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은 내 작업실에 있는 야마하 전자 오르간에 빗댄 속담이 틀림없다. 중고 장터에 헐값에 올라온 물건을 잽싸게 낚아챈 것은 박수받을 만한 묘기였다. 문제는 오르간을 연주하려면 양손 양발을 따로따로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피아노를 연주할 때처럼 왼손과 오른손으로 건반을 누르는 것 외에도 왼발로는 베이스 건반을, 오른발로는 볼륨 페달을 밟아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사지를 따로따로 놀릴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면 우리의 뇌는 좌우 양반구가 아니라 상하좌우 사분구로 나뉘어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이런 사연으로 나의 전자 오르간은 인테리어 소품으로 전락해 인생 제2막을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업실에서 사람들과 맥주를 마시고 있었는데, 음악을 하는 지인이 오르간 앞에 앉더니 어릴 적 즐겨 듣던 찬송가를 연주하는데, 오르간이…. 내 작업실에서 키우는 고양이들이 삼시 세끼 내가 주는 밥을 먹고 내가 매일 청소하는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면서 내가 아침에 출근하면 아는 체도 하지 않다가 일면식도 없는 동네 주민들이 다가오면 배를 보여주면서 가르랑거리듯…. 내게는 한 번도 들려주지 않던 청아한 음색과 단단한 화성을 들려주는 것 아닌가.
따라서 위의 속담은 “내가 가진 것이 아무리 많아도 나와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어야 내 것이다”라는 뜻이 되겠다. 돈은 물건을 소유할 능력을 의미하지만 그 물건을 소유할 자격에 대해서는 어떤 보증도 해주지 않는다. 한번 이런 생각에 사로잡히고 나니 그동안 작업실에 들인 물건들이 내게 “당신은 내 진짜 주인이 아니야. 그깟 돈으로 내 몸은 가질 수 있을지 몰라도 내 마음은 어림도 없어”라고 말하는 듯한 환청이 들려온다.
기타의 푸념이 처량하고 오르간의 꾸지람이 묵직하기는 하지만 가장 괴로운 것은 뭐니 뭐니 해도 1000권은 훌쩍 넘을 책들의 아우성이다. 주인을 잘못 만난 탓에 속살을 태닝할 기회를 한 번도 얻지 못하고 누렇게 찌들어가는 책들. 누군가의 인생을 바꿨을지도 모르는 귀한 책들이 깊디깊은 의미와 비밀을 간직한 채 세상 구경 한번 해보지도 못하고 늙어간다. (이건 동병상련이구나.)
내 머릿속도 내 것 아닌 기억으로 가득하다. 이를테면 나는 마르틴 베크 시리즈 제1권 <로재나>(엘릭시르, 2017)를 5분의 1가량 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저자 마이 셰발과 페르 발뢰가 어떤 인물인지, 이 작품이 추리소설의 역사에서 어떤 위상을 차지하는지, 로재나는 어쩌다 목숨을 잃었는지, 범인은 누구인지 통 모른다. 그저 어떤 추리소설을 읽다 말았다는 기억만 남아 있을 뿐. 머릿속에 갇힌 채 무엇과도 연결되지 못해 세상에 나올 유일한 기회라고는 무엇과도 연결되지 못한 기억의 사례로서 제시될 때뿐인 기억. 며칠 전 만난 출판사 편집자, 개업했다며 떡을 주고 간 피아노 학원 원장, 코로나19 불황을 이기지 못하고 폐업한 통닭집 사장, 메모 앱 에버노트에 적어놓은 뒤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은 글감, 그리고 아침 식사 자리에서 한 번 마주친 작은 아이의 눈빛, 스마트폰에 처박고 있던 고개를 들었을 때 문득 시야에 들어온 아내의 뒷모습. 내가 의미를 부여하는 데 실패한 사건들, 사물들, 기억들. 이젠 더 가지는 것은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
노승영 번역가 20230525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