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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16-22 야곱이 잠이 깨어
야곱이 벧엘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뵙습니다. 그분을 향해 총체적으로 반응합니다.
1. 본문 16절은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입니다.
1) 모세는 야곱이 잠깨어서 했던 말을 상기시키면서 다시 이 꿈이 보통 꿈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합니다.
보통 사람이 잠에서 깰 때는 꿈이었구나! 라든지 꿈에 속았다는 것을 즉시 깨닫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종 야곱의 마음 깊은 곳에 지워지지 않는 표적을 남기셨습니다. 그가 잠에서 깨었을 때 이 표적으로 꿈에서 들었던 하늘 말씀을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2) 이제 야곱은 분명한 말로 자기 자신의 무지를 탓하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황송하옵게도 하나님 자신을 찾지 않은 자 야곱에게 스스로 나타나셨습니다. 야곱은 그곳에 자기 혼자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나타나신 지금에는 감히 바랄 수도 없던 것을 얻게 되었다고 경이로와 합니다. 또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리며 그분께 찬양합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부르고 주께서 자기 여행길에 인도자가 되어 주실 것을 믿고 의지했습니다 그렇지만 야곱이 가진 신앙은 하나님께서 이토록 가까이 계신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곱이 이 같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 행위를 찬양하는 것은 지당합니다.
3) 이제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소원을 예상하시고 우리 마음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많은 것을 허락하실 때면 우리는 언제나 이 족장이 보여준 것을 본 받아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에 놀라서 감사하며 찬양하게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우리 각자가 자기 신앙이 얼마나 미약한지를 반성해 본다면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항상 우리 모두에게 적당한 일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내려주시는 무한한 은사를 능히 알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빈약한 신앙과 능력으론 도저히 하나님께서 주시는 무한한 은사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2. 본문 17절은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입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은혜롭게 말씀하셨는데 야곱이 두려워한 것이 이상하게 보입니다. 또 믿을 수 없는 기쁨으로 충만하게 된 것을 ‘두렵다’고 한 것도 이상스럽게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 종들을 기쁘게 하시는 때에라도 동시에 두려움을 불러 일으키시는 분이시라고 믿습니다.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진정한 겸손으로, 또 자기를 부인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자비를 그대로 받아 누리는 법을 배우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야곱이 타락한 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나타나시자 마자 곧 공포에 질렸다고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야곱은 경건한 복종심을 일으키는 두려움에 감동되었습니다. 그는 그곳을 적절하게 하늘 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곳에 스스로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보좌로서 하늘에 계시는 분으로 말씀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을 뵙게 됨으로써 자기가 하늘에 끌어 올려진 것으로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 선포는 그 자체가 하늘 나라, 혹은 하나님 면전에 나아가서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이라고 불리우게 됩니다. 또 성례전은 우리를 하나님 존전으로 맞아들이기 때문에 하늘 문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카톨릭교도들은 마치 하나님께서 더러운 곳에 거하시기라도 하듯 어리석게도 이 성경 구절을 자기들의 의식을 행하는 전당에 그릇된 방식으로 적용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백보 양보하여 그들이 이 호칭으로 부르는 곳이 불경스러운 미신에 오염되어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 명예는 어느 특정 장소에 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을 자기 신성한 임재로 채우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 자신께로 끌어 올리시는데 사용하는 믿음의 보조 수단만이 하늘 문이라고 불릴 수 있습니다.
3. 본문 18절은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 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입니다.
1) 모세는 거룩한 조상 야곱이 그때 단순히 감사 드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감사 기념물을 후손에게 전하려고 했다는 것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는 기념비를 세우고 그곳에 지명을 붙였습니다. 이것은 야곱이 그런 표상으로 된 하나님 은혜 혜택이 세세토록 기념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런 이유로 성경은 신실한 자들에게 그 형제들 중에서 하나님께 대한 찬양을 하도록 명령할 뿐만 아니라 그들 자녀들을 경건한 종교적 의무도 훈련하며 그들 자손들 중에서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촉진시킬 것도 요구합니다.
2) “베개 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에서 모세가 이 말씀으로써 나타내려는 뜻은 그 돌이 우상으로 세워졌다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기념물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거의 모든 상은 그것이 마치 하나님의 형상이 되기라도 하는 듯이 경배 대상이 되는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세우는 것을 금지하십니다(레26:1). 그때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단어는 (마쯔바) 입니다.
그러나 야곱의 의도는 그런 것과 달랐습니다. 야곱이 돌기둥을 세운 것은 그것으로 상징물이나 표적을 삼아 하나님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 그 돌기둥으로써 자기에게 나타난 이상에 대한 증거를 남기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돌을 거기에 세운 것은 인간마음을 어떤 큰 미신으로 떨어뜨리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피조물에 불과한 그 마음을 위로 끌어올리는데 있었습니다. 그는 봉헌하는 표시로 기름을 그 위에 부었는데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이 결여된 것은 전부가 속되듯이 하늘에서 기름부심(도유: 塗油) 외에 성스럽게 하는 순수한 종교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기 율법에서 명하신 엄숙한 봉헌 권리는 바로 이 점을 가리킵니다. 신자들은 이로써 자기 것은 어느 것도 제단에 갖고 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웁니다. 그 이유는 자기 것으로 성전과 하나님 예배를 더럽히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야곱 당시에는 어떤 교훈도 책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맨 처음부터 독실한 자들 마음에 주입해 두신 경건한 원리가 야곱의 마음에 침투했다는 사실은 확실합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돌에 기름을 부었다 하여 그것을 미신적인 방식으로 돌려서는 안됩니다. 그는 오히려 성령께서 성화 시켜 주시는 일이 없이는 그 어떤 예배도 하나님께 열납되거나 순수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을 증거 한 셈입니다. 야곱은 이상을 본 증거나 소위 기념물로 그 돌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혜택은 만대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야곱은 그런 불모의 사막에서 어떻게 기름을 구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인근 도시에서 기름을 가져왔다고 대답하는 자들이 있는데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 장소는 거민(居民)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히려 이렇게 추측합니다. 당시는 물자가 흔하지 못한 때였고, 필요한 물품을 적시에 구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여행길에 오른 야곱으로서는 어느 정도 식량을 휴대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대로 그 지역에서는 기름의 쓰임새가 아주 컸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양식과 함께 한 병의 기름을 가지고 갔을 것입니다.
4. 본문 19절은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본 이름은 루스더라” 입니다.
모세는 바로 앞에서 야곱이 그곳에서 노숙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지 얼마 안되어 그곳을 도시처럼 말한다는 것을 불합리하게 보일지 모릅니다. 그곳이 도시였다면 야곱은 어찌해서 숙소를 구하거나 어느 집 모퉁이에 몸을 피하지 않았단 말인가?
물론 이런 질문도 있을 법합니다. 그러나 그 도시는 당시에 아직 건설되지 않았습니다. 그곳은 야곱이 이름을 붙인 즉시 그렇게 불린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그 이름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취락이 형성된 때에조차 마치 야곱이 그 길로 지나가지 않기라도 한 듯 벧엘이란 이름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습니다. 이는 거민들이 그곳에서 일어난 사건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들의 상상대로 그것을 루스라고 불렀습니다. 이 지명은 이스라엘인들이 그 땅을 소유하게 될 때까지 계속 불리웠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은 폐지되어 왔던 옛 명칭을 상기해 내었습니다. 그리고 벧엘이라는 이름을 회복시켜 두 가지 지명을 함께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 것은 야곱의 후손들이 어리석은 경쟁 심리로 벧엘에서 하나님 예배를 시작했을 때 선지자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지 않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곳을 벧아웬, 즉 죄악의 집이라고 부르면서 혹독하게 비판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친히 주시는 말씀이 없이 열조의 선례를 따르는 것이 얼마나 불안전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예배에 관한 한 사람들이 한번 실행한 것을 선례로 삼지 않도록 극히 주의를 기울여야 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직접 자기 말씀으로 규정하신 것은 확고한 규칙으로 존속하도록 세심한 배려를 해야 합니다.
5. 본문 20절은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입니다.
야곱이 서원한 목적은 만일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은총을 보이신다면 야곱 자신도 그분께서 베푸신 은총에 반응하여 감사를 드리겠다는 것을 나타내는데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 율법에 따라서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감사는 향기로운 희생 제사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이런 서원을 열납할 만한 것이라고 공히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어떻게 서원 하는 것이 합당하냐는 질문을 받으면 바로 이 점을 분명히 밝혀야 합니다. 일부 사람들은 너무나 까다롭고 괴팍하여서 미신을 받아들이게 되느니보다 차라리 모든 서원을 다 정죄하겠다고 합니다.
물론 무분별하게 서원을 함부로 마구 뱉어 버리는 자들 또한 경솔하고 패역한 자들 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모든 서원을 예외없이 다 부정하는 사람들처럼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서원이 하나님께 합당하고 기뻐하시는 것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① 서원하기 위해서는 우선 올바른 목적을 지향하는 서원이 되어야 합니다.
② 다음에는 서원 하는 사람이 그 자체가 하나님께 시인을 받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③ 끝으로 자기 능력 한계 내에 있는 것만 하나님께 바칠려고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서원의 여러 부분을 따로 떼 내어 살펴보면 우리는 야곱이 자기 태도를 너무도 명확히 하여 우리가 언급한 것들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로, 야곱은 감사를 증거 하는 것 외에 달리 아무것도 의중에 두지 않고 있습니다.
둘째로, 야곱은 자기가 행하려는 것이 무엇이든지 올바른 하나님 예배에 국한시킵니다.
셋째로, 그는 수행할 능력이 없는 것을 교만하게 약속하지 않고 자기 재물 중에 십분 일을 신성한 봉헌물로 바치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러므로 카톨릭 교도의 어리석음을 쉽사리 논박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어지럽고 지저분한 서원들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하나의 전제로서 이런저런 서원을 시작하면서도 그러는 동안 그들의 방종은 모든 경계를 뛰어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맨 먼저 나오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주제 넘게 하나님께 강요하기를 부끄러워 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예배가 육정(肉情)을 금욕하는데 있다 합니다. 또 다른 자는 순례에 있다고 하기도 합니다.
세 번째 사람은 굵은 베옷이나 동일한 종류의 것을 사용하여 어떤 특정한 날을 거룩히 지키는 것으로 예배의 의의를 삼습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께만 서원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이 명예로운 일에 동참시켰으면 좋겠다고 여기는 죽은 자까지도 서원 대상으로 삼습니다. 그들은 영구적 독신 생활 선택권이 자기들에게 있다고 사칭합니다. 그들은 야곱에게서 어떤 면을 보았기에 이와 같은 자기 엄폐물을 내세우는 것입니까? 야곱의 행위 중에 그런 경솔한 것이 있습니까?이런 모든 것을 청천백일하에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말씀 해설에 착수해야 합니다.
야곱은 여기서 마치 아무 대가없이는 하나님을 예배할 의사가 없기라도 하는 듯이 만일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주신다면, 그를 자기 예배 대상자로 삼겠다는 언약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어처구니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야곱이 이런 조건을 삽입함으로써 하나님의 계속적인 보호를 의심하기라도 하는 듯이 불신감에서 행동한 것은 결코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전에 행한 서원으로 자신을 준비시켰습니다.
또 하나님의 선하심을 송축하려고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는 자기 나약성에 대한 대비를 하였습니다. 미신적인 사람은 하나님을 대할 때 마치 죽을 인간을 다루듯 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가졌다고 생각되는 것을 유혹물로 삼아서 하나님을 달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야곱의 의도는 전혀 달랐습니다.
야곱이 서원한 것은 보다 효과적으로 자신을 분발시켜서 경건한 신앙인으로써 자기 의무를 감당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종종 ‘내가 항상 너와 함께 있으리라’ 고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그 언약에 대한 부칙으로 이 서원을 추가시키고 있습니다. 얼핏보기에 그는 비굴한 태도로 보상만 바라는 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에만 전적으로 의지하고, 그 약속을 말하며, 그 약속을 사랑하고 그 약속을 마음에 고착시키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오직 자기 신앙이 확증되는 것만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나약함에 대해 적당한 도움이 된다고 인식되는 것을 모두 동원시키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야곱이 양식과 의복을 운위(云爲)할 때 우리는 그가 이 땅 위의 생활에 관한 배려만 한다고 해서 그를 탓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그는 용감한 투사처럼 격렬한 시험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온갖 것이 다 결핍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른 무수한 위험은 말할 필요도 없고 기아와 헐벗음이 죽음과 함께 끊임없이 야곱을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온갖 도움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자기를 위해 예비 되어 있다는 것을 완전히 확신하고 있습니다. 또 모든 어려움과 장애물을 돌파해 나갈 수 있다는 신념으로 자신을 무장시키고 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께서 내게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시면’하고 말하는 것은 자신이 극도로 궁핍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의아심을 품게 됩니다.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은 자기 종에게 근사한 시종과 약대와 보배로운 장식물들을 주어 보냈었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어찌하여 한 사람의 수행자도 딸리지 않고 양식도 거의 주지 않은 채 자기 아들을 보내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가 이처럼 홀홀 단신으로 떠나게 된 것은 이와 같은 비참한 모습을 보고 잔혹한 에서의 마음이 움직여 그를 측은히 여기도록 하기 위해서였다는 추측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 판단으로는 다른 이유가 더 신빙성이 있을 듯합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이삭이 그 친척들에게 눌러 앉았을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자기 종을 보내면서 이삭을 메소보다아로 들어가게 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삭은 자기 아들 야곱을 위해 달리 결정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적어도 야곱에게서 귀환을 지체시킬 그 어떤 요인도 제거하려는 배려를 합니다. 그래서 이삭은 야곱에게 그 마음을 유혹할 재산을 주지 않습니다. 그에게 진수성찬도 제공하지 않습니다. 야곱이 보다 신속히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가난한 빈털터리로 보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야곱이 모든 나라보다 자기 아버지 집을 더 우선시하여 다른 어떤 곳에 정착하여 쉬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6. 본문 21절은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입니다.
이 말로 야곱은 한 분이신 하나님께 순수한 예배를 결코 배반하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우리는 야곱이 여기에서 경건 생활에 대한 총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야곱이 자기능력을 훨씬 초월하는 약속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생활의 새로움이나 영적 의로움이나 순전한 마음, 그리고 생애 전체의 거룩한 규제 따위는 야곱 자신의 능력으로 되는 일이 아닌 까닭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요구하시고, 또 그것이 경건에 대한 행위로서 자기들에게 유래하는 일들을 시인할 때는 하나님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죄의 사유에 대해 약속하시는 것을 동시에 받아들인다고 우리는 대답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아무것도 자기 능력으로 돌리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자비롭게 그리고 아버지의 관용으로 그들을 용서하시기 때문에 완전에 미달하는 것이 있더라도 그 성도들이 드리는 총체적인 예배는 손상되거나 무효화되지 않습니다.
7. 본문 22절은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입니다.
1) 여기에 나타난 이 의식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대한 부속물이었습니다.
외면적인 의식, 그 자체로는 사람을 하나님을 향한 참 예배자로 만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 이런 의식들은 경건 생활에 대한 보조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족장 시대에는 그들이 원하는 곳이면 어디서나 제단을 세울 자유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돌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때 야곱에게 달리 드릴 제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가 자기 의지대로 하나님을 예배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당시에는 성령의 지시가 기록된 율법을 대신하고 있었던 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신 허락으로 그곳에 돌을 세웠습니다. 그것은 그가 지금까지 받은 이상의 증거물이 될 것이었습니다.
2) ‘이 돌이 벧엘, 즉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다’ 라는 표현은 환유적(換喩的) 언어표현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인 관례에 따라 상징의 대상을 외면적 표상으로 옮길 수 있습니다. 이것은 왕관으로 왕을 나타내는 것과 같은 전유적 표현입니다. 거룩한 족장들의 후손들이 이 거룩한 경건의 관례를 무지하게 남용했었습니다. 어떤 장소나 의상이나 거룩한 제도로써 예배 모범이나 교회 정치 용어까지 아직까지 덧씌워져 있고 오염되어 있습니다.
3) 그 다음에는 십일조의 드림에 대한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의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통합 방식으로 예배와 진리 보전과 전파이며 또 자선의 의무가 추가됩니다. 야곱은 세 가지 순서를 열거하기 때문입니다. 곧 첫째는, 하나님께 대한 영적 예배입니다. 둘째는, 외면의식으로의 예배입니다. 그는 이를 통해 자기 경건을 돕고 그것을 사람들 앞에 고백합니다. 세 번째로는, 봉헌이 나오는데 그는 이로써 예배와 진리 보전과 진리 전파, 그리고 자기 형제들을 친절히 돕는 일에 정진합니다. 의심할 나위도 없이 십일조는 이 세 번째에 해당됩니다.
4) 결론으로 야곱의 마음과 육체로 나타난 행위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향하여 그 자신을 총체적으로 드리는 행위였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을 우리 모두가 명심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