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들에게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신 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거침없이 전해졌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더욱 많아졌습니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갑자기 늘어난 성도들 중에 궁핍하고 어려운 이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자발적으로 헌신하여 자신의 소유나 물건을 내어놓아 함께 나누는 아름다움을 보여 주었습니다. 아마도 이렇게 늘어난 성도들로 인하여 어려운 형편에 있는 자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섬기는 일이 결코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소유를 팔아 사도들 앞에 내어놓은 성도들의 헌신으로 어렵고 궁핍한 이들을 도왔는데, 사도들이 이 일을 다 맡아 하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착오도 일어나기도 했을 것입니다(1절). 헬라파 유대인이란 아마도 헬라어(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을 일컫는 말이고, 히브리파 사람은 유대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을 일컫는 말일 것입니다. 이런 문제가 발생하자 구제와 긍휼 사역이 균형감 있게 진행되도록 하기 위해 일꾼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모든 제자(성도)들을 불러놓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여 구제와 교회에서의 섬기는 사역들을 맡기자고 제안합니다(2절~4절). 성도들은 이 말에 동의하여 일곱 명의 일꾼을 선출하여 사도들 앞에 세웠고, 사도들이 기도하고 이들에게 안수하여 일꾼으로 삼았습니다(5절, 6절).
2절에 나오는 “접대(接待)를 일삼는 것”이라는 말은 헬라어 원문에서 “디아코네인 트라페자이스”(διακονειν τραπεζαις)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접대라고 번역된 프라페자이스의 원형(原形)은 트라페자(τραπεζα)인데, 이 단어는 식탁(食卓, Table)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디아코네인의 원형은 디아코네오(διακονέω)인데 이 단어는 “섬기다”, “섬기는 일을 행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는 집사(執事)라는 명칭이 등장하질 않지만, 헬라어로 디아코노스(διάκονος)라고 하는 집사, 혹은 일꾼 등의 명칭으로 불리게 됩니다. 즉 접대를 일삼는 일이란 식탁 옆에 서서 시중들 듯이 섬기는 일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사도들이 이러한 일들을 일곱 명의 일꾼을 뽑아 맡긴 것은, 사도들은 말씀 사역과 기도 사역이 우선적이었기 때문입니다(2절, 4절). 사도들이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썼다고 해서 아예 교회공동체의 다른 일에는 신경쓰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 이후의 기록들이나, 서신서 등의 기록을 보면 사도들이나 목사로서 섬기는 자들이 그러한 일들에 대해서도 조언(助言)하고 관여하는 일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목사는 교회공동체의 지도자로서 말씀 사역과 기도 사역 등의 사역에 우선적으로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행정적인 일이나 섬기는 사역에 대해서도 지도력을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단지 실무적(實務的)으로 수행하는 것은 교회의 일꾼들에게 맡기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좀 더 체계적으로 사역이 이뤄지자 하나님의 말씀이 더 왕성하게 전해졌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더욱 많아졌는데, 심지어 제사장들 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7절). 그 당시에 제사장의 직분을 가진 자들이 팔천 명 정도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 중의 상당한 숫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그만큼 성령의 역사(役事)가 왕성하게 일어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스데반 집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은혜와 권능이 풍만하여 큰 기사(奇事)와 표적을 행했습니다(8절). 그때 자유민이라고 불리는 자들의 회당에서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이 벌어집니다(9절). 자유민들이란 말은 아마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에 의해 포로로 잡혀갔다가 자유인이 된 유대인들을 일컫는 말로 헬라어 원문에서는 리베르티논(Λιβερτίνων)이란 단어가 사용되는데, 이 단어는 해방 혹은 자유롭게 된 사람을 의미하는 라틴어 리베르티누스(libertinus)에서 온 단어입니다. 이 자유인들은 구레네, 알렉산드리아,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자들인데, 아마 각각 그들의 회당이 있었을 것이고, 그 회당들에서 스데반 집사와 논쟁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자유민들 중에 길리기아에서 온 이들도 눈에 띄는데, 나중에 바울이 된 사울이 길리기아 출신이었던 것을 기억한다면 이때도 사울이 그 자리에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였기에 그 논쟁에서 스데반을 당할 자들이 없었습니다(10절). 그래서 사람들을 매수하여 스데반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들었다고 거짓 증언을 하여(11절) 이스라엘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하여 공회(公會)로 잡아 오게 합니다.(12절). 그리고 거짓 증인을 세워서 성전과 율법을 거슬러 말했다고 증언하고(13절), 나사렛 예수가 이 성전을 헐고, 모세가 전해준 규례를 고치겠다고 하는 것을 들었다고 거짓 증언을 합니다(14절). 예수님께서 성전을 헐면 사흘만에 다시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던 것과 교묘하게 연결시켜 스데반을 고소한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가 전해준 규례는 모세로부터 시작한 관례나 관습 등을 일컫는 말입니다. 14절에 나오는 규례라는 단어는 헬라어 원문에서 “에토스”(ἔθος)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 에토스는 관례, 관습, 전통, 습관 등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15절). 많은 사람들의 거짓 증언이 빗발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얼굴이 천사처럼 평온하였던 것입니다. 스데반은 진실을 가지고 그 자리에 있었고, 스데반은 진리의 말씀을 가지고 그 자리에 있었기에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을 수 있었습니다.
참 진리의 말씀은 거스를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막으려고 해도 막을 수 없습니다. 참이기에, 진리이기에, 진실된 말씀이기에 언제나 당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핍박과 억지스러운 송사(訟事)에서도 평안함을 잃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믿고 따르는 진리의 말씀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러한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진리의 복음을 가진 자들입니다. 로마서 1:16에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라고 바울이 말씀한 것과 같이 우리는 복음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부끄러워하지 말고, 우리에게 축복과 은혜가 되는 이 복음을 온전히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길 소망합니다.
(안창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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