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OP ▷ 보도·연재(報道·連載) ▷ 기획·연재(企劃·連載) ▷ 기사(記事)]
〈히어로즈(HEROES)역경(逆境)을 승리로 넘은 영웅들〉
제49회 왕가리 마타이
2025년 2월 9일
〈마타이 박사〉
‘미래’는 ‘지금’에 있는 것입니다.
장래, 실현하고 싶은 무언가가 있다면 지금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달은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 선생님과 ‘아프리카의 환경의 어머니’ 왕가리 마타이(Wangari Muta Maathai, 1940 ~2011) 박사가 만남을 맺은 지 20주년에 해당한다.(2005년 2월 18일)
마타이 박사는 지금까지 아프리카에 5000만 그루 이상의 나무심기를 추진한 그린벨트 운동의 창립자. 소카대학교(創價大學校) 팬·아프리칸우호회 벗들이 환영하고 청년학술자 대표들이 동석(同席)한 회견에서 이케다(池田) 선생님이 청년에 대한 메시지를 요청하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미래(未來)는 먼 앞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는 ‘지금’에 있습니다. 장래(將來), 실현(實現)하고 싶은 무언가가 있다면 지금 그를 위해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굴하지(꺾이지) 않는’ 인생에 뒷받침된 확신(確信) 넘치는 말은 박사의 숭고(崇高)한 신념(信念) 그 자체였다.
박사는 1940년 4월, 케냐 중부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당시, 국내에서는 여성에게 교육은 필요 없다고 생각되었지만, 가업을 도우면서 항상 학업이 우수해 고등학교를 성적 톱으로 졸업. 주위의 추천(推薦)으로 장학금을 받아 미국의 대학에 유학했다. 생물학연구를 통해 케냐의 농산업에 공헌하고 싶다는 바람(願)으로 석사과정(碩士課程)을 수료. 귀국 후에는 국립 나이로비대학교에서 박사 학위(學位)를 취득해 여성 최초로 교수직에 올랐다(취임했다).
환경문제에 의식(意識)이 향한 것은 우연(偶然)이었다고 한다. 1970년대, 연구 활동으로 농촌을 방문한 박사는 조국의 자연 격변(激變)에 악연(愕然: 깜짝 놀라다)했다. 나무들이 벌채(伐採)되어 농가의 밭(畑)은 수출용(輸出用) 작물을 기르기 위한 경작지(耕作地)로 변해 있었다.
토양(土壤)의 침식(浸蝕), 식량(食糧)이나 물 부족(不足), 영양실조(營養失調), 사막화(砂漠化)의 진행……. 삼림파괴(森林破壞)가 가져온 문제는 심각했다. 고향에서는 신목(神木)으로 소중히 해온 무화과나무가 잘려 쓰러져가고 있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식목(植木: 나무 심기)’이었다. 나무를 심으면 장작(薪, 땔감)이나 가축(家畜)의 사료(飼料)를 얻을 수 있다. 길게 내린 뿌리로 흙의 유출(流出)을 막을 수 있다. 과실(果實)이 열리는 나무라면 식량이 된다, 라고.
그리고 1977년 6월 5일 ‘세계 환경의 날’에 해당하는 이날, 박사는 그린벨트 운동의 시초가 되는 최초의 7그루의 묘목(苗木)을 수도 나이로비 교외(郊外)의 공원에 심었다. 이후 전국 캠페인으로 운동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참여를 원하는 농장이나 학교, 교회(敎會)가 늘어났다.
운동의 중심을 맡은 이는 농촌 여성들이었다. 모두, 일상생활(日常生活)에 쫓겨 전문지식(專門知識)을 배울 여유(餘裕)는 없었지만, 박사는 현지의 전통적(傳統的)인 기술(技術)이나 지혜(智慧)를 살려 식수(植樹)를 실시하도록 제안. 그녀들이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작업하는 모습을 보고 비웃는 엘리트층도 있었지만 박사는 전혀 개의(介意)치 않았다.
당시를 돌아보며 박사는 말했다.
“나는 가만히 앉아서 ‘어떻게 할까’ 등이라는 생각에 잠기지는 않았습니다.”
“문제를 이해(理解)하는 것과 그 문제에 대해 뭔가의 행동(行動)을 일으키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마타이 박사〉
무언가를 바꾸고 싶다면, 자기 자신부터.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훌륭한 체험이기 때문에, 즐겁게 나아가지 않으면!
‘그린벨트 운동’ 중 마타이 박사가 중요시한 것은 ‘주체성(主體性)’이었다.
운동에서는 참가자들과 지역의 문제점을 논의하는 자리를 종종 가졌다. 박사가 문제의 원인을 묻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부(政府)의 책임(責任)’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박사는 웃는 얼굴로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모든 것을 정부(政府) 탓으로 돌려도 아무런 해결(解決)도 안 되지 않을까요?”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없는지, 작은 일이라도 함께 생각해 봅시다.”
이윽고 운동은 해외에서도 주목을 받게. 박사는 마더 테레사(Mother Teresa, 1910~1997)와 함께 영국에서 ‘Woman of the World상(賞)’을 수상하는 등 세계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한편, 케냐의 독재정권(獨裁政權)은 일관되게 엄한 비판의 눈을 돌렸다. 운동이 국민의 의식변혁(意識變革)을 촉구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1989년, 급속한 도시화가 진행되는 나이로비에 초고층 빌딩을 세우는 계획(計劃)이 발각(發覺). 건설 예정지는 시민들이 휴식을 취하는 녹지공원이었다. 계획에는 막대(莫大)한 건설비가 들고 자연뿐만 아니라 역사적 건축물의 파괴(破壞)가 수반(隨伴)되는 등 과제(課題)가 산적(山積)해 있었다.
그것을 알게 된 박사는 정부에 중지(中止)를 요청. 그녀의 언행(言行)은 국회에서 문제시(問題視)되어 의원들은 “국민에게 정부에 대한 반란(反亂)을 일으키라고 호소하는 것이다.”라는 등 비난중상(非難中傷)의 집중포화(集中砲火)를 퍼부었다.
그래도 박사는 굴(屈)하지 않았다. 후년, 거듭되는 어려움(困難)에도 지지 않았던 이유를 묻자 이렇게 말했다. “겁만 먹지(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비록 승산(勝算)이 없어 보일지라도. 한 걸음 한 걸음 목적지(目的地)를 향해 전진(前進)할 수 있습니다.”라고.
한 사람의 용기는 마음 있는 사람들을 분기(奮起)시켰다. 그것은 이윽고 국제사회도 움직였고, 마침내 정부는 빌딩의 건설 계획을 중지했다.
이후에도 시련은 계속되었다. 정부의 압력(壓力)은 더욱 강해져 박사는 ‘악질적(惡質的)인 유포(流布), 선동죄(煽動罪), 반역죄(反逆罪)’라는 부당(不當)한 혐의(嫌疑)로 체포(逮捕)되고 만다. 열악(劣惡)한 독거방(獨居房)에 들어갔다가 곧바로 보석(保釋)으로 풀려났지만 재체포(再逮捕)의 가능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궁지(窮地)를 구한 것은 해외의 동지(同志)였다. 미국의 상원의원(上院議員)들은 정부에 박사의 죄상(罪狀) 입증(立證)을 요구(要求)하며 “체포(逮捕)는 양국의 외교관계(外交關係)를 악화(惡化)시키는 것이 된다.”라고 주장. 후일, 기소(起訴)는 취하(取下)되었다.
이혼(離婚), 실업(失業), 동료(同僚)의 배신(背信) 등 역경(逆境)도 덮쳤지만 꺾여 주저앉지(굴하지) 않았다. “‘실패(失敗)는 죄(罪)가 아닌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실패했을 때에도, 허리를 펴고 계속 전진(前進)하는 에너지와 의지(意志)를 가지는 것”이라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2002년에는 한 번 낙선(落選)했던 국회의원 선거에 재출마(再出馬). 득표율 98%로 당선됐다. 새로운 대통령이 탄생해 독재정치(獨裁政治)에 종지부(終止符)를 찍고, 박사는 환경·천연자원성의 부대신(副大臣: 부장관)에 취임한다.
그리고 2004년, 12월 ‘지속가능(持續可能)한 개발(開發), 민주주의(民主主義)와 평화(平和)에 대한 공헌(貢獻)’이 인정(認定)되어 아프리카 여성 최초로 노벨평화상이 수여되었다.
〈마타이 박사를 통해 말한 이케다 선생님〉
어떠한 벽이 가로막을지라도 용감한 청년의 앞길을 막을 수는 없다.
‘벽을 부순다’ - 이것이야말로 청년의 특권이다.
마타이 박사가 방일(訪日)해 도쿄의 이케다 선생님을 방문한 것은 노벨평화상 수상으로부터 두 달 후의 일이었다.
회견(會見)에서 박사는 선생님에게 솔직(率直)한 심정(心情)을 토로(吐露)했다.
“여러분이 불교(佛敎)의 가르침에 입각한 깊은 가치관(價値觀)을 갖고 있다는 것에 감명(感銘)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이러한 가치관이 사회(社會)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사상(思想)은 ‘생명(生命)을 소중(所重)히 하는’ 사상입니다. ‘자연(自然)을 소중히 하는’ 사상입니다. ‘인간의 생명과 사회를 소중히 하는’ 사상입니다.”
“이케다 회장님께서는 생애(生涯)에 걸쳐 소중한 가치관을 수백만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넓히고 계십니다. 이 중요성(重要性)을 이해(理解)하는 분들과 함께, 저는 이케다 회장님께 진심(眞心)으로 최대(最大)의 감사(感謝)를 전하고 싶습니다. 이케다 회장님 자신이 ‘인류(人類)에 대한 훌륭한 선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더욱이 “젊은 사람들에게는 훌륭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청년에 대한 기대(期待)를 말하면서, 이렇게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무언가를 바꾸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우선 ‘자기 자신부터’ 바꿔야 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선두(先頭)에 서서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살아있는 것 자체(自體)가 훌륭한 체험(體驗)’이기 때문에, 즐겁게 나아가지 않으면! - 이렇게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진심으로 찬동(贊同)하며 “불법(佛法)의 진수(眞髓)도 또한 ‘사는 것 그 자체가 즐겁다’라는 자기 자신을 만드는 점(點)에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바꾼다. - 그것이 곧 인간혁명(人間革命)의 철학(哲學)입니다.”라고 응했다.
그 후에도 교류는 계속되어 다음 2006년 2월, 다시 일본을 방문한 박사는 소카대학교에서 강연. 케냐에 있는 ‘그린벨트 운동’의 사무실에 창가교육동창(創價敎育同窓)의 벗을 초대하기도 했다.
박사가 71년의 존귀한 인생의 막을 내린 것은 2011년 9월이었다. 선생님의 제안으로 박사의 이름을 딴 무화과나무가 식수된 미국소카대학교에는 그 해, 새로운 교육동(敎育棟)이 탄생. 후에 ‘마타이동’이라고 명명(命名)되었다.
비보(悲報)의 다음달, 선생님은 위대(偉大)한 발자취(足跡)를 기리며 수필(隨筆)에 엮었다.
“싸우는 청춘(靑春)은 명랑(明朗)하다.
어떠한 벽(壁)이 가로막을지라도 용감한 청년의 앞길을 막을 수는 없다. ‘벽을 부순다’ - 이것이야말로 청년(靑年)의 특권(特權)이다.
‘할 수 없는 일을 걱정하기보다는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지난달 25일, 전 세계가 안타까워하는 속에 서거(逝去)한 케냐의 왕가리 마타이 박사가 자신을 고무(鼓舞)시킨 말이다. (중략)
괴로워하지 않고, 고민하지 않고 어떻게 위업(偉業)을 성취(成就)할 수 있겠는가.
박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 발밑에서부터 한 걸음 한 걸음 착실(着實)히 운동(運動)을 진행시켜 갔다. 그 꾸준한 축적(蓄積)에 의해 수많은 벽을 돌파(突破)하고 새로운 길을 활짝 열어간 것이다.”
〈2011년 10월 8일자 본지(本紙) ‘수필(隨筆) 우리의 승리(勝利)의 대도(大道)’〉
박사 일행의 운동 슬로건은 ‘하람베(harambee)’. 스와힐리어(Swahili語)로 ‘모두의 힘을 모으자’라는 뜻이다.
‘홀로 서는 도전(挑戰)’과 ‘단결(團結)’ - 박사의 인생은 선생님이 구축한 학회(學會)의 영원(永遠)한 혼(魂)과 서로 울리고〈공명(共鳴)하고〉 있다.
[인용·참고(引用·參考)]
왕가리 마타이(Wangari Muta Maathai) 저(著) 『UNBOWED 꺾이지 않는 왕가리 마타이 자전(自傳)』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 번역(譯) 〈쇼가쿠칸(小学館)〉
왕가리 마타이 저 『못타이나이(고맙다)로 지구(地球)는 녹색(綠)이 된다』 후쿠오카 신이치(福岡伸一) 번역 〈키라쿠샤(木楽舎)〉
지쿠마쇼보(筑摩書房) 편집부(編輯部) 저 『왕가리 마타이 - ‘MOTTAINAI’로 지구(地球)를 구하자』 〈지쿠마쇼보(筑摩書房)〉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 저 『미래를 향한 선택(未来への選択)』 〈지우시오슈판샤(潮出版社)〉
이케다 다이사쿠 저 『미래대화 - 그대와 걷는 승리의 길(未来対話――君と歩む勝利の道)』 〈세이쿄신문사(聖敎新聞社)〉 외
● 의견·감상을 보내 주십시오.
【메일】 news-kikaku@seikyo-np.jp
【팩스】 03-5360-9613
※ 연재 「히어로즈」의 지난 기사(記事)는 아래 링크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유료회원 한정)
https://www.seikyoonline.com/rensaimatome/heroes.html
[기사 원문] https://www.seikyoonline.com/article/BDC1EB729E2A527270ED5ECF080C00F8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매일매일 의노고에 진심으로 깊이깊이 감사드립니다 노고많으셨습니다 ☘️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