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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앞바다.,야경.
인천국제공항과 그 주변을 오가는 자기부상열차
2016년 2월 3일부터 현재 누구나 무료로 이용 가능.
독자 기술로 자기부상열차 상용화는 세계에서 두 번째.
인천국제공항역∼장기주차장역∼합동청사역
∼국제업무단지역∼워터파크역∼용유역 사이
6개역(총 연장 6.1㎞)을 15분 단위로 무인 운행.
최대 시속 80㎞으로 달리며
'인천공항역 ~ 용유역' 15분.
09시부터 18시까지 운행한다.
자기부상열차
......................인천국제공항..........................
인천국제공항은 대한민국 최대 규모 국제공항으로,
대한민국의 대부분 국제선이 이곳을 통해 운항된다.
2001년 3월 29일 개항후 김포공항 국제선 노선을 이관.
영종도와 용유도 사이 바다를 메워 만든 해상공항이라
내륙공항인 김포국제공항과 달리 24시간 운항되고 있다.
세계공항서비스평가(ASQ)에서 2005년 이후
계속 세계 공항 순위 1위를 유지하고 있으며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 제주항공, 진에어,
이스타항공, 티웨이항공, 폴라에어 카고가
이 공항을 허브 공항으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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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공항역 ~ 김포공항역'
공항철도 서해열차 38분 소요.
수도권 주민들의 바다여행이 한결 편리해졌다.
1·4호선은 서울역에서, 경의·중앙선은 공덕역에서,
종합운동장까지 연장된 9호선은
김포공항역에서 서해바다열차를 이용하여
1시간 내외면 서해바다가 근접한 용유임시역까지 간다.
'서울역~인천공항역'
직통 43분, 일반 56분.
중간역이 가까이 있다면
굳이, 직통을 타기 위해서
서울역까지 갈 필요는 없다.
용유임시역에서 마시란해변 등 인근 바다여행과
무의도 호룡곡산 섬 산행, 실미도 탐방, 소무의도
무의바다누리길 트레킹 등을 편리하게 즐길 수 있다.
용유임시역 앞에서 버스를 타면, 선녀바위,
을왕리, 왕산 등 용유해변이 10분 소요 거리.
을왕리해수욕장
용유임시역행 하행열차(서울역→용유임시역)는
오전 7시 29분에 서울역을 출발하는 것을 시작으로
오후 5시 31분(막차)까지 약 1시간 간격으로 운행되며,
서울역행 열차(용유임시역→서울역)
오전 8시 47분부터 오후 7시 25분까지
약 1시간 간격으로 용유임시역을 출발.
영종도해수욕장
.......................영종도..........................
인천에서 남서쪽으로 4.8㎞ 떨어져 있다.
동경 126°31′, 북위 37°29′이며, 면적 50.5㎢,
인구 8,369명(1996년), 조선 중기까지 자연도.
이 섬에 '영종'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숙종 때로
주변에 북도와 용유도(龍遊島)를 거느리고 있어 영(領)
동쪽에 인천을 머리에 이고 서쪽에 신불도가 양 옆을 받치고 있다.
(示)하여 ‘ 宗 ’ 자를 사용해 긴 마루 뜻을 가진 영종이라 부르게 되었다.
1973년 부천군 폐지 후
옹진군에 편입되었다가
1989년 인천에 편입되었다.
섬 전체가 삼각형이며, 중앙 백운산(白雲山, 256m)이 최고봉.
북쪽에 금산(167m)·석화산(147m) 등이 있을 뿐 대체로 저평하여
농경지와 취락이 분포하며 곳곳에 소규모 만은 대부분 방조제를 축조.
농경지와 염전으로 이용되며, 간조시에는 용유도, 운렴도 등과 이어진다.
기후는 한서의 차가 심하며 1월 평균기온 -4℃,
8월 평균기온 25.5℃, 연강수량 1,200㎜ 정도이다.
간조시 섬주변 간석지는 자연 생태계 보존에 매우 유리.
겨울철새, 특히 민물도요의 매우 중요한 도래지,
영종도 누남리의 해안은 재물떼새·큰뒷부리도요·
중뒷부리도요·알락꼬리마도요·청다리도요 등 서식.
그러나, 인천국제공항의 건설로 인한 연륙교 건설 및
대단위 간척사업, 동부 산업지구의 대형 선박 왕래 등으로
그 중요성은 매우 감소하였고 주민은 어업보다 농업에 종사한다.
경지면적은 논 632㏊, 밭 996㏊ 이며,
쌀·보리·콩·고구마·땅콩·마늘·고추·딸기 등.
연안에서는 굴·백합 등이 양식되고
바지락·게·낙지·가무락 등이 채취되며,
염전의 발달로 제염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취락은 백운산 남서 사면인 운남동과 운서동에 집중
동쪽 중산동에 구읍 나루터가 있고 나루터의 남쪽 해안
일대의 공유 수면을 매립한 곳에 농산물 가공센터가 있다.
해안일주 순환도로가 건설되어 있으며,
인천에서 정기여객선이 운항되고 있다.
인천국제공항의 건설로 인하여
서울과 김포를 지나 직접 영종도로
들어갈 수 있게 고속국도로 연결되었다.
인천국제공항은 영종도의 남서부에서
삼목도 신불도 지나 용유도까지 매립해
2006년 완공되었고, 현재 서울의 관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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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도경 기록에 의하면,
송나라 문신 서긍(徐兢)은
사신으로 고려 개경으로 향하다
잠시 머문 섬을 "자연도"라고 기록.
"제비가 많이 날아다녀
자연도(紫燕島)라 불린다"
그때 서긍이 방문한 섬이
현재 인천 앞바다.,영종도.
지금은 900년전 하늘 위로 날아다녔던 제비 대신
하루 수백 대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인천국제공항.
과거에도 비행기 대신 배를 타고 중국을 왕래하거나
서해바다를 오르내리자면 꼭 거쳐야만 하는 장소였다.
1123년(인종 1년) 서긍은 고려에 사신으로 가기 위해
중국 양쯔강 하구 명주(明州)에서 출발해 서해를 건너
흑산도에 도달한 뒤 한반도 연안따라 개경까지 올라갔다.
서긍이 이용했던 뱃길은 남선항로(南線航路).
고려시대 중국을 잇는 항로 가운데 하나였다.
송나라 사신 일행은 흑산도에 도착에
고려 영내에 들어온 뒤 군산의 고군산도와
태안의 마도를 들러 인천의 자연도에 정박했다.
자연도, 즉 지금의 영종도에서는
경원정(慶源亭) 객관에서 환영의식
고려와 중국을 오간 사신의 사행(使行)길.
서남해따라 세곡을 싣고
개경으로 오는 조운선 항로.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삼남지방의 특산물 세곡미 등을 한양으로
올리던 조운선 항로이자 해상 교통로였다.
최근 마도와 영흥도 앞바다에서
고려와 조선시대 배 여러 척이 발굴.
바닷길 길목 영종도는 국방 상 요충지.
정묘호란 당시 인조가 3개월간 강화로 피난하면서
위기를 모면한 것을 계기로 강화는 남한산성과 함께
유사시 왕실과 조정이 피난할 수 있는 보장처로 설정.
강화도 자체 방비를 강화하는 것과 더불어
바다를 통한 외적의 침입에 방어하기 위해
경기도 남양 경기수영을 교동으로 이전하여
수군체제를 개편, 그 일환으로 1656년(효종 7년)
경기도 남양(안산) 수군진 영종진을 자연도로 이전
영종진이 자연도로 이설된 뒤
섬의 이름은 영종도로 바뀌었다.
영종진은 인천 앞바다를 거쳐 도성으로 향하는
수로의 방비와 유사시 한양에서 월미도를 거쳐
강화도로 들어가는 어가(御駕)를 보호하는 역할.
행궁이란 왕이 궁궐을 떠나 잠시 머무는 궁이다.
왕이 휴양, 전란시 임시 대피를 위해 지방에 설치.
청의 침입에 맞서 북벌정책을 강력 추진했던.,효종.
월미행궁은 강화도로 들어가는 비밀 피난통로 중 하나.
1656년 홍명하 건의로 인천부사 윤부가 비밀리에 건축.
왕이 뱃길 따라 인천, 영종을 거쳐 강화로 피난을 할 때
길목에 잠시 머무는 임시대피 비밀 행궁 용도로 지어졌다.
비슷한 시기에 지은 다른 행궁에 비해 규모가 상당히 작았다.
1695년(숙종 21년) 행궁이 중건되어 유지,
북벌론이 수그러들면서 그 기능이 상실되어
조선 말 고종때 헐어버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월미행궁의 터가 어디였는지 아직 분명하지 않고,
이를 확증할 유물이나 유적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문헌에 보이는
행궁의 위치는
'영종진()의 남쪽 수로 7리',
'일본 해군 석탄고'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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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미돈대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설치한 방어물.
성을 쌓기 곤란한 능선이나 계곡, 해안가 등에 축조.
월미도 남서쪽 4부 능선에 원형 모양의 돈대가 있었다.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길 없으며,
현재 돈대로 추정되는 곳에는 여러 채
군인 막사가 있어 이미 훼손된듯 생각된다.
월미 돈대를 언제 쌓았는지 연도는 알 수 없다.
다만 강화돈대가 숙종 때 건립된 것으로 보아
월미돈대도 비슷한 시기에 세워진듯 생각된다.
월미 돈대는 외국 세력의 접근이 활발하던 조선 후기
인천과 강화도 성을 지키는 시설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본해군 석탄고.........................
월미 행궁 터로 추정되는 북사면 일대 일본 해군 석탄고
1882년부터 무단 점용 후 1885년, 일본은 부지 매입을 시도
월미행궁 터라 매매가 불가해 1888년 빌려줄 것을 요구하였다.
조선은 행궁 터에 외국의 군사시설을
들일 수 없다고 하여 이를 거절하였다.
1891년 조선의 독판교섭통상사무를 맡고 있던
민종묵과 일본의 근둥 대리공사 사이에 임차계약
이미 일본이 사용하고 있던 월미도 북사면 4900평을
매년 은화 80냥에 빌려주었던 이곳 일본해군 석탄고는
월미도가 관광지로 본격 개발되면서 철거된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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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아관파천'으로 세력이 강화된 러시아는
러시아해군 석탄창고를 지을 월미도 부지를 요구.
러시아 공사와 외부대신 이완용 사이에 조약이 체결.
월미도 남서쪽 뒷산 일대 44,316m²가 러시아에 조차.
러시아는 음료수 운반을 위해 25칸 가량의 수관을 설치,
석탄 적재를 편리하게 하기 위한 약 156칸의부두를 축조.
조선 침략의 전진기지로 삼았으나
1904년 팔미도 근해 러,일 전쟁에서
패운이 짙어진 러시아가 군함 코레츠호,
와리야크호, 상선 숭가리호를 소월미도 부근에서
차례로 자폭한 후, 이 석탄고도 운명을 같이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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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영종진은 맡은 임무의 중요도를 고려해
1681년(숙종 7년) 수장 직급을 수군만호(종4품)에서
수군첨사(종3품), 1690년(숙종 16년) 영종방어영으로 승격
상부의 간섭 없이 독자적으로 임무 수행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영종진이 이 섬에 들어선 이후
한동안 인천 앞바다는 평온했다.
그러나 19세기 말, 양이(洋夷),
즉, 서양의 열강이 출현하면서
한반도는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당시 인천 앞바다를 통과하는 뱃길은
한양 도성으로 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조선과의 교섭을 원하는 서구열강은 반드시
이곳 영종도 영종진을 거쳐야만 했기 때문이다.
1866년(고종 3년) 프랑스는
자국의 선교사 학살사건을
구실로 함대를 파견하였다.
당시 프랑스 함대는 영종도 앞 작약도와 강화도 동쪽 해안,
즉 염하를 거쳐 양화진까지 올라가면서 수로를 측량했고,
십수 일 뒤 2차로 함대를 이끌고 작약도 근처에서
하룻밤을 머문 뒤 북상해 강화부를 함락시켰다.
5년 뒤에는 미국 함대가
영종대교가 있는 호도에 정박
인천 연안의 수로를 측량했고,
이후 강화 초지진과 덕진진,
광성보를 파괴했다.
2차례 양요에서 영종진은
서양함대를 저지하지 못했다.
이는 책임의 방기라기보다는
현실적으로 근대식 화포로 무장한
서양 함대를 당시 조선 수군 전력으로
방어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1875년(고종 12년) 일본은 해로 탐색
명목으로 수교를 거부하는 조선을 침입한다.
1875년 9월 12일 일본 나가사키를 출발한 운요호(雲揚號)는
9월 20일 강화도 동남쪽 부근에 정박한 뒤 이노우에 함장과
수병들이 정찰을 위해 작은 배를 타고 초지돈대에 접근했다.
당시 초지돈대에서 먼저 포격을 해 작은 전투가 벌어졌고,
단정이 퇴각한뒤 운요호가 직접 초지돈대를 공격해 2시간 교전.
그러나 일본은 남하하여, 9월 23일 영종진에 포격 후 상륙을 감행했다.
운요호가 영종진을 공격한 것은
염하를 따라 한양으로 북상하다 초지에서
저지당한 것을 만회하려는 일종의 보복전이었다.
일본군은 영종진 관아와 민가에 불지르고
대포와 칼, 창, 병서 등을 빼앗아 돌아갔다.
운요호는 인천을 떠나 9월 28일 나가사키 귀환.
당시 조선정부는 영종첨사 보고로
이양선이 침입한 사실을 알았지만
운요호가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그 배가 어느 나라 배인지 몰랐고,
영종진이 공격받은 사실을 안 것은
진이 함락된 지 이틀 뒤였다고 한다.
그후 영종진은 백운산 아래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체결된 강화도조약.
조선이 개항되면서 영종진은 변방의 군영으로.,쇠락.
그래서인지 영종진이 불탄 지 140년이 되는 오늘날,
이 섬에서 영종진을 떠올릴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인천시립박물관 영종도 호적대장이 그것.
이 책은 영종진이 함락되기 9년 전인
1867년 영종방어영에서 호구조사를 실시.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된 것을 복제한 것.
이 호적대장이 어떻게
일본으로 갔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호적대장에 기록된 사람들은
당시 영종진이 불타는 모습을 지켜봤을 것이다.
내년 하반기 영종진이 있던 자리
인근에 영종역사관이 세워진단다.
공항과 신도시가 들어서면서
영종도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도
길을 찾을 수 없을 만큼 변한., 영종도
영종진의 옛모습은
역사관에서 찾아볼
수 밖에 없을 듯하다.
영종도 선녀바위해수욕장.
하늘나라 선녀가 이곳 바위라는 청년과
깊은 사랑에 빠졌다는데 선녀가 지상에
머물 수 있는 기간은 고작 1년 뿐이었다.
결국, 두 연인은 헤어질 시간이 되었지만
너무나 사랑했기에 헤어질 수가 없었단다.
옥황상제는 예정된 시간에 복귀하지 않는
선녀를 향해 벼락을 내렸지만 선녀와 바위는
서로 꼭 끌어안은채 벼락을 맞고 돌이 되었단다.
그리하여, 그후로부터 사랑하는 남녀가
변함없는 사랑을 약속하는 장소가 된 곳.
이곳 선녀바위에는 또 다른 전설이 전한다.
....................선녀바위 전설.....................
영종진 방어영에 수군들이 상주하였던 시절에
이 군을 통솔한 호군(지휘관)에게 첩이 있었다.
그러나 첩에 대한 사랑이 식은 호군이 멀리하자
여인이 남자가 근무하는 군부대 앞에 태평암이란
바위에서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하고 말았다고 한다.
이 애첩의 시신은 수습해 줄 사람이 없어
조수에 떠밀려 용유도 포구에 표류하였다.
뒤늦게 후회한 호군이 그 자리에 묻어주었다.
그후 태평암을 선녀바위라 불렀고
그옆 용유도포구 고개를 호군재라 불렀다
.........................................................
그후 밤하늘이 맑은 밤이면
선녀들이 무지개를 타고 내려와
춤을 추며 노니는 장소가 되었단다.
선녀바위해수욕장
편의시설 : 음식점, 샤워장, 방갈로, 식수대, 슈퍼, 숙박시설
현지숙박 : 바닷가에서 텐트 이용, 주변의 민박, 호텔, 모텔 등.
인천역 하차 후, 앞 광장에서 버스이용 (2, 15, 23, 45, 51, 101, 550번)
→ 월미도 도착 (소요시간10분) → 선착장에서 영종행 여객선(10분 소요)
→ 영종도 여객선 운항시간에 맞춰 출발하는 용유행 버스(소요시간 50분)
돈실러 간다 돈실러 간다
장봉바다로 돈실러 갑세다~
어 허 ~ 어 허 ~ 어 와 요 ~ 어 어~
인천앞바다는 다양한 설화와 전설의 고향.
'심청이'의 효심을 만날 수 있는.,백령도 장산곶,
어부의 은덕을 만선으로 답하는 장봉도 인어이야기,
장봉도 앞 날가지 어장에서
어느 어부의 그물에 걸린 인어.
불쌍히 여겨 산채로 놓아준 뒤부터
늘 만선을 이뤘다는 전설이 흥미롭다.
장봉도는 도깨비불이 많은 곳.
도깨비불은 물고기 먹이가 되는
해저자양분에서 인(燐)이 발광한다.
어장에 고기가 많은 것을
도깨비불에 비유한.,장봉도.
영종도 삼목선착장에서
카페리로 30분 거리에 위치.
주위에 강화도 석모도·모도·시도·신도 등이 있다.
'섬 내 봉우리가 많다.'고 하여, 장봉도라 했으며,
고려말 몽골의 군사를 피하기 위해 강화도 주민이
이주해오기 시작하면서 거주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고려사에서 몽고가 침입했을때
장봉도에는 1만명 피난민이 거주.
이곳 왕궁에 거주하던 원종이
죄인을 풀어주었다고 전해오며
원종 아들 충렬왕도 몽고 반란군이
침입했을때 피난처인 장봉궁에 거처
조선시대 민어 조기 청어 등이 많이 잡혀
우리나라 3대어장 중 하나로 꼽힐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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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도
선녀가 내려와서 춤을 추어 생겼다는 섬., 무의도,
병자호란 때 가시나무로 조기를 잡아 만선의 기원이 된
연평도 당섬의 임경업장군 이야기 등 수많은 설화와 전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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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이란 말은 조선 초기부터
'제물포 수군 기지' 제물량에서 비롯.
'제물(濟物)'은 '제수(濟水)' '물을 건넌다',
'물가의 나루터' 등의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인천 앞바다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워낙 커서,
물때에 맞춰 배를 대지 않으면 갯벌에 배가 얹혀
움직이지 못하기에 이런 이름이 생겼다는 설명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인천군 서쪽 15리에 제물량이 있고,
성창포(城倉浦)에 수군 만호(萬戶)가 있어 지킨다" 이후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 '수군 만호가 지킨다'로 보아 해안 방어 지역.
성창포(城倉浦)는 지금 인천항 일대까지 아우른 이름
이름 그대로 군량미를 보관했던 군수기지 창고로 보면
근처 여러 진지 중 성창포는 그 역할이 특출했던듯 하다.
당시 주둔 병력을 보더라도 제물량영에는
대맹선 2척, 중맹선 1척, 소맹선 1척 군사 510명
해안 방어의 요충지였던 영종진이
대맹선 1척, 중맹선 2척, 소맹선 2척 등
군사 510명이었던 것과 비교할 때, 제물포는
조선 초기부터 그 중요성을 인정받은 곳이었다.
거기에 수군진지 제물량영은 해안 방어뿐 아니라
조운선(漕運船)을 호송하는 중요한 임무도 수행했다.
인천 앞바다와 강화도 일대는 일찍이 고려~조선 시대에
삼남지방 곡식을 서울로 운반해 올리던 중요한 해상 교통로.
인천지역에 서구 원창동(元倉洞),
동구 만석동(萬石洞) 등의 곡식 창고
등도 제물포와 관련된 지명으로 보인다.
군사적인 목적 뿐만 아니라
안전한 세곡(稅穀) 운반을 위해서
이미 남양부 화량만에 경기수영을 두고
그 산하에 영종진, 제물진 등 6개 진지를 둔 것.
임진왜란과 병자호란(1636년)을 겪으면서
강화도 일대의 수비를 보강할 필요가 생기자
이들 6개 진지도 변화를 겪는데, 남양 영종진이
효종 4년(1653) 지금의 영종도로 옮겨오며 이 때문에
당시 자연도(紫燕島)가 영종도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
이어 효종 7년(1656) 제물진이 강화로 이전해 간뒤
개화기에 이르기까지 제물포는 강화도나 영종도 등
인천 앞바다 섬으로 갈 때, 제물포는 배타는 포구 역할.
제물포는 월미도와의 사이에는 썰물 때도 한줄기 수로가 형성.
밀물 때면 수심이 깊어 군선(軍船)이 접안해 화물을 실어 나르고
서울을 오가기에 편리한 곳이므로 서해안 최적지로 판단된 곳이다.
하여, 국제도시로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은 이미 갖춰져 있었던 제물포.
조선 태종 13년(1413) 인구와 물산을 감안한 행정구역 재편
인천은 군(郡)으로, 부평은 도호부(都護府)로 출발했지만
세조 5년(1459) 인천이 세조 왕비 외가라 도호부로 승격.
병자호란을 겪은 뒤 인천의 전략적 가치가 상승되어
월미도에 행궁을 설치하며 그 비중이 상승하고 있었다.
그 결과 18세기 후반 규장각에서
전국의 호수와 인구수를 기록한
<호구총수(戶口總數)>에 의하면
인천은 원호(元戶) 4,096에 1만4566명(남 7505명·여 7061명),
부평은 원호(元戶) 3,167에 1만1587명(남 6107·여 5480)으로
인천이 부평보다 무려 인구 3000명을 앞서게 됐던 것이다.
미군정청은 1945년 10월10일 인천부를 '제물포시'로 바꾸었다.
'인천'보다 제물포를 선택한 것은 변화를 꾀하려는 시도였던듯.
그러나, 10월27일 제물포시를 다시 인천부로 환원했다.
명칭 변경에 따르는 행정상의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었다.
인천은 바다의 도시로서, 비류가 정착한 백제의 수도였고
대중국 해상교류 무대였으며 전근대 최고권력 왕실과 밀접.
고려시대 7대어향이 그러했고, 조선시대에도 왕비의 외가였다.
인천은 개항 후 서구문물이 유입되는 최고 최초의 도시.
일제강점기 유독 일본인이 많이 살았던 인천은 학생운동,
민족운동 기치를 올렸던 곳이지만 '신음'소리도 높았던 곳.
9·15인천상륙작전은 대한민국을 보존하는 계기
그러나, 인천 지역사회의 피폐는 엄청난 것이었다.
경인고속도로, 임해 공단, 신항만 등의 건설은
경제개발5개년 계획의 중추가 되었으나 그 또한
후일 많은 사회문제를 동반했으며 오늘날 인천은
대한민국을 회생시키는 1등공신의 역할을 했던 곳.
오늘날 인천의 성장과 팽창이 현재의 산물이 아니라,
오랜 역사와 전통에서 출발한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되며,
인천 앞바다의 역사와 문화, 가치가 곧 우리나라의 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