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49:23-39)
나는 하나님의 모든 역사가
결국 사랑과 회복으로 해석된다고 믿는다.
그래서 ‘심판’조차도
사랑과 회복의 행위라고 고백해 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판에는 매우 아프고 특수한 지점이 하나 있다.
심판의 결과로,
회복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남은 자와 후대를 향한 사랑과 회복이기에,
그 제외는 더 쓰리고 아프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심판’이라는 카드를
정말 마지막 순간에 꺼내신다.
그러나 일단 그 카드가 꺼내지고 나면,
그토록 자애롭던 하나님은
충격적일 만큼 전격적이고 가차 없으시다.
며칠 동안 본문은 바로 그 장면을 기록한다.
오래 참으시던 하나님께서 심판을 시작하시고,
그 대상은
하나님 대신 의지되던 모든 것들이다.
애굽, 블레셋, 모압, 암몬, 에돔,
그리고 오늘 본문에 이르러
다메섹, 게달, 하솔, 엘람까지—
일체의 주변 국가들이다.
솔직히 말해 무섭고,
어떤 면에서는 ‘잔인하다’는 표현 말고는
달리 표현하기 어렵다.
심판을 읽으며
나는 이런 교훈 앞에 서게 된다.
“하나님께 양해를 구하거나,
속된 말로 ‘개길 수 있는 시간’은
심판 이전까지다.”
오늘의 심판 양상은
이생을 마친 후 맞이할
개인 심판의 구조와도 닮아 있다.
하나님의, 상상 불가능할 정도로 거대한
감동과 설득을 끝내 외면한 결과는,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상태라기보다
우리가 스스로
어떤 선량함도 받을 수 없는 지점까지
자신을 밀어 넣은 상태이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30절과 31절이다.
30절에서는 하솔 사람들에게
바벨론의 공격을 경고하며
회피를 권고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31절에서는
완전히 반대로
바벨론에게 하솔을
가차 없이 공격하라고 명령하신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잔인하고, 솔직히 싸이코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더 무서운 것은
그런 하나님의 모습이 아니라,
그것을 아무 질문 없이 받아들이는
우리의 신앙 감각이다.
하나님은 결코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전쟁이 선하다거나,
폭력이 정의라고 가르치지도 않으신다.
하나님은 피를 즐기시는 분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그래도 하나님이니까 옳다”라는
무비판적 인식 속에서
개별 행위를 정당화하거나 답습하는 태도보다,
“이건 너무 잔인하다”고
느끼는 불편함이
오히려 더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을 미화하는 능력보다,
하나님 앞에서 불편함을 직면하고
하나님의 깊은 참 뜻을 헤아릴 때까지
고민하면서 그 자리를 견디는 분투가
더 바람직하다.
하나님이 이 모든 상황을
의지적으로 조장하셨다기보다,
하나님이 빠진 세계는
결국 이렇게 흘러간다는 사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끝내
사랑과 회복을 놓지 않으신다는 점—
그 지점에 주목하는 것이
우리가 취해야 할
가장 적합한 접근일 것이다.
카페 게시글
매일 묵상(Q.T.)
25. 12. 16. 무비판적 신앙에 대한 경계.
H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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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16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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