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제일 고마운 건 아이들이 아버지를 닮지 않고 돈을 아껴 쓰고 있는 게 일단은 맘이 놓이더랍니다. 큰 아이는 대학 때부터 고등학생 아이들 영수 과외를 하더랍니다. 친구들이 알선해 주기도 하고 내 친구들도 가르쳐 달라는 부탁을 하더랍니다. 돈은 엄마 한태 맡기더랍니다. 저는 과외 돈은 무조건 저축을 해주었지요. 그것도 3 년 정기 적금을 모자라면 내 돈을 보태고 말은 엄마가 쓰도 된다고 하지만 엄청 좋아하는 기색이더랍니다. 일단 대학 졸업 후 직장 시험을 보았지요. 합격한 곳은 K B S 모두 축하한다고 하는데 아이가 직장에 가지 않으려고 해서 내가 죽는 줄을 알았습니다. 지금도 그때 일은 아깝게 생각하는 눈치입니다. 어디든지 시험을 치면 되는 줄 아는 생각을 가지더랍니다.
대학원에 진학했지요. 나는 대학원을 가려면 서울로 가거라고 했지요. 그러려고 하더니 지도 교수와 의논해 경북대학원을 가더랍니다. 그때도 취직이 어려운 때라 취직을 하지 않고 대학원 가는 게 좀 미웠습니다. 엄마가 속상해 하니까 엄마한태 등록금 달라 소리 안한다며 하는 대로 보고만 있으라는데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정말 보고만 있었지요. 국립대학이라 장학제도가 잘 되어 있어 수업료가 거의 면제되어 30 만 원 정도등록금이 나왔다고 기억이 됩니다. 물론 내 직장에서 대학원 등록금은 나오지 않았지요. 재수 일 년 아파서 거의 일 년 친구아들과 한과라 친구 아들이 좋은데 취직되어 가는 게 부러웠습니다. 우연찮게 교수님과 만나게 되어 속상한 이야기를 했더니 교수님 역시 나보다 아들을 더 잘 알고 있더랍니다. 어머니 할 수 없습니다. 공부를 하려고 하니 계속 공부하는 게 맞지 싶습니다.
작은 아이는 재수를 하지 않고 다니던 학교에 복학을 했습니다. 아이가 졸업하던 해는 98년 가을 학기고 기억이 됩니다. 내 직장에도 강요는 안았지만 명예퇴직 신청을 받았습니다. 남편 학교에서도 명예퇴직 신청을 받고 설마 내가 먼저 내면 남편은 내지 않겠지 싶어 대대적으로 신청을 받을 때 신청을 했습니다. 너무 많이 신청을 해 선별해서 신청서를 받았습니다. 32년 1개월 처녀 때 들어와서 내 아이가 내가 들어 올 때 보다 나이가 훨씬 많도록 다닌 직장이기에 눈물이 왈칵 났습니다. 내 가정을 굳건히 지켜준 직장 고맙고도 감사한 직장 그 많은 세월이 영화필름처럼 펼쳐지더랍니다.
그 바쁘기만 하던 직장생활이 집에서 주부의 자리로 돌아오니 남의 자리에 앉은 기분이라고나 할까요. I M F 모두가 힘들다고 했던 시절 우리 오촌도 친구도 지인들이 여기저기 부도가 나고 난리였던 시절 자연 취직도 어렵던 시절이었습니다. 작은 아이에게 컴퓨터 학원에도 보내다가 직장을 가기위한 자격증을 따기 위해 학원을 보내고 있을 때 시동생이 아는 지인에게 직장을 부탁해 중소기업에 다녔습니다. 서울에 원 룸을 얻어 놓고 서울서 인천까지 지하철을 갈아타고 밥해 먹어가며 아이가 고생을 많이 했지요. 명퇴금과 공무원연금 21년 묶고 국민연금 10년은 나라가 부도나기 생겼다고 1,400만원을 일시금으로 탔습니다. 95년 거금 2억5천에 분양받은 분당에 근린상가는 초등학교 남편친구에게 거의 사기 당하듯 했습니다. 남편 몰래 일억 삼천 정도 모았다가 의논한 게 화근이었지요. 전화 하고는 의논도 없이 계약한 게 분양 막판에는 거의 반값을 내놔도 분양이 되지 않은 걸 우리는 분양대금 그대로 돈을 줬답니다. 세도 잘 나가지 않고 지금도 남편에게 원망합니다. 그 때 아이는 처음엔 80만원, 조금 있다가 100만원 받았습니다. 연봉 3,000만원이 훨씬 넘게 받던 나는 80만원 돈이 눈에 차지를 안했다. 처음엔 멋도 모르고 데리고 왔다가 봉급이 너무 적다기에 도로 데리고 갈려니 아이가 다니겠다고 했습니다. 처음 80만원 받는 아이에게 36개월 50만원 적금을 시작해 넣었습니다. 모자라면 내가 돈을 좀 줄 요랑을 하고 그런데 아이가 그것을 넣고 있더랍니다. 도시락은 밥을 지어 사가지고 가고 내가 조금씩 통장에 넣어주기도 했지요. 대학원을 졸업한 큰 아이가 졸업직후 서울에 취직이 되었습니다. 첫 봉급이 250만원, 김대중 정부시절 여기서 밝히지는 않겠습니다만 상당히 괜찮은 곳이 이었습니다. 작은 아이는 형의 봉급을 부러워했지요. 어미 맘은 한편 좋으면서도 작은 아이에 대한 미안한 맘이 가슴이 아리더랍니다. 큰 아이는 정부 출연기관이라 실력자만 모인 곳이라 입사동기생 모두가 sky라며 경대는 아들뿐이었다고 했습니다. 작은 아들 혼자 몇 달 있다가 아들 둘이 서울에 있어 한편으로는 든든했습니다. 작은 아이는 제 옷과 형의 옷을 집에서 다려 입고 가는 알뜰한 아들이었습니다.
2000년 8월 집에 남편 앞으로 등기가 날아 왔습니다. 궁금해서 뜯어보니 선생님의 퇴직을 축하합니다. 하고는 퇴직금을 삼성증권에 좀 넣어 주십사하는 각종 재산증식 자료를 동봉해 보냈습니다. 맘속으로 곧 사표를 내리라고 짐작은 했지만 그래도 한마디 의논도 없이 7년을 남겨두고 사표를 낸 남편에게 화난 체 했지요. 그 자리서 일시금으로 받기로 했느냐? 연금으로 했느냐 첫 번째로 물었지요. 일시금이라는 말을 듣고 직장 다닐 때 그 업무를 본 나는 아직 퇴직금을 손에 쥐지 않았으니 나와 살려고 하거든 지금 가서 연금으로 묶고 봉급 봉투 내놓으라고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남편은 얼른 내 놓고 그길로 교육청에 가서 연금으로 묶었습니다. 또 한 가지 원망스러운 건 사립학교에서 공립학교로 올 때 퇴직금을 연계하지 않고 군 경력과 사립학교 4년 합계 7년 연금을 나 몰래 타서 썼던 모양입니다. 어느 해 그 경력을 인정해 준다고 우리직장에서 타 직장에 간 사람들이 경력 증명서를 떼러 왔기에 남편에게 경력증명서를 떼서 경력을 살리라고 말하니 행정실장이 정년까지 하면 33년 되는데 수고스럽게 하느냐고 7년 미리 나온 남편은 내 말을 듣지 않아 26년 경력이 전부라 연금이 다른 선생님보다 훨씬 적게 탑니다. 그래도 연금으로 한 것이 평생 효자라고 요즈음은 무척 고마워한답니다.
첫댓글 연금으로 하시길천만 다행이네요
그렇지요. 노후 준비는 일등이 연금입니다. 울영감 연금 안했다면 구박 받을견데 남자 환갑지나면 이빠진
호랑입니다. 더구나 젊을 때 애 먹였다면요.ㅎㅎㅎ고맙습니다.
첫 째 아드님 잘되서 정말 다행이어요!^^
다음 쯤 나오겠지만 속을 뒤집어 놓더랍니다. 결과적으로는 괜찮았지만 한창 결혼 적령기에 속이 많이 상했답니다.
고맙습니다.
자제분들이 부모님의 좋은점들만 닮았나보네요. 어려서부터 엄마의 희생정신을 보고자라서~~~저희언니도 교직생활 어언~~30년이 넘었더라구요~공무원은 봉급은 많지않지만 퇴직후 연금이 많지요~삶속님 덕분에 부군님도 두고두고 감사하다는 말씀에 뭉쿨하네요~^^
예 그래요. 70중반 산업화 열풍이 불때 내 친구 남편 섬유회사 기술자인데 울 둘 봉급보다 많더랍니다. 참 부러워했지요.
그 친구들이 지금 우리를 부러워합니다. 둘 연금 탄다고요. 우리아이들 부모님이 연금 타니까 너무 좋다고 합니다.
요즈음은 그래도 국민연금이 있으니까 괜찮지요읽어주셔서.감사합니다.
외유내강? 이신가요? 카리스마도 있으신것 같구요..
퇴직금 말씀하실때 그길로 교육청으로 달려갔셔다는 말씀에 웃음이 났어요.. 다시 상상만 해도...
다음 이야기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남편은 아이들의 결혼 적령기는 다가오고 아무리 생각해도 집에 돈이 별로 없는 걸로 알았던 모양이지요.
아이들 결혼문제 때문에 그래서 일시금 했다고 했답니다. 그 문제는 내가 책임진다하고 연금 했지요.
지금 만족하고 있습니다. 일단은 손 안벌려서 맘편하고 오히려 손주들 보험 넣어주니 고마워 하지요.감사합니다.
ㅇ
ㅇ라고 하셨나요. 나도 그 때는 큰 소리쳤지요. 그때에 받은 통장이 지금도 16년이 되어옵니다. 명색 나는 사장입니다.
연금 타는 날 통장으로 용돈을 넣어 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