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버리다 / 장수철
책을 모두 버리기로 했다.
방 한 칸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저 도도한 내 자의식의 성채를 허물면
아이들 공부방이라도 하나 생겨나리라는 아내의 말은
온당했다.
나는 오래된 책들을 꺼내어
겉장 안쪽 면에 끄적여 둔 날짜와
이제 더 이상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는 것들을 향한
내 무기력한 필적의 서명들과
간혹 책장 사이,
내 삶에 대한 어지러운 주석들까지 낱낱이 찢어놓고는
종이 결을 따라 번진 잉크처럼 희부윰해진 눈망울로
너무 높거나 낮지 않게
그동안 내가 견뎌온 일용할 슬픔의 높이만큼씩
한데 쌓아 묶는다.
그 놈의 책, 밥이 나오냐 떡이 나오냐시던
옛 어머니의 말씀처럼
기어코 쌀알이 되지 못한 저 수많은 활자들.
그리고 부식과 풍화의 나날을 지새우다
국판 크기 시루떡 한 장 빚어내지 못한
곤궁한 나의 청춘까지 한데 묶어
근수대로 팔려 보내고는,
돌아와 텅 빈 서가의 흉곽에 홀로 앉는다.
꿈의 심지를 한껏 돋운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쌀알처럼 흩어지고
제 흉강을 텅텅 울리는 빈 서가의 울음소리
버려진 책들이 있던 자리만한 입방체의 어둠이
칸칸이 고여 들기 시작했다.
- 『우리詩』2010.11월호
첫댓글 내 후배의 시를 올려주셨군요. 열심히 쓰는 친구라서 기대되는 후배이지요.
슬픔의 높이만큼 쌓아 묶어 근수대로 팔아야 하는 책, 저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해마다 정리하는데도 어디서 또 그 높이의 책들이 나오는지. 시는 삶에 대해 반성을 하게 해요. 도서관에서 '반성'에 관해 시를 쓴 몇몇 시인의 시집를 빌려왔습니다.
가슴 없는 지식보다 가슴 있는 지혜를 선택하신 건가요?
인식이나 관념이 아닌, 몸으로 체득한 감각과 직관의 삶을 익히느라 여전히 애쓰고 있습니다. 가깝고도 먼 사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과정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언제나 가슴은 활화산처럼 뜨겁지만 아직 화부로서의 능력이 미진하여 열조절이 필요하다고 해야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