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환상 소설이 우리나라 현대 문학사에서 나름대로의 의미를 가지게 된지도 꽤 되었습니다. 다양한 읽는 이들과 쓰는 이들이 생겨나고, 조금 더 체계적으로 환상 소설에 대해서 공부해보고자 하는 무리들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비판어린 눈초리로 우리나라의 현대 환상 소설을 바라보는 이들도 있고, 혹은 그 속에서 10년 뒤를 내다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한, 외국의 수준 있다고 생각되는 다양한 환상 소설들이 소개되기도 합니다. 번역하는 사람들의 수준도 많이 향상되어, 우리는 좋은 작품을 많이 감상할 수 있는 혜택을 누리고 있기도 합니다.
약 3여년 전만 해도, 환상 소설에 대한 자료라고는, <반지의 제왕> 번역본 - 해적본으로 추정되는 - 과 1970년 번역본인 토도로프의 <환상소설 입문>, 그리고 손에 꼽힐 만큼의 분량 뿐인 환상소설에 대한 논문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10여 질의 우리나라 환상 소설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환상 소설 시장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졌으며, 10대를 주축으로 한 독자군을 만들어내기도 하였습니다. 가히 십 몇년 전 이전의 무협 소설의 인기를 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러한 현상이, 그러나 비단 반갑지많은 않은 이유는, 그러한 양적인 팽창이 질적인 수준의 향상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환타지 소설의 양적인 팽창이 가능했던 이유는, 글 쓰는 이와 독자간의 소통 도구에 기인한 소위 <통신문학>이 인터넷 네트워크 망의 향상과 함께 급격하게 보편화 된데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또한, 우리나라의 소위 현대 순수문학이 이데올로기의 대립 구도 속에 얽매어 있고 그에 대한 대안이 부재한 상황에서, 새로운 독자군이 될 수 있는 소년소녀 독자층이 그러한 고루한 글들을 외면하는 현상이 발생하고, 그러함에도 원초적인 인간의 <읽기 욕구>를 만족시킬만한 다른 전환점이 소위 순수문학에서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등장한 환타지 소설은 소년소녀 독자군 사이에서 급격하게 퍼질 수 있는 파괴력을 불러 일으켰다고 볼 수 있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소년소녀 독자군의 창조욕구는, 급격한 문화적인 흐름과 그 궤를 같이하게 됨으로써 급팽창하게되는데 그러한 흐름은, <누구나 다 자신만의 세계를 꿈꾸는> 시작점이 되지만, 아울러 <무책임한 창조주의 방관>아래서 갈피를 잃어버리는 글 중 등장인물들을 양산하고, 그들은 그들의 일관성있는 행동양태를 포기할 수 밖에 없는 결과를 갖게 됩니다.
즉, 다수의 10대가 글을 쓰기 시작하였고, 폐쇄적인 등단 제도 대신에 인터넷 네트워크의 발달과 함께 누구나 글을 쓰고 그 글이 다수의 익명의 독자를 향유할 수 있게 바뀌어 감으로써, 누구나 <작가>라는 이름을 향유하게 된 것인데, <작가>라는 이름이 가지는 매력만큼이나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의무 - 자신의 세계를 지키고 또 꾸준히 가꾸며 자신의 세계가 가지는 모순을 끊임없이 바로잡아야 하는 - 를 부여받음에도 그러한 의무와는 무관하게 살아가는 그런 현상이 결국은 현재 환타지 소설의 양적 팽창을 질적인 수준이 따라가지 못하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의 현대 환타지 소설이 그 고고성을 울린지 10년도 안되는 짧은 시간에, <더 이상 한국 환타지의 미래는 없다>라는 절망어린 목소리가 들려나오고 그에 대한 어떤 대안도 부재한 것 같이 보이면서, 독자군은 떼거지로 서양의 환상 문학으로 그 걸음을 한 걸음씩 옮겨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 가운데, 우리는 이영도 씨의 <눈물을 마시는 새>를 만나고 있습니다.
글쓰는 이의 꿈, 인간이 인간을 위해 사는 삶
많은 이들이 <사랑>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랑>이라는 개념에 이미 익숙하며, 사랑을 귀하게 여깁니다. 사랑은.
인간이 인간답게 되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인간이 인간을 위해서 살아가는 가장 아름다운 삶의 모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을 가장 궁극적인 관계의 종결점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늘 동경하며 지키기를 힘씁니다.
그러나, 사랑은 도달하기 힘든 지향점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현대의 사람은 사랑에 조건을 부여하는것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조건, 사랑하기 위한 조건은 어떤 식으로든 인간의 삶에 간섭합니다. 우리 시대에는 <조건 없는 사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랑은 어이없는 것이며,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며, 말이 안되는 것이기에, 그런 무조건적인 사랑은 불가능한 것이며 비인간적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는 일견 비인간적으로 보이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케이건 드라카.
그의 왕이 저주하고 증오하는 나가라는 또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아낌없이 사랑을 보내고 싶어서 왕위도 포기하고 사랑할 수 있는 길로 떠난 자입니다. 그는 <단지> 사랑하기를 원하고 <다만>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공존하고 공영할 수 있는 길을 원하는 케이건. 그래서 그는 사랑이 실패로 끝나자, 사랑이 배신으로 보상받자, 그 사랑을 증오로 투사합니다. 인간에게 사랑의 반대편에는 증오가 서있고, 극과 극은 서로 연결되듯이 말입니다. 마치 도로왕이 열심히 극과 극을 이었던 것이 바로 사랑과 증오의 결합성에 대한 상징이겠지요.
이영도 씨는 자신의 글 속에서 이러한 끝간데 없는 사랑에 대해서, 혹은 용납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첫 장편인 [드래곤 라자]에서는 일견 투박하면서도 직설적으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조금 전부터 느끼는 건데요."
"뭐냐? 하고 싶은 말이?"
"아무르타트를 퍽 친숙하게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아니, 꼭 친숙하다기보다는… 저, 글쎄요. 아버지는 아무르타트에 대한 증오심은 확실히 없어지신 것 같아요."
"그러냐?"
"그래요."
"당연하다. 넌 모르겠지만 네 아버지는 드래곤의 곁에 있어봤던 사람이니까."
아이고, 아버지. 아버지의 아들은 드래곤 로드와 이야기를 나눠봤고 지골레이드의 앞발을 막아내었으며 크라드메서에겐 스피어도 집어던져 봤답니다. 난 속으로 웃으면서 말했다.
"드래곤의 곁에 있었다는 것이… 어떤 건데요?"
"내 복수심이라는 것이 허무한 것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지."
"예?"
아버지는 다시 침묵하셨다. 내가 조바심을 참지 못하고 다시 입을 열려했을 때 간신히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후치야. 만일 내가 절벽에서 떨어져 죽는다면 넌 절벽을 증오하겠냐?"
"예?"
"아니, 내가 홍수 때문에 강물에 떠내려가 죽는다면 넌 홍수나 강물에게 복수하려고 들겠냐?"
"어, 그럴 일은 없겠지요."
"그래. 나도 그걸 깨달았다. 내가 헬턴트 마을에 있을 때, 그러니까 아무르타트와 꽤나 먼 거리를 두고 있을 때는 말이다, 아버지는 아무르타트가 정말 때려죽이고 싶도록 미웠단다, 후치야. 하지만 그 전투 이후로 긴 시간 동안 아무르타트의 곁에 있으면서, 난 네 어머니의 죽음과 아무르타트를 연결짓는 것이 갈수록 어려워지더구나."
"아무르타트가 절벽이나 홍수처럼 느껴지신다는 거에요?"
"그런 것 같아. 아무르타트에겐 인간적인 복수심을 적용하기가 힘들어지더라. 아무르타트는… 글쎄다. 나 같은 것이 증오하거나 사랑하거나 해 봤자 아무 상관이 없는 것 같았어. 네가 듣기엔 퍽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말이다, 아버지는 그렇게 느낀다."
문득 고개를 돌려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싶어졌다. 하지만 난 고개를 돌리지 않고 눈 앞의 길만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아버지의 저런 느낌은? 간단한 대답이 떠올랐다.
아무르타트는 라자가 없으니까 그렇다. 라자가 없는 아무르타트는 인간과의 교류가 불가능 하다. 교류라는 것이 단순히 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전달까지도 포함하는 형이상학적인 거라면… 아버지가 말씀하신 예가 도움이 되는군. 절벽이나 홍수 같은 것에 감정을 전달할 수는 없지. 우리는 절벽이나 홍수 따위와 교류할 수는 없다. (드래곤라자 12권 중)
절벽이나 홍수에게 인간은 어떤 의사표시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폴라리스 랩소디]에서 키 드레이번 선장은 거대한 절벽 앞에서 분노하죠. 단지 분노할 뿐입니다. 절벽을 넘어서려면 돌아가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결국, 절벽이나 홍수 앞에서, 인간은 그들을 변화시키려 하기보다는 자신을 변화시키고 자신 속에서 다른 방법을 찾음으로써 절벽과 홍수와 어우러질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이영도 씨는 [드래곤 라자]에서 <내>가 먼저 나를 능동적으로 변화시킨다면, 그래서 상대방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인정할 수 있다면, 인간은 또하나의 가능성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이야기 합니다.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보살핌 아래에서, 함께 공존해나가던 다른 종족들의 번영을 막아버린 채, 자신들만의 번영을 구가하던 인간은, 석양의 감시자이며 헬카네스의 검은 창인 블랙드래곤 아무르타트 앞에서 무력감에 부닥치게 되고, 헬턴트의 영지민들은 결국 자신이 먼저 변화함으로써, 먼저 용납하고 용서함으로써, 살아남는 방법을 터득합니다. 그래서 <먼저> 변화한 그들 앞에서, 삶과 죽음의 거대한 도전은 의미를 상당부분 상실하고 맙니다.
이영도 씨는 그 후속작들을 통하여 <용납하고>, <보이는 별에 만족>하며, <다만> 사랑하는 행위들을 이야기함으로써, 인간이 직면한 멸절의 위기를 극복해보고자 하는 강력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눈물을 마시는 새]는 세련된 대신, 그 글의 미려함 속에서 글 쓰는 이의 생각은 상당부분 죽어버린 듯 합니다.
케이건 드라카의 사랑은 증오와 맞닿아 있습니다. 인간에게, 사랑과 증오는 같은 것입니다. <관심>. 사랑의 반대는 증오가 아닙니다. 무관심입니다. 인간이 정말 당하지 말아야 할 관계의 파괴는 바로 무관심일 것입니다. 증오는. 어쨌든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전작을 통해서 인간 <관계>의 가능성과 필요성,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얻을 수 잇는 매력과, 멸망을 앞두고 있는 종족으로써의 인간에 대해서 다시 한 번의 기회와 희망을 이야기하던 이영도 씨는, 글의 짜임새와 미려함에 자신의 사고를 퇴행시키는 듯 합니다. 이영도 씨 자신이 관계의 단절, 그리고 관계 속에서 용납당하지 못하는 현실을 두려워하고 극복하려고 하는 면들을 끊임없이 보여주고 있다면, <증오>라는 식으로라도 관계가 지속되는 것에 대해서 긍정적이어야 할 것입니다. <증오>를 배제한 인간의 관계는 정말 이상일 뿐입니다. 그런 <증오>없는 관계는 망상에 맞닿아있는 이상입니다. 비아스 마케로우라는 인간을 통해, 혹은 케이건 드라카의 증오를 통해, 관계맺음의 <증오>를 하는 인물들이 그 증오 때문에 관계를 단절시켜나가는 모습 앞에서, 어려움을 느끼는 것이 사실입니다.
증오가, 진정으로 관계를 단절시키는 원동력이자 기제가 될 수 있을까요? 케이건 드라카의 <나가 살육신>, 그리고 비아스 마케로우의 살인, 또한 갈로텍의 제2차 대확장전쟁의 무자비한 실행... 증오와 미움은 결코 인간 관계를 단절시키지 않습니다. <사랑>과 <미움>이 함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핸드레이크 휴리첼이 꿈꾸었던 망상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할슈타일 후작의 미움과 증오를 통해서, 관계를 긍정했으며, 파 L. 그라시엘의 미움을 통해서 관계를 성숙시켰던 이영도 씨의 이런 전환은, 그러나, 글쓰는 이가 일관적으로 이야기하는 바인 <관계의 긍정> 앞에서 단지 의아할 뿐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