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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가미카제(神風)특공대의 심리와 최후발악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어떻게 자기 목숨을 그렇게 쉽게 버릴 수 있는지 말이예요.
"조종사라는 고급 인력을 무의미하게 소비하다니. 나였으면 그런 명령을 내린 놈을 그 자리에서 쏴 죽였을 것이다."
- 전후의 더글러스 맥아더
"쪽발이들(japs)도 끝이군."
- 윌리엄 홀시
'카미카제 전술은 실패한 전술이라 할 수 있습니다. 5천여 명의 군사가 주 목표인 항공모함을 위해 달려들었지만, 정작 항공모함은 1척밖에 격침시키지 못했죠.'
-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 히틀러의 메가프로젝트, 카미카제 편
미국 해군 장병들도 이러한 비상식적인 전술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카미카제 전술이 등장한 초기에 엔진이 고장 난 항공기가 운 나쁘게 우리 배를 들이받았다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군 군부가 바랐듯이 겁을 먹기는 커녕 카미카제에 대한 경계감과 전투의지만 더욱 상승했다. 큰 위협요소를 발견하면 어떻게든 없애버리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안 그래도 개전 직후부터 일본인들을 "Japs" 혹은 "Yellow Monkey(또는 Bastard)"라고 부르며 무시하고 경멸하던 차에 이러한 상식 외의 행동까지 일삼자 일선 장병들은 일본군을 더 이상 같은 인간으로 보지 않는 수준에까지 이르렀으며, 그리고 이 때문에 당시 동양계 미국인들은 인종차별적 시선이 한층 강해져 고생해야했다.
다만 미군이 이 전술을 단순한 뻘짓으로 봤을거란 생각도 버리는 게 좋다. 레이더 피켓함까지 써가며 가능한 한 피해를 억제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격침수는 얼마 안 될지라도 피해함이나 사망승조원의 수는 결코 가볍게 넘길 숫자가 아니었다. 실제로 상당한 위협이라고 보았다는 미군 제독들의 증언 혹은 기록이 있다고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일위키에서 주장하는것처럼 카미카제가 합당한 선택이며 제1의 위협, 혹은 정신적인 위협이었다는 투는 말도 안된다.
6. 조종사들의 심리
일반인들에게는 보통 '절망적인 상황에서 천황을 위해 기꺼이 죽으려 하던 광신도들' 쯤으로 인식되고 일부 일본 극우세력은 '조국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젊은이들' 쯤으로 선동하기도 하는데, 물론 '진심으로 일본 제국과 덴노를 위해 죽으려 하는 광신도들'도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대부분은 사실상 '반강제적'으로 끌려온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정말 자원으로 지원했다기보다는, 심리적으로 억압된 상태가 더 많았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행진식에서 카미카제에 지원하지 않을 조종사들을 보고 앞으로 나오라고 하는 등, 안 그래도 소집 받기 전부터 황국신민 사상으로 온갖 세뇌를 당했을 사람들인데 이런 분위기에서 누가 앞으로 나갈까?
일본군 특유의 가혹행위와 겹치고 갈굼받다가 자기 자신과 가족에게 불명예나 해코지가 오지 않을까 두려워하다가 심리적으로 궁지에 몰리고 결국에는 "나라를 위해 죽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나서게 된 것이다. 아래에도 나와있듯이 당시 특공대원들의 어록이나 일기를 읽어보면 당시 조종사들의 심리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오히려 자신을 이런 상황에 몰아놓은 조국을 원망하면서 가는 조종사들도 꽤 많았다.
이들 중에는 외국어를 능숙히 구사하고 독일과 프랑스 철학을 전공하는 등, 상당히 교육받은 대학생들도 있었다. 당시에 저 정도로 교육받은 청년들이라면 그 국가의 미래를 이끌어갈 인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맨발의 겐에서도 이런 식으로 반강제적으로 끌려나온 카미카제 조종사들이 잠깐 나온다.
일본 제국은 당시 청소년들에게 비행기와 파일럿에 대한 인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파일럿이 비행기를 타고 학교에 방문한다거나 소년잡지의 삽화, 소학교(초등학교)부터 교과서 등지에 비행기 그림이 나오고 현재의 고무동력기 마냥 만드는 법도 가르쳤다. 한마디로 파일럿=엘리트라는 관념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일제강점기 시절의 많은 조선의 소년들도 비행학교에 입학하여 훈련을 받다가 특공대로 끌려갔다. 몇몇은 전쟁이 끝나서 운이 좋게 살아돌아왔지만, 죽은 이들은 일제의 A급 전범들과 함께 '야스쿠니 신사'에 있다. 이건 부관참시와 효수조차 능가하는 최악의 모욕이다. 일본 극우들은 조종사들이 자랑스럽게 자폭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 애국심이 넘치는 조종사들이 없잖아 있었을 수도 있지만, 당시 관련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연히 조종사들 상당수는 군중심리와 압박, 연좌제의 공포에 마지못해 임무에 참여하여 돌아버릴 판이었고, 죽기 직전에 내뱉은 말이 텐노 헤이카 반자이(천황 폐하 만세)가 아니라 오카상(어머니)이라는 사실만 봐도 억지로 이 미친 짓을 하게 됐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군중심리도 심각한 수준이었어서, 카미카제 부대에 차출당했으나 출격 며칠 전에 부상을 당해 부대에서 제외되는 바람에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한 병사는, 그 뒤에 몸이 회복되어 건강하게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해피 엔딩인 상황이었으나, 고향으로 돌아가자 부끄럽지도 않나며 돌부터 맞았다는 사례도 있다. 집안에서도 사지 멀쩡한데도 병신취급 당했다고 하는 등 전쟁 후 몇 년간은 굉장히 힘들게 살았다는 모양. 당시에는 일반 일본 군중들도 대단히 비이성적인 시대였기에, 이런 분위기에 자살하라고 위에서 명령하는 걸 일개 개인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소용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6.1. 실패 원인
전투기로 충돌 테스트도 한다 처음부터 인간이 해서는 안 될 짓이지만, 일본군은 그런 짓을 하고도 아까운 목숨만 내다버렸다. 아주 극단적인 비유지만 만약 무인 대함 미사일이 이정도 성능이었으면 닥치고 폐기처분해야할 정도로 실적과 효율이 나빴다. 그 원인을 소개한다.
6.1.1. 연합군의 경이로운 방공망
위에서 언급했다 싶이 F4U 콜세어, F6F 헬캣, VT신관을 대표로 하는 연합군(특히 미군) 방공능력의 비약적인 향상으로 인해 함대에 접근하기도 전에 하늘에 날아다니는건 그냥 전부 삭제되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여기에 더해 미해군의 방공전술이 무르익어 대공원형진을 내놓게 되면서 더한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다.
문제는 대전 후반으로 갈수록 태평양에 있는 섬들을 점령한 미군이 그곳에 비행장가 격납고를 짓기 시작하면서 단순 함제기 뿐만 아니라 P-51 머스탱, P-38라이트닝 같이 괴물같은 기체들이 하늘을 점령하고, 섬에서도 항공정찰이나 지상 레이더를 통해 항공기들의 이동경로를 파악하고 대비를 할 수 있었던 연합국 측에 비해, 일본의 경우 미드웨이 해전에서 다수의 항공모함을 꼴아밖은 것도 모자라 경유지로 쓸만한 섬들조차 모자라 지니 작전반경은 매우 제한적이였다. 거기다 여러 해전과 항공전을 거치면서 수련된 파일럿들이 늘아난 연합국에 비해 갈수록 숙련된 파일럿이 줄어들어 가미가제를 호위할 호위비행대조차 없을 정도로 열악해지고 만다.
6.1.2. 수준 미달의 조종사
카미카제를 하는 조종사 다수는 긴급 양성된, 초보 조종사였다. 카미카제 대원들을 훈련시키는 과정에서 많은 수가 훈련 중 착륙 등 비행과정에서 사망했을 정도인데다, 무엇보다도 기본적인 이착륙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초보 조종사들이 바다에서 방향을 잡고 항로를 유지하는 고난이도의 교육을 제대로 받았을 리가 만무하다. 거기다 유럽과 달리 태평양은 엄청난 제트기류로 인해 숙련된 조종사들도 상당히 힘들어하는 비행 경로다.
목표까지 가는 길을 못 찾으면 끝없는 태평양 수면에 카미카제하는 결말이 된다. 태평양의 망망대해 위에서 나침반의 방향과 몇 가지 측량법만 의지해서 목표물을 찾는다는 건 상당한 숙련도가 필요했다. 그리고 태평양 전쟁 후반에는 카미카제용 양성 조종사도 대단히 귀한 존재였다.
결국 선도기로 숙련된 조종사의 선도가 미군의 촘촘한 초계망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필수였다. 즉, 카미카제를 시도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칠면조들을 선도해서 적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곳까지 선도해야 했는데 비숙련자들을 이끌면서 자폭하러 가는 비행이 쉬운 일인지 어려운 일인지는 안 봐도 비디오다. 후에 선도기 조종사가 인터뷰에서 밝힌 바로는 배에 뛰어들 때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친 전우는 없었으며, 모두 "어머니"를 불렀다고 한다... 자폭하지 않는 선도기 조종사들은 무전을 통해 수많은 죽음을 전해들었고 지금도 악몽으로 고통받는다고 한다.
심지어 숙련된 조종사도 회피 기동하는 군함을 명중시키기 어려운데, 신참 조종사들이 폭격에 성공하는 것은 사실상 기적에 가까웠다. 하지만 닥돌하게 만들면 비슷한 수준의 조종사가 폭격하는 것보다는 명중률이 더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그 명중률이 고작 10% 정도이다. 게다가 1941년 12월 7일의 진주만 공습 후에 본격적으로 가동된, 연합국 군인들에게 무기를 제공한다는 무기대여법에 1942년 말부터는 한 술 더 떠서 더는 기다릴 수 없다까지 치면서 물자를 쏟아내고 압도적인 인적자원을 가지고 있던 미국과 정상적인 대결을 펼쳐서는 이렇게 해도 도저히 승산이 없었다.
6.1.3. 이성을 날린 인식
카미카제 특공대의 임무는 미 해군 항공모함에 자살공격을 하는 것이었다. 물론, 초음속으로 날아드는 대구경 함포탄에 얻어맞아도 작전이 가능하게끔 설계된 전함을 상대로 카미카제용 비행기의 폭약과 속력 따위로 충돌하면 아스팔트 위에 내던져진 달걀 신세가 된다.
하지만 조종사들이 날아가다가 아무 배나 보이면 그냥 헤딩했다는 것. 나는 법만 간신히 배웠고 극한의 스트레스를 주는 행위를 강요받아 성급해진 신참 조종사들에게 까마득히 멀리 보이는 조그만 점이 어떤 배인지 알아보는 적 함선 식별 등, 고급 행동이 가능했을 턱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제 전방에서 레이더 피켓(picket) 임무라고 해서 레이더를 장착한 구축함들이 항모의 외곽을 둘러싸고 대공경계를 맡았는데 해당 임무를 하던 구축함들이 더 큰 피해를 본 편이다. 몸빵도 원래 레이더 피켓함의 임무 중 하나긴 했지만... 심지어 이 함선들은 나 항모 아님 이라고 써붙여 놓기까지 했다고 한다. 안습. 게다가 미군의 대공화력은 압도적이었다. 카미카제가 공격하려고 해도 그 전에 전투기와 대공포로 이뤄진 철벽을 뚫어야 했다.
그나마 카미카제 특공대의 성과를 키운 것은 바로 미 해군 항공모함의 비행갑판이 목재였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실제 같은 시기 작전에 참여한 영국 항공모함도 카미카제 공격을 받았지만 피해는 미 해군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이유는 영국 항공모함은 비행갑판에 장갑판이 깔려있었고 그 덕분에 카미카제 전투기가 들이받아도 그냥 납작한 팬케이크가 되고 말았으니 팬케이크 된 잔해를 치워버리고 갑판 살짝 보수하고 물청소 한 번 하면 바로 작전이 가능한 수준이었다. "프라이팬에 뛰어드는 달걀"이라는 비유도 있다.
대신 미군 항모는 현지에서의 응급수리가 가능했지만 영국 항모는 제대로 된 항공폭탄이 명중하는 등 일단 한 번 크게 손상되면 귀항해야 수리를 할 수 있었다. 이게 개방식 격납고와 폐쇄식 격납고의 차이이기도 하다.
카미카제로 격침당한 정규항모는 한 척도 없다. 미국이 진주만 공습 직전에 건조한 에식스급 항공모함들 중에서 카미카제 맞고 비행갑판에 거대한 구멍이 뚫린 항모는 있어도... 일본군 입장에서는 문자 그대로 현실은 시궁창이다. 전쟁이 시작되기도 한참 전에 건조한 요크타운급 항공모함들도 마찬가지다. 특히 2번함 CV-6 USS Enterprise의 경우 전쟁 끝나고 나서도 한참을 살아남았지만 결국 스크랩 처리 되었다. 하지만 그 전설적인 활약상으로 인해 이 함명 자체가 미 해군의 상징이 되었으며, 차기 항공모함의 이름으로 지금도 계속 계승되고 있다.
다만 CVE-63 세인트 로 등 호위항모를 격침한 전과는 있다. 그런데 아래에도 나오지만 미군에서 호위항모는 1주~2주 꼴로 한 척씩 건조→취역시키고 있었다는 게 함정. 그것만이 아니라 미 해군이 운용한 호위항공모함들은 카사블랑카급 호위항공모함 문서를 봐도 알 수 있듯이 호위항공모함이라는 함종 자체를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만든 것도 아니고, 수송선단과 상륙부대의 호위를 위해서 급조한 것으로, 원래 전시표준선 중 하나인 리버티선이나 유조선, 화물선 같은 수송선을 개장해서 만든 것들이다. 적의 공격에 대한 방어가 어느 정도 되는 전투'함'이 아닌 방어는 그런 거 없다인 수송'선'을 기반으로 만든 것들이니 당연히 물장갑이었다. 그래서 호위항공모함의 경우 전함의 포격을 받아도 장갑이 없다시피 할 정도다 보니 격침은커녕 과관통으로 인한 구멍만 나고 끝인 경우도 있었다.
6.1.4. 수준 미달의 군용기
일단 항공기 관련 공업능력이 전쟁후반기로 갈수록 저하되었다. 여기에는 공장의 숙련공들조차 일선의 총알받이로 보내버린 일본군의 병크도 한몫 했다. 일선 전투원 못지 않게 숙련공의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던 미국과는 아주 대조적인 상황이다. 이에 따라 전투기의 설계, 제작이 난항을 거듭하여 원하는 성능을 낼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일본이야 자동화로 유명하다지만 그때는 프레스기가 없어 쇠깎아 무기 만들었을 정도로 자동화 수준이 매우 떨어졌다. 그런 나라에서 숙련공을 갈아먹었다는 걸 통해 일본 군부가 얼마나 전쟁수행에 무지했는지 알 수 있다. 이리하여 같은 소총인데 부품호환이 안된다거나, 야전에서 정비가 힘들어 보급이 들어올때까지 기다려야한다는 등 비전투 손실이 엄청났다.
거기다 후반에는 본토 결전을 위해서 조금이라도 쓸 수 있는 기체를 온존하기 위하여 남아있는 95식 1형 복엽 연습기를 자살 특공작전에 투입하였으며, 이 연습기를 이용한 자폭으로 구축함 1척을 격침시켰는데 이러한 구식 복엽기의 경우에는 VT신관이 작동하지 않거나 기관포탄이 명중해도 관통할 뿐이고 워낙 속도가 느려서 돌입이 용이해 의외로 전과를 올리기 쉬웠기 때문이었다. 반면 워낙 저속기인 데다가 무거운 폭탄을 억지로 탑재했기 때문에 손쉬운 표적이 되었다.
문제는 대전 후반기로 갈수록 항공기 연료의 품질 악화가 발생했다. 이는 태평양 전쟁 전 미국의 석유 수출 동결 및 개전 이후 제해권 상실과 더불어 미군 잠수함들의 방해 같은 전황의 악화로 인해 동남아에서의 연료수급사정은 점점 악화되었으므로 송진같은 일단 굴릴수만 있는 연료들을 이용한 대체연료를 사용할 실정이므로 정상적인 연료를 쓸 때보다 엔진 출력도 약하고 자주 꺼지는 현상까지 발생했다. 이런 것은 항공기를 만들 재료에도 적용되므로 전쟁 후반기의 일본군 항공기는 세심하게 만들어도 저질 재료로 인해 상당히 위험했다.
사실 원래 자살공격용이 아닌 병기를 임시로 땜빵질한 것에 불과하여 문제점이 속출한 것이었고, 이는 일본군 수뇌부도 충분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막장 일본군답게 이들이 선택한 방안은 이런 미친 짓을 그만두는 게 아니라. 카미카제 전용으로 만들어진 자폭병기를 정식 편제하는 것이었다.
오카의 경우에는 자폭 공격에만 중점을 맞추고 기존의 카미카제가 폭탄 적재까지 해서 안 그래도 느린 비행기가 더 느려진다는 단점을 개선했다고 만든 유인유도식 미사일이지만, 결론적으로는 조종하기 힘들며 사정거리도 짧았고, 무엇보다 이걸 싣는 폭격기가 허구한 날 격추당하는 항공기였다. 결국 오카는 발사까지 안전하게 자신을 호송해줄 수단조차 확보하지 못해서 이걸 싣고 날아오른 폭격기 모기와 함께 격추당하는 결말을 맞았다.
6.1.5. 수준 미달의 명중률
카미카제는 80~90도 사이의 고각에서 내려꽂힐 때 가장 높은 효율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사실상 급강하 폭격이나 다름없는데 이게 가능하면 이미 베테랑 파일럿이다. 이착륙하는 것만 배운 신참 카미카제 대원이 급강하 폭격하듯 항모에 내리꽂는 데 성공한다면 그 파일럿은 제 2의 한스 울리히 루델, 에이노 일마리 유틸라이넨이 될 수도 있는 결코 일회용으로 굴려선 안 될 인재다.
그리고 상당히 인상적인 케이스로, 1945년 4월 도미야스 슌스케(富安俊助) 중위는 엔터프라이즈의 엘리베이터에 충돌하기 직전에 폭탄을 격납고로 가도록 조준해 분리하여 전방 엘리베이터와 격납고를 동시에 파괴하는 신묘한 재주를 부렸으며 그 과정 또한 상당히 비범하다. 중위는 본래 총 26기 항공기로 구성된 공격대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나머지 25기는 엔터프라이즈에 아무런 피해를 주지 못하고 6기가 대공포에, 19기가 초계기 F4U 콜세어에게 떨어졌다. 그 동안 도미야스 중위는 구름 위에서 항모의 위치를 확인하며 함재기들의 감시를 피하고 있었으며 마침내 6시 53분, 단신으로 엔터프라이즈의 방공망에 돌입한다. 함에서 쏘아올리는 엄청난 포화를 당연하다는 듯이 회피하며 함 위에서 180도 좌선회, 배면비행 상태로 전방 엘리베이터에 충돌하여 대폭발을 일으키고 덤으로 돌입 직전 폭탄을 분리하여 격납고까지 피해를 줬다. 이 때 엔터프라이즈의 방공화기는 40mm 보포스 기관포 54문에 20mm 오리콘 기관포 32문이었다. 여기에 태평양 전쟁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하여 숙련도 만큼은 비교를 불허할 정도의 엔터프라이즈의 승무원들이 저 무지막지한 화력을 항공기 단 한 대에 집중했으니 이 파일럿에게는 거의 최고 난이도급 탄막 슈팅 수준으로 포화가 쏟아졌을것이다. 근데 그 화망을 뚫고 약점을 정확히 타격하는데 성공한다.
이 공격으로 인해 엔터프라이즈는 120미터 상공까지 연기가 치솟았으며 전방 엘리베이터 완파+화재로 동부 솔로몬 해전과 산타크루즈 해전에 이은 역대 3번째 사상자를 내고 본국으로 돌아가 종전까지 도크 신세를 지게 된다. 물론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군대라면 이런 신묘한 재주를 부릴 수 있는 일류 조종사에게는, 평범하게 공격하고 어떻게든 생환해서 다시 싸우게 하는 명령을 내려야 한다. 더 생각이 있는 군대라면 이런 인재는 아예 후방으로 빼서 새내기 조종사들에게 자신의 실력과 경험을 가르치는 교관 역할을 맡기거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보다 효율적인 항공 작전을 구상하는 지휘관 역할을 맡기는게 정상이다. 일본군 파일럿의 계급은 병 계급이 거의 대부분이었고 진급에 굉장히 인색하다는걸 생각한다면 도미야스 슌스케의 중위라는 계급장은 굉장히 높은 것이다. 실제로 도미야스 슌스케는 츠쿠바 해군항공대의 비행교관이었으며 1945년 5월에는 신푸특공대 제6츠쿠바대의 대장이었다.
이렇게보면 도미야스 중위가 베테랑 에이스 파일럿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그 역시 일본해군항공대의 조종사 인력풀 붕괴로 학병으로 입대하여 속성으로 키워진 조종사들중 하나로 비슷한 시기 육군의 특별조종견습사관으로 입대한 조선인 가미카제 탁경현이나 김상필의 경우에서 보듯 경력 및 실력과 상관없이 학력으로 임관후에는 소위 계급을 받았고 더 날림으로 키워지던 요카렌이나 소년비행병 출신 조종사들보다는 상대적으로 비행시간이 월등히 길어 이들을 지휘하는 비행교관이나 편대장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저 길다는 특조출신의 비행시간도 250시간이 채 안되는 시간으로 지금 기준으로는 저가항공의 신입 부기장 최저 지원 기준에도 미달하는 비행시간이다. 고작 100 시간의 비행 경력으로 저런 묘기가 가능하다는 것은 일류 파일럿이 될만한 재능을 가진 엘리트라는 것.
저런 유능한 조종사라면 모를까 초보 조종사들에게 고각 돌입을 요구하는건 억지성이 다분하기에 차선책으로 45도로 내려꽂는 방법이 나왔다. 대전 말 대부분의 카미카제 조종사들의 안습한 숙련도를 생각하면 급강하 각도는 어림도 없고 이게 그나마 확률이 높았다. 문제는 그 각도로 가면 대공포에 영락없이 요격당한다는 점이다. 동료들의 희생 속에 간신히 함재기들의 요격망을 뚫고 들어갔다 치더라도 대부분의 초보 조종사들은 본능적으로 이 각도를 잡고 달려들다가 대공포의 식사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대공포병 입장에서 보면, 45도 각도로 오는 항공기는 멀리서도 아주 잘 보이며 조준하기도 편한 각도이기 때문이다.
최종적으로는 수면에 최대한 붙어서 대공포의 사각지대로 들어가 그 낮은 각도에서 그대로 격돌하는 방식을 가장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이는 초보 조종사들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공격 방식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공격 방식은 장갑이 가장 두터운 함선의 측면, 즉 때려달라는 곳을 때리는 꼴이기 때문에, 설령 제대로 박는다 하더라도 의미 있는 피해를 주긴 어려웠다. 애초에 당시 공대함 폭격은 고공에서의 낙하 에너지를 이용해서, 상대적으로 얇은 전투함의 갑판 장갑을 뚫고서 피해를 입히는 방식이었는데, 가볍고 내구성 약한 전투기 자체의 운동에너지와 별 거 없는 자폭용 폭탄 한두 발 따위로는 최소 수십kg의 작약이 탑재되고 무게는 1톤이 넘는 강철 포탄이 초음속으로 꽂히는 충격을 견뎌내기 위해 설계된 함선의 측면장갑에는 흠집도 낼 수 없었다. 특히, 2차 세계대전때 운용된 전투함은 거함거포주의가 한창 유행하던 시기에 건조되거나 설계된 함선들이 거의 대다수라서 자기 주포를 맞아도 견딜 수 있게 지금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함선의 옆면을 두껍게 만들었다. (위의 사진의 경우 114mm의 강판(카운티급 측면장갑벨트가 114mm)에 들이받은것) 여기에 약간의 변형을 가해서 수면 가까이 저공 비행을 하다가 적 함선이 시야에 들어오면 내리꽂기 좋은 고도로 급상승한다음 들이받는 전술도 있었다. 이 경우에는 급상승 할때 속도가 느려져서 대공포에 격추될 가능성이 높았다.
7. 최후의 발악
카미카제가 나타나기 전부터 일본은 자원이나 병력이 미국과 비교하자면 터무니없이 밀리기에 진주만 공습을 감행한 이유도 직접적인 전투는 불가능하기에 기습으로 치고 들어갈려는 방식밖에 없었다. 하나 더 추가하자면, 진주만 공습 이전에 이미 중일전쟁을 하고 있던 와중에 안 그래도 부족한 인적, 물적 전쟁 수행 역량을 두 개 이상으로 분리시켜버린 것. 문제는 저렇게 전쟁수행 역량을 두 개 이상으로 분리시켜버린 것도 구일본군 특유의 병크인 육해군 대립이 낳은 삽질 중 하나라는 것.
이런 이유로 자원도 병력도 더욱 부족한 상태인 태평양 전쟁은 두말 할 것도 없이 패배 뿐인 싸움이기에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보자는 것과 혹은 적군에게 항복하는 것은 자신들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이며, 자신들의 비참한 최후가 될 것이니 자포자기로 있는 것보단 미친 짓거리지만 조금이라도 때려보자는 심리로 이 짓거리를 했을 가능성도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히트 앤드 런식으로 게릴라전을 벌였을 것이 더 효율적일 것으로 주장이 있기에 위의 주장에 대한 의문이 있다. 그리고 윗부분에 나온 말처럼 정말로 명예를 택했다면 계속 싸우다가 생환할 가능성이 없을 때 적함을 들이받는 것이 그냥 들이받는 것보다 훨씬 더 명예로운 죽음이었을 것이고, 미군을 더 공포로 몰아넣었을 것이다.
8. 결론
차라리 자살성 폭격이였으면 미군은 기겁했을 것이다. 죽음을 각오하고 달려드는 뇌격과 급강하 폭격이 오히려 굉장히 효과적이다. 실패해도 적에게 심리적으로 타격을 주고, 성공하면 폭격하고 귀환하면 된다. 그냥 파일럿을 일회성 폭탄으로 밀어넣은 카미카제보다 월등히 효과적이다.
실제로 이런 방법을 썼던 게 미드웨이 해전 때의 미군 뇌격기 부대다. 뇌격기 부대가 이런 방법을 써서 일본군 전투기들과 견시원들의 시야 범위를 저공으로 묶어뒀기에 노틸러스 잡으려다가 급히 본대로 귀환하던 아라시가 남긴 항적을 추적해서 온 급강하폭격기 부대가 끼어들어서 전세를 뒤집은 것이다.
이것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그 유명한 운명의 5분의 내막이다.
또한 같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반격에 나선 히류 항공대의 고바야시 대위나 토모나가 공격대 역시 전황을 뒤집기 위해 자살에 가까운 공격을 했고 대부분이 생환하지 못했지만 요크타운을 길동무로 끌고갔다. 그리고 산타크루즈 해전에서도 피격되어 생환이 불가한 공격기 2대가 자의로 호넷에 자살 공격을 하기도 했다. 이런 결사의 각오로 돌입한 조종사들은 미군에게까지 용감한 적으로 인정받고 전사가들도 전략적으로 가치있는 공격으로 인정을 한다.
문제는 카미카제가 자살성 폭격이 아닌 그냥 자살 작전이었다는 것이다.
더 멍청한 사실은 전쟁말기에는 기존 전투기도 모자라서 아예 카미카제 전용 무기를 따로 개발해 제작하기에 이른다. 물론 일본이 너무 급한 상황이라서 정상적인 신형전투기 양산도 물 건너간 상황이었겠지만 이런 멍청한 짓을 할 인력과 자원으로 시덴카이 같은 신형기를 만들었으면 결과가 나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 신형기들은 B-29를 격추시킬 수 있는 고도상승이 가능한 기종들이었다. 적어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하러 오는 폭격기를 손가락만 빨면서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카미카제 전용기의 자원낭비를 두고 간혹 카미카제 전용기와 신형기 개발을 나치 독일의 전차 생산라인들이 서로 달라서 38(t)를 안 만든다고 4호 전차를 더 만들 수 있었던 게 아니었던 것과 동일 선상으로 보는 경우가 있는데,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독일의 38(t)는 이미 전쟁전에 (체코가) 만들어 둔 라인을 재사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일본의 카미카제 전용기는 MXY-7 오카의 경우만 봐도 알수 있듯이 전쟁으로 공업지구 전체가 날아가는 와중에 자폭기용 생산 라인을 별도로 또 만들고 있어서 그 멍청함이 원점부터 다르다.
• 다만, 시덴카이를 비롯한 신형기들은 오히려 최우선적으로 밀어주고 있던 기체들이었는데, 대부분 개발 이후에도 제대로 된 물건을 양산할 기술 자체가 안 되었거나 제작중인데 종전하는 식으로 빛을 보지 못한다.
결국 카미카제 대원의 유서에 나온 대로 카미카제는 언 발에 오줌 누기였을 뿐 절대로 현명한 타개책이 아니었다. 제로센으로 미군의 대공포화와 전투기를 피하면서 그 화망을 뚫으면서 한 대도 맞지 말라고 시키는데? 전함에 충돌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 있는 조종사라면 자살돌격 따위가 아닌 정상적인 공격으로 더 큰 성과를 낼 수 있는데 말이다.
게다가 자살공격이라는 특성상 베테랑 조종사를 잘 해봐야 1회의 공격 성공으로 소모한다. 따라서 숙련된 조종사를 인간 미사일로 써버리고 훈련이 별로 안 된 신참 조종사만 양산하는 전략은 국가 규모로 따지자면 항공기, 조종사들을 소모하는 자해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연합군의 응전 태세도 더욱 경각심을 주어서, 결국 일본은 하늘에서부터의 재앙을 두 번이나 겪는다. 정권 유지를 위하여 국민들의 목숨을 패전의 제물로 바치는 인간방패 전략으로 연명한 것이다. 즉 시간적 측면으로 보면 가장 귀중한 자원이자 무기인 것을 갖다 버린 것밖에 안 된다. 총만 들려 총알받이로 쓰려해도 10년에서 20년이 필요한데, 파일럿은 오죽하겠는가? 맥아더가 "나였으면 그런 명령 내린 놈을 쏴 죽였을거다"라고 평한게 괜히 그런게 아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은 미국에 비해 훨씬 적은 인적, 물적자원 때문에 이런 식으로 병력을 낭비해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에 엄청난 자원과 시간을 낭비해 버렸다. 반면에 오히려 인적, 물적 자원이 훨씬 풍부한 미군은 전투 중에 추락한 조종사나 침몰한 배의 장병을 구하기 위해 주변 해역을 샅샅이 뒤져 구조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은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된 두 명의 해군 장교인 존 F. 케네디와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를 포함한 많은 인적 자원을 구해냈다.
1944년 하반기, 미 공군의 B-29 폭격기 부대들이 마리아나 제도에 전개되어 일본 본토공습을 펼쳤을 때 기체 고장, 전투 손상으로 무시 못 할 숫자의 상당수의 승무원들이 태평양의 망망대해에 불시착했었다. 미군은 여러가지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불시착한 B-29 승무원들을 구조하기위한 육,해군 합동조직을 신설하고 구조 체계를 완성시켜 불시착한 승무원의 과반수를 구조하는 데 성공했다. 불시착한 승무원은 근처에 있는 해군 수상함, 잠수함, 육군 항공대의 정찰기, 구조용으로 개조된 주력 전투 항공기들과 어렵지 않게 접촉할 수 있었다.
그보다 시기적으로 더 전인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 때도 마크 미처 제독이 아이스크림을 걸고 바다에 불시착 혹은 격추당해 물에 빠진 생존 조종사 구출을 독려했던 적도 있다. 물론 미군도 완벽했던 건 아니었고 온갖 병크로 점철되어 대형 참사로 일을 키운 것도 모자라 책임을 억울한 사람에 떠 넘기고 덮어버리는 흑역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본군의 수많은 병신짓 퍼레이드에 비하면 미군의 삽질은 우스운 수준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인명에 대한 인식이 전쟁의 승패로 나타났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유능한 인재가 전후까지 살아남았더라면 이후 재건될 때에도 그들의 노하우를 그대로 이어나갈 수 있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그야말로 국가를 운용하는 데 있어 필요한 최소한의 상식조차도 없었다는 것이다.
카미카제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은 CV-17 USS 벙커힐. 카미카제의 정말 몇 안 되는 성공 사례이다. 하지만 후술하는 것처럼 이는 매우 예외적인 경우였으며 그나마 효율성 자체도 더욱 떨어지는 결과였다. 그리고 저래도 거대한 구멍 하나만 생기고 격침도 안 됐다. 참고로 에식스급 항공모함 중 카미카제 공격을 가장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진 항공모함이 CV-11 인트레피드인데 이 배는 기념함으로 남아있다.
카미카제 이야기가 나올 때는, 보통 형언할 수 없는 비인간성에 중점을 둔다. 하지만 카미카제도 일본군이 전술로 사용한 만큼 전술로서의 의미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 해군의 공간전사에서도 일단 엄연한 전술로서 인정하고 그 가치를 다짜고짜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점도 참조하자. 물론 그들이 겪은 정신적 충격이 가시고 나서 느낀 인간적인 경멸을 빼놓지는 않는다.
1942년 과달카날 전투 이전까지의 일본군 조종사의 숙련도는 대단히 높았다. 미 해군 함재기들의 공격을 뚫고 미칠 듯이 솟구쳐 올라오는 대공포의 사격과 미 해군 함정들의 현란한 회피기동 속에서도 30~40% 명중률이라는 놀라운 성과를 거둔다. 물론 미군 함재기의 조종사들도 만만찮은 솜씨를 보였으니 대등한 전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1942~1943년을 거쳐 솔로몬 제도 상공에서의 처절한 소모전과 1944년 6월의 필리핀 해전을 거치며 숙련된 일본 조종사들은 말 그대로 죽어나갔다. 반면 미군은 300,000명의 조종사들을 본토에서 양성하고 있었다. 이 숫자는 14,000명 수준의 사단 20개 이상을 구성할 수 있는 수다. 1944년도부터 연합군은 이미 보유한 조종사만으로도 몇 년간은 문제 없다는 판단으로 비행학교 수를 줄이고 훈련 시간을 늘려서 베테랑 조종사 양성을 도모하고 있었으며 수십 회의 전투에서 살아남은 베테랑들은 무조건 일선에서 물러나 후배들에게 자신의 생생한 노하우를 하루 종일 훈련시키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중간 탈락율은 비슷했고 1944년부터 미 해군의 신규 조종사들은 선배들보다 더욱 치열한 경쟁을 뚫고 조종사가 되었으며 최종 기량도 좋았다. 물론 신형 전투기의 개발/생산에도 적극적이었고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과 같은 일방적인 학살은 일본 군부의 카미카제 전략에 대비되는 당연한 결과물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