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여행 인터넷 언론 ・ 1분 전
URL 복사 통계
본문 기타 기능
[미술여행=윤상길]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이며, 단국대학교 영미인문학과 명예교수인 디지털 크리에이터 오민석 시인이 산문과 자신이 직접 그린 연필 드로잉, 그리고 사진들도 함께 구경할 수 있는 포르투갈 체류기를 펴냈다.(소명출판, 2025)
오민석 시인이 산문과 자신이 직접 그린 연필 드로잉, 그리고 사진들도 함께 구경할 수 있는 포르투갈 체류기를 펴냈다.(소명출판, 2025)
●그리운 또 하나의 공간을 만드는 시간
"그리운 곳에서 그리운 곳으로"는 여행과 일상의 경계를 허물고, 깊고 풍요로운 삶의 경험을 나누는 오민석 시인의 여행기다. 저자는 여행을 '탈출'이 아닌, 더 깊고 의미 있는 삶으로 향하는 길로 정의하고 있다.
오민석이 포르투갈을 그리운 또 하나의 공간으로 인지해 나가는 과정은 단순한 관광이 아닌, 일상 속에서 자연스러운 삶의 흐름을 지속하는 '생활 여행'의 실천이다. 저자는 하루하루를 장 보고, 식사를 준비하고, 집에서 하던 일들을 그대로 이어가며, 여행의 본질인 '깊어짐'을 추구한다. 지나치는 풍경, 스쳐가는 사람들, 그리고 수백 년 동안 그 자리 그대로였던 건축물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는 그 자체로 그리움이다. 현대인들의 허영과 회피의 수단이 되어버린 여행이, 새로운 방식으로 독자에게 다가온다.
<아래는 책 속에서 옮겨온 글들이다.>
여행을 싫어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여행의 느낌과 뒤끝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내내 들떠 있으나 뿌리가 없는 기분, 일상을 망각하거나 그것에서 도망치려는 헛된 노력, 소비 지수의 폭발적 증가, 이런 것들은 여행을 일종의 바보짓이나 허영 혹은 낭비로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여행을 꿈꾸었다. 흥분되지만 마음이 차분해지고 깊어지는 여행, 일상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일상을 ‘새롭게’ 지속함으로써 일상을 더욱 빛나게 하는 여행, 그리하여 더 깊은 일상으로 돌아가는 여행,
쓸데없는 소비를 최대한 억제해서 허영심으로 마음이 가난해지지 않는 여행. ‘한 달 살기, 두 달 살기’, 이런 말들을 요즘 많이 사용한다. 이런 용어는 ‘살기’의 시간적 길이만을 가리킨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여행을 ‘생활 여행’이라고 부르고 싶다.
‘생활 여행’이란 낯선 곳에서 비교적 오래 머물되 집에서와 거의 다를 바 없이 일상을 지속하는 여행이다. 장 보고, 식사를 준비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며, 집에서와 하등 다를 바 없이 읽고 쓰며 그림을 그리는 여행. 그러려면 가능한 한 한 곳을 베이스캠프로 정해 그곳에 오래 머물려 그 주변을 잠깐씩 오가는 여행을 해야 했다.
우리의 베이스캠프는 포르투였다. 포르투는 포르투갈에서 리스본 다음으로 큰 도시이며, 역사 지구 전체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어딜 가나 수백 년씩 묵은 건물들이 즐비하다.
우리가 근 70일 동안 묵은 집도 족히 2백 년은 된 곳이었는데, 사적지라 에어컨 설치도 마음대로 못 한다며 주인은 너스레를 떨었다. 실제로 깨끗하게 잘 리노베이션된 우리 숙소의 실내엔 에어컨이 없었다.
우리는 온통 낡고 오래된 것들만 잔뜩 모여 있는 이 동네에 깊이 빠져들었다. 포르투의 건축물들은 어딜 가나 수백 년 묵은 사연과 색깔과 냄새로 자욱했다. 여기저기 폐가도 많이 보였다. 돈을 처들여 새로 꾸민 곳에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볼 수 없는, 오로지 수백 년의 시간이 스치고 지나가야만 나올 수 있는 색깔과 촉감과 형상이 도시전제를 지배하고 있었다. 유럽의 다른 지역들에 비해 생활 물가도 상대적으로 쌌다. 1~2유로면 아름다운 노천카페 어디에서나 커피를 즐길 수 있었다.
무한 경쟁과 초고속 시간과 변화가 지배하는 현대에 포르투는 무언의 깊은 반문화counter-culture의 냄새가 나는 공간이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운영하고 누리며 그 안에서 신음하고 있는 것과는 다른 문화의 잠재성과 가능성을 그곳에서 자주 느꼈다.
무언가 다른 삶이 존재할 수 있다는 느낌만으로도 우리는 새롭고 행복하고 풍요로웠다.
이 글은 그렇게 떠나서 살다 온 우리 부부의 삶의 기록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잘 놀고, 열심히 일했으며, 거기 있어도 그립고 떠나와도 그리운 또 하나의 공간을 만들고 왔다. 한국에서 포르투로, 포르투에서 한국으로, 그리운 곳에서 그리운 곳으로.....
<Epilogue중에서>
강물과 배와 바람, 그리고 폐허조차도 아름다웠던 포르투여, 이제 잠시 안녕. 나는 다시 그리운 곳에서 그리운 곳으로 간다. 발걸음마다 그리움이다.
<그리운 곳에서 그리운 곳으로 중에서>
히베이라 광장의 노천 카페에서 아내와 레드 상그리아를 천천히 오래 마시다. 도루강의 붉은 노을과 강아지처럼 울어대는 갈매기들과 군밤 굽는 연기가 한데 어울려 이곳을 떠난 후에 닥쳐올 그리움의 지독한 풍경을 만들고 있다.
포르투 한복판에서 나는 혼자 중얼거린다. ‘아, 그리운 포르투’.
뒷골목엔 폐가들도 눈에 자주 띄고, 집들은 대로변의 집들보다 대부분 어둡고 칙칙해 쇠락의 기운이 역력하다. 폐가와 사람이 거주 중인 주택이 나란히 붙어 있는 풍경도 흔히 만난다. 발코니의 난간에 걸린 색색의 빨래들은 가난하고 고단한 생활의 풍경을 더해준다.
돌로 된 길바닥은 수백 년 지나다닌 사람들의 흔적으로 검다 못해 빤질빤질 윤기가 난다. 초점 잃은 눈빛에 술병을 든, 제멋대로 자란 수염의 매우 지쳐 보이는 노인들. 골목에서 때로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밤에만 문을 여는 파두 전문 주점도 있다.
골목 풍경을 찍고 있는데 청년 하나가 현관문을 열고 나와 담배에 불을 붙인다. 다른 손엔 흰색의 작은 에스프레소 잔이 들려 있다. 우리에게 잔을 들어 보이며 오늘 커피 마셨냐고 묻는다.
문득 저런 골목의 어느 다락방에서 누군가 매일 밤 흐린 등불 아래 시를 쓰고 있을 거라는 뜬금없는 생각.
오민석(吳民錫, Oh Min-seok)은 충남 공주 출생으로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이며, 현재 단국대학교 영미인문학과 명예교수이다.(사진: 오민석 시인 SNS 이미지 캡처)
오민석(吳民錫, Oh Min-seok)은 충남 공주 출생으로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이며, 현재 단국대학교 영미인문학과 명예교수이다. 1990년 월간 <한길문학> 창간기념 신인상에 시가 당선되어 시인으로 등단하였으며,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이 당선되며 평론 활동을 시작하였다.
시집 <굿모닝, 에브리원>, <그리운 명륜여인숙>, <기차는 오늘 밤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다>, 문학평론집 <이 황량한 날의 글쓰기>, <몸-주체와 상처받음의 윤리>, 문학이론 연구서 <현대문학이론의 길잡이>, <정치적 비평의 미래를 위하여>, 문학 연구서 <저항의 방식-캐나다 현대 원주민 문학의 지평>, 대중문화 연구서 <나는 딴따라다-송해 평전>, <밥 딜런, 그의 나라에는 누가 사는가>, 시 해설서 <아침 시-나를 깨우는 매일 오 분>, 산문집 <그리운 곳에서 그리운 곳으로-시인의 포르투갈 체류기>, <나는 터지기를 기다리는 꽃이다-먹실골 일기>, <경계에서의 글쓰기>, <개기는 인생도 괜찮다>, 번역서 <냉소적 이론들-대문자 포스트모더니즘 비판>, 바스코 포파 시집 <절름발이 늑대에게 경의를>, <오 헨리 단편선> 등을 냈다.
△'단국문학상', △'부석평론상', △'시와경계문학상', △'시작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관련기사
태그#출판#새책#그리운곳에서그리운곳으로#시인의포르투갈체류기#크리에이터오민석#문학평론가#단국대학교영미인문학과명예교수#소명출판#미술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