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반조
승각전공
- 모름지기 잠깐이라도 돌이켜 비춰보는 것이
세상의 공함을 아는 것보다 수승히 앞선다
송
좋은 것은 나쁜 것의 원인이 되고,
옳은 것은 그른 것의 원인이 되니,
이 두 가지 분별의 마음을 없애는 것이
나를 스스로 편안하게 만들 것이다.
강설
상당히 어려운 뜻을 지니고 있는 대목이다.
반조라 함은 돌이켜 비추어본다는 뜻이다.
무엇을 돌이켜 비춘다는 것일까? 안이비설신의의 육근으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부딪치고 생각하는 것
모두 분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눈으로 보고 좋고. 싫고, 이렇게 생겼고 저렇게 생겼다 분별하고, 귀로 듣고 좋은 소리 나쁜 소리 별별 소리를 다 분별한다. 냄새, 맛, 부딪침, 생각 역시 분별을 일으켜 좋다 싫다. 옳다 그르다는 인과를 만들어 계속 반복하여 윤회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분별한 것조차 좋고 싫고, 옳고 그름이 그대로 있느냐 하면 이 또한, 생로병사하여 변하고 결국 사라짐을
반복할 뿐이다.
허깨비와 같고 이슬과 같으며, 번개와 같고 물거품과 같아서 무엇 하나 남는 것도 없고, 영원한 것이 없으므로 결국 공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눈, 귀, 코, 혀, 몸, 생각의 육근으로 분별하기 이전으로 돌아가서 본래의 마음을 비추기만 하면,
굳이 수고롭게 공을 찾을 필요도 없고,
분별의 유를 없애려 하지 않아도 된다.
공함조차 알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이나 마음이 움직이는 모양이 이러하니 좋은 것을 찾아 선택하면,
그 인과의 과보로 말미암아 나쁜 것이 생겨난다. 다시 나쁜 것을 피하려고 좋은 것을 찾게 되니,
다시 나쁜 것의 과보가 나타난다.
이런 모습 자체가 해와 달이 뜨고 지듯,
밀물과 썰물이 오고 가듯,
제자리에서 돌고 돌 뿐이다.
이를 업이 꼬리를 물고 육도윤회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중생은 눈에 보이는 즐겁고 괴로움의 고락에만 집착하다 보니, 고의 늪에 빠져나올 수 없게 된다. 고락 시비 분별하는 매일의 일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고통과 괴로운 일들이 계속적으로
생겨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아무리 좋은 것도 그만큼의 나쁜 것을 만들어 내는 원인이 되고,
아무리 옳은 것도 그만큼의 그른 것을 만들어 내는 원인이 된다.
좋은 것을 선택하지도 말고,
옳은 것을 분별하지도 말며,
그저 그러려니 하면서 좋다 싫다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
좋은 것도 싫은 것도 분별하지 않는 마음을 가져야 본래의 마음인 자성, 불성, 성불의 자리로 돌아가서 편안하게 될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희비의 감정을 드러내지 말고, 순간순간의 감정을 놓고 또 놓아 방하착해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불교는 좋은 것을 선택하거나, 옳은 것을 선택하라는 것이 절대 아니다.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반대의 하나가 자동으로 생겨서, 인과의 과보로 인해 괴로운 마음을 일으키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좋다 싫다의 분별심을 없애는 것이 불교의 최종 목적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내 앞에 나타나는 일들은 내 업의 그림자라는 사실을 항상 잊지 말고, 육근에 의해 끄달리지 말며, 무심한 마음으로, 분별하지 않는 일상이 되어야 한다.
그래도 없의 마음에 끄달려 탐하고 성내고 어리석은 생각이 끊이지 않는다면,
기도와 참선, 보시와 정진으로 극복해야 한다.
수유반조
승각전공
- 모름지기 잠깐이라도 돌이켜 비춰보는 것이
세상의 공함을 아는 것보다 수승히 앞선다
신심명 강설, 진우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