿇고(曲賊屈壓)얼굴을 받치고 있다. F씨는 이것으로써 사위성(舍衛城)의 기적을 나타낸 것으로 좌우는 Indra와 Brahma라 하고 G씨는 문수 (文殊)와 관음(親音)이 되리라고 상상한다. 이와 같은 형식의 삼존이 석감자(石龕子)에 표현된 것이 같은 곳에서 발견 되었다(F. ebenda, fig.76, G. ebenda. fig.152).
이 삼존의 협시로 표현된 반가상이 거의 동시에 독립된 보살상으로 조상(造像)된 것도 있다. 이것도 로리앙 탕가이에서 발견된 것으로 미륵인지 관음인지는 알 수 없으나 혹은 오른손을 오른쪽 무릎에(F. ebenda, fig.109 & 428) ,혹은 왼손을 왼쪽 무릎에(F. ebenda, fig.410) 받고 있는 (ebenda, fig.410)는 태(態)는 쥬우구 사(中宮寺) 관음식의 반가사유(半柳思惟)의 형상과 완전히 같다. 즉 이 형상의 기원은 이미 간다라 조각 중에 있다고 단언한다. 이 로리 앙탕가이의 삼존상과 같은 양식이 시대가 오래 상거하고 장소가 멀리 떨어져 있는 지나 육조의 조각에 나타나 있음은 문화 이동사상 어떠한 암시를 줌이 없을까?'
예컨대 운강(雲崗)석굴사의 북위(北魏)조각 중 두 무릎을 교차(交.'.>'[)한 중존('lfl훈좌우에와」 전한 반가상의 자제를 취하고、오른쪽 협시는 오른손으로 왼쪽 협시는 왼손으로 볼을 지지하고 있는 3상이 다수 보인다. 용문(龍門)에는 운강보다는 그 수가 적다. 물론 이 삼존상이 어떤 종류의 불상을 표시하는가 하는 것은 알 수 없으나 당시 여러 다른 조상명(造像銘)안에 조감(照鑑)하면 미륵·석가·정광(定光)등을 표현한 듯도 하나 그 협시는 특히 어느 보살로써 해야 한다는 규약이 없는 것이므로 이를 분명히 밝힐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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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술한 바와 같이 본래는 협시상(夾侍像)에서 발달한 듯 한 반가상이 얼마 아니되어 하냐의 독립한 상으로 표현 되었음은 사실이다. ‘이미 운강에서 한둘의 예를 볼 수 있다 (C. ebenda, fig 220, 221). 이 경우에는 협시상과 간이 중준을 향한 태도를 취할 필요가 없으므로 자연 정연한 태도를 취하계 되었다. 그 중 다리 앞에 필마(匹馬)가 궤복(跪伏)하여 있음을 보아 석가임이 분명하면 이러한 예로 보더라도 원래 협시상으로 이용되던 반가상이 그후 독립한상으로 바뀌어 지고、따라서 그 표의(表意)가 시종보살(侍從菩薩) 뿐 아니라 석가 기타에까지 파급 되었음을 인증(認證)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이 이러한 양식의 반가상을 당시 신앙된 종파에 의거하여 정명(定名)을 좌우할 수 없는 한 증좌도 된다.
그건 그렇고 이 반가상이 하나의 독립상으로 되자 오른손 사용을 습속(習俗)으로 하는 지나·조선·일본에 있어 오른손으로 오른 쪽 무릎을 지지하고 있는 독립된 반가상이 유행되었음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필자는 대략 이상으로써 이 반가상의 기원고(起源考)를 마쳤다 보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 와서 조선에 현재 남아 있는 반가상을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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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 제3권을 들추어 보더라도 경주 발굴의 석상을 비롯하여 왜소(綾小)한 금동상까지 열 손가락을 꼽을 만큼 있으며 일본 세이소인(正倉院)에 있는 어물(御物) 48 불상 중에도 조선에서 간 것이 있으리라고 까지 하니 반가상이 신라 통일 전후(이반가형식이 대체로 조선·일본에서 이때에 성행하였고 후기예는 돈연히 쇠퇴하였다)에 얼마나 첨단(尖端)을 가는 한 예술 형식이었음을 볼 수가 있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 작품으로는 이왕직 박물관의 금동상과 국립박물관에 있는 금동상이 있으니 그것의 제부관찰을 서술(叙述)한 후 이양식의 예술적 가치를 고려(顧慮)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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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직 박물관 소장 금동미륵반가상은 안면이 방원(方圓)에 가까운 풍만(豊滿)한 상(相)으로 몸이 작고 머리가 큰 한(恨)이 다소 있으며 버들잎 눈썹(柳眉)에 봉황의 눈(鳳眼)을 반쯤 뜨고 콧마루(鼻梁)가 날카롭고 난대 정위(蘭臺廷尉 : 코끝 양쪽 도두룩한 부분)가 단아(端雅)하다. 입(口形)은 방형(方形)에 가깝고 입아귀(口角)에는 다소 완화(緩和)된 의고소(擬古笑-Archaic Smile)를 띠었으며 인중(人中)은 깊고 크다 승장(承醬) 입술아레 오목한 부분)이 다소 오목함은 북위(北魏)의 수법이요、목부분에 두서너 횡선이 형식적으로 그려 있음은 일교적(密敎的) 영향이 있지 아니한가 한다,
귓블(耳朶)은 비사실적이요 뒷바퀴(耳框)가 비입체적이다. 귀고리(耳環)는 없고 다만 허공(虛孔)이 님아 있다. 연약한 두 어깨는 여성적이요, 가느다란 두 팔의 곡선미는 십분 사실덕이다. 저자는 이 가는 팔고 동체가 완곡(宛曲)히 연접(연접)되는 홍견부(홍견부)에서 조선적 미각(미각)을 느낀다( 이 점에도 이것은 일본 京都 廣隆寺 반가상과 동일한 입체미를 가지고 있다. 御物 금동 48불이란 것의 하나와 中宮寺 관음 등 위에서 말한 부분을 비교할 제 이왕직 미륵반가상. 廣隆寺 반가상의 그것이 연약하고 여성적이요 사실적임에 비하여 御物佛과 中宮寺 관음은 勢力的 팽창성을 보인다) 다시 오른 손은 유연(柔然)히 굴곡하여 오른쪽 볼을 지지하고 왼손은 유연(柔然)히 흘려 어른팔 과두(과두)에 의단(의단)을 가벼이 얹고 있다. 유방(유방)의 굴곡이 있는 듯 없는 듯 가는 허리로. 흘러간다. 왼쪽다리는 연대(蓮臺)위에 드리우고 오른쪽 다리를 굽혀 반가의 자세를 취하였다. 손가락의 기교가 우아 단묘(端妙)함에 대하여 발가락의 기교가 다소 조략(粗略)한 점이 있다. 머리위에 메산(山)자형의 무장식 법관(法冠)을 썼으며 머리 뒤쪽에 광배(光背)를 끼우는 지철(支鐵)이 있을 뿐이요、광배는 없어졌다. 결발(結髮)은 체발(剃髮)을 모(模)하고 장엄구(莊嚴具)로는 목걸이가 하나이고 상박(上膊)에 환패(環珮)를 끼웠던 형식이 있을 뿐이나 고오류 사 반가상에 없음을 보아 이곳에도 원래 없었을는지 모른다. 이리하여 상반신은 완전한 나형(裸形)을 이루었고 허리부분에만 치마를 걸쳤으니 그 주름(褶襞 습벽)은 유창(流暢)하고 조의(彫意)가 활달하여 복위식의 졸박(拙朴)한 기하학적 형태를 벗어났음은 실로 기교의 일단전보를 표시한다. 더구나 오른 다리에 휘휘둘린 비단이 날릴 듯한 수법은 조각가의 환상을 이내 곧 구현(具現)한 듯 하만 대개 금동체의 의습(衣褶)이 평행균제성(均齊性)을 많이 가지고 단면이 직각적인 경향을 갖게 됨이 통성(通性)이나 이 동체에 있어서는 주름의 선이 원미(圓味)를 많이 갖고 더구나 기하학적 원형성을 떠나 회화직 요소가 풍요(豊饒)하여 집은 석굴암의 선구(先驅)를 웅변(雄辯)으로 설명하고 있다. 좌우 비대(紕帶)는 완패(環璟)을 떨어뜨려가며 둔부(臀部)로 졉혀듦이 상칭(相稱)의 법(상정법이라 함은 詩句의 對句와 같이 좌우 형태를 같이 하여 상청시키는 것으로 싯구에서 보다도 조각에 있어서는 다소 자유롭지 못한 형식에 구속된 감을 일으키기 쉬운 것이다)을 떠나지 못하였다. 대좌는 원동형(圓筒形) 조형(釣形)으로 하부가 나팔같이 벌어졌다. 대좌를 위요(圍繞)하여 포피(布被)가 평행 군제직(均齊的) 고무래 정(丁)자 도안으로 주연(周延) 되었으며 연화는 없고 왼쪽 다리 부분에만 한 포기 연화가 받쳐있다 (반가상의 臺座는 이 형식이 원형이요、廣隆寺 반가상에서와 같이 연화가 全臺座를 이룹은 비정식일 것이다. 그러나 廣隆寺· 반가상의 광배와 대좌는 후기 別作이므로 그것으로써 이왕가반가상과, 別系의 것이라고는 못한다. 이상윤 총괄(總括)하면 일반이 직각적·평행적·의장적(意匠的). 국제적 조의(彫意)를 떠난 자유로운 조상이욕 장엄을 떠난 정신적 풍만에 치심(置心)한 조상(彫像)이다.
이에 대하여 국립박물관 소장인 금동미륵반가상은 전자가 장염구 없는 반나형(半探形) 임에 대하여 이는 장식적 요소가 풍부하다. 세술(細述)하연 두용(頭容)이 방원 풍만함과 전신에 비하여 과대함이 앞의 것과 같으나 그 아름다운 맛이 전자만은 못하고 두 어깨 두 팔의 세연(細軟)함이 전자와 동일하나 그 사실미가 적고, 동체의 기교와 두 다리의 수법에서 정선적 타페(墮弊)를 볼 수 있는 반면에 장식적 의장(意匠)이 과다하다. 두부에는 보관(寶冠)을 써서 두 볼로 그 관끈(冠纓관영)이 흐르고(이 보관은 전반뿐이요 후반이 없다) 보화형(寶花形)이 결발(結髮) 후두부에서 쌍반(堅半)되어 상징적으로 두 어깨에 홀렀으니 이는 곧 당조(唐朝)의 결발을 본뜬 것이다. 두 어깨를 뒤덮은 상의는 비양(飛揚)하는 듯 옷깃은 두줄 세선이 상칭적으로 전면 전면을 흘러 북위식 대로 요하(腰下) 복부(腹部)에서 X자형으로 교차하여 좌금(左襟)은 우굉(右肱)을 돌고 우금은 좌완을. 돌아 각기 나비맺음(蝶樣結法)의 비대(紕帶)로 그쳐 오른쪽은 영락(瓔珞)을 모조하고 왼쪽은 가는 그물 모양(細網狀)을 모각(模刻)한 비대로 그쳤다. 상대(裳帶)도 나바 모양으로 맺혔고 주름은 모두 선조(線條)로 간략히 표시 하였다. 두부와 상박(上膊)과 하완(下腕에는 북위식 통례(通例)의 식환(飾環)이 있다. 전적으로 보아 기법의 제전보다도 의장이 앞섰고 얼마 쯤 엄숙한 관조(觀照)를 떠나 기술의 농락(弄絡)이 있어 보인다. 수법으로 보아 이왕직소장의 상보다 후기에 속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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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말한 바와 같이 하나는 반나의 반가상이요 하나는 장엄의 반가상이다. 이 두 반가상의 기원에 대하여 반가상은 인도직계의 것으로 지나에 수임되자 완전히 지나화 하기 전에 조선에 수입된 것이요 장엄의 반가상은 완전히 지나화 한 후에 수입된 것으로 본다면 시대적으로 이 두 상이 전후 관계에 서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고 두개의 상이 동시에 유행한 것이라 하면 시대적 전후 관계는 없어질 것이요、오직 수법으로 전후 관계를 짐작할 수 밖에 없으나 혹은 지방적 관계는 볼 수 있다. 이미 이 두 상과 시대적 으로 앞선 것으로 남북조시대의 작품인 운강용문의 석굴 속에 지나식 장엄의 반가상이 많음을 보아 '혹은 치나 북조에서는 지나식의 장엄 반가상이 유행되었고 남조에는 반나 번가상이 유행되었을는지 모르나, 현금 남조의 유물이 전혀 없으므로 논단(論斷)하기는 곤란하나 남조선에서 (북조선에는 붕상의 유물이 극소함으로 보아) 발견되는 반가상 중 반나상이 매우 많음과 일본에 잔류(殘留)된 반가상 중 또한 반가상이 매우 많음을 보아 북조선에서는 착의 장엄(着衣莊嚴)의 반가상이 유행되었고 남조선에서는 반나 반가상이 유행되었음이 아닌가 하나 추축이 항상 깊어진다, 역사상으로 보더라도 신라·백제가 남방 지나와 교동함이 많았음을 보아도 처간(這間)의 관계를 설명함이 많지 않은가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남북조의 문화가 전연 판이한 구분을 가진 것은 아니요 다소 상동됨이 있으나 그러나 남북통일 이전의 지나로서 더구나 교통이 불충분한 당시로서 남북간 큰구별이 있음직도 한 사실인가 한다.
위에 말한 반나 금동상과 아주 같은 수법의 것으로 지금 고오류사(殺隆寺)에 한 반가상이 있는데 그것이 하나의 목조각(木影刻이 란점에서 재료상 차이가 있으나 그 기교와 수법에 있어서 동일인의 제작으로 간주되며 '따라서 이왕직소장의 금동상이 확실히 조선예술가의 손에 제작된 것이라면 이 목조각 상도 조선의 것으로 조선이 찾아야 할 예술품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바이니、그 목조가 연대적으로 기원 600년 전후의 작품이라고 일본 학자간에 고증이 있음을 보아、이왕직소장의 금동상도 동기의 작품이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지나 수조(隋朝)에 해당하고 신라진평왕(興平王) 백제무왕(武王) 대 전후에 해당한다. 혹은 이 목조반가상은 오육십년후 신라통일운동으로 백제가 혼란된 당시 일본으로 이출(移出)된 것인지도 모른다. (대개서양의 예술이전동보다도 자유개성을 토대로 발달하였음에 대하여 동양의 예술이 너무나 전통적이었으며 또 불교 예술은 종교적 기반에 전통적으로 결박되었기 때문에 지나·조선·일본간의예술적형식의 구별이 실로 곤란하고, 따라 동양미술사가에게 많은 곤란을 느끼게 한다. 지나·조선·일본의 예술적 구별을 柳宗悅씨는 그의 著《조선과 그미술》에서 모양과 선과 빛깔에서 그 특성을 설명하였으나 그러나 그것온 실재적으로 예술품에 적응하여 국민적 국가적 소유로 還付시키는 너무나 시적 구별임에 불과하다).
이상과 같이 이왕직박문관 소장 금동 미륵반가상을 삼국말기 전후에 둔다면 당시의
남조선의 예술을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며, 현금 세계적으로 유명한 쥬우구 사(中宮 寺) 관음상이 당고종 일본 덴지왕(天智王)대의 작품이라면 이것은 시대적으로 전자에 이 금동반가성의 형식이 그 이전에 수입되어 일본의 소위 아스까(飛飛鳥)식 불상의 기법에 다시 새로운 수법이 가미되어 산출된 것이 쥬우구 사의 관음상이다. (이것은 일반 일본 美術史家 사이의 定論인 듯하다). 이러한 점에서 실물적으로 당시의 신라 백제의 예술에 파급시킨 영향을 가히 규지(窺知)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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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 개관(槪觀)한 바와 같이 이 금동반가상은 서기 약600년 전후의 남조의 예술을 대표하는 것으로 그것이 백제의 것인지 신타의 것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지금 경주박물관에는 같은 양식의 석조 파편이 있다)한편으로 일본예술계에 다대한 영향을 끼치고 조선 독특의 예술미를 가진 불상으로 조선 미술사상 한 준령(峻嶺)을 이루는 것이라 할 것이다. 이제 그 예술적 가치를 평함에 당하여 나의 미숙한 술어와 자가의 편협(偏狹)된 자찬(자찬)을 피하기 위하여 외인의 평가를 잉용(잉용) 소개함이 오히려 온당할까 한다 (Kari with, Buddhistische Plastik in Japan S.73ff)"
「생체(生體)의 비오(秘奧) 속에 투아(投我)한 조형의 정숙(貞淑)한 일체감이 고오류 사(廣隆寺) 관음에서 가장 아름답고 선명하게 표현되었다. 여기서 반나부와 착의부(着衣部)와 대관부(대관부)가 구조의 삼부이곡(三部異曲)을 이루고 있다. 신체 각부에 흐르는 표면에 간단 명료성이 조각체의 통일을 구성하였다. 간단한 주름으로 의복의 재료적 실재성을 포사하였다. 실제적 재형을 무시함으로써 비로소 조의(彫意)와 물성(物性)을 떠난 조체(彫體)가 성립되었다. 한히 유연한 강이 나부(裸部)에서 흐른다. 정서적 입체감이 흐르는 냇물의 장파(長波)같이 목간(木幹)을 흐른다. 두 팔은 섬연(織娟)하고 유연하다. 흉부는 고스란히 봄려있고 견부는 맺고 끊은 듯 꺾여있고 두 손은 곱고도 연약하다. 생명의 맥박이 관절마다뛰고 단엄(端嚴)한 인격이 내부에 싹트고 목재의 담박성(淡泊性)이 미망(迷妄)된 인생의 고업(苦業)을 소거(消去)하였다. 새로운 유기적 기운(氣韻)이 생동하고 원형대좌로부터 정상 보관(寶冠)에 이르기까지 어느 곳에나 늘씬 한 맛이 없을 뿐더러 자연적 동태를 휩쓸어 파착(把捉)하여 초자연적으로 정화된 태도로 유기화(有機化)하였다· 방석(方石)을 층층이 쌓은 덩어리 집이 아니라 성장하는 묵재의 생명이 생체속에 흐르고 있다. 펀편한 칼자국과 경건(敬虔)한 끌자국이 입체미를 살리고 목재의 결이 유연한 피부와 같다.
오인(吾人)은 상술에서 고오류사(f${隆전 관음의 형식 파악의 극한을 세론(細論)하였다. 그는 도상성(圖像性)을 자연종합으로부터 유출(流出)시킴에 있지 않고 오로지 관념적 이상을 실재적으로 구체화함에 있다 함을 의미한 것이다. 오인은 모든 계기에 있어 모든 신작품에 있어 고식의 형식 극한(形式極限)과 감각국한(感覺極限)이 스스로 해이(解弛)되고 분열됨을 볼 줄로 믿는다. 쥬우구 사(中宮寺)관음은 고급(古級)의 포만(包滿)된 종말이요 고오류사 관음은 신급(新級)의 시초이다. 우상이 놀랄만큼 최고의 한도로 그 형식의 완성과 그 형식의 영화(靈化) 로를 성취하다. 전자에서 모든 것이 유연해지고 청명해지고 풍성한 가을의 결실 같고 명랑하고、후자는 신선하고 굳세고 혈기 있고 발육되고 호흡하고 생동하고 성결(聖潔)하고 청정(淸淨)한 인격의 호흡으로 체워져 있다」(이상은 원문에 미숙한 意抄이다.)
(독자가 주의 할 바는 상술문에서 보면 슈우구사 관움이 시대적으로 앞선 것 같이 보이나 그러나 하마다 박사가 지적한 바와 같이 수법의 진퇴 여하와 양식의 이상(異相)으로만은 시대의 전후 관계를 결정할 수 없는 바이니 신고 양식이 양식의 발달과정으로 볼때는 전후관개에 있을 것이나 시대적으로 반드시 전후 관계에 있다고는 못하는 때문이다. 말하자면 옛 양식이 신시대까지도 오랫동안 그 양식을 墮弊的 기세이나마 보류할 수 있는 것이요、따라서 신구 양식이 동시 병존할 수도 있는 동시에 고식이 후대까지도 오래 남을 수 있기 때문에、오로지 양식만 가지고 시대관계를 전후시키려면 신중히 고려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상은 일본고오류사에 있는 목조 여의륜 관음상에 대한 씨의 관조(觀照)다. 이미 7에서 고증한 바와 같이 목조반가상이 이왕직소장 금동미륵상과 같은 상이므로 그 예술적 가치에 대한 상술한 평가는 그대로 옮겨 이 금동상에 붙여 하등 불가함이 없을까한다. 실로 감수성 있는 예술가의 기질(temperament)과 유연한 공상과 일종 환몽(幻夢)에 가까운 정서가 W씨가 말한 바와 같이 조선식 예술품dml 특징이라면 이상에도 같은 특징이 흐르고 있다°
----後跋 이상 간단한 고증이요 논고요 평가이지만 이 금동반가상이 조선 삼국시대의 예술을 가장 웅변으로 중외에 선양하고 있 는사실을 적기(摘記)하였다. 후일에 조선의 Burckhardt가 나오고 Winckelmann이 나와 조선미술사를 쓴다면 반드시 이 반가상에서 시대적 Monument를 발견할 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