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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27. 묵상글 들 ( 대림 제1주일. - 위대한 깨어 있음.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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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27. 대림 제1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위대한 깨어 있음
바오로 사도는 지금이 어떤 때인지
우리가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지금이 어떤 때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이 어떤 때인지 알고 있습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때는 어떤 때이고
바오로 사도가 얘기하는 어떤 때와 같은 때입니까?
때에는 여러 때가 있고 그 여러 때 가운데 지금은 어떤 때이고,
사람에 따라 지금이 어떤 때인지 다릅니다.
수험생에게는 지금이 놀 때이거나 공부할 때이고,
재산을 굴리는 사람에게는 지금이 땅이나 주식을 사고팔 때이고,
청춘 남녀에게는 지금이 사랑을 만날 때이거나 결혼 적령기이고,
늙은이나 중환자에게는 지금이 생명과 죽음을 놓고 싸울 때이고,
신앙인에게는 지금이 회개의 때이거나 구원의 때 곧 주님께서 오실 때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자기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지금이 어떤 때라고 생각하는지 다를 것이고,
각기 자기가 중요시하는 것이 이루어질 때라고 생각하기 마련인데
자기 정체성이 신앙인의 경우, 지금은 늘
회개의 때이고 구원의 때이며 주님께서 오심을 기다리는 때입니다.
그래서 대림 시기를 시작하는 오늘 바오로 사도는
처음 믿을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워졌고,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왔으니 잠에서 깨어날 때가 됐다고 하고,
주님께서는 지금이 바로 당신이 다시 오실 때이니
우리에게 지금은 그 오실 주님을 깨어 기다리는 대림의 때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잠에서 깨어 주님을 기다리는 때이기에
우리는 오늘 두 단어 곧 잠과 주님을 더 성찰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잠이란 단지 물리적인 잠만 말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물론 대림 시기에 기도하는 시간보다 잠자는 시간이 더 많아서는 안 되겠지만
영적인 의미에서 잠이란 주님께 대한 의식이 잠든 것을 말하는 것이니
지금까지 주님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왔더라도 이제는
그 잠 곧 주님을 의식하지 않는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기에
물리적으로 깨어 기도만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가 어둠의 행실 곧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를 그만두라고 하지만,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술을 많이 마실 때가 있는데
그럴 때라도 주님께 대한 의식은 깨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술꾼이어서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지만,
그래서 저는 기도나 술을 먹지 않을 때 주님께 대한 의식이 깨어 있는 것보다도
술을 먹었을지라도 주님께 대한 의식이 깨어 있는 것이 더 위대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저의 경험이기도 하지만, 들은 얘기이기도 합니다.
제가 대전에 있을 때 그곳 본당의 열심한 신자들은 술을 많이 먹고 난 뒤에도
집으로 바로 가 잠자지 않고 꼭 성당에 들러 조배하고 가 잠을 잤다고 합니다.
물리적으로는 술에 취했지만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는 취해 곯아떨어지지 않는 위대한 깨어 있음이지요.
그러므로 대림 시기를 시작하는 오늘 우리도 다윗의 서원을 상기합시다.
내 집안에 들어가지 않으오리다 * 침대에도 오르지 않으오리다.
이 눈에서 잠을 거두오리다 * 눈두덩에서 단잠을 거두오리다.(시편 132, 3-4)
어제 많은 분이 문자로 저의 축일을 축하해주셨는데
제가 문자를 하지 않기에 일일이 감사하다는 답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적절치 않지만 이곳에서 대신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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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27. 대림 제1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전례력으로 영적인 한해를 시작하는 대림 제1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깨어있음’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깨어 있으라’는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무엇보다도 신앙의 근간이 되는 ‘믿음과 사랑의 깨어있음’에 대해서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것은 많은 경우 고통의 문제입니다.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주님께 대한 믿음의 끈을 놓지 않고 그 믿음에 늘 깨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와 일치되어 있을 때에는 고통이 매우 적습니다. 우리 자신이 이기심에 의해 야기된 고통으로부터, 그리고 분노와 원망, 자기연민, 신랄함, 절망에 의해 야기된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일상생활 안에서 우리의 감정들을 들여다 보면 고통을 참아내야 할 여러 상황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아무리 사소한 경우일지라도 우리의 감정들을 자극하는 모든 것 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발견하기 위해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야 말로 하느님의 뜻이 일상 생활속에 내재함을 이해할 수 있는 빛을 우리에게 줄 수 있습니다. 이 빛이 없으면 우리는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 데 필요한 이해력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 확실성 없이는 우리는 초자연적 확신과 평화를 가질 수 없습니다. 영적으로 항상 살아 있기 위해서는 우리의 믿음을 끊임없이 쇄신해야 합니다. 영적 삶은 무엇보다도 이처럼 깨어 있는 믿음의 삶입니다. .
우리 각자 안에는 어떤 갈망이 있는데, 그 갈망은 우리가 마음이라고 부르는 우리 자신의 깊은 중심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갈망을 지니고 태어났지만 만족스럽게 채워지지 않을 뿐더러 결코 없어지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가끔 이 갈망을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 갈망은 언제나 깨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에 대한 인간의 갈망입니다. 이 지상의 모든 사람은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기를 또 사랑을 알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 자아와 우리 존재는 바로 이 사랑의 갈망 안에서 발견됩니다.
우리는 사랑의 빛을 품고 사는 법을 배우려고 태어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품는다는 것은 세가지 의미가 있는데, 곧 사랑을 견디어 내고, 사랑을 지니고, 사랑을 낳는 것입니다. 첫째로 사랑을 견디어 낸다는 것은 사랑의 아름다움과 고통을 견디어 내는 능력 안에서 우리가 성장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로 사랑을 지닌다는 것은 사랑을 전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셋째로는 우리가 사랑을 낳는 사람이 되고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져다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사랑의 세가지 본성입니다.
믿음과 사랑의 갈망은 이 우리를 깨어있게 만들고 우리가 깨어 있음은 언제나 무엇인가를 위한 것인데 그것은 참된 삶의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우리가 의식하고 있음은 우리의 심장이 뛰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 믿음과 사랑을 갈망하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사랑에 대한 갈망으로 인한 깨어 있음의 시작단계가 지나면 믿음과 사랑의 의식이 자라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일상안에서 믿음과 사랑의 은총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사건들 안에서 늘 믿음과 사랑으로 깨어 있으면 이 믿음과 사랑은 늘 우리의의식 안에 자리잡아 우리의 삶을 인도하게 될 것입니다.
✝️ 일요일 성체의 날✝️
알코이 (Alcoy) 의 아기 예수
스페인 -1568년
염색 기사이며 행상인이었던 장프레(Jean Prats) 라는 이름의 어떤 프랑스 사람이 알리칸테 (Alicante) 근처에 있는 스페인 마을 알코이(Alcoy)에 살고 있었다. 1568년 1월 29일 저녁에 그는 임종이 가까운 사람에게 거룩한 병자성사를 베푸는데 쓰이는 은으로 된 성작과 몇 개의 성체가 들어 있던 은으로 된 작은 가방을 훔쳤다. 하느님의 물건을 훔친 그 도둑은 다른 값비싼 물건들도 가져갔다.
다음날 아침 성 미구옐 솔레(HH. MigueI SoIer) 신부와 성 요셉 파스토르(HH. Josef Pastor) 신부는 성체를 도난당한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즉시 교회의 종을 치게 하였고, 달려온 많은 사
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알렸다. 그리고 두 사제는 모든 사람들에게 도난당한 성물(聖物)을 빨리 찾도록 노력할 것을 당부했으며, 또한 그 성물이 가능한 한 빨리 신성모독 행위를 한 도둑의 수중에서 벗어날 수 있도룩 기도하고 단식해 주기를 부탁했다.
알코이의 성실한 주민들은 그러한 범죄에 대하여 굉장히 놀랐다.
성스러운 미사를 참례한 후에 이 마을의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은 거룩한 성체를 찾기 위해 도둑을 추적하는 것을 도왔다. 그러나 노인들은 소원기도와 속죄기도를 바치기 위해 행렬을 이루어 맨발로 성모 마리아의 소성당으로 들어갔다. 그 동안에 사람들은 모든 마구간, 헛간, 덤불숲, 건초더미, 그리고 퇴비더미를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아무 성과도 없었다.(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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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수도회 한국관구
에페소 기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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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27. 대림 제1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깨어 있어라.”(마태 24,42)
오늘은 전례력으로 새해 첫날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탄을 기다리는 대림의 때에 이르렀습니다. 이 시기의 큰 주제는 ‘깨어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도 ‘깨어있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구체적인 내용을 두 가지 비유를 들어 말씀해 주십니다.
<첫 번째 비유>(37-41절)는 노아의 홍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는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는 하느님을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으로 알고 있는 우리에게 이해할 수 없는 일로 여겨집니다.
대체, 끔찍하고 잔인한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 것일까요?
흥미롭게도, 예수님께서는 노아의 홍수를 말씀하시면서, 그때 그 사람들이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심판을 받은 그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곧 마구 먹고 마시는 사람들, 장가들고 시집가는 사람들, 들에 있는 사람들, 맷돌질하는 여자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는 노아의 홍수가 사람들의 타락 때문이라기보다 사람들의 안일한 삶에서 비롯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아무 일도 없으리라는 그들의 무관심과 타성에 젖은 평범한 일상의 굴레에 젖어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이는 죄를 피한다할지라도 사랑하고 있지 않으면 심판받게 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나쁜 짓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선과 정의로 진리 편에 서서 이를 행하고 투신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곧 어둠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빛에로 나아가야 하고, 항상 빛 가운데 살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것이 ‘깨어있음’의 의미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 비유>는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는 집주인과 언제 올지 모르는 도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알다시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 지 집 주인이 안다면,
깨어 있어서 도둑이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24,43)
이는 어느 한 순간도 주의와 경계를 늦추지 말고, 언제 어디서나 깨어 있으며, 하느님을 기다려야 함을 말해줍니다. 곧 사람의 아들은 생각지도 않은 시간에 오실 것이니, 준비하고 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오늘 <말씀전례>에서 ‘깨어있음’의 의미는 세 가지로 말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마지막 날에 오실 주님을 맞이 할 ‘준비로서의 깨어있음’이요, <둘째>는 유혹에 대한 ‘경계로서의 깨어있음’이요, <셋째>는 ‘이미’ 와 ‘아직’ 사이에서, 주님과 동행하여 걷는 ‘기도로서의 깨어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4,42)
이 말씀에서,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하는 첫 번째 분명한 사실은 주인님이 오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분명 오십니다. 만약 오시지 않는다면 굳이 고대하고 기다릴 필요도, 깨어있을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깨어있음’은 ‘그분이 오신다는 믿음’에 근거합니다. 그러기에 진정 믿는 자만이 진정 깨어있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언제 올지를 모릅니다. 그러기에 깨어 있음은 임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요, 오실 님을 기다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지도 않을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마태 24,44)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하는 <또 하나>의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잠들어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곧 우리는 ‘이미’ 깨어났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깨어나라’고 하지 않으시고, ‘깨어 있어라’고 하십니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의 첫 번째 오심으로 이미 깨어난 까닭입니다. 그러니 잠에서 깨어나라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잠들지 말라는 말입니다. 헛 군데 눈 돌리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깨어있음’은 얼차려 입니다. 곧 정신차려있는 것 입니다. 마음의 경계를 품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깨어있음’의 <둘째> 의미인 유혹에 대한 ‘경계로서의 깨어있음’이 필요하게 됩니다. 곧 깨어있음은 한편으로는 빛을 향한 깨어있음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어둠에 대한 경계로 깨어있음입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로마 13,12-13)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고서야 비로소 깨어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이미’ 오신 주님과 다시 오실 주님 사이에서 살고 있으며, 바로 여기에 <셋째>의 의미인 주님과 동행하여 걷는 ‘기도로서의 깨어있음’이 있게 됩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깨어, 빚 속을 걸어야 할 일입니다. 이미 대림초를 밝혔으니, 깨어 그 길을 걸어야 할 일입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말합니다.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을 걸어가자.”(이사 2,5).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깨어 있어라.”(마태 24,42)
주님!
깨어 있게 하소서, 깨어 기다리게 하소서.
고대하고 희망하게 하소서, 희망하고 준비하게 하소서.
더 이상은 잠들지 않게 하시고, 졸지도 않게 하소서
헛 군데 눈 돌리지도 말게 하시고, 언제나 임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빛의 갑옷을 입고 빛 속을 걷게 하시고, 동행하시는 당신께 깨어 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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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27. 대림 제1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먼저 나를 기다리시는 분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기보다 먼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가운데 은총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성탄축일 전 4주간을 대림절이라고 합니다. 대림이라는 말은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기다립니까? 주님을 기다립니다. 세 가지 의미로 구분해 보면,
첫째로 우리를 구원하실 구세주의 탄생을 기다립니다. 예수님께서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우리의 구원자로 탄생하셨고 실제로 인류에게 구원의 은총을 주시고 계시니 그날을 경축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일찍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세주를 목마르게, 4천년을 기다렸습니다. 자유와 해방을 주실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대림초를 4개로 하는 것은 바로 4천년을 4주간으로 상징화하기 때문입니다. 4개의 초는 예수님께서 동서남북, 온 세상의 구세주이심을 의미합니다. 초의 색깔은 어두운 자색으로 시작하여 점점 밝은색으로 불이 밝아짐으로써 주님께서 가까이 오시는 기쁨을 표현하고 동시에 우리의 마음도 맑고 또 밝아져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로 죄의 허물을 벗게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메시아를 기다렸지만 정작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마음의 문이 닫혀있었고 자기들만의 선입견과 고정관념이 있었기 때문에 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 오시더라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세상의 마지막 날에 다시 오실 심판자 주님을 기다립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그때 하늘에 사람의 아들의 표징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 세상 모든 민족들이 가슴을 치면서,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을 떨치며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마태24,30).하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사도신경에서도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하고 고백합니다. 미사 안에서도 “주님의 자비로 저희를 언제나 죄에서 구원하시고, 모든 시련에서 보호하시어, 복된 희망을 품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게 하소서.”하고 기도합니다. 그날이 준비된 사람에게는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드는 날입니다. 속량의 날이요, 구원의 날입니다(루카21,28).
구세주 빨리오사! 어두움을 없이하실 분으로 빨리 오시면 좋으련만 지금 당장 심판자로서 오셔도 당당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1코린1,8). 그리고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도록”(1코린1,9)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주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쓰레기통’의 동의어는 ‘성직자’랍니다.
쓰레기통 같은 사람
남들이 인상 찌푸리는 것을 껴안는다. 아무 불평 없이.
가운데 자리 마다하고 구석으로 간다. 아무 불만 없이.
화려한 것, 화려한 곳만 찾는 성직자가 있다면
그는 쓰레기통 같은 사람이 아니라 쓰레기일지도 모른다. -정철-
각자의 본분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은 쓰레기가 됩니다. 이러저러한 환경이나 여건을 탓하거나 핑계 대는 일 없이 근본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 내리면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해도 좋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진리의 말씀,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주 예수님 안에 머물러, 오시는 주님을 당당히 영접해 드려야 하겠습니다.
예비자 한 분을 만나게 되었는데 성당을 찾게 된 동기가 이웃에 사는 부부의 행복한 모습이었습니다. 성당에 다니는 부부의 기쁘고 행복한 모습을 보면서 성당에 가면 무엇인가 좋은 것이 있는가 보다 생각하게 되었고 어린 자녀에게 일직 신앙에 눈뜨게 해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나오셨다고 했습니다. 사실 하느님 말씀 따라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복음 선포입니다. 전교한다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느님때문에 기쁘게 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히게 하여라”(마태5,16).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당신의 모상대로 창조하시고 당신의 영, 숨을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 그분께서 주신 탈랜트를 잘 활용하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욕심 부리지 않고 자기 그릇대로 빛을 발하는 것이 주님을 잘 기다리는 모습입니다. 남과 비교하여 빛을 가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셋째 의미는 우리의 일상 안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살기를 희망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 위에서 제자들과 동행하시면서 뜨거운 감동을 주셨던 그 기쁨을 기다립니다. 묵시록 3장20절에서는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하셨습니다. 마음의 문을 여는 일은 우리의 몫입니다. 사실 성당에서는 매일 미사가 봉헌 되고 있습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 주시고 영혼의 양식을 주십니다. 그러나 내가 이런저런 핑계로 그분을 모시지 못할 뿐입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서도 이야기하고 싶어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미사 안에서 성경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느님은 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분은 나를 한 번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내가 밖에서 허우적거렸을 뿐입니다. “님은 내안에 계셨지만 나는 님 안에 있지 않았습니다”(성 아우구스띠노).
주님께서는 우리가 기다리기도 전에 먼저 우리를 간절히 기다리십니다. 성경 안에서 당신의 말씀을 열어주기를 기다리십니다. 감실 안에서 당신을 조배하는 이들을 기다리시고 당신 앞에서 무릎 꿇어 기도하는 이들을 보고 싶어 하시며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바라보는 이들을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는 것보다도 더 간절한 마음으로 당신의 모든 것을 가져갈 수 있기를 희망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시는 주님을 외롭지 않게 해 드려야 하겠습니다. 우리에 앞서 언제나 기다려 주시는 주님이 계심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날들 이루시길 기도합니다.
세상의 끝 날, 종말이 언제 오든 아무 걱정 하지 마십시오. 기다리시는 그분이 계신데…그날을 대비하여 지금 깨어 준비하면 됩니다. 그날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의 날입니다. “주님, 제가 당신의 구원을 기다립니다”(창세49,18).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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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27. 대림 제1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뉴저지 가톨릭방송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방송미사 녹화를 부탁하였습니다. 아직 9월인데 대림 1주와 2주의 미사를 녹화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미리 준비하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기에 기꺼이 함께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2023년 대림 제1주일은 다른 해보다 3달 먼저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전례는 오늘부터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합니다. 새로운 한 해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리면서 시작합니다. 이 기다림의 시간을 ‘대림(待臨)’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메시아는 기름부음 받은 자이고, 하느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고통과 절망으로부터 해방 시켜주실 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시는 분입니다. 교회는 그 메시아가 2,000년 전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음을 신앙으로 고백합니다. 그 메시아는 이렇게 선포하였습니다. “때가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이들에게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주어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대림은 2,000년 전에 오셨던 메시아를 기억하며, 우리에게 다시 오실 메시아를 깨어서 기다라는 것입니다.
미당 서정주 선생님은 ‘국화 옆에서’라는 시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필라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보다.” 한 송이 국화꽃이 피는 데에도 참 많은 시간과 정성이 필요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장석주 시인은 ‘대추 한 알’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 안에 번개 몇 개가 들어 있어서/ 붉게 익히는 것일 게다. 저게 혼자서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이 들어서서/ 둥글게 만드는 것일 게다./ 대추야 너는 세상과 통하였구나.” 붉게 익은 대추 한 알에도 참 많은 시간과 정성이 필요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깨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깨어 있음에도 몇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시간의 차원입니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은 깨어 있습니다. 물속의 물고기는 강물을 거꾸로 올라갑니다. 새는 힘차게 날아오르며 노래 부릅니다. 다람쥐는 겨울을 나기 위해 도토리를 모으고 있습니다. 생명을 유지하고,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서 생명은 깨어 있습니다. 깨어 있음은 죽을 때까지 계속됩니다. 두 번째는 의미의 차원입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속한 것입니다. 문학, 음악, 미술, 건축, 수학, 철학은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발전하였습니다. 재물, 명예, 권력이라는 바벨탑으로 오르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의미는 진, 선, 미를 추구하면서 문명의 꽃을 피우기도 하지만, 의미는 욕망이라는 전차가 되어 문명을 파괴하기도 합니다. 세 번째는 가치의 차원입니다. 종교는 가치를 추구합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당한 이를 도와줍니다.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닭이 울 때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부끄러움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섬김을 받으실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오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사람이 되신 건 겸손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제2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깨어 있음에 관해서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지금이 어떤 때인지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 이미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깨어 있는 걸까요? 가치의 차원을 사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 온 목적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 온 목적을 알았다면 최선을 다해서 그 목적을 이루는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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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27. 대림 제1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사제로 살아가며 죽을 때까지 사제로 산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음을 자주 깨닫습니다. 특히 어려운 일이 생기면 세상에 나 혼자만 있다는 생각에 눈물의 기도를 흘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사제 생활을 20년 넘게 하면서 주님께서 저를 특별히 선택하셨음을 자주 느끼게 됩니다.
만약 저 같은 사람이 짝꿍을 만나 결혼했다면 잘 살았을까요? 저의 부족한 능력과 저도 파악하기 힘든 성격을 볼 때, 마누라와 자식들 모두에게 큰 시련을 줬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직접을 저를 맡으셨던 것이 아닐까요? 당신의 품 안에 있어야 그래도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을 것 같았겠지요.
이제 사제가 되어서는 특히 여성에 대한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려고 극성스러운 여성 몇 분을 보내주셨습니다. 저 좋다고 쫓아오시는 그분 덕택에 여성이라면 근처에도 가기 싫어졌습니다. 그리고 나이 오십이 넘어가니, 여성의 유혹도 없어졌습니다. 아마 이러면서 웃으실 것 같습니다.
‘이제는 네가 뭘 하겠니? 나 아니면 먹고나 살 수 있겠어?’
불러주신 그분의 뜻에 맞게 열심히 살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특히 언젠가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 살아야 합니다.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고 주님밖에 모릅니다. 미리 알면 시간에 맞춰 잘 준비하겠지만, 주님께서는 가르쳐주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단 한 순간만 열심히 사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열심히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부터 교회력으로 새해라고 하는 대림시기가 시작됩니다. 이 땅에 강생하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시간이지요. 이 기간에 주님 오심을 잘 준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우리는 12월 25일이 예수님께서 강생하신 성탄 대축일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전에 판공성사도 보고, 구유와 성탄 트리를 만들면서 예수님 오심을 준비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다시 오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는 언제일까요?
만약 노아 시대에 대홍수가 날 것을 사람들이 미리 알았다면 너도나도 배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을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살면 될까요? 다시 오시는 날에 땅을 치며 후회하는 것보다, 주님의 합당한 선택을 받을 수 있는 삶을 지금 당장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준비하며 사는 삶을 통해 제2독서의 사도 바오로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구원에 더 가까워지게 됩니다. 따라서 이제는 단호한 결심이 필요합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이사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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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잃는 것과 얻는 것으로 얽혀 있습니다. 버릴 줄 아는 사람만이 얻을 수 있습니다(정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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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27. 대림 제1주일. 키엣 대주교님.
생각하지도 않은 때
이제 교회는 화려한 향과 꽃으로 장식하지 않고 소박한 제단과 함께 사제는 자색 제의를 입습니다. 회개와 절제, 간절한 기도, 기다림을 상징하는 자색은 대림시기는 기다림의 시기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실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희망없는 삶, 절망의 삶을 벗어나 새로운 생명을 줄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뿐이십니다. 주님만이 우리를 죄의 노예에서 벗어나 진정한 주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하십니다.
이처럼 대림은 간절한 희망과 기쁨을 안고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기다림은 희망입니다. 희망은 푸르름입니다. 그런데 보라색이 어떻게 푸른색으로 변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희망을 붙잡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느님의 아들이신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대림시기에 지녀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대림 첫주는 노아처럼 준비해야합니다. 노아는 주님의 말씀을 믿으며 적극적인 태도로 준비하였기에 모두를 삼켜버린 홍수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적극적인 태도라는 것은 두가지를 의미합니다. 암울한 일상 속 미래에 대한 희망입니다. 사람들은 희망으로 살아갑니다. 희망이 없는 세상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영원한 하늘나라 생명에 비하면 지금 이 세상은 빨리 지나가는 삶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지금 이 세상밖에 알지 못합니다. 아직 가 보지 않은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행복한 지 알수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지금 이 세상의 고통과 시련이 가장 어렵게 느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만일 희망이 없다면, 살아갈 수도, 일을 할 수도, 성공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희망이 있기에, 농부는 이른 새벽 눈비를 맞으며 땅을 일구고, 씨 뿌리고 잡초를 뽑으며 풍성한 수확을 기대합니다. 희망이 있기에, 학생들은 밤을 새워 공부하며 좋은 성적이 나오길 기대합니다. 바로 이러한 희망으로, 노아는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고 용기와 인내로 그토록 큰 방주를 만들었기에 홍수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희망은 주님의 약속(말씀)에 의해서만 보살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노아는 주님말씀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었기에 밝은 미래의 희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희망은 험난한 고난을 극복하는 힘입니다. 그러므로 적극적인 태도로 미래를 준비해야 합니다. 미래의 희망은 용기를 주지만 그 희망자체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희망은 환상입니다. 그러므로 미래의 희망이 이루어지기 위해 지금 이 순간, 적극적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자세가 필요하며 그러한 자세로 미래를 준비해야 합니다.
학생들이 앉아서 좋은 결과만 기다린다면 밝은 미래는 오지 않을 것입니다. 밤을 세워 공부하는 적극적이고 성실함이 필요합니다. 농부들은 풍요로운 수확을 걷어들이기 위해 비를 맞고 뜨거운 햇빛 속에서 땀흘리고 열심히 땅을 일구어야 합니다. 노아는 앉아서 주님의 구원만을 빌지 않았습니다. 이웃의 비방과 유혹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일만 하였습니다.
‘스스로 돕는 사람을 하늘도 돕는다.’ 노아는 이것을 실천한 사람이며 최선을 다해 미래를 준비하였기에 주님께서는 당신이 약속하신 대로 그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은 긴 대림시기와 같습니다. 고난과 실패로 불안과 우울, 절망감이 우리를 덮고 있습니다. 절망 속에서도 노아처럼 주님의 약속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어두운 세상에 희망과 밝은 미래를 주실 것입니다.
앉아서 기도만 하는 소극적인 기다림이 아니라 지금 나의 처지에 맞는 일들을 적극적으로 준비하며 주님을 맞이해야 합니다.
흔들리지않는 믿음으로 매일을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인간에 대한 주님 사랑의 마음으로 아무리 작고 하찮은 일이라도 열심히 임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태도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오시는 때를 놓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주님, 저희에게 오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다음 세상을 바라면서도 지금 열심히 살지 않습니다. 지금이 너무 힘들어 다음 세상을 생각해 볼 여유가 없습니다. 나는 어떠한 삶을 살고있습니까?
2. 노아는 주님에 대한 믿음과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믿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준비했습니다. 노아의 적극적인 태도의 근본은 주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나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3. 대림시기를 맞아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무엇을 할 지 생각해 보십시오.
말씀의 나눔
1. ‘스스로 돕는 사람을 하늘도 돕는다.’ 너무나 잘 아는 말입니다. 하늘이 도와줄만큼 스스로 돕는 사람, 스스로 준비하는 사람이 되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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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27. 대림 제1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대림의 기쁨, 대림의 희망, 대림의 평화
-늘 깨어 있어라!-
참 기쁨은 대림의 기쁨입니다.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기쁨입니다. 참 희망은 대림의 희망입니다.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희망입니다. 참 평화는 대림의 평화입니다. 오시는 주님을 기대리는 평화입니다. 이런 대림의 기쁨이, 이런 대림의 희망이, 대림의 평화가 맑은 정신으로 깨어 기도하며 준비하며 살게 합니다. 대림시기 새벽 성무일도 다음 초대송 후렴으로 기쁘게 하루를 시작한 우리 수도형제들입니다.
“오실 임금께 어서 와 조배드리세.”
이어지는 찬미가도 영롱하게 빛나는 대림초와 함께 우리 마음을 기쁨과 희망의 빛으로 환히 밝혔습니다.
“맑고도 맑은 소리 메아리친다, 어두움 물러가라 울려퍼진다.
깊은잠 깨어나라 밝혀주시듯, 예수님 하늘에서 비춰주신다.”
이어지는 아침기도 첫 후렴도 참 흥겨웠습니다. 해마다 대림시기 짧은 기도로 끊임없이 불렀던 노래입니다.
“그날에 모든 산에서 단 것이 방울져 내리고,
언덕들에서 꿀이 흐르리라, 알렐루야.”
그날이 오늘입니다. 주님이 오실 그날의 기쁨을 앞당겨 살아가는 대림시기 우리들입니다. 가톨릭 교회의 아름다운 전례가 대림의 기쁨을, 대림의 희망을, 대림의 평화를 한껏 고무합니다. 대림의 여정입니다. 우리를 찾아 오시는 주님이요, 주님을 찾아 가는 우리의 순례 여정이요 이런 깨달음이 역동적 삶을 살게 합니다. 우리를 찾아 오시는 주님을 마중 나가는 우리들이요 주님과의 상봉시간도 날로 가까워집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은 대림에 앞서 온통 깨어 살 것을 촉구합니다.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로지 아버지만이 아신다.”
그러니 그날과 그 시간에 대비하여 늘 깨어 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에 대비하여 집중적 깨어 살기 영적 훈련 기간이 오늘부터 시작한 대림시기입니다. 이어지는 노아때의 홍수의 비유도 실감나게 마음에 와 닿습니다.
“노아 때처럼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홍수 이전 시대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하면서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려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때나 오늘이나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인간 무지의 현실입니다. 노아만이 깨어 살다가 이런 재앙에서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똑같은 외적 환경에서 내적 삶도 참 판이함을 봅니다. 두 사람이 들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며, 맷돌질 하는 두 여자중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라 합니다. 바로 내적으로 깨어 살았던 자만이 구원 받음을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님이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오늘 복음의 결론 말씀입니다. 유비무환입니다. 막연히 깨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전사’로 빛의 갑옷을 입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고 깨어 준비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제2독서 로마서의 말씀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를 회심으로 이끌었던 말씀입니다.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대림시기에 잘 드러맞는 권고입니다. 하루하루 이렇게 절박한, 절실한 심정으로 깨어 준비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전사답게 빛의 갑옷을 입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고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러 나가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은 우리에게 빛의 갑옷을 입혀 주시고, 당신을 입혀 주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전사입니다. 동시에 주님의 학인입니다. 죽어야 제대인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이듯, 죽어야 졸업인 영원한 주님의 학인입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환시가 우리의 삶이 적극적으로 끊임없이 주님으로부터 배워야 하는 ‘배움의 여정’임을 일깨웁니다. 참으로 평생 주님을 공부하는 수행자로 살라는 것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주님께 대한 공부뿐입니다.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이는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
말씀대로 주님께 배우고자 주님의 산, 불암산 기슭에 자리 잡은 주님의 집, 요셉 수도원 미사전례에 참석한 우리들입니다. 대림의 꿈은 평화의 꿈입니다. 오실 대림의 주님은 평화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평화의 꿈이 바야흐로 오실 주님을 통해 실현될 것임을 예고합니다.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리라. 그러며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 않으리라.”
얼마나 많이 회자되고 있는, 얼마나 고무적인 평화의 주님인지요! 하느님의 염원이, 우리 인류의 궁극적 염원이 이런 평화의 꿈의 실현입니다. 참으로 평화의 전사로, 평화의 일꾼으로, 평화의 도구로 살라는 깨우침을 줍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5,9)
대림시기만이라도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전쟁이 멈췄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 은총의 대림시기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대림의 기쁨, 대림의 희망, 대림의 평화를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영적 야곱 집안인 우리 모두를 격려합니다.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이사2,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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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27. 대림 제1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기다림>
마태오 24,37-44 (깨어 있어라)
그 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노아 때처럼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홍수 이전 시대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그때에 두 사람이 들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기다림>
오시는 님을
기다립니다
기다리던 내가
오신 님께
낯설지 않도록
오시는 님을
닮아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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