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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26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마태오 25,31-46
인간은 모든 인간을 사랑할 수 없다
오늘 복음은 우리 각자가 받게 될 ‘심판’을 상기시킵니다. 심판은 함께 살 부류끼리 묶는 것을 의미합니다.
함께 살 것들의 차이는 바로 사랑의 수준에 의해 결정됩니다.
모기와 인간을 묶어놓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왕이요 심판관으로서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우리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양은 굶주린 이를 먹여 주고 헐벗은 이를 입혀주었으며 병든 이를 찾아준 사람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선행’을 많이 쌓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기준이 선행의 행위라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처럼
십계명을 잘 지키면 선행을 쌓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중에 염소로 분류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 없이 한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믿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행위는 다 죄입니다.”(로마 14,23)라고 말합니다.
오늘 말씀은 행위가 아니라 ‘본성’에 의해 심판이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만약 어떤 아버지가 불 속에 있는 아이를 구하러 뛰어들었다면 그것은 사랑이 많아서일까요?
기억상실증에 걸려 불 속에 있는 아이가 자기 아이인 줄 모른다면 그래도 뛰어들까요?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정체성은 믿음의 결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로마 3,28)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율법에 따른 행위에 의지하는 자들은
다 저주 아래 있습니다”(갈라 3,10)라고 합니다.
믿음이 있다면 우리가 물 위도 걸을 수 있는 존재요, 죽어도 부활하는 존재임을 알고 그리스도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영화 ‘엑스 마키나’(2015)는 한 인간이 로봇과 사랑에 빠져 자신과 같은 인간을 배신할 수 있다는
줄거리를 가집니다.
유능한 프로그래머 ‘칼렙’은 ‘네이든’의 비밀 연구소로 초대받습니다.
그곳에서 네이든이 창조한 매혹적인 A.I. ‘에이바’에 유혹받습니다.
칼렙은 에이바를 불쌍히 여기게 되고 오히려 비인간적인 네이든을 싫어합니다.
에이바가 해체 위기에 놓이자 칼렙은 네이든을 배신하고 에이바를 풀어줍니다.
이 과정에서 네이든은 에이바에 의해 살해당합니다.
만약 아기와 개, 두 대상 중에 자신과 평생 살 대상을 선택하라면 누구를 선택해야 할까요?
주님은 행위가 아니라 ‘본성’으로 심판하십니다. 칼렙처럼 행동만으로 심판하려다가는 사람처럼 똑똑한 개를 선택하고 아기를 버리게 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차가 브레이크 고장으로 달려오는데 여러분의 반려동물과 한 범죄자가 그 차에 치이기 직전 하나만 구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둘 중 누구를 구하겠습니까?
여러분의 선택에 따라 여러분이 어느 무리와 살 자격이 있는지가 결정됩니다.
그러나 인간은 모든 인간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반면 인간은 모든 개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강형욱 조련사는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하였습니다.
인간은 왜 모든 인간을 사랑할 수 없을까요? 같은 인간끼리는 같은 욕망을 추구하여 ‘경쟁’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는 잘만 조련하면 모두 좋은 개를 만들 수 있어 모든 개에게 연민을 느끼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모든 인간을 사랑하는 존재가 되려면 사랑하려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는 더 높은 존재가 되어야만 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3,3)
라고 하십니다.
이때문에 아기가 동료 아기들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경쟁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잘 드러나는 책이 『꽃들에게 희망을』입니다.
애벌레끼리는 경쟁합니다.
하지만 애벌레가 나비가 되면 모든 애벌레 안에서 나비의 가능성을 봅니다.
그래서 모든 애벌레에게 자비를 가질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믿음은 내가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정체성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 모든 인간을 사랑하게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가 되었다고 믿으면 모든 인간을 자비의 눈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적어도 모든 인간을 불쌍히 여길 수는 있게 됩니다.
야곱에 이사악 앞에서 자신이 에사우라고 말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정체성의 변화만이 우리가 모든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길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머리로 보내주신 이 은혜를 이해하십니까?
놀라고 기뻐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가 된 것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795항)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1월26일 [그리스도왕 대축일]
-마태오 25장 31-46절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하느님 오른 편에 당당히 서기 위해>
교회력으로 연말이 가까워지면서 반복되는 복음 말씀은 최후 심판 때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복음사가들이 묘사되는 세상 마지막 날의 때로 참혹하고, 때로 끔찍한 모습에 살짝 걱정도 되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경우만 해도, 그날이 오면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갈라놓듯이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갈라 세우겠다고 말씀하시니 제 개인적으로 걱정이 태산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씀을 위협이나 경고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격려와 자극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길 바랍니다.
영광스럽게도 만왕의 왕 예수님 오른 쪽에 서게 될 사람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리 특별한 일을 한 사람들이 아니더군요.
하느님 오른 편에 서는 것이 그리 어렵지도 않았습니다.
변장해서 찾아오시는 우리 주변의 ‘작은 이들’을 환대한 사람들입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바로 이런 사람들이겠지요.
역 주변을 떠도는 노숙인들을 이방인 취급하지 않고 한 형제로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위한 ‘사랑의 밥 나눔’ 봉사활동에 참여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위한 쌀 모으기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입니다.
강도 높은 영업이 끝나고 녹초가 된 몸이지만 팔다 남은 빵을 들고 기쁜 얼굴로 사회복지시설을 찾아나서는 사랑의 빵장수들입니다.
갈 곳 없어 떠도는 사람들을 내 집에 맞이한 사람들입니다.
아직도 우리나라는 매년 1000명 이상의 우리 아이들을 해외로 수출하는 나라입니다.
그 아이 중 하나를 아무런 조건 없이 입양해 내 자녀처럼 키우는 사람은 100% 오른 편에 설 사람입니다.
옷장을 열어보면 일 년에 단 한 번도 입어보지 않는 쌩쌩한 옷들로 꽉 차있습니다.
과감하게 정리해서 꼭 필요한 곳에 택배로 보내는 사람, 하루 온 종일 찾아오는 사람 하나 없어 무료하고 천장만 바라보고 있는 시립 무료 병원 환자들을 찾아가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
춥고 음산한 담장 안의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기쁨을 선사하기 위해 매주말 김밥을 싸고 반찬을 만드느라 바쁜 사람들 모두 당당하게 예수님 오른 편에 설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제 더 이상 마지막 날 앞에서 두려워한다거나 부들부들 떨기만 할 일이 아닙니다.
어떻게 해서든 하느님 오른 편에 설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만 남았군요.
마지막 날에 가서는 우리가 그간 이웃들에게 행한 사랑의 봉사는 모두 인류의 맏형이신 예수 그리스도, 결국 하느님을 위한 봉사로 변화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을 공경한다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하느님이신 가난한 이웃들을 환대하고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며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인간에 대한 거부는 하느님에 대한 거부입니다.
인간과의 단절은 하느님과의 단절입니다.
이번 한 주간 특별히 나와 가장 가까운 이웃들에 대한 사랑의 실천을 통해 당당하게 하느님의 오른편에 서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강론>
(2023. 11. 26.)(마태 25,31-46)
<최후의 심판>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마태 25,31-33).”
‘종말의 날’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이고, 온 세상의 왕으로서, 또 심판관으로서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날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요한 5,22).”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버지와 예수님은 하나이기 때문에(요한 10,30),
예수님의 심판은 곧 하느님의 심판입니다.
여기서 ‘모든 민족들’은 글자 그대로 ‘모든 사람들’입니다.
인류 전체가 심판의 대상입니다.
그렇지만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신앙인들’입니다.
<최후의 심판은 인류 전체를 대상으로 한 심판이지만, 마태오복음 25장에 있는 이야기는 심판의 전체 상황이 아니라 일부 상황, 즉 신앙인들에 대한 심판 상황 이야기입니다.
악인들에 대한 심판은 따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요한 5,29).”>
32절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라는 말씀과 33절의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 라는 말씀은, 누가 양인지, 또 누가 염소인지 심사하는 일은 이미 끝났고, 최종 선고만 남은 상황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최후의 심판 날’은 무죄와 유죄를 조사하거나 심사하는 날이 아니라, 최종 선고를 하는 날이라는 것인데, 그러면 ‘심리(審理)’ 과정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진행되는 것일까?
주님의 법정이고, 주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니까 세속의 법정에서 하는 것과 같은 심리 과정이 필요 없을지도 모릅니다.
‘최후의 심판’은 주님께서 직접 하시는 일이고,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이니, 실제로 어떻게 진행될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으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최종 선고를 내리시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이 자기의 운명을 선택한다는 점입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바리사이들이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라고, 즉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다.”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루카 17,20-21).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은, 종말과 심판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지금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종말의 시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의 나의 삶’은 ‘최후의 심판’의 과정입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말과 행동과 생각들 하나하나가 심판 날의 최종 선고에 직결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삶 속에서 하는 선택들은, 최후의 심판 날의 최종 선고에 대한 선택이 됩니다.>
“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34.40ㄴㄷ)”
‘양들’에게 ‘구원 선고’가 내리는 것은 단순히 ‘불우이웃 돕기’를 잘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들의 ‘삶 전체’가 주님의 뜻에 합당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작은 이들’에 대한 사랑 실천을 잘했다는 것은 신앙생활 전반에 걸쳐서 ‘하느님의 뜻 실행’을 잘했음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사랑 실천만 잘하면 믿음이 없거나 부족해도 상관없다고 오해하면 안 됩니다.
‘믿음’과 ‘사랑’이 모두 중요합니다.
사랑 없는 믿음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1코린 13,2).
그처럼 믿음 없는 사랑도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 3,18).”
그런데 ‘믿음 없는 사랑’이란 무엇일까?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신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는 것”이(마태 5,46) ‘믿음 없는 사랑’의 대표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랑은 사랑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최후의 심판’에 관한 예수님 말씀은, 의인들에게는 ‘위로와 격려’가 되고, 죄인들에게는
회개하라고 타이르는 말씀이 됩니다.
‘하느님의 뜻’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입니다(요한 3,17).
지금 잘하고 있다면 ‘끝까지’ 변함없이 잘하려고 노력해야 하고, 무엇인가 부족한 점이 있다면 늦기 전에 회개하고 바로잡아야 합니다.
우리는 심판을 안 받으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으려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같은 말 같지만, 완전히 다른 말입니다.
신앙생활은 심판이 무서워서 억지로 하는 생활이 아니라, 주님께서 ‘창조 때부터 준비해 놓으신’(34절) 영원한 기쁨과 영원한 행복을 향해서 나아가는 ‘기쁨 가득한’ 생활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