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구속사 강해
세속 국가와 구별되는 하나님의 나라
모세와 아론은 다시 바로에게 들어가 하나님께서 내리실 여덟 번째 재앙을 선포하였다. 이제까지는 하나님께서 바로를 상대로 애굽에게 재앙을 내리셨지만 이제부터는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가슴속에 새기기 위한 재앙이 바로와 애굽 땅에 내려질 것이다.
지금까지는 바로의 마음을 돌이켜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라는 성격을 가진 재앙이었으나 이제는 그 재앙의 성격이 완전히 달라진 것을 볼 수 있다(출 10:3-6).
1. 분열되는 애굽의 권세
모세의 경고를 받은 바로의 신하들은 사태가 예전과 같지 않고 무언가 크게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들은 바로에게 "어느 때까지 이 사람이 우리의 함정이 되리이까 그 사람들을 보내어 그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게 하소서 왕은 아직도 애굽이 망한 줄을 알지 못하시나이까"(출 10:7) 하고 직언을 하였다. 그들은 서둘러 모세와 아론을 바로에게로 다시 데려왔다. 그러자 바로는 "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갈 자는 누구 누구뇨"(출 10:8) 하며 마지못해 허락을 내렸다.
모세는 "우리가 여호와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인즉 우리가 남녀 노소와 우양을 데리고 가겠나이다"(출 10:9)고 대답을 하였다. 바로는 "내가 너희와 너희 어린 것들을 보내면 여호와를 너희와 함께 하게 함과 일반이니라 삼갈지어다 너희 경영이 악하니라 그는 불가하니 너희 남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 이것이 너희의 구하는 바니라"(출 10:10-11)고 한 후 모세와 아론을 쫓아내고 말았다.
지금까지 진행된 재앙을 통해 바로의 신하들에게서 바로와 의견을 달리하는 변화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것은 바로의 왕국에 분란이 발생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절대 권력을 가진 바로에게 신하들이 항변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바로의 통치력이 약화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반면에 바로의 신하들은 재앙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차원에서 바로의 거듭된 고집에 반기를 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까지 전개된 재앙이 우연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때문에 그들의 심정에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깃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의 궁정에 있는 측근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권능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바로의 권세가 약화되고 있다. 이것은 바로를 앞세워 이스라엘 백성을 억압하려던 사탄의 궤계가 무너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바로의 마음이 여전히 강퍅하여 이스라엘의 자손을 보내지 않자 하나님의 재앙이 내렸다. "메뚜기가 온 지면에 덮여 날으매 땅이 어둡게 되었고 메뚜기가 우박에 상하지 아니한 밭의 채소와 나무 열매를 다 먹었으므로 애굽 전경에 나무나 밭의 채소나 푸른 것은 남지 아니하였더라"(출 10:15). 메뚜기의 재앙은 애굽 전역에 경제적으로 심각한 타격을 가져다 주었다. 이제 애굽은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이것은 바로로 상징되는 세상 통치가 가져다 주는 극적인 결말을 예고하는 징조이기도 하다.
통치의 제일 원칙은 경세제민(經世濟民)인 것이다. 백성들의 생존을 보존하는 것이 통치자에게 요구되는 첫 번째 의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바로는 그의 백성들에게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양식을 공급할 수 없는 무능력자가 되고 말았다. 이것은 바로의 통치의 한계를 보여준다. 이것이 세속 왕국의 한계인 것이다.
그러자 바로의 마음이 더 급해지기 시작했다. 바로는 황급히 모세와 아론을 불러 "내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와 너희에게 득죄하였으니 청컨대 나의 죄를 이번만 용서하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이 죽음만을 내게서 떠나게 하라"(출 10:16-17)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이미 바로는 하나님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모세의 간구가 있자 여호와께서 강렬한 서풍을 불게 하여 메뚜기를 홍해에 몰아 넣으셨다. 그러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심으로 바로는 이스라엘 자손을 보내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는 이번 재앙을 통해 자신의 통치권에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바로의 신하들뿐 아니라 바로의 백성들마저도 더 이상 바로의 통치권 안에서 생존에 대한 안전을 보장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후에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나갈 때 상당수의 애굽 사람들이 그 뒤를 따르게 되었는데(12:38) 이것은 바로의 통치에 대한 한계를 그 원인으로 들 수 있을 것이다.
2. 빛의 나라와 어둠의 나라
아홉 번째 재앙이 시작되었다(출 10:21-23). 그렇지만 이번 재앙은 예전과는 달리 바로에게 경고하지 않은 재앙이었다. 이것은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애굽 땅과 이스라엘 땅을 구별하여 애굽 땅에만 3일 동안 흑암이 있게 하신 것이었다. 이러한 이적은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기이한 현상이었다. 바로가 의지하는 신(神)들이 아무리 권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와 같은 이적은 행할 수 없는 것이었다.
바로는 더 이상 하나님과 대적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나 한번 더 만용을 부려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너희 어린것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출 10:24)고 하며 선심을 쓰고자 했다. 이것은 패전한 바로가 한 가닥 자존심이라도 건져내 보고자 하는 비열한 속셈을 담고 있다.
그러나 모세는 단호히 바로의 제안을 거부하고 나섰다. "왕이라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 희생과 번제물을 우리에게 주어야 하겠고 우리의 생축도 우리와 함께 가고 한 마리도 남길 수 없으니 이는 우리가 그 중에서 취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길 것임이며 또 우리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어떤 것으로 여호와를 섬기는지 알지 못함이니이다"(출 10:25-26)고 하며 오히려 바로로부터 하나님께 드릴 재물을 받지 않고서는 갈 수 없다고 하였다.
모세는 더 이상 바로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막강한 권세를 가지고 있는 바로와 그의 군대라 할지라도 모세는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그것은 비록 이스라엘 군대가 사람들의 눈에는 볼품 없이 보일지라도 만군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그 어떤 세력도 대적이 되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 사실을 그의 백성도 알고 있었다. 이제 바로와 그가 자랑하는 막강한 군대는 더 이상 모세와 이스라엘의 대적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밝혀진 것이다.
3일간의 흑암이 애굽을 덮은 반면에 이스라엘이 거주하는 땅에는 빛이 있었다는 것은 새로운 징조였다. 흑암은 죽음을, 빛은 생명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이번 재앙은 암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곧 죽음과 생명, 생사(生死)의 문제가 그 안에 내포되어 있었다. 이것이 바로가 통치하는 국가와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국가의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빛으로 상징되는 생명의 나라인 반면 바로의 세속 국가는 어둠으로 상징되는 죽음의 나라였다. 그 흑암의 정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모세는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손을 들매 캄캄한 흑암이 삼일 동안 애굽 온 땅에 있어서 그 동안은 사람 사람이 서로 볼 수 없으며 자기 처소에서 일어나는 자가 없으되 이스라엘 자손의 거하는 곳에는 광명이 있었더라"(출 10:22-23).
흑암이 지배하고 있는 애굽 전역에서는 오직 정적만이 감사고 있었다. 사람의 움직임을 전혀 감지할 수 없을 정도의 정막함이 온 땅을 덮고 있었다. 살아있으나 죽어있는 것과 같은 죽음의 상태가 삼일동안 계속되었다는 것은 더 이상 그곳에서 생명을 찾아 볼 수 없음을 보여준 것이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여전히 빛 가운에 살고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끊임없이 창조의 활동이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창조하신 목적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라는 것이었다(창 1:26). 하나님의 나라는 창조 행위의 연속적인 활동이 보장되는 나라이다. 그 안에서 백성들은 자신의 존재 목적에 따라 창조라는 문화 활동을 여전히 수행해 나갈 수 있다.
출처: 기독신학공동체 원문보기 글쓴이: 송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