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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차이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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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와 『三國遺事』의 차이점
삼국유사(三國遺事)란 제목은 「빠뜨린 일」을 챙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지난 시대의 기록 가운데 무엇인가 본질적으로 빠져 있다는 생각이 없었다면 일연스님께서 70노구를 이끌고 남은 생의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았을것이다. 유사이전의 정사로는 지난번 살펴본 『삼국사기(三國史記)』가 있다. 그리고 불교 인물들만으로 구성 되어있는 『해동고승전』이 있었다. 일연이 「빠뜨렸다」고 느낀 것은 주로 『삼국사기』를 의식했다고 본다. 『삼국사기』는 김부식의 지휘 아래 이루어진 찬집이다 대 중국의 관계에서 자주적 입장을 지닌 묘청의 봉기를 진압한 공로로 집과 작위를 누리던 그가 만년에 왕명을 받아 찬수한 『삼국사기』는 그의 굳건한 유가경험적 의식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사료의 취사선택은 역사적 사실의 합리성이 기준이 되었기 때문에 『구 삼국사기』를 포함한 신화와 전설, 구전전승의 풍부한 기록이 대부분 무시되었다. 창시자 공자가 그러했듯이 괴력난신(怪力亂神:괴이한 일, 힘쓰는 일, 난봉부리는 일 그리고 귀신에 관하여서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논어 20장)은 말하지 않으려 했다는 것이다. 전설과 설화 기적 등 「이야기」의 세계는 유교적 합리주의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에게 역사는 궁극적으로 「거울」이었다. 인간의 삶의 드라마는 유가적 기준에 합당한 것이냐 아니냐로 판정되었으며 그것은 기본적으로 「도학적」인 것이었다. 이 잣대를 비껴나는 형태는 가차없이 삭제하고 있다. 이 잣대와 관계없는 것은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결국 인간의 삶이 보여주는 다양하고 적나라한 모습은 가리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 일례로 『삼국사기』는 사료의 출처를 밝히고 그것을 원형대로 보존하려는 노력에 그는 모든 이야기를 다듬어 사실의 줄거리만 남겨 놓았다. 예를 들면 신라 제22대 지철로 왕은 「체력이 크고 담력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고 『삼국사기』에는 기록되어 있다. 이 표현은 추상화된 「요약」이다. 기록 이전에 구전이 있었을 것이고 그 전승은 지철로 왕은 커다람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에비해『삼국유사』는 “왕의 음경의 길이가 1척 5촌이나 되어 짝을 찾기 어려워 사자를 삼도에 보내어 구하였다”고 구체적인 이야기를 밝히고 있는데 이 표현이 훨씬 더 원형에 가까울 것이라는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야기는 삶의 공간이다. 구전되는 이야기에는 인간 삶의 자연스럽고 적나라한 모습이 생생히 숨쉬고 있고 그 안에서 울고 웃는 인간의 모습, 갈등과 화해 그리고 원망과 동경이 있다. 조상과 이웃의 이야기는 그대로 자신의 삶의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 마을로부터 추방은 그의 모든 것을 박탈하는 죽음보다 더한 형벌이었음을, 마을 공동체가 부서지고 세계가 익명화된 현대 산업시대의 우리들은 절실히 깨닫지 못하는 수가 있다. 그들의 그곳은 현실의 세계이면서 꿈의 세계이다. 현실의 세계이기에 역사가 있고 꿈의 세계이기에 신화가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현실의 세계는 있지만 꿈이 없고, 사상의 세계는 있되 이야기가 없다. 그것은 이성의 세계이지 정감의 세계는 아니다. 긴장은 있되 화해가 없다.일연의 「빠뜨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 이야기이며 정감이며 화해일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삶의 본질적 부분인 신화와 전설이 빠졌 있다는 자각이 그로 하여금 『삼국유사』를 쓰게 했을 것이다.
신화와 전설 지금도 신화와 전설을 인지가 발달하지 않은 옛 사람들의 허황된 공상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다. 과학과 산업의 도구적 유용성에 세뇌된 현대인들은 이른바 합리주의가 가진 상대적 다층적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그것의 절대성을 반성없이 강조하고 있다. 이 태도는 우리가 과거를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장애가 된다. 이 폐단은 역사학자들에게서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역사나 실증적 역사에 훈련되어온 역사가들은 『삼국유사』가 가진 신화와 전설의 세계를 어떻게 합리적 기준에서 이해할 수 있을까를 놓고 곤혹스러워 했다. 그들은 대체로 신화와 전설이 역사적 사실과 뒤얽힌 그 풍부한 복합체에서 사실의 부분만 조심스럽게 골라내는 작업에 매달렸던 것이다. 그 풍부한 복합체에서 사실의 부분만 조심스럽게 골라내는 작업에 매달렸던 것이다. 불교 측에서도 그 풍부한 설화를 이른바 교화를 위한 방편이나 보조자료로서만 읽으려고 노력해 왔다. 신화를 신화로 읽지 못한 데에는 기본적으로 신화를 보는 부정적 시각, 요컨대 편협한 합리주의적 시각에 그 원인이 있다.
신화는 지나간 시대의 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꿈이 형상화된, 인간 심성의 깊은 곳에 환기력을 갖고 있는 살아있는 언어이다. 다신교의 여러 신들이 갖고 있던 초자연적 힘을 지금은 민주주의니 자유니 평등이니 하는 새로운 추상명사가 가지게 되었다. 인간은 지배하는 것은 다아위니즘이 생각하고 현대인들이 무의식적으로 믿고 있듯이 생물학적 필요나 충동이 아니다. 인간은 꿈꾸는 동물이다. 가장 오래된 알타미라의 벽화라 하더라도 그것의 용도는 생물학적 필요와는 직접적 관련이없다. 신화와 설화는 진솔한 삶의 이야기다. 과거 인간의 삶은 압도적인 자연의 힘에 의해 지배되었고 그 힘에 대한 원초적 인식은 외경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 힘에 대한 외경이 신화이고 설화는 그 힘이 행사하는 비합리적 운명과 본질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직선적 인과로는 채워지지 않는 꿈의 영역에 신화와 설화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일연스님은 인간본연의 그 꿈을 회복시켜 보고 싶어 「빠트린 이야기」를 모았으리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그 필요성은 일연스님 당시 더욱 절실한 바가 있었다.
저술당시의 사회배경 삼국유사가 쓰여진 고려 초기 지배 왕권은 그다지 공고하지 않았다. 태조 왕건의 지배적은 지방 호족을 친척 관계로 광범위하게 연대시켜야 할 정도로 취약한 것이었다. 한반도의 경우 秦漢 제국처럼 명실상부한 국가체제를 형성한 것은 고려 중•후기라고 보아야 한다. 이 시기에 오면, 유교적 전제정치의 이념을 통해 지방호족의 정치참여를 배제함으로써 이 지배체제는 기층사회와 점점 더 멀어지게 된다. 중앙귀족 정치의 전제화에 따라 국가와 사회, 정권과 민중 사이의 유리가 보다 심화된 것이다. 체제 내부에서의 갈등도 이때 더욱 치열하고 복잡한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무인의 지배는 이 종합적 갈등의 폭발의 성격을 지닌다. 무인의 지배는 그러나 갈등의 해결이 아니라 새로운 폭력과 독재였다. 문화적 인식과 소양이 없는 시대에 장원의 확장을 통한 경제적 집중은 심화되고 있었다. 잇따르는 노예반란과 강포한 몽고를 비롯한 주변국가들의 침략으로 조선반도는 안팎으로 참혹한 시련을 겪게 된다. 삼국유사는 바로 이 절망의 시기에 태어났다. 불교는 삼국시대부터 사회적 통합의 원리로 기능해 왔다. 그렇게 진행된 통합이 고려 중후기에 어느정도 일단락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통합은 그러나 사상적 권위와 물리적 힘에 의해 일방적으로 강제된것이었다. 그것은 마을공동체가 바라는 바와는 거리가 있다. 일연스님의 무신란과 몽고의 침입이라는 안팎의 위기를 맞는 것은 강제된 사상적 제도적 공고화의 극단에서였다. 통합은 아래로부터 진솔한 인간의 삶의 정서와 손잡지 않을 때는 얼마나 파괴적이고 위험한 것인가를 일연스님은 느꼈을 것이다. 일연스님은 적나라한 인간의 모습에서 구원을 읽었고 그 모습이 바로 해탈로 이어진다는 기막힌 변증법을 득도해낸 몇 안되는 탁월한 인물이다. 그러므로 그의 작업은 결코 한가로운 것일 수 없다. 시기적으로 삼국유사에는 의도가 없다. 이야기에서 우리는 인간적인 삶의 그대로의 정감과 애환을 적나라하게 접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공명한다. 이 원초적 환기력이, 이 의도하지 않은 의도가 일연스님이 세운 전략이다. 이 의도 아닌 의도를 통해 이야기는 더욱 은근하면서 힘있는 감동으로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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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장태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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