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즈리아 메쪼라
여덟째 날
이번 파라샤는 출산 이야기로 시작되며, 남자 아이의 경우 “여덟째 날에 그 포피를 베어 할례를 행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레위기 12:3). 이는 단순히 ‘밀라(מִילָה, 할례)’로만 알려지지 않고, 훨씬 더 신학적인 의미를 지닌 ‘브리트 밀라(בְּרִית מִילָה, brit milah, 할례의 언약)’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는 시나이 산 사건 이전, 유대 역사의 태동기 무렵에 이미 할례가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의 표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창 17:1-14).
왜 하필 할례였을까요? 왜 이것이 처음부터 다른 계명들 중 하나에 불과한 미쯔바가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언약,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와 맺으신 언약의 그 자체적인 표징이 되었을까요? 그리고 왜 8일째 되는 날일까요?
지난주 파라샤는 '셰미니(Shemini)', 즉 "여덟째 날"(레위기 9:1)이라고 불렸는데, 이는 미쉬칸(성막)의 봉헌식을 다루었기 때문이며, 이 봉헌식 또한 여덟째 날에 이루어졌습니다. 이 두 가지 상당히 다른 사건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요?
시작점으로 삼을 만한 것은 로마 총독 티라누스 루푸스(Tyranus Rufus)와 랍비 아키바(Akiva)의 만남을 기록한 기이한 미드라쉬입니다.
루푸스는 대화를 시작하며 “하나님의 작품과 인간의 작품 중 어느 쪽이 더 낫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놀랍게도 랍비는 “인간의 작품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루푸스가 “하지만 하늘과 땅을 보십시오. 인간이 그런 것을 만들 수 있겠소?" 라비 아키바는 그 비교가 불공평하다고 대답했습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는 것은 분명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일입니다. 인간의 능력 범위 안에 있는 일에서 예를 들어 주십시오." 그러자 루푸스가 말했다. "그럼 왜 할례를 행하시오?" 이에 라비 아키바는 대답했다. "당신이 그 질문을 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미리 인간의 작품이 하나님의 작품보다 낫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자 랍비는 총독 앞에 옥수수 이삭과 빵을 내놓았다. 가공되지 않은 옥수수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빵은 인간의 작품입니다. 생옥수수 이삭보다 빵을 먹는 것이 더 즐겁지 않은가요? 그러자 루푸스가 말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정말로 우리가 할례를 행하기를 원하신다면, 왜 아기들이 태어날 때 이미 할례를 받은 상태로 태어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랍비 아키바가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계명을 주신 것은 우리의 성품을 연마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매우 기이한 대화이지만, 우리가 보게 될 것처럼 깊은 의미를 지닌 대화입니다. 이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태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토라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 우주를 창조하시고 7일째 되는 날 쉬시며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6일째 되는 날, 하나님의 마지막 창조물은 인류, 즉 첫 번째 남자와 첫 번째 여성이었습니다. 현인들에 따르면, 아담과 이브는 그날 이미 금단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죄를 지었고,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하는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동산에서 안식일을 보낼 수 있도록 형의 집행을 하루 미루어 주셨습니다. 하루가 저물어갈 무렵, 인간들은 밤의 어둠 속으로 세상으로 쫓겨날 처지에 놓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빛을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브달라(Havdalah)때 특별한 촛불을 켭니다. 이는 단순히 안식일의 끝을 알리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빛으로 일주일의 노동일을 시작함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하브달라 촛불은 인간의 창조성이 시작되는 여덟째 날의 빛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는 말씀으로 창조의 첫날을 시작하셨듯이, 여덟째 날의 시작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도 빛을 만드는 법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처럼 유대교에서 인간의 창조성은 신의 창조성과 평행선상에 놓이며, 그 상징은 바로 여덟째 날입니다.
이것이 바로 미쉬칸이 여덟째 날에 봉헌된 이유입니다. 네하마 라이보비츠(Nechama Leibowitz)와 다른 학자들이 지적했듯이, 토라가 하나님의 우주 창조를 묘사하는 데 사용하는 언어와 이스라엘 백성이 성소를 건축하는 과정을 묘사하는 언어 사이에는 분명한 유사성이 있습니다. 미쉬칸은 소우주, 즉 축소된 우주였습니다. 따라서 창세기는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로 시작하고,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백성의 창조 이야기로 끝납니다. 여덟째 날은 우리가 창조에 대한 인간의 기여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것이 바로 할례가 여덟째 날에 행해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든 생명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믿습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았습니다. 우리는 각 아이를 하나님의 선물로 여깁니다. “자식은 여호와의 선물이며, 태의 열매는 그분의 상급이라”(시편 127:3).
그러나 유대인 남자 아이가 언약에 들어갔음을 알리기 위해서는 인간의 행위, 즉 할례가 필요합니다. 바로 그 때문에 할례는 8일째 되는 날 행해집니다. 이는 언약에 들어가는 것을 상징하는 행위가 인간의 행위임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마치 시나이 산 기슭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행하고 순종하겠나이다”(출 24:7)라고 말했던 때와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상호성과 호혜성(Mutuality and reciprocity)은 하나님께서 먼저 아브라함과, 그다음 모쉐와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특별한 언약의 본질을 특징짓습니다. 바로 이 점이 하나님께서 노아흐와, 그리고 그를 통해 온 인류와 맺으신 보편적 언약과 구별되는 지점입니다.
창세기 9장에 기록된 그 언약에는 인간의 응답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 내용은 일곱 가지 노아흐의 계명이었고, 그 표징은 무지개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노아흐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셨으며, 심지어 그의 동의조차 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유대교는 보편성과 특수성이라는 독특한 이중성을 구현합니다. 우리는 인간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모두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기본적인 도덕 법칙에 묶여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것의 일부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이라는 것은 또한 하나님과의 상호적인 특별한 언약의 일부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우리는 응답합니다. 하나님이 일을 시작하시고 우리에게 그것을 완성하라고 요청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할례 행위가 상징하는 바입니다.
랍비 아키바는 하나님께서 남자 아이들이 할례를 받은 채로 태어나게 하지 않으셨다고 말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이 행위, 즉 언약의 표징을 의도적으로 우리에게 맡기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랍비 아키바와 로마 총독 티네이우스 루푸스 사이의 대화의 깊은 의미를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로마인들과 그리스인들, 그리고 고대 세계 전반에 있어 신들은 자연 속에 존재했습니다. 태양, 바다, 하늘, 땅과 그 계절, 들판과 그 비옥함 속에 존제합니다.
유대교에서 하나님은 자연을 초월하시며, 우리와의 언약은 우리를 또한 자연을 넘어서는 곳으로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 자연적인 모든 것이 선한 것은 아닙니다. 전쟁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갈등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우두머리가 되기 위한 폭력적인 경쟁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유대인들—그리고 아브라함의 하나님에게서 영감을 받은 다른 이들—은 영화 《아프리카의 여왕》에서 캐서린 헵번이 험프리 보가트에게 말했듯이, “자연이란,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바로 그것을 초월하기 위함입니다”라고 믿습니다.
로마인들은 할례가 자연스럽지 않다는 이유로 이를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그대로의 인체를 찬양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랍비 아키바는 로마 총독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뿐만 아니라 문화를, 하나님의 작품뿐만 아니라 인간의 작품도 소중히 여기십니다.”
하나님께서 창조를 미완성으로 남겨두신 것은 우리가 그 완성의 동반자가 되도록 하기 위함이며, 하나님의 명령에 응답함으로써 우리는 정화되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창의성을 기뻐하시고 첫 인간들에게 빛을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심으로써 그 과정을 도우셨다는 이러한 일련의 사상들이야말로, 유대교를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믿음에 대한 신앙으로 독특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여덟째 날, 즉 하나님이 인간을 세상으로 보내 창조의 일에 자신의 동반자가 되게 하신 날이라는 개념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왜 이것이 할례의 행위로 상징되나요? 다윈의 말이 옳다면, 모든 인간 본능 중 가장 원초적인 것은 자신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물려주려는 욕구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 안에 있는 가장 강력한 자연의 힘입니다. 할례는 자연보다 더 높은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을 상징합니다. 우리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일은 단순히 맹목적인 본능이나 다윈주의적 충동이어서는 안 됩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은 성적 순결, 결혼의 신성함, 그리고 세상에 새로운 생명을 가져오는 사랑의 성화에 기반을 두었습니다. 이는 알파 수컷의 윤리를 거부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물리적 자연, 즉 과학이 규명해 낸 자연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과 함께 인간 본성을 창조하는 공동 창조자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게르의 아브라함 모르데카이 알터(Abraham Mordecai Alter) 랍비가 말했듯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은 누구에게 말씀하신 것일까요?
바로 사람 자신에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너와 내가 함께 사람을 만들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공동 창조의 상징은 바로 여덟째 날, 하나님께서 우리가 빛과 사랑의 세상을 창조하기 시작하도록 도와주시는 날입니다.
By Rabbi Lord Jonathan Sacks
<참고>
퀸투스 티네이우스 루푸스(Quintus Tineius Rufus)는 바르 코흐바 봉기 당시 유대 총독을 지낸 로마인입니다. 그는 랍비 문헌에서 ‘악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유대인의 관습에 대한 그의 적대감은 봉기를 촉발한 요인 중 하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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