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보른 Ernest Albert Kilbourne, 吉寶崙, 1865-1928, 동양선교회
장로교·감리교와 함께 한국의 개신교 교단 중 하나인 교회가 성결교회입니다. 한국성결교도 선교사들을 통해 개척되었는데, 그 역할을 담당하신 분이 바로 E. A. 킬보른이라는 선교사입니다.
본래 킬보른은 1865년 3월 13일 캐나다 온타리오에서 출생하여 독실한 감리교인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시카고에서 전신기술자로 일하다가 무디 성서학원을 졸업하면서(1899) 목사가 되었습니다(1902). 또한 동양선교회 총재였던 카우만(C. E. Cawman)의 초청으로 1902년 8월, 일본으로 건너가 전도사업과 성서학원 운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킬보른은 1907년 5월 카우만, 김상준, 정빈과 한국에 2주간 머물게 되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연동교회의 청년신자이자 동경성서학원을 졸업하였던 정빈과 김상준 그리고 킬보른과 카우만이 함께 일본에서 귀국하여 1907년 5월 30일 한국최초의 성결교회인 ‘동양선교회복음전도관’을 설립했던 것입니다. 특별히 이때는 평양 대부흥운동의 열기가 전국을 휩쓸고 있던 시기였으므로, 동양선교회의 한국선교 개시와 킬보른 선교사의 활동은 참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적절한 때였습니다.
먼저 킬보른 선교사는 1921년 3월부터 OMS 한국감독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그리고 ‘조선예수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라는 명칭으로 정식 교회를 조직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1922년, 서울에서 「활천」이라는 기관지를 창간(1922)하여 초대 사장으로 활동하면서 교육과 문서선교에 헌신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1924년 동양선교회 총재였던 카우만 총재가 별세하자, 그의 뒤를 이어 후임 총재로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비단 킬보른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 손자까지 동양선교회의 총재를 지내며, 한국성결교의 발전을 위해 일하였습니다.
킬보른은 그 어떤 일보다 한국에서의 선교활동이 자신에게 큰 기쁨이었음을 자신의 일기 속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담대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수십 년 동안 수백만 금의 돈을 출납하였으나, 나의 소유는 송곳 한 개 박을 땅이 없고 집도 없고 화려한 가구도 없고 생활비로 쓰다가 남은 돈 60달러밖에 없는 것이, 나의 기쁨이요 자랑이다.”