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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도 일어나고 재난도 발생하고 전쟁도 끊임이 없습니다. 그게 우리가 사는 지구의 현재입니다. 하기야 역사 이래로 그래왔습니다. 그러면서 좀 더 나아지자고 보다 평화롭게 잘 살자고 애써온 것입니다. 하지만 21세기가 되어도, 이렇게 문화와 문명이 발달해도 크게 달라지는 것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짐승의 시대에는 먹고살자고 그랬겠지요. 그러나 사람의 시대에는 단순히 먹고살자고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의 현실이 기막힙니다. 한쪽에서는 남아돌아 버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모자라 굶어죽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교통이 발달했음에도 말이지요. 어디에나 경계가 있습니다. 함부로 건너다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배 터져 죽고 배곯아 죽는 겁니다.
본능으로 사는 것은 아닌데 본능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하기야 그래서 발전도 한 것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아무튼 살아갑니다. 물 좀 먹자고 몇 시간을 오가는 고생을 해야 하는 곳도 있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미안함도 느낍니다. 힘 있는 대로 나누며 살아야지 하는 마음입니다. 탈북민의 이야기를 보고 들으며 아주 가까이 살면서도 너무나 다른 환경을 봅니다. 그래서 그저 감사합니다. 그냥 있는 자리에서 감사하며 주어진 삶을 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생명을 주신 창조주께 보답하는 길이라 싶습니다. 생명을 가치 있게, 삶을 보람 있게 만드는 것, 산 자의 의무이고 보람이며 뜻이라 생각합니다. 기한이 있다는 사실, 늘 염두에 두어야 하겠지요.
5월도 하순입니다. 곧 여름이네요. 건강해야 생각도 합니다. ㅎㅎ 복된 주말을 빕니다. ^)^
2024년 5월 25일 김종우 목사 드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마태복음 24 : 7 - 8)
<혹성탈출 - 새로운 시대>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바닷가 모래사장에 반쯤 묻혀 있는 자유의 여신상. 말 그대로 충격이었습니다. 아니 그 긴 시간을 달려온 곳이 겨우 지구였던가 말입니다. 문제는 시간의 차이입니다. 그 사이 수천 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지구는 전혀 다른 세상이 되어 있었지요. 유인원이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 상상도 대단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멸망의 길을 걸었고 결국 시간이 흘러 세상은 거꾸로 되었습니다. 우리에서 나온 유인원들이 인간을 우리 안에 가두려는 것입니다. 인간은 언어를 잃고 유인원이 말을 합니다. 인간은 하등동물이 되어 그들의 실험 대상이 됩니다. 시간을 뛰어 넘어온 이방인이 돌연변이로 발생한 동물이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계속 속편이 나왔습니다. 이야기도 진화하고 있습니다. 이제 또 새롭게 바꾸려나봅니다. 아무튼 이야기는 인간적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성과 지성을 가지게 되면 더불어 욕심과 야망도 생기는 것일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여타 동물은 일단 배가 부르면 딴 짓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배부르다고 일 안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배가 불러서 일합니다. 그래서 먹고사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우선 내일을 걱정하여 계속 쌓아두려 합니다. 다음으로는 뭔가 만들려고 합니다. 보다 편하게 보다 쉽게 보다 빠르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물론 그래서 사람에게만 문명과 문화가 생기고 발전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문명과 문화를 이루기 위해 욕심이 과해지는데 있습니다. 자연히 다툼과 싸움이 일어납니다. 빼앗으려고 또 지키려고. 아마도 같은 종 안에서 인간처럼 아귀다툼을 하는 존재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인간은 서로 육신을 잡아먹으려고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의 것을 빼앗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싸우는 것이고 확장되면 전쟁을 하게 됩니다. 개인 간의 다툼이 아니라 집단 간의 싸움이 되는 것이지요. 젼쟁이 별 것입니까? 간단히 말해서 빼앗으려 하는 것이고 지키려는 것입니다. 이 최고 문명의 시대라고 하는 21세기에도 여전합니다. 아무리 발전해도 인간성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이곳은 보다 선하게 진화가 안 되는 모양입니다.
스스로 ‘시저’를 이어받았다는 유인원의 지도자 ‘프록시무스’는 그 중 머리를 제대로 쓸 줄 아는 존재입니다. 물론 그래서 무리 가운데 우두머리가 되었겠지요. 똑똑한 인간의 도움을 받아 권력을 장악하고 오래 전 옛날 인간들이 사용했던 비밀병기가 숨겨져 있는 동굴을 파헤치려 애쓰고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노동력이 필요하였고 그래서 다른 무리의 유인원 족속을 납치해 노예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불쑥 나타난 것입니다. 언어까지 사용하는 것을 보니 여태 보았던 인간들과는 좀 다르다 싶습니다. 그러니 잡아서 이용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부하들을 시켜 모두 잡아들이라 합니다. 그렇게 해서 평화롭게 살던 ‘노아’의 부족을 쑥대밭으로 만듭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비를 잃고 가족은 모두 노예로 끌려갑니다. 노아만 간신히 살아남아 피합니다. 가족과 부족을 찾아 나선 길에 시저의 시대를 알고 있는 어른 ‘라카’와 인간 ‘메이’를 만나서 동행합니다. 평안히 살던 생활은 산산이 부서지고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들어갑니다. 아버지를 묻으며 맹세하였습니다. 꼭 다 데리고 돌아올게요.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놈들에게 들키고 붙잡힙니다. 가족을 다시 만나서 다행이지만 모두가 노예 신세입니다. 그들은 바닷가 커다란 절벽 앞에서 바다를 막고는 큰 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노동력이 필요하여 붙잡혀 온 것입니다. 아무리 힘으로 동굴 입구를 열려고 해도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비밀은 메이가 알고 있습니다. 메이는 다른 인간들과는 좀 다릅니다. 언어도 사용하고 머리도 뛰어납니다. 노아도 메이가 필요하고 메이도 노아가 필요합니다. 그곳에서 빠져나가려면 두 존재는 협력을 해야 합니다. 혼자만의 힘으로는 어림없습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태였지만 그래서 노아도 메이와 손을 잡기로 합니다. 동굴을 찾아들어가는 방법을 메이는 알고 있습니다. 그 옛날의 인간들이 살아남아 당시의 기계들을 조작하고 있으나 동력 작동의 중요한 열쇠를 그 동굴에서 찾아와야 가능합니다. 메이가 그 사명을 가지고 유인원의 지역으로 침투한 것입니다. 다 잘 되는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프록시무스도 이미 알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유인원의 어른이었던 라카는 노아에게 시저의 상징물을 남겨줍니다. 프록시무스가 시저의 대통을 이을 수는 없습니다. 그만한 존재가 아닙니다. 라카는 부족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종족을 이어갈 큰 사명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인간 메이가 사이에 들어왔습니다. 이 두 존재는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요? 서로 도움을 주고받고 노예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살아가야 할 땅이 다릅니다. 물론 살아가는 공동체도 다릅니다. 문화도 문명도 다를 것입니다. 어떻게 이 한 별에서 공존할 수 있을까요? 노아는 노아의 부족과 다시 자기네 부락을 재건합니다. 메이도 자기 사회로 들어가 찾아온 열쇠를 건네줍니다. 영화 ‘혹성탈출 - 새로운 시대’(KINGDOM OF THE PLANET OF THE APES)를 보았습니다.
생각이 만드는 길
고민이 많을 때 사람은 도대체 하루에 몇 가지를 생각하는 걸까요? 답은 오만 가지입니다. 그런 말하잖아요? 오만 가지 생각이 오락가락한다고. 사람이 다른 피조물과 다른 점이 많이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두드러진 것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이 있습니다. 한 철학자의 말이기도 하지만 곧 우리 인간만의 특징을 드러내는 말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는 말입니다. 생각하는 존재, 사실 그것만도 놀라운 일입니다. 왜 생각을 할까? 무엇을 생각하는 것일까? 때로 생각을 많이 하면 골치가 아프다고 합니다. 머리가 복잡하다고도 하지요. 그러면 사람은 도대체 얼마나 생각하는 것일까요? 물론 양이 정해져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 사람마다 생각하는 것들이 다릅니다. 누가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자기만 아는 일이지요. 그런데 나 이외에 아는 분은 있습니다. 다윗이 아들 솔로몬에게 그렇게 고백합니다. 대상 28 : 9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비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 네가 저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버리면 저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 그렇지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 누가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오만 가지 생각을 한다고 하였는데 그 많은 생각이 다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우리 삶의 현실로 나타나는 것은 아마도 지극히 일부일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타나는 행동은 바로 생각의 산물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많이 생각하는 것이 행동으로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생각하며 사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아가 무엇을 생각하는가 하는 것이 바로 그 사람을 만드는 것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혹 알기를 원한다면 나는 지금 무엇을 가장 많이 생각하고 있는가, 그것을 점검하면 대충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많이 생각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한 율법사가 와서 묻습니다. 마 22 : 36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37 - 38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첫째입니다. 당연히 생각을 많이 해야겠지요. 그러면 그에 따라서 우리의 행동과 삶이 맞춰져 갑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그렇게 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하루하루 경쟁 속에 사는 삶이라면 말 그대로 정신이 사나워집니다. 긴장의 연속이지요. 사실 그 속에서 더욱 하나님을 생각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찾아야 하는데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것에 의존하려 합니다. 그게 빠르고 쉽기 때문이지요. 이리 부딪치고 저리 깨지고 내 손안의 능력이 다 소진될 때 가서야 비로소 하나님 앞에 설 때가 많습니다. 즉 보이는 것이 다 사라지고 나서야 보이지 않는 것을 찾게 된다는 말입니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 다 사라지고 나서 비로소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사방이 다 막히고 나야 위에 있는 하늘 문에 생각을 돌립니다. 한두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지요. 남들 이야기를 많이 들어도 나는 또 다른 나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반복되는 일인 줄 모르고 또 그렇게 합니다. 자기 생각을 바꾼다는 것이 손바닥 뒤집듯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과 북쪽으로 이웃한 나라가 있습니다. 아람 나라입니다. 이스라엘과 종종 전쟁을 치르는 이방나라입니다. 사실은 북이스라엘도 야곱의 자손으로 선민의 나라이기는 하지만 솔로몬 사후 유다에서 갈라져 나와 하나님을 등지고 시작한 나라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당신의 백성으로 사랑하시고 꾸준히 당신의 종을 보내서 돌아와라 깨우치시지요. 그런데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은 아람나라의 한 경건한 사람을 통하여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이제 그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선민에게만 내려지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베드로의 꿈에서 말씀하시지요.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행 10 : 15) 자 이제 그 역사의 현장으로 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한 이방인을 만납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여기 하나님이 은혜 베푸실 자가 누구인지 소개합니다. 왕하 5 : 1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저로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저는 큰 용사나 문둥병자더라” 누구입니까? 나아만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아람 나라 군대장관입니다. 설명해주기를 왕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라고 합니다. 그 영광이 대단하지요. 그런데 그 뒤의 설명은 그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에게는 치명적인 병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병의 이름조차 듣고 싶지 않습니다. 그 나라의 영웅이며 존귀한 자였던 나아만은 바로 문둥병자였습니다. 그러니 그 당사자는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지금도 장기간의 치료를 요하는 병입니다. 당시로서는 낫기를 소원해도 나을 수 없는 불치병입니다. 자기 몸이 점점 썩어 가는 것을 지켜보며 서서히 죽어가야 하겠지요. 영웅이면 뭐하고 사람들로부터 숭앙을 받으면 뭐하겠습니까? 누가 대신해줄 수 없고 홀로 감당해야 하는 고통입니다. 더구나 사람들과 가까이 할 수 없는 아픔까지 짊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나아만의 아내를 수종드는 계집아이가 하나 있었습니다. 아마 전쟁 중 이스라엘 땅에서 잡아온 포로였던 모양입니다. 그 집에서 시종하며 전후 사정을 다 알게 되었겠지요. 그리고 주인어른의 사람 됨됨이가 괜찮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 아픔을 안타깝게 여겼겠지요. 그래서 자기 믿음대로 전합니다. 3절 “그 주모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저가 그 문둥병을 고치리이다” 사람이 의사에게서 암이라는 진단을 받으면 대체로 공통적인 순서를 밟아 나간답니다. 그 가운데 한 가지 행동이 무엇인가 하면 그 병에서 낫기 위하여 별 짓 다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나름대로의 전문가가 됩니다. 그리고 아닌 게 아니라 정말 별 짓 다합니다. 오래 전에 겨우 나이 63세에 세상을 떠난 선배가 있었습니다. 1년 반 정도 투병하다 떠났지요. 그 사이 정말 그런 치료법도 있나(?) 싶은 치료법을 시행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 그대로입니다. 나아만이 그 말을 들었을 때 가만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을 만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이웃나라인 이스라엘로 들어갑니다. 군대장관의 행차입니다. 거창했겠지요. 그리고는 드디어 선지자 엘리사 집 앞에까지 당도합니다. 이제 9 - 10절입니다.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엘리사가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 선지자가 뭐라 말합니까?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합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주신 권세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말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 생각하면 됩니다. 그가 말합니다.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우리는 다 아는 이야기니까 쉽게 아멘 하고 답하지요. 그러나 과연 아멘 하고 그에 따라 행동합니까? 바로 그것이 우리들의 과제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아멘! 합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바로 행동이 나오는가 하는 것이지요.
전에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당신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한 자리에서 다 들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와 동떨어져 있어서 듣기 힘들다 그런 변명은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다 들려주신 후에 다짐합니다. 신 30 : 11 - 14절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몰라서 행하지 못하는가 하는 점을 되짚어 보는 것입니다. 몰라서 안 하는가 아니면 알아도 안 하는 것인가 솔직해지자 하는 것이지요. 보겠습니다.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와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아멘! 오늘날 우리는 당시보다 훨씬 하나님 말씀과 가까이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2. 생각을 바꾸면 운명이 바뀝니다.
나아만이 하나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는 아람나라 군대장관이었고 이스라엘에까지 그 명성이 자자했습니다. 그가 이웃나라 이스라엘로 행차를 하였으니 대단한 일이지요. 그래서 처음에는 이스라엘 왕궁으로 찾아갔습니다. 더구나 자기 나라 왕의 친서를 가지고 갔습니다. 어마어마한 예물도 지참했습니다. 아람나라 왕이 자신의 총애하는 국가적 영웅인 신하의 병을 고쳐주는 일이니 각별히 신경을 쓰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소식을 접한 이스라엘 왕은 기가 막힐 일입니다. 그래서 괜히 시비 걸어 전쟁을 일으키려나보다 걱정과 두려움이 생깁니다. 왕하 5 : 7 “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내가 어찌 하나님이관대 능히 사람을 죽이며 살릴 수 있으랴 저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 보내어 그 문둥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로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 줄 알라 하니라”
선지자 엘리사가 그 소식을 듣고는 왕에게 전갈을 보냅니다. 그 사람을 이곳 저에게로 보내주십시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그래서 나아만이 행렬을 이끌고 선지자의 거처로 찾아옵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얼굴도 보이지 않고 말만 전합니다. 요단강에 일곱 번 들어갔다 나오라. 이게 말이나 되는 것인가? 내가 누군데. 아니 일국의 군대장관이 행차하였으면 최소한 그 예의는 보여야 하는 거 아닌가? 이 먼 데까지 찾아왔는데 정작 당사자는 나타나지도 않고 건방지게 하인을 시켜 이래라 저래라 명령이야? 11절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그렇습니다. 그가 짐작하고 기대했던 것은 바로 그러한 대접이었습니다. 자기에게 나아와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리고 그 상처 위에 어떤 조치를 취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야 뭔가 되는 것 아니겠는가 그것이 제대로 된 방법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자기 생각과 기대와는 전혀 딴판이었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다는 말인가? 화가 났지요.
때때로 하나님의 말씀이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흔히 예로 드는 주일성수 문제가 있습니다. 장사하는 사람들 특히 주일에 가게 문 닫는 것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실제로 매상이 평일보다 두 배 세 배 더 많이 생기는데 그걸 뻔히 알면서 가게 문을 닫습니까? 관광지에서 매점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더욱 그렇지요. 또 수입 지출을 정확하게 따져서 세금 신고하는 사업가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정직이 밥 먹여주는 거 아닙니다. 사업을 하자면 다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런 말 듣지요. 세상 모르는 소리, 하지도 말라고 핀잔만 듣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벌어서 십일조도 하고 감사헌금도 하고 교회 건축도 할 수 있는 겁니다. 말이야 좋지요. 그런데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받으실까 모르겠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뭐 부족하신 분입니까? 헌금 부족해서 안달이 나셨답니까? 자기 이름값을 위해서 하는 헌금이라면 차라리 드리지 않느니만 못합니다. 그것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헌금과 마찬가지일 뿐입니다.(행 5장) 드리고도 정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신 25 : 13 - 14 “너는 주머니에 같지 않은 저울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 것이며 네 집에 같지 않은 되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두지 말 것이요” 이것은 일반적인 상거래에 있어서 정직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계시면서 세금을 내셨습니다. 그것은 당연히 지켜야할 이 세상 백성으로서의 의무입니다. 마 17 : 27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지켜야할 것은 지켜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 땅의 질서가 유지되니까요. 롬 13 : 7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아멘! 그런데 문제는 우리 생각은 다르다는 것이지요.
나아만 장군의 생각이 그랬습니다. 선지자라는 자가 낯짝도 나타내 보이지도 않고 기껏 한다는 소리가 그래 뭐?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고? 야 우리 동네는 이보다 훨씬 좋은 물이 얼마든지 있다. 웃기고 있네. 그리고는 돌아섰습니다. 왕하 5 : 12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이켜 분한 모양으로 떠나니” 일이 여기서 끝났다면 별일도 아니지요.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13절 “그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중요한 것은 나아만이 이 종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감동하심이 있었으리라 믿습니다. 14절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 할!
3. 하나님은 돕는 자를 붙여주십니다.
만약 나아만 장군과 함께 했던 모든 자들이 상관의 하는 말에 묵묵히 동조하였다면 이 일은 그냥 평범한 일로 끝났을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 기록도 남지 않았겠지요. 그러나 그 상관의 결정과 선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 부하들이 있었습니다. 지금 뭐 하려고 그 먼 길을 왔습니까? 목적은 하나입니다. 문둥병을 낫고자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체면도 형식도 필요 없습니다. 병만 나으면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하나님의 선지자는 말씀을 주었습니다.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얼마나 간단한 일입니까? 그런데 나아만은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목적보다는 과정을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또 나름대로의 치료법을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그것뿐입니다. 그리고 나아만 장군의 부하들이 오히려 그것을 간파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상관한테 직언을 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때로는 우리 생각과 다를 수 있고 또 때로는 우리가 순종하려 해도 무슨 의미인지 깨닫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바로 도움이 필요한 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을 붙여주시기도 하고 신앙의 선배를 동행시켜주기도 하십니다. 그런가 하면 전혀 예기치 않은 사람의 입을 통해서도 전해주십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성전에서 시끄럽게 찬송하는 소리에 분을 내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마 21 : 15 - 16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예수께 말하되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그렇습니다. 어린아이의 입을 통해서도 깨우쳐주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하면 하나님은 누구라도 붙여주십니다. 모세에게 아론과 훌을 붙여주시고 다윗에게 많은 용사들을 붙여주시고 사도 바울에게도 바나바를 비롯하여 믿음의 아들 디모데와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와 다른 많은 동역자들을 함께 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생각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늘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우리에게 다가오실지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준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내 생각을 바꾸면 하나님이 내 운명을 바꾸십니다.
가장 종요한 것, 우리가 들어야 할 말씀은 하나님 말씀 곧 성경에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만약 성경에서 나오는 말씀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언제라도 이의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다른 교회로 가셔도 됩니다. 아니, 가셔야만 합니다. 하나님 말씀이 나오지 않는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떠나야만 하고 하나님 말씀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내가 사는 길입니다. 교회 간판이 붙어있다고 하나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가 여부는 그곳에서 나오는 말씀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인가 그것으로 판별되는 것입니다. 사 29 : 13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계명이 아니라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교회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는다면 자기가 죽는지 사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나아만 장군도 말했습니다. 왕하 5 : 11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내 생각에는’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내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설령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 말씀이면 따라가야 생명을 얻습니다. 또 하나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익숙한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입니다. 여태 들어온 말씀과 다르다 싶으면 사리판단을 하려고도 하지 않고 이단이라고 정죄하는 버릇들이 있습니다. 위험합니다. 행 17 : 11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우리도 이런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인가 여부는 무엇을 가지고 판단해야 합니까? 바로 성경입니다. ‘누가 그러더라’가 아닙니다. 내가 성경을 상고하고 판단해야 합니다. 소경을 따라가는 소경이 되지 맙시다. 듣고 배우고 깨닫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성전과 하나님 백성이 서기관 바리새인들에게 붙잡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을 구원하시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막 7 : 8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사람의 유전’ 그 앞에서는 ‘사람의 계명’이라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 말씀은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또한 예수님 말씀을 듣고자 하는 백성들을 가지 못하게 막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화를 말씀하십니다. 마 23 : 13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그들이 성경을 가지고 있었지만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쳤습니다. 성경을 들고 있다고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교회마다 하나님 말씀을 전합니다. 말은 ‘하나님 말씀’이라고 하지만 분별해야 합니다. 그것을 분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배워서 알아야 하겠지요.
예수님은 오셔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것은 여태 들은 말씀과 달랐습니다. 마 7 : 28 - 29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무엇이 달랐는지 어떻게 달랐는지 알아야 바른 것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익숙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옳은 것이 중요합니다. 눅 5 : 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우리의 생각 우리의 부대를 바꾸지 아니하면 그 말씀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우선은 성경에서 나오는 말씀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다음, 그것이 육의 말씀(사람의 계명)인지 영의 말씀(하나님의 계명)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땅을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늘을 말씀하십니다. 육이 아니라 영을 말씀하십니다. 요 6 :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하나님의 목자라 하는데 하늘 이야기하는지 땅 이야기를 하는지 분별해야 합니다. 그 생각이, 그 말이 천국 아니면 지옥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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