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아모스 7장 1절 – 17절) 7:1 주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왕이 풀을 벤 후 풀이 다시 움돋기 시작할 때에 주께서 메뚜기를 지으시매 2 메뚜기가 땅의 풀을 다 먹은지라… 4 주 여호와께서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주 여호와께서 명령하여 불로 징벌하게 하시니 불이 큰 바다를 삼키고 육지까지 먹으려 하는지라 5 이에 내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청하건대 그치소서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 하매 6 주 여호와께서 이에 대하여 뜻을 돌이켜 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것도 이루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7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가지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8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두고 다시는 용서하지 아니하리니 9 이삭의 산당들이 황폐되며 이스라엘의 성소들이 파괴될 것이라 내가 일어나 칼로 여로보암의 집을 치리라 하시니라 10 때에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에게 보내어 이르되 이스라엘 족속 중에 아모스가 왕을 모반하나니… 11 아모스가 말하기를 여로보암은 칼에 죽겠고 이스라엘은 반드시 사로잡혀 그 땅에서 떠나겠다 하나이다 12 아마샤가 또 아모스에게 이르되 선견자야 너는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가서 거기에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에서나 예언하고 13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 14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 15 양 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 16 이제 너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니라 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예언하지 말며 이삭의 집을 향하여 경고하지 말라 하므로 17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아내는 성읍 가운데서 창녀가 될 것이요 네 자녀들은 칼에 엎드러지며 네 땅은 측량하여 나누어질 것이며 너는 더러운 땅에서 죽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반드시 사로잡혀 그의 땅에서 떠나리라 하셨느니라 (개역개정) 우리가 ‘무엇을 보느냐?’는 중요합니다. 또한 우리가 ‘어떻게 보느냐?’도 중요합니다. ‘무엇을 보느냐?’는 우리의 관심이 어디에 있느냐고 하는 영역이라면, ‘어떻게 보느냐?’는 우리가 보는 것을 어떤 시각에서 해석하느냐의 영역입니다. 문제를 문제로 보지 못하고, 같은 문제 상황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그 문제와 상황에 대한 본질적인 인식을 하지 못해 잘못된 해석을 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로써 잘못된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 그 사람의 가치관과 인격과 신앙의 중심이 무엇이냐를 드러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그 제자들에게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7:15-21)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 겸손히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이들이 복됩니다. 오늘의 성경 본문은, 아모스서의 중반부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족속이 저질러 온 죄악이 무엇인지 경고하며 그 죄악에 따른 국가적 민족적 심판의 당위성을 설교했던(3:1-6:14) 아모스 선지자가, 그 뒤를 이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보여주신 5가지 환상(7:1-9:10)을 통하여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회개를 촉구했던 하나님의 요청을 끝까지 거부한 이스라엘에 임할 멸망의 필연성을 계시하는 내용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아모스 선지자가 본 5가지 환상 중 메뚜기 재앙과 불의 재앙 그리고 다림줄의 심판이라는 3가지 환상과 함께, 아모스를 핍박하고 나선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의 죄악과 그에 대한 심판 선언과 아모스 자신의 선지자적 소명을 밝히는 내용입니다. 1. 아모스에게 보이신 환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모스 선지자에게 보이신 5가지 환상 중에서, 오늘 본문에는 3가지 환상을 계시하면서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7:1,4,7)는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 아모스 선지자에게 보이신 환상은 메뚜기 재앙이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왕이 풀을 벤 후 풀이 다시 움돋기 시작할 때에, 주께서 메뚜기를 지으시매, 메뚜기가 땅의 풀을 다 먹은지라.”(7:1-2). “왕이 풀을 벤 후 풀이 다시 움돋기 시작할 때”라는 것은 앗수르 제국이 북 이스라엘을 침공할 시기를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은 이른 비와 늦은 비로 인하여 두 번의 추수를 하는데, 첫 추수에서 나온 풀과 곡물은 왕실과 왕의 군마와 가축을 위해 왕에게 바쳐지게 되며, 두 번째 추수에서 나온 것을 일반 백성과 목자들이 먹고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때에 “주께서 메뚜기를 지으시매, 메뚜기가 땅의 풀을 다 먹은지라”는 것은, 자연재해가 있을 것에 대한 의미이자 앗수르 제국을 “메뚜기”로 비유하여 그들을 통해 자신들의 죄악을 돌이키지 않는 북이스라엘을 초토화 하실 것에 대한 환상입니다. 이러한 환상을 지켜본 아모스 선지자가 하나님께 간구한 중보기도가 무엇이었다고 했습니까? “내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청하건대, 사하소서!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 하매”(7:2). 이스라엘에 닥칠 하나님의 심판 경고 앞에 아모스 선지자는 당시 남 유다 백성으로서 우리의 북한과 같은 상황의 북 이스라엘의 멸망과 심판을 기뻐하기보다 같은 동족애를 우선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북 이스라엘의 정치 종교 사회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죄악을 용서해줄 것을 간구했습니다. “야곱”은 당시 북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아모스 선지자 당시의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 시대로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적 번영을 누리던 때였는데,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것은 훗날 북 이스라엘의 국력과 경제력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계속된 앗수르 제국의 침략으로 약화될 것을 의미합니다.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아모스 선지자의 중보기도를 들으시고 심판을 보류하실 것을 어떻게 예언합니까? “여호와께서 이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셨으므로, ‘이것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7:3).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아모스 선지자에게 보이신 환상은 불의 재앙이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주 여호와께서 명령하여 불로 징벌하게 하시니, 불이 큰 바다를 삼키고 육지까지 먹으려 하는지라.”(7:4). 두 번째 재앙은 “불로 징벌”하실 것을 선언합니다. 이것 역시 앗수르 제국의 침략을 통한 하나님의 심판의 계시이자, 한발로 인한 가뭄과 기근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불이 큰 바다를 삼키고, 육지까지 먹으려 하는지라”는 표현은, “큰 바다”는 큰 강과 호수를 나타내고 “육지”는 농경지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강과 농경지가 모두 메말라버리는 고통을 겪게 될 것을 상징함으로써 국가의 존립이 어려울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 이르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환상을 아모스 선지자가 통쾌해하며 즐기기보다 하나님께 중보기도로 어떻게 간구했다고 했습니까? “이에 내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청하건대, 그치소서!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 하매”(7:5). 첫 번째 “메뚜기” 재앙의 환상 때와 동일하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북이스라엘을 향한 심판의 징벌을 멈춰주실 것을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이에 아모스 선지자의 중보기도를 들으시고 “주 여호와께서 이에 대하여 뜻을 돌이켜 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것도 이루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7:6)는 응답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멸망을 두 번이나 유보하셨음을 나타내는 계시의 환상입니다. 역사적으로 첫 번째 “메뚜기” 재앙의 환상은 주전 745년에 앗수르의 1차 침공으로 성취되고, 두 번째 “불”의 재앙의 환상은 주전 733년에 앗수르의 2차 침공으로 성취됩니다. 아모스 선지자의 활동 시기를 주전 760-755년경으로 추정하면, 불과 15년 후에서 30년 사이에 북 이스라엘에 닥칠 상황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앗수르 제국의 반복된 침략으로 더 이상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적 번영을 자랑할 만한 북 이스라엘이 아니라, 아모스 선지자의 간구처럼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라고 하는 간신히 멸망만 면한 작고 미약한 국가로 위축되게 된다는 계시를 눈여겨봐야 합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께서 아모스 선지자에게 보이신 환상은 다림줄의 심판이었습니다.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가지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7:7). “다림줄”은 무거운 납이나 주석으로 만든 추를 매단 줄로, 건물을 지을 때 수평과 수직을 바로잡는 역할을 하는 도구입니다. 이것은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추”(레19:36)와 함께 하나님의 참되고 정확한 공의를 상징하는 도구입니다. 북이스라엘을 “다림줄을 가지고 쌓은 담”으로 비유하며, 하나님께서 세우신 백성과 공동체의 모든 근간이 ‘하나님의 공의’여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계시하는 경고입니다. 이 환상에서 주님은 아모스 선지자에게 “네가 무엇을 보느냐?”(7:8)고 묻자, 그는 “다림줄이니이다”(7:8)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모스 선지자에게 “다림줄”의 환상을 보여주신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십니까?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두고 다시는 용서하지 아니하리니, 이삭의 산당들이 황폐되며, 이스라엘의 성소들이 파괴될 것이라. 내가 일어나 칼로 여로보암의 집을 치리라.’ 하시니라”(7:8-9). 세 번 째 환상에는 아모스의 중보기도나 하나님의 용서가 없습니다. 두 번의 기회를 주었지만 돌이키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 “다시는 용서하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긍휼로 멸망의 심판을 보류하셨지만, 더 이상 참지 않겠다는 최후 심판의 선언이셨기 때문입니다. “이삭의 산당들”은 자신들은 예배처소라고 했지만 북이스라엘 전역에 깔려있는 우상숭배의 터전을 가리키며, 국가적으로 벧엘과 단에 세운 “이스라엘의 성소들”과, 여로보암 1세를 통해 세워진 북 이스라엘 곧 “여로보암의 집”의 파멸을 선언합니다. 이것은 주전 724년 앗수르 제국의 3차 침략으로 성취되어, 3년간 버티며 항전했지만 결국 주전 722년에 완전히 멸망하게 됩니다. 북이스라엘 땅은 이방인들을 이주시켜 황폐화시켰고,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갔거나 이방인들과 혼혈이 되게 됩니다. 2. 아모스와 아마샤가 서로 어떻게 다릅니까? 아모스는 북이스라엘을 적국으로 생각하고 파멸을 외쳤던 선지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하신 한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회복을 위해 저들의 죄악으로부터의 회개를 외쳤던 선지자였습니다. 이러한 아모스 선지자의 신앙적 진심을 읽고 함께 하고자 하기 보다는, 단지 그 메시지의 외형적인 비판 부분만을 문제 삼아 오히려 모함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름 아닌 북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였습니다. 아모스 선지자의 외침을 어떻게 왜곡하여 북 이스라엘 왕에게 고소합니까? “때에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에게 보내어 이르되, ‘이스라엘 족속 중에 아모스가 왕을 모반하나니, 그 모든 말을 이 땅이 견딜 수 없나이다.’ 아모스가 말하기를, ‘여로보암은 칼에 죽겠고, 이스라엘은 반드시 사로잡혀 그 땅에서 떠나겠다 하나이다.’”(7:10-11).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는 북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죄악으로 부패와 타락에 처한 상황에 대해 아모스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가 아니라, 아모스 한 개인이 왕에 대한 반역을 선동하는 반정부주의자와 반국가주의자로 모함했습니다. 과거 우리 한국도 독재 시절에 그러했고, 중국도 선교사를 추방할 때 ‘국가 내란 전복 음모죄’라는 무시무시한 죄목을 붙여주는 것처럼, 국가의 통치 질서가 왜곡된 곳은 어느 나라나 이런 식으로 바른 말을 하지 못하게 가로막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여로보암” 2세에 대한 개인적 비판과 저주 또는 “왕을 모반”하는 선동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잘못된 죄악으로부터의 민족적 회개의 요청과 그렇지 못할 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계시했을 뿐입니다. 오히려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아모스의 선지자의 외침을 왜곡하여 왕의 마음을 선동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아모스 선지자에게 어떻게 협박합니까? “아마샤가 또 아모스에게 이르되, ‘선견자야! 너는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가서, 거기에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에서나 예언하고,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 이는 왕의 성소요 나라의 궁궐임이니라.”(7:12-13). “아마샤”가 “벧엘의 제사장”이면, 여로보암1세가 황금송아지 상을 만들어 벧엘과 단에 세워놓고 이스라엘 백성으로 애굽에서 이끌어내신 하나님이라며 경배하게 했던(왕상12:27-29) 국가적 성소를 맡았다는 점에서, 그는 북이스라엘 최고의 대표적인 제사장이요 종교지도자였습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의 제사장이 아니라, 왕이 임명한 우상 숭배를 위한 제사장이었습니다. 당시 그 제사장이나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황금송아지를 숭배하는 것을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으로 왜곡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는 전혀 관계없는 오히려 하나님을 배반한 패역한 행위였습니다. 따라서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는 아모스 선지자를 협박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갈 것과, “거기에서나 떡을 먹으며” 곧 거기나 가서 선지자 노릇을 하여 밥벌이를 하라며, “예언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이것은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하나님께 대한 소명을 가진 종교지도자로서가 아니라, 단지 자기 입에 풀칠하기 위한 밥벌이를 위한 직업적인 제사장이었을 뿐임을 드러냅니다. “아마샤”가 “왕의 성소요, 나라의 궁궐”이라고 한 표현 자체가, 그가 섬기는 성소가 하나님의 처소가 아니라고 밝힌 것이며, 따라서 자신은 하나님의 제사장이 아니라 왕의 제사장이었음을 나타냅니다. 이에 대해서 아모스는 자신이 “아마샤”가 생각하는 그런 직업적인 종교인이 아니라, 하나님께 부름 받았다고 하는 분명한 소명을 어떻게 고백합니까?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 양 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7:14). 아니, 아모스는 “선지자”로 부름 받은 것이 아닌가요? 왜 그는 자신을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고 말한 것입니까? 이것은 자신이 직업적인 생계형의 “선지자”나, 엘리야 시대 이후 생긴 선지자 학교 같은 곳에서 훈련받은(왕하2:5) “선지자의 아들”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자신의 직업은 목자와 농부였지만, 하나님께서 어느 날 자신을 직접 불러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고 하셨기에 순종했을 뿐임을 고백합니다. 아모스가 재배했다는 “뽕나무”는, 이스라엘에서 목재용으로 쓰던 돌무화과 나무에 대한 잘못된 번역으로 봅니다. 3. 잘못된 신앙인을 향한 심판이 무엇입니까? 혹시 오늘 우리가 주님의 교회라고 섬기는 교회가, 실상은 ‘주님의 교회’가 아니라 ‘목사의 교회’이거나 어떤 특정인이나 ‘종교 집단의 교회’인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목사나 장로 권사 집사 등의 직분자로서의 역할이 ‘주님의 종’이나 ‘주님의 사역자’로서가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거나 단지 어떤 ‘종교 집단의 사역자’로서 생활하는 월급쟁이나 주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군은 아닌 가 모르겠습니다.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아모스를 가리켜서 “선견자야!”라고 호칭합니다. “선견자”는, 하나님의 계시나 환상을 보는 사람 곧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자를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는 아모스가 하나님의 사람이었음을 알았다는 의미입니다. 아모스가 말한 “선지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메시지를 백성들에게 전하는 자라는 의미로 ‘예언자’라고도 표현합니다. 그러나 “선견자”가 되었든 “선지자”가 되었든, 같은 의미입니다. 아모스는 사람들이 자신을 어떠한 종교적 호칭으로 부르느냐에 대한 관심보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감당해야 할 역할이 무엇이냐를 우선했습니다.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라는 호칭처럼, 우리의 호칭은 거룩하고 존엄한데 실상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백성들을 우상 숭배의 죄악으로 이끄는 종교지도자라면, 그 거룩한 호칭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런 호칭으로 불리는 것이 오히려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 아닌가요? 야고보 선생이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약3:1)고 한 당부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는 이들이 복됩니다.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아모스 선지자에게 행한 가장 큰 죄악이 무엇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까? “이제 너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니라. 네가 이르기를, ‘이스라엘에 대하여 예언하지 말며, 이삭의 집을 향하여 경고하지 말라’ 하므로”(7:16). “아마샤”가 아모스의 선지자 사역을 가로막은 것은, 아모스 개인을 핍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역하고 거부한 죄악이었습니다. “이삭의 집”은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동일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로 신앙인들과 신앙의 공동체가 행하는 죄악을 경고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로막는 것이 얼마나 큰 죄악이냐 하는 것을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는 망각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 단지 타락한 왕의 신하였을 뿐이고, 그 밑에서 밥이나 빌어먹고 사는 거짓 종교지도자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 목회자들이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7:1)는 예수님의 말씀을 왜곡 인용해서, 교회가 행하는 잘못과 죄악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해서는 안 되고 무조건 순종하라고 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문제의 극복을 위한 “비판”을 거부하신 것이 아니라 ‘정죄’를 거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새번역 성경에서는 이러한 오해를 해결하고자 “너희가 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심판하지 말아라.”로 원문의 의미를 살렸습니다.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는 북이스라엘의 죄악을 경고하며 회개하고 돌이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아모스 선지자를, 반정부주의자 내지 반체제주의자로 모함하여 왕에 대한 “모반”을 꾸미고 선동하는 자로 몰아갔습니다. 이러한 북이스라엘의 최고 종교지도자인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와 그를 맹신하고 맹종했던 북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 심판이 어떻게 선언됩니까?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네 아내는 성읍 가운데서 창녀가 될 것이요, 네 자녀들은 칼에 엎드러지며, 네 땅은 측량하여 나누어질 것이며, 너는 더러운 땅에서 죽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반드시 사로잡혀 그의 땅에서 떠나리라.’”(7:17). 패망한 국가가 얼마나 처참한 상황에 처하며, 그렇기에 정복당한 땅의 여자들 역시 얼마나 비참한 상황에 처하는지는 모두가 잘 압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끝까지 회개하여 돌이키지 않았던 북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은 결국 주전 722년에 성취되어, 국가의 멸망과 함께 정치 종교 사회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백성들 역시 포로와 노예로 끌려가는 치욕과 수치의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아모스 선지자는 “주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7:1,4,7)는 계시의 선언을 통하여, 북 이스라엘을 향해 자신의 생각을 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을 전하는 선지자의 소임에 순종하였던 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아모스는 한낱 목자와 농부에 불과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쓰고자 하실 때에, 자신에 대한 호칭이 아니라 자신에게 맡겨주신 역할에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는 그의 직위는 대단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타락한 왕에 대한 충성으로 하나님을 향한 예배조차 우상 숭배로 왜곡시켜버린 적그리스도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아모스 선지자뿐만 아니라, 수많은 선지자들을 통한 하나님의 경고와, 실제 역사적 사건을 통한 하나님의 경고에서도 볼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아모스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켜버린 것처럼, 백성들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거부했습니다. 이들 모두에게 아모스 선지자는 “이제 너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니라”(7:16)고 권고합니다. 사도 바울은 아들같이 사랑했던 디모데를 향한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권면하기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딤후4:3-4)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러한 이들의 실상을 가리켜서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바 되어,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딤후3:6-7)고 한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것은 분명 주님의 큰 은혜요 축복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과 말씀에서 무엇을 보십니까? 또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십니까? 내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내 유익을 추구하는 입장으로만 해석하지 않습니까? 아모스 선지자가 “주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고 했던 고백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말씀하신 것을 통해 ‘공의와 사랑’이라는 주님의 선한 뜻 가운데 살아가는 신실한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