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경기도 사통팔달의 고장 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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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3.12.30. 20:23조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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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통팔달의 고장 수원
자리 잡은 땅은 삼남지방으로 통하는 요충지이니 영역은 사방 수백 리에 걸쳐 있고, 설치된 방어영(防禦營)은 한 도(道)의 웅대한 진영이니 무장한 군사가 8천 명이네. 방어시설을 대대적으로 갖추었으니 나라에서 가장 의지하며 중요시하네. 동쪽으로는 서울의 강산과 맞닿아 있으니 뗄 수 없는 긴밀한 형세이고, 서쪽으로는 강화 바다를 제어하고 있으니 뱃길이 서로 통하네.
이는 영조 16년(1740)에 수원부사를 지낸 이정보가 지은 관아 삼문인 공극루(拱極樓)의 기문이다. 수원의 고구려 때 이름은 매홀군(買忽郡)이며 신라 때는 수성군(水城郡)이라 불리다가 고려 원종 때 지금의 이름을 얻었다. 광교산을 진산으로 둔 수원시는 북쪽으로 백운산, 형제봉 등이 둘러싸고 있고 시내 중앙부에는 팔달산, 여기산, 숙지산 등이 솟아 있으며, 수원천과 서호천 등이 도심 가운데를 흐르고 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정쟁을 피하여 산 밑에 숨어 살던 이고에게 다시 나와 벼슬하기를 권하자, 이고는 집 뒤의 산이 들 가운데 있어 사통팔달하여 사방이 내려다보이므로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이곳에서 살겠다며 사양하였다 한다. 이 말을 들은 이성계는 이 산을 팔달산(八達山)이라고 이름 붙였고 그런 연유로 수원시 팔달구가 생겨났다. 정조는 본래의 수원을 이 산 밑으로 옮긴 뒤 화성(華城)을 축성하고 개발하였다.
조선 중기의 문장가인 월사 이정구는 독성 남쪽에 있는 표루(標樓)인 진남루 기문에서 수원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경기도의 37개 고을 가운데 가장 큰 고을이 수원이다. 가장 큰 까닭에 중요한 인물을 뽑아 기용한다. 세 도호부와 두 군, 일곱 현이 소속되어 있으니, 한강 남쪽의 거대한 진영(鎭營)이다. 고을은 평평하고 너른 들판 사이에 자리하고 있으니 험하고 가파른 산이나 골짜기로 막혀 있지 않다. 관아의 동쪽 10리에는 매우 높게 우뚝 솟은 산이 길가에 있는데, 민간에서는 독성산(禿城山)이라고 한다. 산에는 나무가 없어서 바라보면 민둥민둥하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을 얻었다. 사람들은 예사롭게 바라보면서 특별히 여기지 않는다.
임진년에 일본이 대규모의 군사로 짓밟으니 나라 안의 든든한 성과 거대한 진지들이 연달아 패배해 함락되었다. 도원수 권율이 남은 병사를 이끌고 옮겨다니며 싸우다 이곳으로 들어와 근거지로 삼고 서울에 있던 적병과 맞섰다. 왜적은 군사를 풀어 여러 차례 공격했지만 끝내 감히 가까이 올 수 없었다. 이에 사람들은 이 성이 지리적으로 좋은 형세를 가지고 있어서 나라의 요충지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독성산이라 불린 독산성1)은 남한산성과 더불어 한강 이남에서 최고의 산성이며 수원, 화성, 오산의 옛 수원도호부를 지키는 요충지다. 독산성전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독산성은 임진왜란 당시 권율 장군이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대군을 격파한 전승지다. 권율이 이 산에 진을 쳤다는 소식을 들은 왜군 수십만 명이 이 산을 포위하고서 세작(간첩)을 보내 독산성에 물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승리를 확신하였다. 적의 의도를 간파한 권율 장군은 독산성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 멍석 수십 닢을 깔고 흰 말 다섯 마리를 한 줄로 세웠다. 그리고 좌우로 쌀 한 섬씩을 준비한 뒤 흰쌀을 말에게 부어 말을 목욕시키는 듯 보이게 위장하였다. 말들이 일제히 꼬리를 뻗치고 말굽을 치며 갈기를 흔들고 소리를 요란하게 질렀다. 그러자 깜빡 속아 넘어간 왜적들이 놀라서 퇴각하였는데, 권율 장군은 달아나는 왜적을 추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권율 장군의 탁월한 전술을 기념하기 위해 말을 씻었다는 뜻으로 ‘세마대(洗馬臺)’라는 이름의 누대를 건립하였고, 오늘날까지 독산성이라는 이름과 함께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가 기문을 남긴 지 몇백 년이 흐른 지금 이 산의 이름은 독성산보다는 세마산, 향로봉, 석대산으로 더 많이 불리고 있다.
수원은 조선의 22대 임금인 정조가 뒤주 속에 갇혀 죽은 비운의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으로 세운 계획도시다.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에 사도세자와 그의 아들인 정조의 능이 있는데, 융릉(隆陵)은 사도세자와 그의 부인이자 『한중록』을 지은 정조의 어머니 경의왕후를 합장한 능이고 건릉(隆陵)은 정조와 그의 부인 효의왕후를 합장한 능이다. 양주 매봉산에 있던 사도세자의 능을 이곳 태안으로 옮긴 정조는, 군이었던 수원을 부로 승격한 다음 나라 안의 만석꾼들을 도마다 한 명씩 뽑아 오늘날 오산시의 부자골로 옮겨가 살게 하였다. 정조가 녹을 주면서까지 여덟 명의 부자를 그곳에 정착시키려고 했지만, 일제강점기까지 그곳에 남아 있던 부자는 6만 섬지기로 알려진 정영덕뿐이었다고 한다.
태안읍 송산리에 있는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때 염거화상이 창건하였으며, 병자호란 당시 불에 타 폐사가 된 것을 정조가 아버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원찰로 삼았다. 이 절에 정조가 단원 김홍도에게 명하여 그린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이 있고, 고려 초기의 범종으로 우리나라의 범종 양식을 충실히 계승한 것으로 알려진 용주사 범종(국보 제120호)이 있다.
용주사 © 유철상
태안읍 송산리에 있는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때 염거화상이 창건하였다. 병자호란 당시 불에 타 폐사가 된 것을 정조가 아버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원찰로 삼았다.
정조는 화성 능 행차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일찍이 공자가 “부모가 인연을 맺었던 나라를 떠나니 더디게 걷노라”라고 썼던 것처럼 애달픈 시 한 편을 남겼다.
아침저녁 어버이를 잊지 못해 오늘 또 화성이라
가랑비 듣는 어버이 무덤에 어느덧 비 뿌린다.
재실 주위를 걷노라니 그리운 정 젖어든다.
사흘 밤을 묵을 수 있다면 못다 한 정 채우련만
말 머리 벌써 돌아갈 곳을 향하고
뒤돌아 바라본즉 애틋한 구름이 떠오르누나.
한편, 수원화성은 정조 때의 실학자였던 채제공과 정약용의 합작품이다. 수원화성은 1784년부터 쌓기 시작하여 1786년에 완성되었는데, 수원 땅 한가운데 솟은 팔달산 동쪽 기슭에 자리한다. 남문인 팔달문, 북문인 장안문, 동문인 창룡문, 서문인 화서문의 사대문이 있고, 비밀 통로인 암문(暗問) 5개, 수문(水問) 2개, 적대(敵臺) 4개, 공심돈(空心墩) 4개, 봉화를 올리는 봉돈 1개에 포루(砲壘) 5개이며, 포사(砲舍)가 1개인 이곳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 중 하나다.
수원화성 화홍문 © 유철상
수원화성 전경 © 유철상
수원행궁 옥쇄 © 유철상
수원은 조선의 22대 임금인 정조가 뒤주 속에 갇혀 죽은 비운의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으로 세운 계획도시다. 수원 화성은 정조 때의 실학자였던 채제공과 정약용의 합작품으로, 1784년부터 쌓기 시작하여 1786년에 완성되었다.
나라 안에서 가장 이름이 높았던 수원 쇠전은 2일과 4일에 장이 섰는데, 전라북도와 충남북 일대에서까지 소장수들이 소를 끌고 왔다. 수원 갈비가 명성을 얻은 것은 수원 쇠전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부지런하고 억척스러운 수원 사람들을 일컬어 ‘수원 사람은 발가벗고도 80리를 뛴다’라고 하는데, 이 말은 옛날 서울로 공부하러 갔던 수원 사람이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자 옷도 입지 않고 서울에서 수원까지 80리 길을 한달음에 달려왔다고 해서 생겨난 말이다. ‘수원 사람은 발가락을 벗겨도 30리를 간다’라는 말은 옛날 수원 인심이 모질었다는데서 유래한 말이고, ‘수원 구두쇠’ 또는 ‘수원 사람 앉은 자리에는 3년간 풀이 안 난다’라는 말은 옛날 수원 사람들이 마음이 굳고 돈에 인색하였다는 데서 나온 말로 구두쇠를 가리키는 말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통팔달의 고장 수원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4 : 서울·경기도, 2012. 10. 5., 신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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