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던지는 서론... 보다 앞선, 서론을 시작하기 위한 서론 전단계의 글입니다.
물론, 자의적인 글입니다. 모든 독자는 읽을 수 있는 권리가 있고, 그것은 결코 강요당할 수 없기에, 저는 제 권리를 행사하며, 제 글을 읽는 다른 분들이 제 글에 반대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우리, 친절한 반론과 유쾌한 항의는 환영합니다. 언제나.
스포일러의 위험이 있으므로 혹여 눈새를 읽지 않으신 분은 읽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흠. 그리고 그다지 잘된 글이 아니므로... 보이기에 부끄럽다는 것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그러나, 더 좋은 생각, 더 분명한 사유들을 만나기 위해서 먼저 어설픈 제 생각을 보이는 것에 대해서, 너그럽게 봐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작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전적인 의미로 풀이하자면, <만드는 가문>이라는 뜻이 될것이지만, 그런 식으로 의미를 해석하는 기묘한 상황은 핫소드 그란의 헤게모니아 어 실력의 기묘한 만큼이나 기묘하기 때문에, 작가라는 말은 해석의 여지를 가질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즉, 작가라는 말을 우리는 사전적인 의미가 아닌, 해석된 말로써 사용한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작가, 자신의 작품으로 하나의 일가(一家)를 이룬 자. 자신의 사유를 튼튼하게 쌓아올려 마침내는 하나의 가문을 형성한 자. 개인적으로 집짓는 일에 종사하다보니, <집>이 가지는 종합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됩니다. 거칠게 말해서, 집짓는 일은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제가 이쪽 일을 하게된지 고작 2달여 지났기 때문에 거칠게 말할 수 밖에 없음을 용서하시길.) 설계와 시공, 그리고 감리.
설계는 집을 잘 지어가기 위한 준비단계입니다. 어디에 주기둥을 박고, 어떤 공법을 사용해서 터파기를 하고, 또한 건물의 외양과 치장(마감)은 어떻게 해나가야할지 생각하고 도면을 그려보는 단계입니다. 시공은, 직접 지어나가는 과정입니다. 설계의 도면을 바탕으로 해서 여러가지 변화와 변경을 거쳐서 지하 마지막 콘크리트 타설 작업부터 마지막 내부 장식(마감)까지... 한 채의 건물을 짓기 위해서 꼭대기에서부터 최하부 바닥까지 꼼꼼하게 체크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감리는 이런 모든 작업을 감시하고 감독해서 공사가 잘못 이루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는 일입니다. 혹여 예산을 줄이기위해 나쁜 재료를 쓰지 않는가, 거푸집 작업 후에 7일간의 양생작업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서 부실공사를 야기하지 않는가. 이런 하나하나의 과정을 감시하고 감독해서 제대로 된 집이 지어지는가를 체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 가지의 과정이 조화를 이룰 때, 우리는 한 채의 아담하고 튼실한 집[家]을 한 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작가는 바로 그러한 자입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만들어지고, 또 다듬어지며, 마침내는 우리 독자가 그 건축물 안에서 안온하고 평안하게 쉴 수 있는 그런 자.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의 중요한 과정 중에서 하나라도 결여된 자를, 우리는 작가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생각해보시길. 아무리 좋은 재료와 꼼꼼한 감시 감독이 있다 하더라도 부실 설계를 바탕으로 한 구조물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말입니다.
이러한 사유의 기반 아래에서 저는 이영도 씨의 신작 <눈물을 마시는 자>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이영도 씨에 대한 해묵은 이야기들
1. 그는 모든 등장인물을 통제한다. 그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네크로멘서>의 손 아래에서 춤추고 움직인다. 그들은 살아있는듯 하지만, 그들의 생존에 독창적인 여지는 없다. 네크로멘서가 그들을 통제하기 때문이다.
위의 이야기와 유사한 것으로, <이영도 씨의 글에는 결코 악인은 나오지 않는다. 모든 악인은 그 이유를 가지므로 더이상 그들은 악인이 아니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한 인물 한 인물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가 글 쓰는 이의 주제를 향해서 수렴되도록 하는 그런 전반적인 글의 흐름이 바로 위와 같은 이야기들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정말 그렇습니다. 이전에도 다른 작가에 의해서 몇 번 시도되어진 적이 있지만, 이영도 씨는 북부군과 나가군의 전투장면에서 (보통은) 의미없이 지나가버릴 몇몇 인간 혹은 동물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그들의 치열한 삶과 죽음의 과정은, 제2차 대확장전쟁을 통해서 죽어간 수백만의 인간에 대한 비극을 명징하는 수단이며, 그러한 이름 없는 자들까지도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글 쓰는 이의 가상한 애정일 것입니다.
익명성 속에서 막연히 흘러가기 쉬운 그러한 군중 속의 관계성이, 이영도 씨의 손을 거쳐 세심하게 재단되는 순간, 그러나 덧없고 무가치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러한 애정 뒤에 숨겨진 이영도 씨의 착취를 보기 때문이며 그러한 착취는 바로 자신의 생을 소란스러운 방식으로나마 조용히 마칠 수 있는 자들을 억지로 이끌어내어 자신의 글의 주제를 향해서 처절하게 달려가게 하는 그것입니다. 결국 모든 인간들 하나하나에 가치를 부여하고 싶어하는 글 쓰는 이의 애정은, 역설적으로 용인인 륜이 늘상 맛보는 <모든 것을 아는 고통>을 독자에게도 전가시키고 있으며, 따라서 독자는 쓰는 이가 제시하는 그 길을 쉴새없이 달려가도록 강요받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심장탑의 꼭대기까지 한달음에 달려가는 그 고통처럼.
이러한 글 쓰는 이의 등장인물 착취를 <세리스마>라는 인물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세리스마는, 이영도 씨의 전편을 통해서 거의 유일하게 음모를 꾸미고 모략으로 자신을 점철할 수 있는 자입니다. 그의 음모와 모략에는 아주 특별한 이유가 없습니다. 이영도 씨 소설 속에 등장하는 <악인>편에 선 모든 자들이 그 자신들의 인생 속에도 가치 있음을 드러냄으로써 독자로부터 인정받고 있어온 것에 비하면 아주 새로운 인물상이었습니다.
할슈타일 후작 마저도 <퓨처 워커>를 통해 그의 인생에 가치를 부여받고, 넥슨 휴리첼은 무수히 많은 악행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에게 인정되고 또한 포용되는 것에 비하면, 세리스마는 전형적인 악한의 전형으로써 글에 등장하고 또한 모든 이야기를 관통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이영도 씨는 세리스마의 입을 빌립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에 가치를 부여합니다.
그러나 이미 그러한 부여는 늦은 바 되었습니다. 차라리 비아스처럼 나둘 것을... 세리스마는 죽기 전에 비아스를 처리(?!)하는 선한 역할로 탈바꿈하고, 그것은 그 근거마저 모호한 그야말로 돌변이며, 이영도 씨가 등장인물을 살아 움직이는 좀비처럼 부려먹는다는 말에 가장 큰 증거가 되어버렸습니다.
퇴마록을 쓴 이우혁 씨의 가장 큰 악덕이, 자신이 만들어 낸 인물들에 대해서 크나큰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일겝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영원한 휴식을 주어야 할 시기에, 이우혁 씨는 다시 그들을 불러냄으로써 글의 주제 대신 인물들만 득시글거리는 지저분한 글을 만들어냅니다. 반면에 이영도 씨는 그의 등장인물 하나하나에 생동하는 개성을 부여하고 그들 인물들이 꼭 존재해야하는 이유를 제시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창조물들에 대한 강렬한 애정이며, 글솜씨가 뒷받침되므로 인해 그러한 인물들을 적재적소에서 등장시킴으로써 글의 주제를 가장 명확하게 드러냅니다. 그래서 그는 일부의 독자들에게, <등장인물을 자유롭게 풀어주라!>는 항의를 받기도 하지만, 세리스마의 경우에는 그러한 항의가 정당하게 받아들여지는 예라고 할 것입니다.
"그것이 제 죄입니다."
"뭐라고?"
"그것이 제 죄입니다. 저 자신의 마지막 한 부분에 끝까지 제한을 두었다는 것이 제 죄입니다. 저는 저의 마지막 한 부분을 긍정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죄로 생각합니다."
(4권 316쪽)
문득 튀어나오는 세리스마의 고백. 그러나 그것은 정말 의아한 것일 뿐입니다. 시의적절하지 않으며, 이미 앞부분에서 무수히 많이 드러났기 때문에 더 이상의 언급이 없어도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주제를, 작가는 세리스마의 입을 빌어서 폭로해버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세련되지 못합니다. 이제 이영도 씨는 세련되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제 독자들은 <이영도>라는 훌륭한 거처에서 쉴 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리스마를 그냥 두었어도, 좋았을 것입니다. 요스비를 그렇게 놔 둔 이영도 씨가 마지막에 세리스마의 입을 빈 것은 의아할 뿐입니다.
2. 이영도 씨의 글은 어렵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독자가 읽고 알 수 있는 표현이나 쉬운 의미로 풀어주는 친절함이 그에게서는 찾기 어렵다. 그는 현학적이다.
이영도 씨의 글에는 함정이 많습니다. 반전에 또 반전... 그래서 그의 글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스포일러>라는 말은 일반적입니다. 6217명이라든지, 아니면 88챕터에 88일, 그리고 8명의 선장은 그가 독자에게 던져주는 작은 즐거움이며, 독자들은 그런 것으로 즐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글 속에서 등장하는 여러 모양의 반전을 통해서 큰 기쁨과 함께 그의 주제의식에 조금 더 가까이 갈 수 있었습니다. 누가 핸드레이크 <휴리첼>이 시오네에게 <물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중부대로의 슬픔인 아무르타트가 실은 인간의 폭주하는 삶을 제어할 수 있는 <석양의 감시자>임을 알았겠습니까. 그것은 그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다름을 인정하고 용납하는 관계를 통해서 얻어지는 인간의 가능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장치였으며 그와 함께 독자를 즐겁게하는 배려였습니다.
도대체 누가 파 L. 그라시엘이 준비된 껍데기임을 알았으며, 칼이 <모든 정의와 사랑, 우정의 이름을 깨어버리기>로 작정하였다는 사실을 상상할 수 있었습니까. 그레이 휠드런이 데스나이트의 투구를 뒤집어 쓰고, 제레인트의 처절한 절망 속에서 할슈타일 후작의 죽음의 순간이 고정되어 버릴지 누가 알았습니까. 분명히 글 쓰는 이는 그러한 반전을 통해서 우리에게 <시간을 아껴써라!>는 명확하고 일반론적인 주제가 일곱권의 유쾌하고 아기자기한 이야기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독자를 기쁘게 합니다.
그러나, 왜 <눈물을 마시는 새>에는 불필요한 반전이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키타타 자보로가 륜 페이를 향해 작살검을 들었을 때, 단지 놀랐을 뿐입니다. 세페린과 갈로텍, 그리고 세페린과 케이건 드라카, 그리고 갈로텍과 케이건 드라카는 작가의 주제를 향한 거대한 패스파인딩 속에서 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까. 물론 이영도 씨는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살신 계획, 그리고 흑사자와 아라짓 전사의 후예인 케이건 드라카. 도깨비 감투 같은 작은 소품까지도 우리의 즐거움을 배가시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단지 <반전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반전들 때문에 단순하게 주제를 향해서 달려갈 수 있는 이야기가, 마치 서투른 패스파인더와 약간은 자신만만한 테페리의 지팡이 덕에 구불거리고 있다는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구불거림에 반드시 소소한 멀미기운을 느끼곤 합니다.)
그의 이러한 반전은, 마치 장님을 인도하는 안내인의 친절함이 없다면 걸어갈 수 없는 길을 걷는 듯 합니다. <열 가지의 해석이 나온다면, 열 한 번째의 해석을 생각하면서 즐거워하겠다>고 말하던 글 쓰는 이는 너무 많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이러한 태도가 오히려 역설적으로 글 속에서 독자를 버겁게 만들고 있습니다.
전작(前作)들의 <어려움>이 나태한 독자에 대한 도전이라는 측면에서 긍정될 수 있다면, 이제 그는 분명한 글을 쓸 수 있어야하며, 명료하고 단순한 이야기가 던져주는 미덕에도 귀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가 <오버 더 호라이즌>에서 보여주었던 그런 종류의 것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