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183
7월11일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연중 제15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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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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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Xdx6PCGrNRU (이용권 안드레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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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파괴를 거슬러 건설을!>
하느님께서는 곤경에 처한 당신의 백성들을 결코 나 몰라라 하지 않으시고 다양한 방법으로 위로와 격려, 도움과 사랑을 베푸시는데, 그중에 한 방법이 성인성녀들의 파견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베네딕토 아빠스 성인도 당시 시대를 위한 하느님의 선물이자 은총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몸담고 살아가던 시대의 고통과 슬픔, 문제점에 대해서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함께 가슴 아파하며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진지하게 고민하던 끝에 자신의 길을 찾게 되었습니다.
베네딕토 성인이 살아가던 당시(AD 480-547) 유럽 세계는 민족 대이동의 시기였습니다. 잘 나가던 로마 제국은 힘을 잃고 쇠락해졌습니다. 이민족들은 끊임없이 이동해가면서 약탈을 자행했습니다. 농부들이 아무리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헛수고였습니다. 침략과 전쟁, 파괴와 살육이 계속되던 불안정한 시대였습니다.
이런 전쟁과 파괴의 시대 앞에 베네딕토 성인은 ‘정주 수도회’ 건설로 응답합니다. 그는 ‘파괴를 거슬러 건설’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든든한 반석 위에 하느님의 집을 건설하는 건축가로서의 소명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운 좋게도 베네딕토회 소속 이태리 신학생을 알게 되어 얼마간 베네딕토 성인께서 머무셨던 수비아코 수도원, 몬테카시노 수도원에 머문 적이 있습니다.
잘 나가던 시절 수백명의 수도자들이 생활하던 대 수도원이었습니다. 지금은 관광명소로 널리 알려졌고, 몇 안 되는 수도자들께서 힘겹게 이끌어 가시는 모습이 역력해서 안타까웠습니다.
그러나 수도원 이곳저곳을 찬찬히 둘러보면서 감탄사를 연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그 높은 곳에, 그렇게 견고하고 엄청난 대수도원을 건설할 수 있었는지. 아마도 외부의 침략과 약탈로부터 동료 수도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높디높은 산꼭대기에 수도원을 건설한 것이겠지요.
그러나 베네딕토 성인께서는 꼭 외형적 수도원 건설만을 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른 무엇에 앞서 전쟁과 파괴에 맞서 평화의 공동체를 건설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폐허가 된 건물을 일으켜 세우는데도 관심이 컸었지만 상처입고 피폐해진 사람을 건설(일으켜 세우는데)하는데 더 큰 관심이 있었습니다.
베네딕토 성인은 한 인간이 이 땅 위에 똑바로 서는 것, 건강하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 이웃들과 조화를 이루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을 통해 사랑의 수도공동체를 건설하고자 한평생 노력했습니다.
베네딕토 성인은 자신에게 철저한 사람이다 보니 동료 수도자들에게도 똑같은 잣대를 적용했습니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커지게 마련이지요. 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이웃들의 약점에 고정되었고 점차 마음의 평정을 잃어갔습니다.
지나치게 깐깐한 장상 베네딕토로 인해 수하 수도자들의 원성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결국 서로 심각한 상처를 입히고 넘어서는 안 될 선까지 넘게 되었습니다.
이런 자신의 허약함을 잘 알게 된 베네딕토의 실망은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동료들의 완고함과 무기력함, 나태함 앞에 크게 실망했지만, 거기서 끝내지 않았습니다. 크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작업을 시작합니다. 자신의 영혼 깊숙한 곳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그 누구도 침해하지 못할 고요한 방 하나를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곳은 더 이상 흔들리지도 않는 장소, 더이상 파괴되지도 않는 장소였습니다. 거기만 들어가면 하느님과 나 둘만 마주 보는 아름다운 장소를 만든 것입니다.
베네딕토는 드디어 건축물 중에 가장 아름답고 든든한 건축물을 건설하게 되었습니다. 자신만의 개인용 내면의 성체, 내면의 감실, 내면의 지성소를 건설한 것입니다.
그 결과 베네딕토는 이웃들의 결점과 실수, 죄와 문제들 앞에서도 더 이상 좌지우지하지 않게 되었고, 그제야 흔들리는 사람들을 위한 진정한 영적 스승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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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불의에 찬 축제모임”>
신부님이 본당에서 하는 성경공부 시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음 주에는 아주 중요한 교훈에 대해 배우겠습니다. 그러니 예습하는 차원에서 마르코복음 17장을 모두 읽어 오세요.”
그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다음 주가 되자 교사는 성경공부 참석자들에게 “지난주에 마르코복음 17장을 읽으신 분 손 한 번 들어 보시겠어요?”라고 했습니다. 그 방의 거의 모든 사람이 손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신부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참 재미있군요. 마르코복음은 16장까지밖에 없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최소한 오늘 적절한 교훈을 배우게 되겠군요. 오늘은 예수님이 거짓말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시는지 배우겠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주님께서 이사야 예언자를 시켜 말씀하시는 첫 번째 경고는 위선적 예배입니다.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에는 안중에도 없는 마음으로 제물을 바치기에 그런 거짓된 예배에 물렸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뜻이란 선행을 하는 것입니다.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피고, 고아의 권리를 찾아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는 것입니다.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라는 당신의 뜻은 실천하지도 않으면서 예배에 나와 위선적인 제물을 바치는 것을 오늘 독서는 “불의에 찬 축제모임”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손에는 이웃에게 해를 끼쳐 피가 가득한데 예배만 드리면 괜찮을 것이라는 헛된 생각을 먼저 버리라고 명하시는 것입니다.
혹 우리의 예배도 불의에 찬 축제모임이 되어가고 있지는 않은가요? 주님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당신 뜻을 이미 알려주셨는데도 미워하는 마음으로 성당에 앉아 미사를 드리고 있지는 않나요?
이웃이 돈 때문에 힘들어 하는데도 나부터 살고 보자는 마음으로 도와주지도 않으면서 미사를 드리고 있지는 않나요?
주님은 그런 예배에서 지금도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 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라고 하고 계십니다.
미사를 드리러 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합당한 옷차림입니다. 미사 이전의 준비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죄 있는 상태로 미사를 본다면 주님을 참으로 지치게 만드는 것입니다.
미사 나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죄 없는 상태를 유지하는 노력이고, 그 노력이 미사 때 드리는 참된 예물입니다.
예전 중동 건설 붐이 일었을 때 남편이 몇 년 동안 고생하다가 귀국하는 날, 어떤 부인들은 남편을 기쁘게 맞으러 가고 어떤 부인들은 자살하고 그랬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그런 부인들의 돈을 갈취하는 제비들이 있어서 남편이 번 돈을 다 날리는 부인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만나는 시간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을 위해 준비하는 노력이 더 중요한 것처럼 우리 미사를 위해서도 위선적인 예배, 불의에 찬 축제모임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 방법이란 미사 끝나고 성당 문을 나갈 때부터 이미 다음 미사 때 예수님을 기쁘게 만나기 위해 죄를 멀리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노력에 온 힘을 쏟으며 살아가기를 결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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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0,34-11,1 : 너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려 할 때, 우리가 아무런 어려움 없이 주님의 뜻을,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34절)고 하신다. 주님께서는 말씀이라는 칼을 통하여 하느님을 따르는 일치 곧 참평화를 이루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시다.
우리가 말씀의 힘을 통해 세례의 물로 새롭게 될 때에, 우리는 죄와 죄의 근원으로부터 갈라서게 된다. 그리고 죄 많고 불성실했던 과거의 나를 벗고 몸과 마음이 성령으로 새로워지면 우리는 죄스런 옛 삶의 습관들을 혐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가족들 간의 분열이란 바로 내 마음 안에 일어나는 갈등이라 하겠다. 선포된 복음은 평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분열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 세상이 하느님께 대한 신앙 때문에 서로 갈라져 있다. 어떤 집안에는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이 같이 살고 있다. 여기에서 갈등은 악한 평화를 깨뜨리기 위한 필연적인 것이다. 예수님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37절) 이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부모님을 자식들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부모나 자식들은 그분 안에서 함께 할 것이라는 뜻이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38절) 그리스도께 속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죄스런 버릇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이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39절)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옛 악습을 끊어버림으로써 새로운 생명에로 태어나게 된다. 즉 완전히 변화된 내가 된다는 것이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40절)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41절) 예언자를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 안에 계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의인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이 같은 상이 주어진다. 그는 바로 그들 안에 계시며 그들을 파견하신 그들을 맞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는 예언자와 의인에 합당한 영예를 받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가장 작은 행위라고 하더라도, 즉 그들 신앙의 겉모습만 보고서 그에 마땅한 친절을 베풀었다 해도 희망을 품은데 대한 상을 빼앗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시원한 물 한 잔”(42절)의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주님께서는 사랑을 베푼 사람의 믿음에 상을 주시는 것이지, 사랑을 받은 사람의 위선에 상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원한 물 한 잔은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줄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이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지시하신 뒤, 그들이 당신께서 명하신 것을 실천할 기회를 주시고자 그들을 떠나셨다. 우리는 오늘의 복음을 잘 묵상하고 주님께서 명하신 것을 실천하는 삶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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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평화, 칼>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
이 말씀은 다음 말씀과 합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세상이 주는 평화는 너무 다릅니다. 너무 다르다는 그 차이가 ‘참 평화’를 방해하는 칼이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또 그 모든 계명과 조문과 함께 율법을 폐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당신 안에서 두 인간을 하나의 새 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멀리 있던 여러분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시고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에페 2,14-17) 또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천사들이 이렇게 찬미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예수님은 ‘참 평화’의 원천이신 분이고, 그 ‘참 평화’를 우리에게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실천함으로써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서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시는가? 이 말씀은 ‘반어법’을 사용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평화를 주시는데, 인간들 가운데에는 그 평화를 거부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평화를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거부하는 자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고 갈등이 생깁니다. 그 분열과 갈등이 바로 ‘칼’입니다. 세속의 안 믿는 자들은 예수님이 그 분열과 갈등의 원인이라고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그 사람들의 주장을 겨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진짜 뜻은, “나는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왔다. 그러나 너희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선택했다.”입니다. <예수님은 칼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칼을 없애시는 분입니다.>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0-21ㄱ) 이 기도는 ‘믿는 이들’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당신을 믿어서 모두 하나가 되고, 그래서 모두가 함께 평화를 누리게 되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심정을 나타낸 기도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는 사람들과 안 믿는 자들 사이에 생기는 분열과 갈등의 책임은 예수님이 아니라 안 믿는 자들 쪽에 있습니다. (평화를 거부하고 칼을 선택하는 자들의 책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마태 10,35-36)
이 말씀도 ‘반어법’을 사용하신 말씀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예고할 때, 가브리엘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한 말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루카 1,17) 여기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라는 말은, 가족의 화해와 일치를 뜻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말라키서의 예언을 인용한 말입니다.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말라 3,24ㄱ)> 세례자 요한의 주 임무는, 사람들을 회개시켜서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게 하는 것입니다. 회개에는 가족의 화해와 일치도 포함됩니다. 예수님은 그 화해와 일치를 ‘완성’시키려고 오신 분입니다. (화해와 일치가 완성된 가정이 바로 ‘성가정’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식구들을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의 평화를 거부하고 ‘칼’을 선택하는 사람들을 꾸짖기 위해서입니다. 참된 신앙인은 가족의 분열을 바라지 않고, 자신의 가정이 ‘성가정’이 되기를 간절하게 희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자들은 자기 식구가 신앙인이 되는 것도 싫어하고, 신앙인이 된 식구를 미워합니다. 그러면서 가족의 분열은 예수 때문이라고 비난합니다. (제3자의 눈으로 본다면, 서로 ‘네 탓’이라고 하면서 싸우는 것으로 보일 것입니다.) 이 문제는 사실 ‘논쟁’으로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는 “말 없는 처신으로 감화를 받게 하십시오.”라고 권고합니다.(1베드 3,1) 가족은 끝까지 사랑으로 함께 가야 할 동반자입니다. 적도 아니고 원수도 아닙니다. <37절의 “가족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라는 말씀은, 가족을 버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산가족이 되기를 바라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현세적이고 인간적인 애착심 때문에 ‘구원의 길’에서 탈락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사랑’은 ‘선’이고, 또 ‘선’을 지향합니다. 만일에 사랑한다는 이유로 ‘선’을 버리고 ‘악’을 향해서 간다면, 그것은 가족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사랑한다면, 식구들이 ‘악’을 향해서 가는 것을 막고, 함께 ‘선’을 향해서 나아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말 없는 처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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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지구의 역사는 45억 년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지구의 지층에서 시간을 측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구는 퇴적을 통해서 지층이 아래로 쌓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각 활동으로 융기하는 지층이 있습니다. 지금은 높은 산이지만 그곳이 예전에는 바다였던 곳도 있습니다. 황량하고 메마른 사막도 예전에는 푸른 숲이었던 곳도 있습니다. 이렇게 지구는 지층과 화석이라는 흔적을 통해서 지구의 역사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 몸에도 살아오면서 여기저기 삶의 흔적이 있습니다. 저는 인식하지 못했는데 어렸을 때 결핵이 제 몸에 머물다 갔다고 합니다. 비자 문제로 건강검진을 받으면 그 지나간 흔적 때문에 가슴 사진을 찍곤 했습니다. 눈썹에는 연탄재 싸움을 하다 맞아 수술한 흔적이 있습니다. 무릎에는 보온병을 열다가 물이 흘러 화상 입은 흔적이 있습니다. 오른쪽 발목에는 골절로 수술한 흔적이 있습니다. 이런 흔적들을 담고서 여기까지 와 준 제 몸이 고맙고, 여기까지 이끌어주신 하느님의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에도 ‘영성’의 흔적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 시작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쁘신 중에도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기도’할 것을 늘 강조하셨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복음을 전하기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기도하고 찬양하던 교회는 성령의 이끄심으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교회에는 박해의 광풍이 몰아쳤습니다. 많은 사람이 순교하였습니다. 박해의 광풍이 잦아들면서 교회는 제도와 성전을 세우면서 외적인 모습이 발전했습니다. 사막으로, 광야로 들어간 은수자들은 제도와 성전으로 채울 수 없는 영성의 기둥을 세웠습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베네딕토 성인은 수도원의 기틀을 세웠습니다. ‘일하며 기도하라.’는 베네딕토 성인의 가르침은 기도하며 복음을 전하였던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한 것입니다. 권력에 취해서 교회의 권위가 무너져갈 때 프란치스코 성인은 영성으로 무너져가는 교회를 다시 일으켰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가난과 나눔의 영성은 예수님께서 구유에서 태어나셨고, 몸과 피를 내어 주셨던 모범을 따라한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바람이 불어올 때 이냐시오 성인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을 택할 수 있고,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 있고, 장수보다 단명을 택할 수 있다.’는 영성으로 교회를 지켰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한 것입니다.
누군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지식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채우면서 얻어지는 것이고, 지혜는 나누고 비움으로써 얻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채우고, 쌓으면서 얻는 것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끊임없이 비우고, 나누는 삶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럴 때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밀알 하나로 남지만 떨어져 썩으면 수많은 밀알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매일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이 참된 제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세례를 받은 우리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쟁기를 들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밭을 제대로 일굴 수 없듯이,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자꾸 다른 곳을 바라보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세상과 교회에 쌓아야 할 ‘흔적’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우는 것입니다.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들 보살피는 것입니다.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악행을 버리고 선행을 쌓는 사람들은 하늘나라에서 받을 상을 절대 잃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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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인호 루카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의 삶과 그들이 받게 될 보상에 대하여 소개합니다.
제자들이 따라야 할 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오신 분’이십니다. 그 ‘칼’은 예수님 말고 ‘다른 것을 사랑하는 삶’을 자르고, ‘자기 십자가를 피하는 삶’을 베어 내며,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삶’을 잘라 내라고 주신 것입니다. 제자의 삶은 예수님께 충실한 데서 비롯하는 단호함이라는 ‘칼’을 필요로 합니다. 어설픈 제자에게 들린 ‘칼’이 떠오릅니다. 자기 실속을 위협하는 복음의 요구를 잘라 내고, 주님의 일을 베어 내며, 복음의 가치들을 쳐 내는 칼, 자신을 위하여 만든 ‘칼’입니다.
여러분의 손에 들린 ‘칼’은 누구의 칼인가요?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그 삶을 통해 얻게 되는 행복과 기쁨, 평화의 중심에 그분 대신 ‘나 자신’이 자리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정신이 번쩍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칼’을 청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성 베네딕토 아빠스를 기억합니다. 베네딕토 성인은 「규칙서」 마지막 부분에서 자신의 모든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 것이니, 그분께서는 우리를 다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베네딕토 성인이 보여 준 제자의 삶이 우리 안에서도 지속될 수 있도록 전구를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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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이진호 안토니오 신부님]
얼마 전에 불량만두 사건으로 온 나라가 소란한 적이 있었습니다. 불량 만두냐? 우량 만두냐? 하는 판단근거는 만두 속입니다. 속 재료가 우량하면 그 만두는 우량 만두이고, 속 재료가 불량하면 그 만두는 불량 만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비록 겉모양이 화려하고 그럴듯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만두는 소비자들로부터 버림받고, 마침내 법적인 처벌과 제재까지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한 인격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량 인격자냐? 불량 인격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속에 따라 결정됩니다. 속이 바르고 참되면 우량 인격자가 되는 것이고, 속이 거짓과 위선이면 불량 인격자가 되는 것입니다.
비록 외모나 외적 조건이 아무리 그럴듯하고 화려하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우량인격자가 되려면, 우량한 속을 가져야 합니다. 마음과 정신을 우량하게 가져야 합니다. 내면세계를 바르고 참되게 가져야 합니다. 마음과 정신이 불량하면 그 행위는 거짓이 되고 위선이 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허위가 되고 맙니다.
이사야는 말합니다. “두 손 모아 아무리 빌어 보아라. 빌고 또 빌어 보아라. 내가 보지도 듣지도 아니하리라.” 따라서 우리가 일체의 인간 행위를 하기 전에 먼저 마음을 바로 해야 합니다.
내면세계를 바로 해야 합니다. 정신이 없는 제물은 형식에 불과하고, 더는 의미가 없는 헛된 제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너나없이 외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이 모든 것의 판단 근거가 되고 있는 세상입니다. 신앙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하늘나라는 다릅니다. 신앙생활도 달라야 합니다. “나는 칼을 주러 왔다.” 하느님처럼 살고 싶으면 하느님과 같은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예언자처럼 살고 싶으면 예언자적 정신을 지녀야 합니다. 선인처럼 살고 싶으면 선한 생각을 지녀야 합니다. 생각을 바꾸고, 마음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야 행동도 바뀌고 삶도 바뀝니다.
불량 만두 후유증이 오래갑니다. 이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제는 “속”입니다. “소~~~ 옥!!” 속이 튼튼하면 몸은 저절로 튼튼해집니다.
“옳은 길을 걷는 이에게 하느님의 구원을 보여주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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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성균 예로니모 신부님]
성경에 담긴 말씀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인생의 진리를 알게 하고 삶의 방향을 일러 주는 보고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다 보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당혹스러움을 안겨 주는 것들을 만날 때가 많습니다. 성경이 작성되던 시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는 담겨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늘의 환경이 과거와 같지 않고 예전의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한 현실과 마주하고 있는 우리의 개별적인 고민을 구체적으로 적용하여 답을 얻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통과 문화의 차이는 생각의 차이를 빚어냅니다. 시대를 달리하면서도 여전히 존속하는 가치들도 있지만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가치 또한 있게 마련입니다.
그렇긴 해도 오늘의 복음은 가치를 달리하고 싶지 않은 사안에 대해서 재평가를 요구하고 있는 듯해서 당혹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주님께서도 인용하신 적이 있듯이 “부모를 떠나 남자와 여자가 한몸”이 되어 이루는 가정과 그 구성원인 가족 사이에 유지되어야 할 바람직한 덕목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화목한 가정’이라는 말로 간단히 표현합니다.
가족들 간에 서로를 돌보며 이해와 사랑을 잃지 않을 때, 우리는 그 목표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 시간에 가족을 이루고 사는 우리도 변함없이 바라는 바입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께서는 엇나가는 말씀을 하시는 듯 보입니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아마 우리 주변에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보게 된다면 우리는 그런 사람을 가정파괴범이라고 부를 겁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누군가 이렇게 요구한다면 그 사람은 인간관계에 장애가 있는 사람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만 사랑해야 한다는 미성숙한 사랑의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생명은 하느님께서부터 오는 것이며 사람이 임의로, 또 쉽사리 좌우해서는 안 된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요? 오늘의 말씀은 가족들 간에 사이가 좋지 않을 때나 종교로 인해 갈등이 있을 때, 또는 삶을 포기하고 싶을 때 내세울 수 있는 변명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말씀은 초창기에 복음선포의 길에 나선 제자들의 경험담을 배경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가족들의 몰이해가 안겨준 상처를 보듬고 복음을 전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더 알뜰히 보살펴야 할 가족들을 뒤로하고 못내 길을 나서야 했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목숨을 요구하는 이들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복음적인 삶을 유지해 낸 이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들 덕에 오늘 복음을 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가정을 떠나고 가족과 갈라서며 삶을 포기해야만 얻어지는 것이 복음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무의미함을 넘어서 경계해야할 위험한 주문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님처럼 구체적인 고난의 길을 따라간 이들의 희생적인 삶을 주님과 함께 기억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온 생애를 바쳐 증언하고 전해준 복음적 기쁨을 가족들 사이에 펼치는 일입니다. 사랑하라는 주님의 법을 가르치고 배우며 가족애를 넘어서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품고 퍼낼 줄 아는 인간이 되는 일입니다.
가정 안에서 각별한 마음으로 서로를 돌보십시오. 그리하여 세상의 흐름을 거스르는 새로운 모범이 되십시오. 가족을 넘어서는 사랑을 키우십시오.
그것이 오늘날 세상에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새로운 복음선포의 길입니다. 길거리에서 외치는 것보다 그 사랑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 더 힘찬 선교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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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평화대신 칼 : 무엇에 쓰시려는가?>
오늘 복음은 마태오복음 10장, 파견설교의 마지막 부분이다. 지금까지 예수께서 말씀하신 파견설교의 내용을 미루어 짐작할 수는 있었겠으나, 청천벽력 같은 말씀이 오늘 복음을 통하여 선포된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평화보다는 칼을 주러 오셨다고 하시며, 집안의 식구들이 각자에게 원수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어떻게 알아들어야 하는가. 예수께서는 칼을 내리쳐 온 가족을 풍비박산 내실 작정을 하신 모양인가.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의도가 과연 이런 것인가.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4,17)고 하시면서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께서 도래하는 하늘나라를 이런 내용과 묶으시려는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하늘나라를 결코 그런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진복선언을 포함한 산상설교(5-7장)의 가르침과 수많은 구마기적과 병자치유기적(8-9장)의 행적 등을 통하여 예수님은 “몸소 우리의 허약함을 맡아 주시고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신 분”(8,17) 이심을 확인하였고, 그분에게 이 땅의 죄까지 사하는 권한(9,8)이 있음을 보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은 다른 각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우선 칼의 의미를 살펴보자. 칼은 베고, 잘라 분리하는 일을 한다.
다음으로 예수께서 온 가족에게 칼을 내리쳐 아들과 아버지를, 딸과 어머니를, 며느리와 시어머니를 서로 맞서게 갈라 세우시려는 의도를 살펴야 한다. 물론 칼로 내리쳐 어느 한 편을 죽이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칼로 갈라진 아들과 아버지를 보자. 그 관계를 살펴보자는 것이다.
‘아들’이란 ‘아버지’ 없이 있을 수 없고, 아버지 역시 아들 없이 존재할 수 없다. 딸과 어머니, 며느리와 시어머니도 마찬가지며, 세상의 어느 존재도 다 같은 원리에 속한다. 누구든 자신이 무엇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것이 관계의 원칙이다. 따라서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곧 우리들의 인간관계를 재삼 숙고하라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만약에 아들이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찾지 아니하고 아버지와 분리된 상태에서 아들이라고 우긴다면, 그럴 수도 없겠거니와 그는 아버지에게 ‘원수’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고 마는 것이다.(34-36절)
내가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제자라면 제자로서의 나의 존재는 무엇과 더 관련이 있겠는가? 아버지와 어머니인가? 아니면 예수님인가?
물론 예수님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사람이 되어 그분의 복음을 전파하는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자기 식구들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하고, 세상보다는 하느님나라를 더 사랑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결국 십자가를 지시고 그 십자가에서 목숨을 바쳤으니, 제자들도 그분처럼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하며, 그 위에 자신을 매달 줄 알아야 할 것이다.
결국 예수님의 제자가 그 외에 다른 방법을 통하여 자기 목숨을 얻으려 한다면 오히려 잃을 것이고,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뜻에 자기 목숨을 맡겨 그 목숨을 잃는다면 오히려 얻게 되는 것이다.(37-39절)
예수님의 부활로 힘을 얻은 제자들이 강림한 성령과 더불어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 내리신 파견설교의 내용이 빈말이 아니라 현실로 다가왔다. 수많은 이들이 복음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목숨을 바쳤다.
이렇게 성장한 교회 안에는 어느덧 여러 가지 직무가 생기고 이 직무를 맡은 교역자가 생기게 된다. 사도들로부터 시작하여 주교, 사제, 부제, 신자들에 이르는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 전체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이 비록 죽을 각오를 하고 예수님을 따르며, 그분의 복음을 전하는 제자라고 하더라도 복음의 주인이신 예수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들이 비록 작고 보잘것없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실제로는 예수님의 대리자요 하느님의 교역자들이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우리이지만 서로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건네며 복음선포의 하루를 시작하자.(40-4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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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길을 걷는 이>
마태오 10,34-11,1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버림과 따름.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들이 받을 상)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다 지시하시고 나서, 유다인들의 여러 고을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려고 그곳에서 떠나가셨다.
<길을 걷는 이>
길을 걷는 이에게
길은 하나입니다
길 아닌 길들이
쉼 없이 끈질기게
유혹할지라도
깨끗한 눈길로
오롯한 마음으로
단단한 걸음으로
길을 걷는 이는
그 길만을 걷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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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칼을 주러 왔다>
칼은 좋은 것입니다.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좋은 것에 쓰지 않고 엉뚱하게 쓰이기도 합니다.
좋은 것이지만 잘못 쓰임을 받으면 좋지 않은 것이 되고 맙니다. 칼은 칼로 존재하는데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만들어진 목적에 따라 잘 사용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듭니다. 더군다나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고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고 하니 정말 귀가 막힐 일입니다.
어찌 구원자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나요? 사랑 자체이신 분이 이리 무서운 말씀을 하시나요?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이렇게 옵니다. 죄악을 거부하는 '결단의 칼'을 써야 합니다. 매 순간 선을 선택하는 결단의 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운명은 분명 다르게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주님께서는 구원을 원하시지만, 칼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한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칼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에페6,17)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4장 12절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 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 받아들여 참된 경외심과 두려움을 갖는 사람과 그릇된 욕망을 가진 사람을 갈라놓는다고 말씀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로 향할 것인가? 아니면 돌아설 것인가?
이에 대한 태도는 집안 식구가 다 각각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서로의 견해가 다르고 받아들이는 믿음의 정도가 다르므로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 해야 합니다. 갈라진 마음이나 어정쩡한 결단으로는 결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서로의 마음이 상하고 적대감을 느끼게 될 수도 있습니다.
실제 악이 기승을 부릴 때는 부모와 자식 간이나 형제 간, 부부 간처럼 가까운 사이여서 도저히 악이 끼어들 수 없을 것 같은 관계 곳곳에 끼어듭니다. 그렇지만 어려움에 타협하지 말고 말씀 안에 꿋꿋하게 서 있어야 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하나씩 버려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차지하면 다른 것들은 다시 돌려받게 됩니다. 사랑하면 마음이 쓰이고, 눈길이 한 번 더 가게 마련입니다. 그것이 진전되면 그 사랑하는 이는 존재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존재 이유가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과 인간적인 것이 끊임없이 대치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의 칼을 선택한다면 그 모든 것이 하느님 안에서 열매 맺게 되고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로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예수님께서 주시는 칼은 상대방을 위해 휘두르는 칼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향해 있는 칼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이 있다면 단호하게 잘라내야 하겠습니다. 세상은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을 큰 탈 없이 계속 누리는 것을 평화라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의 평화는 사랑 안에서 나온 공정과 정의가 함께하는 평화입니다. 참 평화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선한 양과 악한 양이 있습니다. 둘이 싸우면 어느 양이 이길까요? 힘이 센 양이 이깁니다. 그런데 힘센 양으로 만드는 것은 나에게 달려있습니다. 내가 어느 양에게 먹이를 제대로 주느냐에 따라 힘센 양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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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신학교 교수 신부가 신학교에 막 들어온 신학생들에게 강의할 때였습니다. 커다란 칠판을 가리키면서, “이 칠판이 하느님이라고 상상해보십시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느님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습니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잠시 뒤, 신부님께서는 칠판에 점 하나를 찍은 뒤에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느님을 이해하는 정도입니다.” 유한하고 부족한 존재인 우리가 과연 얼마나 하느님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칠판 위의 점만큼은 과연 이해하고 있을까요? 이 정도만 한 이해만 있어도 하느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갈 것이다.”(마태 17,20)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정도의 믿음도 없어서 불평불만의 연속과 하느님 뜻에서 멀어지는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다행스러운 것은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을 키워야 합니다. 그분 사랑을 이해할 수 있어야 지금을 잘 살 수 있습니다. 칠판 위의 점만큼이라도 하느님께 대한 이해를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을 내 삶의 첫 번째 자리에 놓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처음 주님의 말씀을 접하는 사람에게 충격적일 것입니다. 평화를 얻기 위해 성당에 왔는데,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라고 말씀하시니 말입니다.
뒤에 이어 오는 말씀도 충격적입니다. 부자간, 모녀간, 고부간에 갈라지면서 서로 원수가 된다니요. 이는 무조건 원수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우선순위에 두면서 갈라질 수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선 그 자체이십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선하심과 정반대의 악의 세력은 어떻게 하려고 할까요?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도록 온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 세력이 사랑하는 내 가족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래서 평화가 아닌 분열이 올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주님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분열될 수 있음을 말씀하시며 다음과 같이 당부하셨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38)
이사야 예언자도 이렇게 외칩니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이사 1,16) 주님께 합당한 자녀가 될 수 있는 믿음을 키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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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좋은 분, 성 베네딕도>
-슬기, 사랑, 섬김-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 그 둘레에,
그분의 천사가 진을 치고 구출해 주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시편34,8-9)
오늘은 유럽의 수호자 사부 성 베네딕도 아빠스 대축일이자 제 사제서품 33주년이 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참 좋은 분을 만나면 마음도 환해지고 기분이 좋습니다. 얼마전 전임 아빠스님을 뵙고 왔을 때도 그랬고 어제 수도원을 방문했던 분들과의 만남도 그랬고 오늘 대축일을 지내는 성 베네딕도와의 만남도 그렇습니다. 긴 여운의 향기로 남아있는 느낌입니다.
“우리 곁에 왔던 성자, 사람에게 행복을 주는 김수환 추기경 이야기”
책을 좋은 지인에게 선물 받았습니다. 바로 오늘 대축일을 지내는 성 베네딕도에게도 딱 드러맞는 말마디입니다. 우리 곁에 왔던 성자, 여전히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성 베네딕도입니다. 아니 주님과 함께 여전히 우리 곁에 살고 있으며 여전히 행복을 주고 있는 듯한 성인입니다. 성인을 기리는 입당송입니다.
“베네딕도는 그 이름 뜻대로 복을 받아 거룩하게 살았네. 그는 가족과 유산을 버리고, 오로지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려고 거룩한 수도생활을 추구하였네.”
어제 저녁기도시 아름다운 성경소구 말씀도 그대로 성인의 풍모에 대한 묘사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분은 위대한 증거자로다. 그는 구름들 사이에 있는 아침 별과 같고 보름의 둥근 달과 같도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전 위에 비치는 태양과 같고 영광의 구름에 걸린 무지개와 같도다.”(집회50,5-7)
바로 이런 베네딕도 성인입니다. 위기와 혼란에 처했던 5-6세기 유럽을 구한,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참 좋은 선물, 유럽의 수호자 성 베네딕도입니다. 서방 수도생활의 아버지인 성인의 후예인 베네딕도회 수도승들이 이후 1500년에 걸쳐 가톨릭 교회와 세상에 준 업적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무궁무진합니다.
방금 부른 베네딕도 성인의 생애를 요약한 듯한 복음전 부속가 노래는 얼마나 아름답고 깊고 풍부하고 흥겨웠는지요! 길지만 내용이 은혜로워 그대로 인용합니다. 정말 성인을 자랑하고 싶은 내용은 끝이 없습니다. 사람마다 한권의 책이라면 성인 삶의 책은 참 ‘내용contents’도 ‘이야기story’도 깊고 풍부해 샘솟는 우물같습니다.
“새빛 선물 가져오는 위대하온 지도자를 기념하는 대축일.
성총받은 그 영혼이 노래하는 찬미가는 마음속에 울리네.
동쪽길로 올라가는 아름다운 성조용모 감탄 울려 퍼지네.
태양같은 생명으로 많은 후손 얻은 그는 아브라함과 같도다.
작은 굴에 있는 그를 까마귀의 복사로써 엘리야로 알리네.
강물에서 도끼건진 성 분도를 엘리세오 예언자고 알도다.
무죄덕행 요셉같고 장래일도 알아내니 야곱처럼 알도다.
그의 생각 지극하여 예수님의 영복속에 우리 인도하소서.”
오늘 자주 불러 보려 합니다. 성인 축일은 기념, 기억하라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 성인이 되라 불림 받았으니 성인이 될 각오를 새로이 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걸출한 성인이 없는 요즘 세상이라 탄식할 것이 아니라 여러분 한분한분이 성인이 될 각오를 새로이 하시기 바랍니다.
성인이 되려는 청정욕은 얼마든 좋고 하느님께서도 환영하십니다. 성인의 삶을, 성 베네딕도회 영성을 요약하라면 저는 주저없이 ‘산山과 강江’의 영성이라 칭하고 싶습니다.
“밖으로는 산, 천년만년 임 기다리는 산
안으로는 강, 천년만년 임 향해 흐르는 강”-1998.
무려 24년전 자작 짧은 시詩이지만 이상적인 영성의 요약입니다. 밖으로는 언제나 거기 그 자리 임 기다라는 정주의 산같은 삶, 안으로는 끊임없이 임 향해 맑게 흐르는 강같은 삶이라면 얼마나 멋지고 아름답겠는지요! 저는 산을 베네딕도로, 강을 프란치스코로 바꿔 읊기도 합니다.
“밖으로는 성 베네딕도, 천년만년 임 기다리는 성 베네딕도
안으로는 성 프란치스코, 천년만년 임 향해 흐르는 성 프란치스코”
사실 절묘하게 상호보완을 이루는 두 성인입니다. 성 베네딕도회에 속한 프란치스코 수도사제인 제 좌우명같은 고백이기도 합니다. 참 자랑스러운 베네딕도 성인입니다. 오늘 말씀을 바탕으로 성인의 덕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슬기를 추구하라!”입니다.
지혜의 순수한 우리말 슬기가 좋습니다. 그래서 슬기란 우리말 이름도 많습니다. 얼마전 신씨 성의 ‘신난다’ 이름이 참 기발하다 생각했는데 정말 신나게 사는 형제입니다. 오늘 잠언은 한결같이 지혜를 추구하라는 충고입니다. 성 베네딕도는 참 지혜로운, 슬기로운 분이셨습니다. 이런 지혜는 그대로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이 바로 지혜입니다.
“지혜에 네 귀를 기울이고 슬기에 네 마음을 모은다면, 그래, 네가 예지를 부르고 슬기를 향해 네 목소리를 높인다면, 네가 은을 구하듯 그것을 구하고 보물을 찾듯 그것을 찾는다면 그때에 너는 주님 경외함을 깨닫고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찾아 얻으리라. 주님께서는 지혜를 주시고, 그분 입에서는 지식과 슬기가 나온다.”
정말 궁극으로 추구해야할 바 주님의 지혜입니다. 이런 지혜로 충만한 성 베네딕도의 삶을 요약한 어제 저녁성무일도시 계응송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베네딕도 성인은 모든 덕의 어머니인 분별력의 지혜의 대가였습니다.
“하느님의 사람, 베네딕도는 슬기로운 절제와 명쾌한 표현으로 규칙서를 저술하였도다.”
“이 거룩한 사람은 자기가 체험하지 않은 것을 남에게 가르칠 수 없었도다.”
둘째, “사랑하라!”입니다.
무지無知에 대한 답이 슬기라면, 허무虛無에 대한 답은 사랑입니다. 경천애인敬天愛人, 참으로 하느님을 온마음으로 사랑하는 이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합니다. 베네딕도 성인 역시 ‘사랑의 대가’였습니다. 사랑은 성덕의 잣대이자 율법의 완성입니다. 사랑과 함께 가는 지혜입니다. 사랑에서 샘솟는 지혜입니다. 정말 사랑할줄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성 그레고리오 대 교황의 “베네딕도 전기”를 보면 무려 38개 항목에 걸친 기적 일화들인데 한결같이 사랑의 기적들이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사랑의 기적’이라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불순한 의도가 전무한 순전히 모두가 성인의 지극한 사랑에 감동하신 하느님의 화답으로 이뤄진 사랑의 기적들입니다. 제2독서 콜로새서 말씀은 사랑으로 새사람이 되라는 바오로 성인의 간곡한 권고입니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 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입니다.”
며칠전 보자기의 영성을 강조했던 일이 생각납니다. 가방의 영성이 아니라 큰 보자기의 영성을 지니자는 권고였습니다. 이런저런 모든 것을 하나에 담아 묶을 수 있는 것은 정해진 규격의 가방이 아니라 큰 보자기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느님을 닮아 사랑의 큰 보자기 마음이 되자는 것입니다. 베네딕도 성인이 바로 그런 분입니다.
셋째, “섬겨라!”입니다.
위로 하느님을 섬기고 좌우사방의 이웃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섬김의 권위, 섬김의 직무입니다. 믿는 이들의 영성이 섬김service과 종servant의 영성입니다. 섬김의 사랑이야 말로 참 영성의 잣대입니다. ‘섬김의 대가’ 예수님을 닮아 성 베네딕도 역시 섬김의 대가였습니다. 예수님의 유언遺言과 같은 오늘 복음 말씀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
예수님을 빼다 닮은 성 베네딕도는 자기 제자들의 수도승 공동체를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로 정의했습니다. 평생 한결같이 겸손한 사랑의 섬김의 자세로 살라는 성 베네딕도입니다. 주님을 섬기고 또 주님을 섬기듯 형제를 섬기라는 성인의 가르침입니다. 역시 ‘섬김의 학교’에서 평생 배우고 훈련해야 할 섬김의 덕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은 모두 섬김의 직무,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입니다. 대표적 서비스업인 음식점, 병원, 학교를 보면 그 핵심이 뭔지 한눈에 들어 옵니다. 다음 셋은 서비스업의 3대 필수요소란 것이 제 지론입니다. 첫째 사람이 친절하여 좋아야 하고, 둘째 사람이 유능하여 실력이 좋아야 하며, 셋째 안팎의 환경이 아늑하고 푸근하여 좋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셋을 우리 수도원과 제 자신에 자주 적용하여 점검해 보기도 합니다.
참 좋은 자랑스런 성 베네딕도입니다. 자랑하기로 하면 끝이 없습니다. 길이 향기로 남아 우리를 행복하게, 또 부단히 분발의 노력을 다하게 하는 베네딕도 성인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성 베네딕도처럼 날로 슬기의 사람, 사랑의 사람, 섬김의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주님을 경외하여라. 주님의 사람들아, 그분을 경외하는 이들에게는 아쉬움이 없으리라.
부자들도 궁색해져 굶주리게 되지만. 주님을 찾는 자에게는 좋은 것 뿐이리라.”(시편34,10-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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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10,34)
<평화가 아니라 칼???>
오늘은 '유럽의 수호성인'이시고, '서방 수도 생활의 아버지'라 불리는 '성 베네딕토 아빠스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먼저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한 분들과 베네딕토 수도회 가족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예수님의 파견사화(마태10,1~11,1)의 마지막 부분인 오늘 복음은 '세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곧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는 단락, 그리고 '버림과 따름',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들이 받을 상'입니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만 바라보면,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칼을 주러 오셨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힘들 것입니다. '평화'는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이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인데... 평화가 아니라 칼이라니!
칼의 용도는 무엇인가를 자르는 것입니다. 이런 칼이 지니고 있는 '영적인 의미'는 바로 '단호함'입니다.
육적인 가족보다 예수님을 더 먼저 생각하고 사랑하는 단호함!
내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단호함!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면서 지나가는 육적인 것에 대한 집착을 끊어내는 단호함!
가장 작은 이들에게 관심을 두는 단호함!
내 안에 있는 습관적인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리는 단호함!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악한 행실에 대명사인 소돔과 고모라의 지도자와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 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이사1,16-17)
'이 단호함이 바로 칼의 의미'이고, '이 단호함 뒤에 참평화가 있다.'는 의미로 묵상되었습니다. 오늘도 '참평화'를 얻기 위해, 지금 여기에서 '단호함을 실행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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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인정은 칼로 베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평소 우리가 생각하는 주님의 말씀과 다릅니다. 그래서 주님 말씀이 아닌 것같이 느껴집니다.
평화를 주러오신 주님이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오셨다고 하고, 일치를 가르치신 주님이 일치가 아니라 분열을 주러오셨다고 하며 서로 사랑하라 하신 주님이 서로 사랑하면 당신께 합당치 않다고 하시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그릇된 말씀을 하실 분이 아니라고 믿는 사람이라면 그래서 주님께서 분명 옳은 말씀을 하신 거라고 믿는 사람이라면 오늘 말씀하시는 평화나 일치나 사랑은 잘못된 평화나 일치나 사랑이기에 그런 것들을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거라고 알고 또 믿습니다.
예를 들어 모든 일치가 좋은 것이 아니지요. 야합도 일치지만 그런 일치는 아주 나쁜 일치지요.
마찬가지로 모든 사랑과 평화가 좋은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사랑과 일치하는 사랑이 좋은 사랑이고, 하느님 진리와 일치하는 평화가 좋은 평화입니다.
하느님을 같이 사랑하지 않는 사랑, 인정에 매여 주님을 따르지 않는 사랑, 인정 때문에 주님을 따르는 것을 막는 사랑, 이런 인정을 오늘 주님께서는 문제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늘로 오르지 못하는 인정, 하늘로 오르지 못하게 하는 인정은 참사랑이 아니며, 이는 마치 연을 끈으로 묶어 날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연은 하늘로 날아야 진정한 연이듯 우리의 사랑도 하느님 사랑에로 올라가야 참사랑이고, 그래서 사랑이 아닌 인정은 칼로 베라고 칼을 주러 오신 주님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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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QMVmpRy1W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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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 34)
진짜 칼은
사람을
바꾸어 놓는다.
칼을 부정하는
것은 하느님을
부정하는 것이다.
잘라내야 할
악습을 잘라내는
단순한 사실에서
칼은 시작된다.
우유부단한
우리들에게
칼을 주셨다.
주님께서
주시는 칼은
삶의 중심을
바로잡아 준다.
십자가의 칼이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한다.
진짜 신앙은
하느님
중심적이다.
따르기 위해서는
자를 수
있어야 한다.
일상의
매순간이
식별의 칼날과
함께 주님을
향한다.
평화를 지키는
십자가의 칼이다.
밭을 갈아엎는
쟁기도
소중한 것을
알게 하는
칼도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삶임을
가르쳐준다.
조화와 균형
겸손과 중용
절제와 성숙의
칼이 필요한
우리들이다.
칼끝이 향하는
방향이 실은
새로워져야 할
우리자신의 삶이다.
새로워진 삶이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이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십자가의
새 길이다.
무딘 신앙으로는
아무 것도
잘라낼 수 없다.
주님께서는
절박하고
각별한 칼을
우리에게 주셨다.
반성과 결심의
칼은 우리의
목마름을
일깨워주며
우리의 안일함과
우리의 이기와
우리의 무지를
꾸짖고 있다.
평화는 칼과
함께 공존한다.
우리자신의
변화를 촉구한다.
식별의 칼이며
우선순위의
칼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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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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